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1부 1화

이경규·2026년 5월 31일

전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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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조건

1화 서해의 11분

세종 벙커 상황실의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서해의 표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용산 합참 지휘통제실에서는 원자료 확인이 이어졌고, 계룡대의 각 군 상황라인은 조용히 깨어났다. 평택의 연합 라인에서는 신중한 단어들이 오갔다. 지상의 대통령실 사무공간에는 아직 대부분의 불이 꺼져 있었지만, 안보실 번호들은 이미 새벽을 잃어버렸다.

하현민은 세종 벙커의 대형 화면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사이버작전사령부에서 파견된 유서진 소령이 손을 들었다. 밤샘 근무의 피로가 눈 밑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대통령님.”

“말하세요.”

“북한 쪽 전자전 패턴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물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건, 비슷하다는 겁니까, 다르다는 겁니까?”

유서진은 잠시 망설였다.

“보고서식으로 말하면 유사성은 있으나 동일성은 낮습니다.”

합참의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사람이 알아듣게 하면?”

유서진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쉽게 말하면, 북한 냄새가 나게 만든 흔적입니다.”

상황실 안이 조용해졌다.

하현민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전문가들이 싫어할 표현이었지만, 정확했다. 공격자는 지문을 남긴 것이 아니라 냄새를 뿌렸다. 추적하라고 남긴 흔적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라고 뿌린 냄새.

국가안보실장이 물었다.

“세종 코어 판단은?”

유서진이 화면을 조작했다.

가능성 평가
1. 북측 해상자산 실제 기동: 중간
2. 센서 오류: 중간
3. 외부 기만 신호 개입: 중간 이상
4. 복합 상황: 높음

합참의장이 짧게 웃었다.

“다 중간이면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거야.”

국방부 장관이 작게 말했다.

“장군님, 그래도 하나는 높습니다.”

“복합 상황?”

“예.”

합참의장은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일 짜증나는 답이네. 틀리진 않았는데 도움도 안 되는 답.”

하현민이 말했다.

“그게 현실에 제일 가까운 답일 때가 많습니다.”

그는 화면 아래의 로그를 보았다.

센서 불일치.
표적 신뢰도 변동.
연합 확인 지연.
해군 현장 판단 대기.
세종 코어 판단 보류.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나쁜 공격은 시스템을 완전히 멈추게 하지 않는다. 완전히 멈춘 시스템은 차라리 쉽다. 장애라고 부르면 되고, 복구하면 되고, 책임자를 찾으면 된다. 더 나쁜 공격은 시스템을 작동하게 둔다.

문제는 화면이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화면은 그대로 켜져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의 화면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
현장도, AI도, 동맹도, 대통령의 판단도 그 안에서 조금씩 흔들릴 수 있었다.

그때 화면의 점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사라졌다.

서해 초계함에서 먼저 보고가 올라왔다.

“미확인 접촉 소실. 재획득 안 됩니다.”

상황실 안에서 몇 사람이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무도 안도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현민도 안도하지 않았다.

진짜 위험한 표적은 사라진 뒤에 더 오래 남는다. 화면에서 사라진 점은 이제 보고서가 될 것이다. 보고서는 평가가 되고, 평가는 의심이 되고, 의심은 정치가 될 것이다.

세종 코어의 화면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상 미확인 표적 소실
직접 위협 징후 없음
권고: 상황 종료 후 데이터 무결성 검증

국가안보실장이 말했다.

“대통령님, 일단 우발 상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발 상황이요.”

그는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우발 상황은 참 편리한 말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회의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상황비서관이 들어왔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종이 보고서가 올라온다는 건, 그만큼 민감한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대통령님.”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말하세요.”

상황비서관은 한 번 숨을 삼켰다.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서 보고서를 예고했습니다. 제목은 한국군 독자 전구지휘 준비태세 평가입니다.”

합참의장의 얼굴이 굳었다.

국방부 장관이 물었다.

“언제 올라온 겁니까?”

“방금 전입니다.”

“방금 전이면 언제?”

“서해 상황 종료 9분 뒤입니다.”

그 말에 상황실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게 내려앉았다.

하현민이 말했다.

“내용은?”

“전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요약문 일부가 언론에 흘러나왔습니다.”

“읽어보세요.”

상황비서관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한국군의 독자적 전시 지휘능력은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나, 최근 해상 상황 대응 과정에서 감시·지휘·연합조율 체계의 불안정성이 확인되었으며, 전작권 전환 일정에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현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없었다. 분노보다 더 차가운 것이 있었다.

확신.

누군가 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새벽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현민은 화면 위의 한반도를 바라보았다. 지도 위에서는 작아 보였다. 그러나 그 작은 면적 안에 너무 많은 선이 겹쳐 있었다. 북쪽에는 핵을 가진 정권이 있었고, 동쪽에는 재무장을 서두르는 이웃이 있었고, 서쪽에는 오래된 제국의 그림자가 있었으며, 태평양 너머에는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설계하는 강대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국은 이제 운전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 운전대가 진짜인지, 장식인지,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헐겁게 풀어둔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오늘 새벽 상황에 대한 모든 원자료를 보존하세요.”

