옛날에 쓴 글.
낭만주의 문학 수업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이다. 새삼 이런 주제를 유구하게 좋아했구나 싶다.
한참 전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 없이 어디까지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를 소재로 해서 휴대폰 없이 살기, 최저가로 살아보기 같은 도전들을 다루었던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도 한 번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좀 더 쉽게 물음을 바꿔 보겠습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저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분석할 영화 두 편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고유의 인간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지, 만약 존재한다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휴머니즘은 다른 존재와 비교되는 인간 고유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성과 감성, 즉 로고스와 파토스라는 인간의 정신 능력입니다. 휴머니즘은 몸과 정신의 이원론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고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인간의 이성을 똑같이 모방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머지 않은 미래에 기계가 인간의 감정까지 따라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대두되면서, 휴머니즘이 내린 인간의 정의는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능력을 똑같이 소유한, 그러나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을 과연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지를 새롭게 고민하게 되면서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등장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바로 이 포스트 휴먼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사이의 상호 연결고리에 소속되기 위해 언어를 배우고 지식을 습득했는데, 이는 그가 인간 이성의 측면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가 구사할 수 있게 된 언어는 프랑스어입니다. 당시 영국 사회를 생각해보았을 때 프랑스어는 상류층의 언어, 지식인의 언어라는 느낌이 있는데, 이것은 피조물의 지식 수준이 상당함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그는 펠릭스 드 레이시의 부친과 프랑켄슈타인을 설득하려 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름다운 언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본능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자기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더 고차원적인 감성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피조물은 휴머니즘이 강조해온 인간 고유의 능력이자 인간 우월함의 증거인 로고스와 파토스를 겸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겉모습으로 인해 인간들에 의해 인간이 아닌 타자로 배척 받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더 인간 같지만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피조물의 등장은 더 이상 휴머니즘의 휴먼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포스트 휴먼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sf영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은 사고를 당해 온 몸을 잃고 뇌만 겨우 구조되어, 뇌를 제외한 전신이 의체로 대체된 몸을 가지게 된 사이보그입니다. 그의 뇌는 몸과 따로 떨어져서 ‘뇌각’이라는 용기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이 뇌는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 몸이 없어도 네트워크 상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소령의 몸 중에서 진짜 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사실상 그는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령의 본질일까요? 기계인 그의 몸일까요, 아니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뇌일까요? 이처럼 영화 ‘공각기동대’는 쿠사나기 소령이라는, 인간의 정신과 기계의 몸이 결합된 인물을 제시하며 무엇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지 질문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쿠사나기 소령은 정신적 관점에서는 인간이지만, 우리는 이들을 간단히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부감의 원인을 정신적인 것 이외의 것에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감각적인 것으로 논의가 넘어가게 됩니다. 피조물의 경우, 시각적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인간의 형태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쿠사나기 소령의 경우 생긴 것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그 속은 기계입니다. 그렇다면 만졌을 때 차갑고 딱딱하겠죠. 이런 촉각적인 느낌의 차이에서 오는 생리적인 거부감을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인간의 배타성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 동안의 휴머니즘이 강조한 정신적 측면보다는 멸시당해온 감각과 경험의 문제, 그리고 육체적인 문제로, 즉 형이상학적인 차원보다는 형이하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영화를 가져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애니 매트릭스’는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인데, 그 중 ‘두 번째 르네상스’라는 단편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기계는 인간에게 봉사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계에게 자아가 생기고 사람을 죽이게 되자 사람들은 기계파괴 운동을 벌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몸을 기계로 대체한 진짜 인간들도 혐오의 대상이 되어 억압을 받고 폭력에 희생당한다는 것입니다. 로봇이라는 포스트휴먼들이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기계의 육체를 가진 사이보그들마저 인간 집단에서 배제하기로 한 것이죠.
프랑켄슈타인과 공각기동대, 애니 매트릭스라는 세 작품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동안 인간의 고유성이라고 생각해왔던 정신의 영역이 침범 당했을 때 사람들은 또 다른 기준점을 세움으로써 인간의 배타성에 대한 보호막을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기준점인 육체는 낯선 것, 즉 타자성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한데요. 휴머니즘의 이분법에서 정신은 주체의 영역에, 몸은 타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타자성이 포스트휴먼들이 점점 등장하고 있는 시대에 와서는 오히려 비인간이라는 타자와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인간을 재정의하게 된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이전까지의 위계적인 이분법 체계가 얼마나 쉽게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들이 지금에 와서, 오히려 타자성의 침범을 허락하면서까지 인간의 고유성을 사수하고자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