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여름학기에 수강한 철학개론 수업 중간고사 답안입니다.
칸트 인식론에 대해서 나쁘지 않게 요약이 된 것 같아 공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Keywords : 이성의 운명, 감성/지성/이성, 직관, 개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 은 규정한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서양철학의 '합리론자'들은 어떠한 진술도 합리적인 사유와 논증을 통해 선험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이것은 굉장히 오만한 것이었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연소한다'와 같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 참과 거짓을 알 수 있는 명제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무의미한 논쟁만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원천을 탐구하고 그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영국 '경험주의자'들의 회의론 역시 적절한 해답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험주의자인 흄은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과성조차도 우연적인 두 사건이 시간적 전/후로 반복되면서 느끼는 착각이며, 결국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보편적 진리는 없다고 논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수학과 물리학은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된 여러가지 동기 중 하나는 바로 수학과 물리학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선험적(a priori) 이라는 것은 경험에 앞선다는 뜻이고, 종합판단은 분석판단이 아닌 판단을 의미한다.
예컨데 '총각은 남자이다' 라는 명제는 '총각'이라는 주어의 정의 안에 '남자'라는 술어의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참이다. 즉, 주어와 술어를 분석했을 때 명제의 참/거짓이 자명하게 결정되는 것이 분석명제(판단)인 것이다. 반면 종합판단은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참과 거짓을 알 수 없으므로, 비로서 지식의 확장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경험 없이 이성의 사유만으로 지식의 확장이 가능하지(합리주의자들의 주장) 않다면 어떻게 그 경험의 선험성, 즉 보편타당성이 보장될 수 있는지가 칸트가 마주한 문제였던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기존에 대상이 중심에 있고 이것을 인식 주체가 수동적으로 해석한다고 생각한 '인식'의 틀을 깨고, 대상은 주체가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을 칸트의 언어로 표현하면, 실제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으며, 우리의 인식체계는 물자체로부터 내용(정보)를 받아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현상'이다. 즉, 칸트는 물자체와 현상계를 구분한 것이다. 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인식 능력'에 어떠한 선험적인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부분을 찾기 위해 마음을 해부하는 '초월적(transcendental) 탐구' 를 진행한다. 여기서 초월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경험에 앞서 있는 것들에 대해 탐구하겠다는 뜻이다.
칸트는 인간의 마음을 감성/지성/이성의 세 능력으로 나누고, 각각의 영역에 대해 초월적 탐구를 하였는데, 이를 각각 초월적 감성론, 초월적 분석론, 초월적 변증론으로 이름 붙였다. 칸트는 계속해서 각 능력의 '순수'한 영역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여기서 순수하다는 말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능력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마음의 순수한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인간이 세계에 대한 어떤 보편타당한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초월적 탐구의 결과로 감성의 순수형식인 순수직관(시간과 공간의 형식), 지성의 순수개념인 12범주, 그리고 이성의 선험적 개념인 이념들(우주, 영혼, 신)을 제시한다.
칸트의 탐구에 의하면 감성은 물자체의 정보를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받아드려 감각-인상(직관)으로 변환하는 능력이며, 지성은 이렇게 받아들여진 직관의 종합을 특정한 개념 아래로 데려가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때 지성은 이러한 개념들을 선험적인 12개의 범주를 이용하여 종합하고, 재구성하여 능동적인 인식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한다. 즉,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개념 둘 다 필요하다는 점에서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고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은 추론하는 능력으로써 인식 가능한 경험의 세계를 넘어 사유하게 된다. 이는 이성의 특징 때문인데, 이성은 계속해서 보다 일반적이고 무제약적인 설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추구는 결국 무제약적인 이성의 선험적 개념인 이념들(우주, 영혼, 신)에 대한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이 이념들의 경우에는 경험가능한 직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적 언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이성은 굉장히 불행한 운명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은 계속해서 더 일반적이고 무제약적인 설명을 추구하지만, 그 끝에는 이성의 권한을 벗어나는 물음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칸트의 입장에서 그동안 해결되지 않던 사변적 형이상학의 문제들은 모두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기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가면 칸트는 이러한 이념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의문들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가? 칸트는 분명히 이 이념들에 대한 우리의 구성적 사용은 이성의 월권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은 존재한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주장은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규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과 같은 가정 아래에서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론에 있어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종합하였으며, 인간의 인식에 대한 초월적 탐구를 통해 이성의 원척을 분석하였고, 그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을 휼륭하게 수행하였다. 이는 칸트가 그의 윤리학과 미학(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을 전개하기 위한 초석이 된다.
서양철학에서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칸트가 서양철학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특히 칸트의 제 1 비판인 《순수이성비판》은 현대 뇌과학과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들과 결부되어 많은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칸트 비판들의 묘미는 탐구의 '결론'보다도 '논증 과정'에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아마 본 글만 가지고는 그러한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한된 시험시간 동안 조건에 맞춰서 쓰다보니 들어가야 할 내용들만 간결하게 요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만 보고 칸트의 작업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됩니다. 칸트를 읽는 것은 진정한 천재의 탐구 과정을 따라가면서 소위 '칸트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굉장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칸트 인식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T.E 윌커슨(배학수 번역)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철학개론 수업 교재인 《왜 칸트인가》를 포함하여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를 총 3권정도 읽어보았는데, T.E 윌커슨의 해설서가 압도적으로 제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저 칸트의 주장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칸트의 논증 과정의 허점들은 지적하면서도, 칸트의 위대한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적당히 재구성 한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자역학, 상대론 등 현대 과학과 칸트의 인식론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룬 점도 좋았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제가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