하현민의 목소리는 낮았다.

“세종 코어 입력값, 해군 원시 로그, 공군 항적, 민간 선박 데이터, 연합망 교환 기록까지 전부. 용산 합참과 해작사에도 같은 지시 내리세요. 해석하지 말고 보존하라고 하세요.”

국방부 장관이 물었다.

“공식 발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현민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대답을 고르고, 개발자는 원인을 찾는다.
대통령은 둘 다 해야 했다.

“아직 발표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보고서가 먼저 나가면 여론이—”

“그래서 발표하지 않는 겁니다.”

하현민은 화면을 다시 보았다.

“우리가 먼저 방어하면, 그들이 만든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필요한 건 해명이 아닙니다. 증거입니다.”

합참의장이 물었다.

“어디까지 파보시겠습니까?”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우리 쪽부터요.”

상황실 안의 공기가 다시 한 번 굳었다.

대통령은 덧붙였다.

“외부를 의심하려면 내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싫어도 순서입니다.”

합참의장은 잠시 하현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국가안보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통령님, 이 사안은 정보 쪽 움직임도 필요합니다.”

하현민은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이준은 어디 있습니까?”

그 이름이 나오자 몇몇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강이준.

그는 공식 직함이 자주 바뀌는 사람이었다. 국정원 대외안보국 소속이라고도 했고, 대통령 직속 합동태스크포스 파견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됐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말이 있었고, 중동에서 오래 있었다는 말도 있었으며, 몇 년 전 동유럽에서 한국 방산 브로커 실종 사건을 정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은 많았지만, 확인된 것은 적었다.

국가안보실장이 답했다.

“현재 인천입니다. 출국 대기 중이었습니다.”

“목적지는?”

“공식적으로는 브뤼셀입니다.”

하현민이 물었다.

“비공식적으로는?”

국가안보실장은 잠시 말을 골랐다.

“워싱턴입니다.”

하현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하세요.”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의 새벽은 지나치게 밝았다.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공항은 잠을 모르는 장소였다. 천장의 조명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았고, 유리벽 너머 활주로에는 항공기 꼬리등이 차가운 별처럼 깜빡였다. 면세점 일부는 셔터를 내린 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청소 차량은 넓은 바닥을 느리게 지나갔다. 장거리 비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의자에 몸을 접은 채 잠을 훔쳤다. 누군가는 캐리어 손잡이에 목베개를 걸어두었고, 누군가는 충전기 옆에 쪼그려 앉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강이준은 혼자 깨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깨어 있는 척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게이트 근처 카페 구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점퍼, 회색 후드, 낡지 않았지만 새것 같지도 않은 운동화. 테이블 위에는 식어가는 커피와 접힌 스포츠신문이 놓여 있었다. 여행객처럼 보이기에는 짐이 너무 적었고, 공무원처럼 보이기에는 자세가 너무 느슨했다. 그는 신문을 읽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은 활자를 따라가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갈색 코트의 남자.

검은 백팩을 멘 젊은 여자.

그리고 조금 전부터 같은 기둥 뒤에서 세 번째로 전화를 받는 척하는 회색 패딩.

셋 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같은 방향으로 동시에 걷지도 않았다. 하지만 강이준은 그런 식의 우연을 별로 믿지 않았다. 새벽 공항에서, 같은 게이트 주변에서, 같은 간격을 유지하고,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시야를 나누는 우연은 대개 직업이었다.

강이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공항 커피는 왜 늘 비싼데 식으면 더 억울하냐.”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지만, 사실은 이어피스의 감도를 확인하는 말이었다.

귓속에서 아주 작은 잡음이 움직였다.

곧 목소리가 들렸다.

“강이준.”

대통령실 안보보좌관의 목소리였다. 밤을 샌 사람 특유의 건조함이 묻어 있었다.

강이준은 신문을 넘기는 척하며 대답했다.

“예. 아직 안 죽었습니다.”

“농담할 상황 아니야.”

“제가 농담 안 하면 진짜 상황 안 좋은 겁니다.”

이어피스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만으로도 강이준은 알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서해에서 일이 있었다.”

“봤습니다.”

“벌써?”

“공항 와이파이가 생각보다 나라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장난 그만하고.”

강이준은 유리창에 비친 갈색 코트의 남자를 계속 보고 있었다. 남자는 매장 간판을 보는 척하며 멈춰 있었지만, 시선은 한 번씩 강이준의 테이블을 스쳤다. 검은 백팩의 여자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회색 패딩은 아직도 통화 중인 척했다. 셋 중 가장 어색한 사람은 회색 패딩이었다. 너무 열심히 평범해 보이려고 했다.

강이준은 그런 사람들을 싫어했다.

평범함은 연기하면 티가 난다.

“워싱턴입니까?”

강이준이 물었다.

“대통령님 지시다. 보고서 출처를 확인해. 누가 문장을 만들었고, 누가 흘렸고, 누가 한국 쪽에 심었는지.”

“합법적으로요?”

