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지하는 서울보다 조용했다.
지상에는 반듯한 도로와 정부청사, 밤이 되면 하나둘 꺼지는 사무실 불빛들이 있었다. 행정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시는 늘 정리되어 보였다. 도로는 넓었고, 건물은 낮고 길었으며, 낮 동안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표처럼 움직였다. 장관의 차가 지나가고, 공무원들이 점심시간에 몰려나오고, 저녁이면 청사 주변 식당가에서 김치찌개 냄새와 커피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다른 도시가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도시.
뉴스 카메라가 들어오지 못하는 도시.
국가가 잠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
사람들은 그곳을 공식 명칭으로 길게 부르지 않았다.
세종 국가위기관리센터.
대통령실 문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국회 보고자료에도, 감사원 제출용 시설현황표에도, 예산서의 항목명에도 그 이름이 올라갔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에서 일하는 군인들과 보좌관들, 국가안보실 직원들과 사이버 분석관들은 더 짧게 불렀다.
세종 벙커.
이름은 투박했지만, 그 이름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그곳은 대피시설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몸을 숨기는 장소도 아니었고, 전쟁영화에 나오는 마지막 지하 요새도 아니었다. 세종 벙커는 하현민 정부가 구축한 국가위기관리의 심장이었다. 지상의 대통령실이 권력의 얼굴이라면, 세종의 지하는 신경망이었다. 용산의 국방부와 합참, 평택의 연합 지휘라인, 계룡대와 주요 군사·방산 거점, 민간 통신망과 전력망 일부까지 국가의 위험을 감지하는 신호가 이곳으로 모였다.
그 모든 신호의 한가운데에 세종 코어가 있었다.
세종 코어.
공식 명칭은 세종 통합전장판단체계였다. 그러나 이름을 길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 하현민은 처음부터 짧은 이름을 좋아했다. 개발자 출신답게 그는 긴 이름을 믿지 않았다. 긴 이름은 대개 책임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세종 코어는 명령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현민이 끝까지 고집한 원칙이었다.
AI는 추천한다.
인간이 명령한다.
국가는 책임진다.
그 문장은 대통령 취임 첫해 국방과학기술회의에서 나왔고, 이후 하현민 정부의 국방 AI 원칙처럼 굳어졌다. 지지자들은 그 문장을 좋아했다. 반대자들은 비웃었다. 언론은 편한 대로 잘라 썼다. 어떤 신문은 “AI 대통령, 전쟁도 AI에 맡기나”라고 썼고, 어떤 방송은 “인간이 명령한다는 대통령의 원칙”이라고 썼다. 같은 문장을 두고도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현민은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 새벽, 그는 세종 벙커 지하 상황실에 서 있었다.
시간은 02시 17분.
대형 화면에는 한반도와 주변 해역이 떠 있었다. 지도 위로 군사분계선, 해상작전구역, 민간 항공로, 항공식별구역, 주요 항만, 공군기지, 위성 궤도, 기상정보가 얇은 선과 점으로 겹쳐 있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세종 코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현민은 여전히 화면을 사람의 눈으로 오래 보았다.
그는 숫자가 얼마나 사람을 속이는지 알고 있었다.
정치에 들어오기 전, 그는 서버실의 온도와 장애 알림음을 먼저 배운 사람이었다.
그가 만들었던 검색 알고리즘은 한때 한국 인터넷의 관문이었고, 그가 설계에 관여한 한국어 AI 모델은 병원과 재난관리, 금융보안, 그리고 끝내 국방망까지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천재 개발자라고 불렀지만, 하현민은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천재라는 말은 실패를 지워버린다. 밤새 고친 버그와, 잘못 학습된 데이터와, 배포 직후 터지는 장애와, 책임질 사람이 사라진 회의실의 침묵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로 천재라는 말을 쉽게 썼다.
그는 알고리즘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알고리즘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알고리즘을 믿는 사람을 경계했다.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틀린 데이터를 정직하게 계산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결과에 소수점이 붙어 있으면, 그것이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착각한다.
화면 아래쪽에 파란 글씨가 떴다.
SEJONG CORE / STRATEGIC ASSESSMENT MODE
세종 코어 / 전략 평가 모드
그 아래 새로운 판단 결과가 이어졌다.
서해상 미확인 접촉 발생
표적 신뢰도: 62.4%
북측 군사자산 가능성: 41.8%
센서 불일치 발생
확전 위험도: 11.7%
권고: 경계태세 부분 상향 / 추가 감시자산 투입 / 연합 정보 재검증 요청
11.7%.
하현민은 그 숫자를 오래 보았다.
