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회고 글을 쓰던 암울했던 시간이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멋지게 추락하고 있다고 표현한 그때의 심정이 이제는 잘 아물어 별 것 아닌 일이 되었다. 2023년과 대비되서일까, 올해는 무탈하게 잘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24년 한 해 나를 살게했던 것들을 기록해 본다.
한 해를 시작하며 ‘막노동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개념을 스스로 되뇌었다. 학생 때 막노동을 할 때 느꼈던 감정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직업에 대입해 본 것이었는데 내게 좋은 영감을 주었고 정신적인 건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가치 목표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는다. 대신 오늘 하루 나의 벽돌을 쌓는 일에 집중한다. 나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지 않으며 내게 주어진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들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나는 내일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나를 보살핀다. 올해 이런 생각들이 나를 많이 살려주었다.
책상 앞에 앉아 코딩만 하는 개발자로 산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협업하는 다른 파트의 일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과 더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다. 책상 앞에 앉아 개발자로만 살기를 내려놓자 내게 더 넓은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
현재 회사 입사를 고사해야 할지 말지까지 생각하게 했던 걱정거리들이 실제로 회사에 입사하자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은 걱정일 뿐이었고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내 지난 걱정들이 우습게 느껴진다.
개발하던 위성 통합시험을 위해 폴란드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경유를 위해 독일까지 가는 13시간의 비행은 정말 길고 고통스러웠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폐소공포증 증상이 일어났는데, 내 지난 어떤 고통의 순간 보다 두렵고 떨렸기에 다른 고통의 기억들이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나긴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흘러 가는듯 했지만, 내가 기대한 만큼 빠르게 가지 않았다. 그 날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인생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인내를 내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인내하면 비행기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때의 깨달음은 올해 내게 느리게 일어난 어떤 일들, 심지어 일어나지 않을 것 만 같은 그런 일들을 인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폴란드에 가서 본체 업체와 통합시험을 마쳤다. 현재 우리 위성은 SpaceX로 보내졌고 올해 1월 발사를 기다리고 있다. 인공위성이라는 아주 정교한 제품을 스타트업의 스피드로 약간은 허술하게 만들어 본 경험은 내게 무척 신선했고 놀라웠다. 그리고 해외에 처음 나가 경험한 영어권 문화도 내 인생에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무릎이 아파서 몇 주 쉰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달렸다. 매일 아침 달리기는 내 몸을 생기있게 만들어 주었고 복잡한 생각들을 잊게 해주었으며 나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달리기로 인해 20대 때의 몸무게로 돌아갔고(7키로 감량) 아이들이 살을 빼니 옷빨이 더 잘 받는다며 칭찬해줬다. 체력은 몰라보게 좋아져 아내를 따라 쇼핑을 하는게 거뜬해졌다. 그리고 건강검진을 하면 항상 위험 범위에 있던 콜레스테롤 수치가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달리기가 느즈막히 내 인생에 들어왔다. 달리기와 함께 20대 때 열심히 하던 웨이트트레이닝도 다시 시작했는데 중력을 거스르는 근육의 느낌들이 너무 좋았다. 지금은 20대 때 느끼지 못한 훨씬 섬세한 근육의 감각들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땐 괜히 무게에 집착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운동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 40대가 되니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 알겠다.
여러 어려운 일들이 있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순간 마다 사람들이 내게 찾아왔다. 회사의 여러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들이 나를 살렸다. 일년 만 버티자며 시작한 이 회사의 삶이 잘 자리내릴 수 있었던 건 정말 동료들 덕분이다.
2025년에는 더 나답게 나의 인생 2막을 열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