“가능하면.”

강이준은 작게 웃었다.

“그 말이 제일 무섭다니까.”

“그리고 조심해. 움직임이 빠르다. 미국 쪽만 보는 게 아닐 수 있어.”

강이준은 검은 백팩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휴대폰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진짜로 뭔가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장면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중국도 붙었습니까?”

“가능성 있다.”

“북한 냄새도 나고요?”

이어피스 너머에서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강이준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판이 그렇잖습니까. 냄새는 북한, 돈은 방산, 문장은 워싱턴, 박수는 베이징. 한국만 가운데서 욕먹고.”

“그 정도면 국회 가도 되겠네.”

“죄송합니다. 욕을 덜 먹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겁니다.”

그때 갈색 코트의 남자가 움직였다.

강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놓았다. 그의 오른손은 점퍼 주머니 가까이에 있었다. 공항 안에서 총을 쓸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멋있다. 현실에서는 검색대와 CCTV와 외교문서와 징계위원회가 따라온다.

하지만 손목, 팔꿈치, 무릎, 뜨거운 커피 정도는 다른 문제였다.

안보보좌관이 말했다.

“강이준.”

“예.”

“대통령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이 11분을 설계한 사람이 누군지 찾으라고.”

강이준은 유리창 너머 활주로를 보았다. 동쪽 하늘이 아주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찾으면요?”

“보고해.”

“죽이면 안 되고요?”

“당연히 안 되지.”

강이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다들 일을 어렵게 시키네.”

“강이준.”

“예. 알아요. 농담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색 코트의 남자는 화장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백팩의 여자는 반대쪽 통로로 빠졌다. 회색 패딩은 통화를 끝낸 척하며 두 사람 사이의 중간 지점에 섰다.

셋 중 하나는 미끼일 가능성이 높았다.
둘이 미끼일 가능성도 있었다.
셋 다 미끼이고, 진짜는 이미 그의 뒤에 있을 수도 있었다.

강이준은 스포츠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그러나 시선은 느리지 않았다.


세종 벙커의 상황실에는 아직 새벽이 남아 있었다.

지상에서는 겨울의 어둠이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넓은 도로 위에 낮게 깔려 있었지만, 지하에는 계절이 없었다. 공기는 늘 일정하게 차가웠고, 조명은 피로를 숨기기에 충분할 만큼 밝았다. 대형 화면에는 조금 전까지 서해 위에 떠 있던 작은 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사라졌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하현민 대통령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자료 보존 지시 다시 확인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세종 코어 입력값, 해군 원시 로그, 공군 항적 자료, 민간 선박 데이터, 기상정보, 연합망 교환 기록까지. 각 기관별 편집본 말고 최초 기록 기준입니다.”

국가안보실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용산 합참과 해군작전사령부에 동일 지시 내려갔습니다.”

“해석 붙이지 말라고 하세요.”

합참의장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현장에서는 해석 없이 올리기 어렵습니다. 군 보고라는 게 결국 판단을 붙이는 일이라서요.”

하현민이 그를 보았다.

“그 판단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순서를 바꾸자는 겁니다. 원자료 먼저, 판단은 그다음.”

합참의장은 잠시 대통령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하현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IT 개발자 출신 대통령. AI를 국방의 중심에 놓은 정치인. 전작권 전환을 역사적 과제라고 말하면서도, 군 출신도 아니고 외교관 출신도 아닌 사람. 합참의장은 그런 대통령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전 하현민이 “우리 쪽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를 의심하려면 내부부터 확인한다.

그건 군인에게도 통하는 말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문제는 워싱턴 보고서입니다. 서해 상황 종료 9분 뒤에 요약문이 흘러나왔습니다.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국가안보실장이 덧붙였다.

“문장도 정교합니다. 한국군의 발전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마지막에는 추가 검증 필요로 몰고 갑니다. 노골적인 반대보다 더 까다롭습니다.”

하현민은 화면 한쪽의 문장을 다시 보았다.

한국군의 독자적 전시 지휘능력은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나, 최근 해상 상황 대응 과정에서 감시·지휘·연합조율 체계의 불안정성이 확인되었으며, 전작권 전환 일정에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그는 문장을 오래 보았다.

개발자였던 시절, 하현민은 오류 메시지를 읽는 데 익숙했다. 좋은 오류 메시지는 문제를 해결하게 해준다. 나쁜 오류 메시지는 책임만 떠넘긴다. 지금 이 문장은 후자였다.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의심은 전부 심어놓았다.

상당한 발전.
그러나.
불안정성.
추가 검증.

단어들이 모두 예의 바르게 서 있었다.
그래서 더 지저분했다.

하현민이 말했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한국군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방부 장관이 그를 보았다.

“그렇게 보십니까?”

“네. 외부에서 대충 쓴 문장이 아닙니다. 용산과 평택의 언어를 둘 다 압니다. 그리고 한국 언론이 어떤 단어에 반응하는지도 압니다.”

합참의장이 낮게 말했다.

“안쪽에 누가 있다는 뜻이군요.”