11.7이라는 숫자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위험은 숫자의 크기로만 오지 않았다. 어떤 위험은 낮은 확률의 얼굴을 하고 들어와 사람들의 경계심을 통과했다. 어떤 위험은 대놓고 문을 부수지 않았다. 대신 출입증을 달고 들어와 로그에 정상 접근으로 남았다.
그게 더 나빴다.
국가안보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통령님, 현재까지는 제한적 이상징후입니다.”
그는 하현민보다 나이가 많았다. 말투가 차분했고, 외교관 출신답게 단어를 고르는 버릇이 있었다. 제한적, 가능성, 우려, 추가 확인. 그는 그런 말을 정확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런 단어들은 때때로 결정을 늦추는 데 아주 유용했다.
국방부 장관은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해군 쪽 센서에는 잡힙니다. 그런데 공군 쪽 통합항적에는 아직 안 올라옵니다. 연합망도 확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합참의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말이 적고, 얼굴에 감정을 잘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턱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군인이 자기 전장 정보를 믿지 못하는 상황. 그것은 기술적 불편함이 아니었다. 지휘의 자존심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화면 한쪽에는 평택의 연합 지휘라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한미군 측 연락장교는 정중했다. 지나치게 정중했다.
“현재 연합 측 감시자산으로는 확정적 위협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발포나 적극 대응은 권고하지 않습니다.”
합참의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함정이 위협받는 상황이면 한국군 지휘계통으로 판단합니다.”
“물론입니다, 장군님. 다만 현재 상황은 연합 차원의 확인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끝난 뒤, 상황실 안에 얇은 균열이 생겼다.
누구도 동맹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구도 미국을 탓하지 않았다.
누구도 전작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의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서해 위의 작은 점 하나가 방 안의 공기를 바꿨다.
모두가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같은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누가 마지막 명령을 내리는가.
하현민이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최종 명령권자는 누구입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길어야 몇 초였다.
그러나 하현민에게는 그 침묵이 오래된 역사처럼 느껴졌다.
서해의 밤은 검었다.
초계함 함교 유리창 너머로 바다는 먹색 천처럼 펼쳐져 있었다. 달빛은 흐렸고, 파도는 낮았다. 바람이 갑판 난간을 스칠 때마다 젖은 철 냄새와 디젤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견시병은 망원경을 들고 북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스마트폰에는 어머니가 보낸 문자가 아직 읽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 짧은 문장은 화면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허락된 세계는 휴대폰 속 문장이 아니었다. 함교의 낮은 조명, 전술상황실의 경고음, 레이더 스코프, 암호화 통신, 그리고 눈앞의 검은 바다였다.
전술상황실에서 경고음이 울린 것은 갑작스럽지 않았다.
소리는 작았다. 누군가 금속판을 손톱으로 살짝 긁은 듯한 짧은 신호음이었다. 하지만 그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레이더 담당 부사관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접촉 신호 확인. 방위각 변동 있습니다.”
전술장교가 옆 화면을 확인했다.
공군 조기경보기 쪽 통합항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군 자체 센서에는 있었다.
연합 정보망에는 아직 미확인으로 떴다.
세 개의 체계가 같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세 개의 대답이 달랐다.
함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철제 받침에 닿으며 짧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재확인.”
“재확인 중입니다.”
“민간 선박 가능성은?”
“항로상 등록된 민간 선박 없습니다.”
“북측 고속정?”
전술장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함장은 그 침묵의 모양을 알고 있었다.
군대에서 정말 무서운 순간은 누군가 소리를 지를 때가 아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고 믿다가, 갑자기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다.
그는 화면의 점을 보았다.
작고, 흐릿하고, 애매한 점.
그 점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도록 나타났다.
“함장님.”
전술장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종 코어 쪽 신뢰도 60퍼센트대입니다.”
함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60퍼센트대면 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함장은 피식 웃었다.
“참 좋네. 보고서 쓰는 놈들은 아주 행복하겠다. 맞으면 60퍼센트라 했고, 틀리면 40퍼센트는 아니라 했고.”
긴장한 상황실 안에서 누군가 아주 작게 숨을 내뱉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짧았지만, 사람들은 그 짧은 틈으로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군대의 농담은 늘 그랬다.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손이 굳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
함장은 곧바로 표정을 지웠다.
“대응태세 유지. 조준은 하지 마. 위협기동 확인 전까지 발포 없다.”
“예.”
“상급부대에 원자료 그대로 올려. 해석 붙이지 말고.”
전술장교가 고개를 들었다.
“해석 없이 말입니까?”
“그래. 우리가 해석 붙이면 위에서는 그걸 또 해석해. 그러다 보면 나중엔 북한 고속정이 아니라 내 성격 결함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몇 명이 정말로 작게 웃었다.