하현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성급한 단정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단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마저 위험한 지연이 되기도 했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군 내부일 수도 있고, 방산 쪽일 수도 있고, 연합 라인에 접근 가능한 민간 컨설팅 조직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모릅니다.”

합참의장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 뒤져야겠군요.”

국가안보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현은 조금 부드럽게—”

합참의장이 그를 쳐다봤다.

“검색이라고 할까요?”

상황실 한쪽에서 누군가 작게 웃음을 삼켰다.

하현민도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농담이 필요했다.
농담은 상황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이 무너지지 않게 할 뿐이다.

“검색 좋네요.”

하현민이 말했다.

“다만 검색 로그까지 남기는 방식으로 합시다.”

그때 유서진 소령이 다시 보고했다. 밤샘의 피로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손에 든 태블릿은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대통령님.”

“말하세요.”

“서해 접촉 당시 세종 코어에 들어온 외부 참조 데이터 중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깨끗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눈을 찌푸렸다.

“깨끗하다니?”

“보통 실제 해상 데이터는 지저분합니다. 잡음도 있고, 기상 영향도 있고, 민간 선박 항적과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접촉을 둘러싼 일부 보조 데이터는 너무 정리되어 있습니다.”

합참의장이 말했다.

“쉽게.”

유서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진짜 현장 냄새가 덜 납니다.”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하현민이 물었다.

“만들어진 데이터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세종 코어가 참고할 수 있는 형태로 예쁘게 포장해 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국가안보실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북한이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유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하현민은 다시 대형 화면을 보았다.

세종 코어는 공격당하지 않았다.
명령 체계도 무너지지 않았다.
어떤 화면도 검게 꺼지지 않았다.
아무 미사일도 발사되지 않았고, 아무 함정도 침몰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누군가는 한국군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의 모양을 이미 보고서 문장으로 준비해두고 있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강이준 쪽은?”

국가안보실장이 답했다.

“인천공항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혼자입니까?”

“현재는 그렇습니다.”

합참의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에 현장 요원 하나만 붙이는 건 위험합니다.”

국가안보실장이 말했다.

“그 요원이 보통 하나가 아니라서요.”

합참의장이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은 다 하나입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백업 붙이세요. 단, 강이준 눈에 띄지 않게.”

국가안보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현민은 화면을 바라본 채 덧붙였다.

“그 친구, 눈에 띄면 짜증냅니다.”

국방부 장관이 작게 말했다.

“대통령님도 그건 아시는군요.”

하현민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저한테도 짜증냈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실 여기저기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찰나였다.

그리고 다시 모두가 화면을 보았다.


강이준은 화장실 앞 통로에서 걸음을 늦췄다.

갈색 코트의 남자는 모퉁이를 돌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항의 화장실은 넓고 밝았다. 세면대는 길게 이어져 있었고, 청소 직원의 카트가 입구 쪽에 세워져 있었다. 새벽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무 없었다.

강이준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입구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벽면의 반사되는 금속 안내판을 보았다.

갈색 코트의 남자는 안쪽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손을 씻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도 않았다. 오른손이 코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강이준은 한숨을 쉬었다.

“아, 진짜 공항에서 이러지 말자.”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갈색 코트의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총은 아니었다. 총이었다면 강이준은 이미 더 거칠게 움직였을 것이다. 물건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저장장치였다.

남자는 그것을 세면대 배수구 쪽으로 떨어뜨리려 했다.

강이준은 신문을 던졌다.

펼쳐진 종이가 남자의 얼굴을 덮었다.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강이준은 두 걸음 안으로 들어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비트는 각도는 작았다. 그러나 충분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벌어졌고, 저장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

작은 소리였다.

강이준은 발끝으로 그것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남자가 팔꿈치를 날렸다.

강이준은 상체를 뒤로 빼며 피했고, 동시에 남자의 무릎 안쪽을 낮게 찼다. 중심이 무너진 남자가 세면대에 어깨를 부딪쳤다. 강이준은 그의 목덜미를 잡아 벽에 조용히 밀어붙였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게 중요했다.

진짜 전문가는 사람을 화려하게 쓰러뜨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만 쓰러뜨린다. 특히 공항에서는 더 그렇다. 공항에서의 화려함은 곧 보고서다. 보고서가 많아지면 윗사람들이 회의를 열고, 회의가 열리면 현장 사람만 피곤해진다.

강이준은 남자의 팔을 뒤로 꺾었다.

“성함이?”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

“그럼 제 이름 말고 본인 이름을 말해야 공평하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이준은 바닥의 저장장치를 주워 손바닥 안에 감쌌다. 평범한 외장 보안키처럼 보였다. 겉면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너무 아무 표시도 없어서 오히려 표시처럼 보였다.

“이거 버리려고 했습니까, 주려고 했습니까?”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었다.
짧은 중국어 욕설에 가까웠다.

강이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오늘 국제전이네.”

그 순간 뒤쪽에서 공기가 움직였다.

강이준은 남자를 밀치며 몸을 낮췄다. 검은 백팩의 여자가 화장실 입구 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전기충격기가 들려 있었다. 강이준이 한 박자 늦었다면 목 뒤에 꽂혔을 위치였다.

그는 세면대 위의 물비누 통을 집어 던졌다.

여자가 팔로 막았다.
그 틈에 갈색 코트의 남자가 몸을 빼냈다.
강이준은 둘 중 누구를 먼저 잡을지 계산했다.

여자다.

남자는 저장장치를 잃었다.
여자는 아직 목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앞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손목을 왼손으로 밀어내고, 오른쪽 어깨로 몸통을 받았다. 여자가 뒤로 밀려났지만, 균형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훈련받은 몸이었다. 그녀는 전기충격기를 놓는 대신 손목을 회전시켜 다시 찌르려 했다.

강이준은 짧게 웃었다.

“아, 성실하시네.”

그는 손목을 꺾지 않았다. 대신 팔꿈치 안쪽을 눌러 힘이 빠지는 방향으로 밀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풀렸고, 전기충격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이준은 그것을 발로 차서 화장실 칸막이 아래로 밀어 넣었다.

갈색 코트의 남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은 백팩의 여자도 동시에 몸을 틀었다. 둘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자는 화장실 출구로, 여자는 비상구 쪽으로.

강이준은 욕을 삼켰다.

“이래서 팀플이 싫다니까.”

그는 남자를 포기했다.

검은 백팩의 여자가 더 중요했다. 남자는 저장장치를 버리려 했다. 여자는 회수하거나, 실패하면 강이준을 무력화하려 했다. 역할의 무게가 달랐다.

강이준은 비상구 쪽으로 뛰었다.

여자는 비상계단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강이준의 손이 문틈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을 때렸다. 그는 어깨로 문을 밀었다.

계단실의 공기는 터미널보다 차가웠다.
형광등이 건조하게 깜빡였다.
여자의 발소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강이준은 난간을 잡고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갔다.
무릎에 부담이 갔다. 그는 속으로 나이를 욕했다.
삼십대 후반 이후의 몸은 늘 이런 식이었다. 마음은 뛰는데 관절은 협상하려 든다.

아래층 전환부에서 여자가 갑자기 멈춰 섰다.

강이준도 멈췄다.

너무 쉽게 따라잡혔다.

함정이었다.

위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회색 패딩이 계단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짧은 접이식 칼이 들려 있었다.

강이준은 위아래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좁은 계단실.
CCTV 사각 가능성 높음.
소음 적음.
도망로 제한.

최악은 아니었다.

최악은 항상 보고서였다.

강이준은 저장장치를 점퍼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회색 패딩이 한국어로 말했다.

“그거 두고 가면 다치지 않는다.”

발음이 조금 어색했다.

강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한국말 되시네.”

“두고 가.”

“근데 한국말 배울 때 그런 말부터 배우면 친구 사귀기 힘들어요.”

회색 패딩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은 백팩의 여자는 말이 없었다.

강이준은 두 사람의 거리를 계산했다. 위쪽 남자가 먼저 내려올 것이다. 칼을 든 사람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고 믿는다. 아래쪽 여자는 기다릴 것이다. 강이준이 물러나는 순간 다리를 걸거나, 다시 전기충격기 같은 것을 꺼낼 가능성이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는 무기를 든 사람이 유리하다.

하지만 난간은 더 유리하다.

회색 패딩이 움직였다.

강이준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남자의 칼이 짧게 들어왔다. 강이준은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남자의 손목을 난간 바깥쪽으로 밀었다. 금속 난간에 손목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이준은 남자의 손등을 두 번째로 난간에 찍었다.

이번에는 칼이 떨어졌다.

아래쪽 여자가 올라왔다.

강이준은 회색 패딩의 옷깃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자의 몸이 계단을 가로막는 방패가 됐다. 여자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 강이준은 남자의 무릎 뒤를 걷어차고, 그의 몸을 아래쪽으로 밀었다.

두 사람이 부딪혔다.

계단실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너무 컸다.

강이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이러면 청소하시는 분들 놀라시는데.”

그는 곧장 아래로 뛰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강이준이 먼저 도착했다. 그는 그녀의 백팩 끈을 잡아 벽 쪽으로 돌려세웠다. 여자가 팔꿈치를 날렸고, 강이준은 맞았다.

정확히 턱 아래였다.

시야가 잠깐 흔들렸다.

“아, 씨.”

그는 처음으로 욕을 뱉었다.

여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강이준은 턱을 문지르며 웃었다.

“이제 좀 진심이시네.”

그는 이번에는 부드럽게 가지 않았다.

여자가 주먹을 내는 순간, 그는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어깨를 잠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여자를 계단 벽 쪽으로 눌렀다. 충격은 짧고 정확했다. 여자의 숨이 순간적으로 끊겼다. 강이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등 뒤로 돌리고, 백팩을 벗겨냈다.

회색 패딩은 아직 계단에 엎드려 있었다.

강이준은 백팩을 열었다.

안에는 여권 세 개, 얇은 노트북, 충전 케이블, 그리고 작은 파우치가 있었다. 파우치 안에는 빈 보안키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강이준은 웃음을 멈췄다.