함장은 알고 있었다.
그 농담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발포하면 전쟁이 될 수 있다.
발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도발이 되고, 너무 늦게 움직이면 무능이 된다.
작전학교에서 배운 규정과 절차와 교전수칙은 분명했다. 그러나 실제 바다는 언제나 문장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적이 명확히 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 상급부대의 지시보다 상황이 먼저 움직일 때. 동맹의 조언과 자국의 판단이 아주 조금 어긋날 때.
그때 함장은 문득 이상한 생각을 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질문이라고.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의 함장은 자기 함정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독자 판단할 수 있는가.
합참은 어디까지 명령할 수 있는가.
대통령은 어느 순간 전시 지도자가 되는가.
그리고 그 모든 판단 위에, 아직 완전히 반환되지 않은 권한의 그림자는 얼마나 길게 드리워져 있는가.
“신뢰도 변동. 58에서 64 사이 오갑니다.”
“전자전 가능성?”
“배제 못 합니다.”
“공군 쪽은?”
“여전히 미확인입니다.”
함장은 화면을 보았다.
점은 아직 거기 있었다.
평화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것.
적도 아니고, 오류도 아닌 것.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정확하게 애매한 것.
워싱턴 D.C.에는 아직 전날 오후의 빛이 남아 있었다.
포토맥강 위로 낮은 구름이 걸려 있었고, 고급 사교클럽의 창문은 두꺼운 유리 너머로 그 빛을 적당히 걸러냈다. 안쪽은 오래된 나무와 가죽, 은식기와 묵직한 카펫 냄새로 가득했다. 벽에는 오래된 전쟁화와 대통령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직원들은 손님보다 조용히 움직이는 법을 배운 사람들처럼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누구도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두지 않았다.
누구도 서로를 직함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실수를 할 만큼 젊지 않았다.
가장 안쪽 자리에 앉은 남자는 와인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머리는 희었고, 양복은 어두웠으며, 구두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는 크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전직 관료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싱크탱크 연구위원, 방산기업 임원, 상원의원 보좌관, 그리고 신문 칼럼니스트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사실 같은 문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안보 공백.
동맹의 불확실성.
한국군의 준비 부족.
중국에 대한 잘못된 신호.
북한의 오판 가능성.
그 문장들은 보고서가 되고, 칼럼이 되고, 청문회 질문이 되고, 뉴스 자막이 된다. 때로는 예산이 되고, 때로는 무기 계약이 되며, 아주 가끔은 전쟁이 된다.
흰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서울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전시작전통제권을 반환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휘권이라는 건 서류에 서명한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지휘권은 네트워크입니다. 위성, 탄약, 연료, 데이터, 정보, 전략자산, 의회 예산, 그리고 여론. 그 모든 걸 움직일 수 있어야 지휘권이죠.”
방산기업 임원이 작게 웃었다.
“한국은 많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흰 머리의 남자는 바로 대답했다.
“약한 동맹은 보호하면 됩니다. 강한 동맹은 협상하려 듭니다. 더 강해진 동맹은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에 테이블 위의 공기가 조금 식었다.
싱크탱크 연구위원이 종이를 한 장 밀어놓았다. 표지에는 제목이 있었다.
Assessment of the Readiness of the ROK Independent Theater Command System
대한민국 독자 전구지휘체계 준비태세 평가.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의 문장 몇 개는 이미 다른 길을 통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문장은 칼럼으로, 한 문장은 의회 질의서로, 한 문장은 한국의 어느 정치 유튜브 채널 대본으로, 또 한 문장은 중국 관영매체의 조롱 섞인 논평으로.
상원의원 보좌관이 물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서울이 반발할 겁니다.”
흰 머리의 남자는 느리게 미소 지었다.
“반발하게 둬야죠. 반발하면 반미로 보일 겁니다. 침묵하면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 질문은 살아남습니다.”
“질문이라면?”
남자는 손가락으로 보고서 표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말 한국은 자기 전쟁을 스스로 지휘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 문장은 이미 여러 번 쓰인 문장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반복될 문장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말했다.
“하현민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는 기존 정치인들과 다릅니다. 숫자와 시스템을 압니다.”
흰 머리의 남자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압니다. 그래서 그를 흔들려면 감정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시스템을 건드려야 합니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AI를 공격하지 마십시오. 그건 너무 조잡합니다. 세종 코어를 망가뜨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작동하게 두세요. 단, 사람들이 그 결과를 믿지 못하게 만들면 됩니다.”