빈 케이스.

그는 손에 넣은 저장장치를 꺼내 보았다.

미끼일 수 있었다.

아니, 미끼였다.

여자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 순간 강이준의 이어피스가 울렸다.

“강이준, 응답해.”

안보보좌관이었다.

강이준은 여자를 벽에 누른 채 대답했다.

“예. 바쁩니다.”

“무슨 일이야?”

“공항 계단에서 국제 친선 교류 중입니다.”

“장난할 때야?”

“상대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저장장치는?”

강이준은 손바닥의 작은 물건을 보았다.

“확보했습니다. 근데 이거 진짜 같지가 않습니다.”

“무슨 뜻이야?”

강이준은 여자의 백팩에서 나온 빈 케이스를 보았다.

“누가 저한테 뭔가를 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는 여자의 눈을 보았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이걸 주웠다고 믿게 만들려고 한 겁니다.”


세종 벙커에서 강이준의 보고가 들어왔을 때, 하현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실 화면 한쪽에 인천공항 보안 협조 라인의 제한된 영상이 떴다. 공식 수사로 전환하기 전이라 화면은 거칠고 제한적이었다. 계단실 내부의 직접 영상은 없었다. 다만 전후 동선은 보였다. 갈색 코트의 남자, 검은 백팩의 여자, 회색 패딩, 그리고 강이준.

국가안보실장이 말했다.

“공항경찰에는 일반 보안 사건으로 우선 처리 요청했습니다. 국정원 쪽 회수팀이 이동 중입니다.”

합참의장이 건조하게 말했다.

“공항에서 몸싸움이라.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는군요.”

국방부 장관이 답했다.

“총 안 나온 게 어디입니까.”

합참의장은 그를 보았다.

“장관님, 그걸 위안이라고 하십니까?”

“요즘 세상에 위안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황실 한쪽에서 다시 작은 웃음이 지나갔다.

하현민은 웃지 않았다.

그는 강이준이 보낸 짧은 음성 보고를 다시 들었다.

제가 이걸 주웠다고 믿게 만들려고 한 겁니다.

이 말이 중요했다.

서해의 11분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실제 표적을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있었다.
한국군이 표적을 봤다고 믿게 만들었을 수 있었다.
워싱턴 보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한국군이 실패했다고 증명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군이 실패했다는 문장을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 인식.
공격이 아니라 판단.
파괴가 아니라 의심.

유서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통령님, 저장장치를 세종 코어 격리 분석망에 넣을까요?”

하현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개발자였다.

모르는 USB를 꽂지 말라는 말은 초등학생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위기 상황에서는 그 당연한 원칙이 자주 무너진다. 급하니까. 중요하니까. 빨리 알아야 하니까. 조직은 늘 그런 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보안수칙을 어긴다.

하현민이 말했다.

“아니요.”

유서진이 그를 보았다.

“그럼 어떻게—”

“기계에 넣지 마세요. 사람에게 먼저 주세요.”

국가안보실장이 물었다.

“사람이라면?”

“독립 분석팀. 세종 코어 운용팀 말고, 외부망과 완전히 분리된 포렌식 팀. 그리고 분석 과정은 영상 기록 남깁니다.”

국방부 장관이 말했다.

“시간이 걸릴 겁니다.”

“걸려야 합니다.”

하현민은 화면 속 공항 영상을 보았다.

“기계가 빨라질수록, 첫 판단은 더 천천히 해야 합니다.”

그 말에 합참의장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의심이 조금 줄어든 눈이었다.


강이준은 공항 계단실에서 여자를 넘겨주고 있었다.

국정원 회수팀은 늘 그렇듯 늦지 않게, 그러나 너무 일찍도 아니게 도착했다. 그들은 공항 직원처럼 보였고, 실제 공항 직원보다 더 공항 직원 같았다. 강이준은 그런 연기를 싫어했다. 너무 잘하면 오히려 티가 난다.

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다친 데는?”

강이준은 턱을 만졌다.

“마음.”

“얼굴이 아니라?”

“얼굴은 원래 이래.”

팀장은 잠깐 그를 보다가 백팩을 넘겨받았다.

“저장장치.”

강이준은 바로 주지 않았다.

“이거 미끼야.”

“알아.”

“알면 더 조심하고.”

“너보다 조심하는 게 우리 일이야.”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그럼 왜 맨날 내가 먼저 맞냐?”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얇은 차폐 케이스를 꺼냈다. 강이준은 저장장치를 그 안에 넣었다. 케이스가 닫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순간 강이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쉬웠다.

세 명이 붙었다. 훈련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적이 애매했다. 죽이려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빼앗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회수하려면 더 거칠게 왔어야 했다. 감시라면 더 멀리 있었어야 했다.

그들은 강이준이 저장장치를 갖고 세종으로 보내게 만들었다.

그게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저장장치 안에 있는 것은 악성코드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악성코드는 막으면 된다. 진짜 위험한 것은 조작된 진실이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자료. 너무 그럴듯해서 조직 전체가 그 자료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미끼.

강이준은 회수팀장에게 말했다.

“이거 열기 전에 대통령실에 한마디만 전해.”

“뭐라고?”

강이준은 계단 아래쪽을 보았다. 검은 백팩의 여자는 이미 고개를 숙인 채 끌려가고 있었다. 갈색 코트의 남자는 놓쳤고, 회색 패딩은 공항경찰에 일반 난동자로 처리될 것이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정리된다. 중요한 것은 조용히 사라지고, 시끄러운 것만 기록에 남는다.

“이 자료가 우리한테 답을 주려고 온 게 아니라고.”

팀장이 눈을 좁혔다.

“그럼?”

강이준은 차가운 계단실 공기를 들이마셨다.

“우리가 뭘 믿고 싶어 하는지 보려고 온 거야.”

그는 턱을 다시 문질렀다.

아팠다.

“그리고 나 치과 가야 될 수도 있다고도 전해.”

팀장이 피식 웃었다.

“턱 맞은 거랑 치과가 무슨 상관이야?”

“몰라. 아프면 일단 치과랑 정형외과랑 한의원 다 생각나는 나이가 됐어.”

그제야 회수팀 몇 명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공항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워싱턴행 항공편의 탑승 준비를 알리는 방송이었다.

강이준은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원래 목적지는 브뤼셀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공식적인 목적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안보보좌관에게 다시 연결했다.

“강이준입니다.”

“상황은?”

“저장장치 넘겼습니다. 하나는 잡았고, 하나는 놓쳤고, 하나는 공항경찰이 오늘 술자리 안주로 쓸 겁니다.”

“워싱턴행 탑승 가능해?”

강이준은 전광판을 보았다.

“가능합니다.”

“바로 가.”

“브뤼셀 출장은요?”

“취소.”

“출장비는요?”

“살아서 돌아오면 얘기해.”

강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정부가 긴축이 심하네.”

“강이준.”

안보보좌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통령님 지시다. 워싱턴에서 문장 만든 사람을 찾아.”

강이준은 출국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장 만든 사람이라.”

그는 중얼거렸다.

“총 든 사람보다 그런 사람들이 더 귀찮은데.”

“왜?”

강이준은 탑승구 너머의 새벽빛을 보았다.

“총 든 사람은 쏘기 전에 손이 움직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문장 쓰는 사람은 나라가 움직일 때까지 손이 안 보입니다.”


세종 벙커에서는 첫 번째 내부 회의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현민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통령 전용 의자가 있었지만, 그는 그 의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의자는 사람을 고정시킨다. 그는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편이었다.

대형 화면에는 세 개의 축이 떠 있었다.

서해 미확인 접촉
워싱턴 보고서
인천공항 저장장치

세 사건은 아직 하나의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국가안보실장이 말했다.

“대통령님, 공식 입장은 오전 브리핑 전에 정리해야 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덧붙였다.

“서해 상황은 숨길 수 없습니다. 군 내부에서 이미 말이 돌고 있을 겁니다.”

합참의장은 더 직설적이었다.

“언론이 먼저 쓰면 끌려갑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서둘러 쓰면, 그들이 만든 문장에 답하는 꼴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그는 정치인이 된 뒤에도 가끔 개발자처럼 생각했다. 장애가 터졌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사과문을 쓰는 게 아니다. 로그를 보존하는 것이다. 어떤 사용자가 불편을 겪었는지 확인하고, 재현 조건을 찾고, 원인을 좁히고, 임시 대응과 근본 대응을 분리해야 한다.

국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국가의 장애는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

“오전 브리핑에서는 사실만 말합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서해에서 미확인 접촉이 있었고, 우리 군은 절차에 따라 대응했고, 직접 위협과 피해는 없었으며, 현재 원자료를 분석 중이라고.”

국가안보실장이 받아 적었다.

“전작권 전환 관련 질문이 나오면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지 않습니다.”

하현민은 잠시 멈췄다.

“이 사안은 전작권 전환의 찬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군 지휘체계에 대한 기만 가능성을 확인하는 문제라고 말하세요.”

합참의장이 물었다.

“기만이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씁니까?”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아니요. 브리핑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내부에서는 씁니다.”

합참의장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분을 할 줄 아는 대통령이라면, 아직은 대화가 가능했다.

그때 유서진 소령이 다시 보고했다.

“대통령님, 해군 원시 로그 1차 대조 결과가 들어왔습니다.”

“말하세요.”

“문제의 11분 동안, 해군 자체 센서의 데이터는 끊긴 게 아니라 과잉 보정된 흔적이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물었다.

“센서가 알아서 보정했다는 겁니까?”

“장비 자체 보정일 수도 있고, 중간 처리 과정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공군 항적, 민간 데이터, 기상 데이터와 대조하면 특정 방향으로만 깨끗해졌습니다.”

합참의장이 말했다.

“특정 방향?”

유서진은 화면을 확대했다.