“한국군 지휘망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들이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때 클럽 직원이 조용히 들어와 접시를 치웠다. 은식기가 서로 닿으며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들 중 누구도 방금 나눈 이야기가 전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관리 가능한 압박이었다.
조정 가능한 위기였다.
동맹 조건과 예산과 무기 계약을 다시 배치하기 위한 고급스러운 게임이었다.
흰 머리의 남자는 창밖을 보았다. 워싱턴의 하늘은 평온했다.
“서울은 운전대를 원합니다.”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운전대는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길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는 계속 정할 수 있어야죠.”
베이징의 밤은 워싱턴보다 더 건조했다.
높은 담장 안쪽의 건물은 외부에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관청처럼 보였다. 그러나 창문은 불필요하게 두꺼웠고, 복도에는 장식이 거의 없었으며, 회의실 문은 닫힐 때 소리를 삼켰다.
그 방에도 이름표는 없었다.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인물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밝은 빛에 반쯤만 드러났다. 눈가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표정에는 감정이 없었다.
화면에는 워싱턴의 한 사교클럽 주변 동향, 서울의 주요 언론사 기사 준비 흐름, 한국 정치권 인사들의 공개 발언, 그리고 서해 일대의 군사 긴장 지표가 층층이 떠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의 대화를 직접 듣고 있지는 않았다. 세상에 그런 마술은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보고서가 어느 서버를 거쳐 갔는지, 어떤 문장이 어느 나라 언론에 먼저 나타났는지, 어떤 주식이 조용히 움직였는지. 그런 흔적들이 충분히 쌓이면, 대화의 내용은 몰라도 방향은 보인다.
그는 그 방향을 읽는 사람이었다.
옆에 선 젊은 참모가 말했다.
“미국 쪽 강경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모는 다음 화면을 넘겼다. 한국 대통령 하현민에 대한 분석 파일이었다.
기술관료형 정치인.
대중적 호감도 높음.
안보 경험 부족 프레임에 취약.
AI 국방 정책이 핵심 브랜드.
반미 성향은 약하나 동맹 재조정 의지가 강함.
중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않음.
마지막 문장 아래에는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 확대는 장기적으로 중국 동북부 및 서해 작전환경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
긴 테이블 끝의 인물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한국의 전작권 반환.
베이징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손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중국에는 기회가 생긴다고 믿었다. 서울이 워싱턴과 다투면 베이징은 웃으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한국은 약할 때보다 강할 때 더 예측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압박받을 때는 오래 참지만, 생존의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면 갑자기 모든 비용을 감수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전작권을 가져오고, 자체 전투기와 미사일 방어망과 장거리 정밀타격체계와 전장 AI를 하나의 지휘망으로 묶는다면, 그것은 미국의 하위 노드가 아니라 독자적인 군사 신경망이 된다.
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한국을 아직 고객으로 보는군.”
그가 처음 입을 열었다.
참모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들은 한국이 파트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아니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
“그들은 한국이 파트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자신들과 대등한 파트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거다.”
참모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한국의 방산 수출 지도였다. 폴란드, 중동, 동남아, 북유럽, 남미. K2, K9, 천무, FA-50, KF-21, 천궁, L-SAM, 잠수함, 무인체계, AI 지휘통제.
한국의 무기들은 더 이상 한반도 안에만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계약서와 항구와 시험장과 외교문서 속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다.
“한국의 전작권 반환을 막을 필요는 없다.”
참모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방관합니까?”
“아니.”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전작권을 가져간 뒤에도 한국인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 위의 한국 여론 지표를 가리켰다.
“찬성하는 자들은 반미로 보이게 만들고, 반대하는 자들은 사대주의자로 보이게 만들어라. AI 국방은 위험하다고 말하게 하고, K-방산은 거품이라고 말하게 해라. 미국의 의심과 한국 내부의 불신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면 된다.”
참모가 물었다.
“북한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은 도구가 아니었다. 도구처럼 다루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동맹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불안정했다. 그러나 때로는 날카로운 물건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움직임을 조심하게 된다.
“평양은 자신들이 판을 흔든다고 생각하게 둬라.”
“하지만 판 전체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 전쟁은 아직 이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그는 화면 속 서울과 세종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심이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 속에서 그는 워싱턴의 흰 머리 남자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서로 손을 잡지도 않았다. 같은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가는 반드시 충돌할 적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만큼은,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이 운전대를 잡는 날이 오더라도,
그 손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면 충분했다.
강대국들은 때때로 서로 싸우면서도 같은 대상을 불편해했다.
자기 발로 서기 직전의 동맹.
자기 목소리를 내기 직전의 이웃.
자기 전쟁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나라.
그런 나라는 누구에게도 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