서해의 검은 바다 위에 가느다란 선들이 나타났다. 실제 좌표와 세부 항로는 표시되지 않았다. 공개될 수 없는 정보는 자동으로 흐려져 있었다. 세종 벙커의 화면은 대통령에게도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하현민이 정한 원칙이었다. 대통령도 필요 이상의 정보에 접근하면 안 된다. 권한은 책임을 위해 존재하지, 호기심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유서진이 말했다.

“표적이 북측 자산처럼 보이게 하는 방향입니다.”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하현민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프롤로그의 새벽은 끝나지 않았다.
그 새벽은 이제 사건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말했다.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나온 게 아니라, 북한이 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흔적이 나온 거군요.”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는 게 정확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낮게 말했다.

“그럼 북한이 아닌 겁니까?”

하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북한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했는데 누군가 그 흔적을 이용했을 수도 있고, 북한이 안 했는데 북한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합참의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통령님, 그러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그래서 조건을 줄여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시간입니다.”

하현민은 워싱턴 보고서의 공개 시각을 화면에 띄우라고 지시했다.

“서해 접촉 발생. 접촉 소실. 보고서 요약문 유출. 인천공항 저장장치 접촉. 이 네 개의 시간을 한 줄에 놓으세요.”

몇 초 뒤 화면이 바뀌었다.

네 개의 시간이 한 줄에 표시됐다.

하현민은 그 선을 바라보았다.

“보고서가 서해 상황 이후에 쓰였다고 보기에는 너무 빠릅니다.”

국가안보실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전에 작성됐다는 뜻입니다.”

“네.”

하현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리고 사전에 작성됐다는 건, 누군가 서해의 11분이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상황실의 모든 사람이 그 문장을 이해했다.

우발 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 기다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실제 도발이었든, 기만이었든, 오류였든 상관없이.

필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사건처럼 보이는 11분이었다.

하현민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부터 이 사건의 내부 명칭을 정합니다.”

국가안보실장이 펜을 들었다.

하현민이 말했다.

“서해 11분.”

그 이름은 너무 단순했다.

그래서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워싱턴행 항공편은 예정대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이준은 탑승구 앞에 섰다. 여권과 탑승권은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 이름은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관련 서류상으로는 그랬다. 국가가 필요할 때 만들어내는 합법은 늘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강이준은 그 냄새에 익숙했다.

그는 탑승 전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안보보좌관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사건 내부명: 서해 11분.

강이준은 화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름 한번 직관적이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 표시 없음.

내용은 짧았다.

You picked up the wrong key.

강이준은 걸음을 멈췄다.

(잘못된 열쇠를 주웠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초보들이나 한다. 대신 탑승구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을 보았다. 비즈니스 승객, 아이를 안은 부부, 졸린 얼굴의 유학생, 노트북 가방을 멘 중년 남자, 이어폰을 낀 젊은 여자.

모두가 평범해 보였다.

그래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강이준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캡처하지도 않았다. 캡처는 흔적을 남긴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더 보고, 그대로 휴대폰을 껐다.

잘못된 열쇠.

그렇다면 진짜 열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했다.

탑승 안내가 시작됐다.

강이준은 줄에 섰다.

워싱턴으로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턱은 아직 아팠고, 점퍼 안쪽에는 새벽의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느슨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 만든 사람을 찾으러 가고 있었다.

총을 든 사람보다 위험한 사람.
손을 보이지 않고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
서해의 11분을 기다렸거나, 만들었거나, 적어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

탑승구를 지나기 전, 그는 세종 쪽으로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강이준입니다. 워싱턴행 탑승합니다. 그리고 방금 발신자 없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내용은 이겁니다. 잘못된 열쇠를 주웠다.”

공항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탑승권을 확인했다.

강이준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진짜 열쇠는 따로 있습니다.”


세종 벙커에서 그 메시지가 재생됐을 때, 하현민은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못된 열쇠.

아직 누구도 그 말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종 벙커 안의 모두가 느꼈다.

어딘가에 진짜 열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현민은 대형 화면을 보았다.

서해 11분.
워싱턴 보고서.
인천공항 저장장치.
발신자 없는 메시지.

조건은 충족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조건을 충족할 때마다, 조건표의 마지막 줄을 새로 쓰고 있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 전작권 전환 검증 일정은 그대로 갑니다.”

국방부 장관이 그를 보았다.

“대통령님, 공격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멈추지 않는 겁니다.”

합참의장이 물었다.

“정치적 판단입니까?”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아니요.”

그의 대답은 짧았다.

“검증입니다.”

상황실 안이 조용해졌다.

하현민은 말을 이었다.

“정말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면, 멈추는 순간 그들의 보고서가 사실이 됩니다.”

합참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틀리지 않은 말이 늘 안전한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현민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승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전작권을 정치적 트로피로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더 무거운 것이었다.

책임.

세종 벙커의 화면에는 아직 새벽의 지도가 떠 있었다.
서해는 다시 조용했고, 용산은 깨어 있었으며, 평택은 침묵하고 있었다. 워싱턴행 항공기는 곧 이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제 한 가지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서해의 11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11분은 이제 보고서와 로그, 공항의 저장장치와 워싱턴행 항공편을 타고 나라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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