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은 늘 예의 바르게 사람을 압박했다.
총을 들이대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협박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대신 초대장을 보냈다.
고급 종이에 인쇄된 이름 없는 만찬 초대장.
싱크탱크가 주최하는 비공개 라운드테이블.
전직 고위 관료가 사회를 맡는 정책 세미나.
동맹의 미래를 논의한다는 제목의 조찬 모임.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같은 문장이 붙었다.
For friends of Korea.
(한국의 친구들을 위하여.)
강이준은 그 문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단어는 워싱턴에서 너무 자주 쓰였다. 너무 자주 쓰이는 단어는 대개 원래 의미를 잃는다. 이 도시에서 친구는 술값을 같이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는 예산을 같이 통과시키는 사람, 보고서를 같이 쓰는 사람, 청문회 질문지를 미리 건네는 사람, 때로는 상대국의 약점을 너무 잘 알아서 그 약점을 대신 관리해주는 사람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새벽과 밤을 몇 번이나 건너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
착륙 직전, 창밖으로 보인 도시는 조용했다.
포토맥강은 회색으로 굽어 있었고,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낮게 엎드려 있었다. 서울의 고층 빌딩 숲과 달리 워싱턴은 높이보다 거리감으로 사람을 누르는 도시였다. 건물들은 서로를 압도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의 빈 공간이 권력을 만들었다. 넓은 도로, 낮은 석조 건물, 오래된 나무들, 깃발, 기념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느리고 단단한 공기.
강이준은 비행기에서 마지막까지 내리지 않았다.
통로에 서서 빨리 나가려는 사람들을 그는 믿지 않았다. 너무 급한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정말 급하거나, 급한 척하는 사람이거나. 둘 다 관찰할 가치는 있었다.
앞쪽 비즈니스석에서 회색 양복의 남자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기내용 캐리어를 꺼내며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강이준은 그를 기억했다.
중앙 좌석 쪽에서는 젊은 여자가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그녀는 비행 내내 잠을 자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척했지만, 화면 밝기가 낮았고, 자막이 바뀌는 속도와 눈동자의 움직임이 맞지 않았다.
그도 기억했다.
입국심사대 앞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한국계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감색 코트, 갈색 구두, 작은 여행가방. 그는 입국심사 줄에서 강이준보다 세 사람 뒤에 섰고,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눈에 띄었다. 요즘 세상에 줄을 서면서 휴대폰을 안 보는 사람은 둘뿐이다. 정말 피곤한 사람이거나, 양손을 자유롭게 두고 싶은 사람.
강이준은 세 사람을 머릿속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되자, 평범한 얼굴로 입국심사관 앞에 섰다.
심사관은 여권을 보았다.
“Purpose of visit?”
(방문 목적이 무엇입니까?)
“Consulting.”
(컨설팅입니다.)
강이준이 답했다.
심사관은 화면을 확인했다.
“What kind of consulting?”
(어떤 종류의 컨설팅입니까?)
강이준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Complicated one.”
(복잡한 쪽입니다.)
심사관이 고개를 들었다.
강이준은 아주 담담하게 덧붙였다.
“Defense-related policy meetings.”
(국방 관련 정책 회의입니다.)
심사관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화면을 봤다.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많은 것을 묻지만, 모든 것에 관심이 있지는 않다. 관심이 있어 보이는 표정과 실제 관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심사관은 피곤했고, 강이준의 서류는 충분히 깨끗했다.
도장이 찍혔다.
“Welcome to the United States.”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강이준은 여권을 받았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그는 입국장을 빠져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환영은 늘 입국장에서만 빠르다.
공항 밖의 공기는 건조했다.
강이준은 택시 승강장으로 가지 않았다.
렌터카 카운터로도 가지 않았다.
대사관 차량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공항 안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가장 맛없어 보이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실제로 맛이 없었다. 그래도 인천공항에서 식은 커피를 마신 뒤라 큰 충격은 없었다.
테이블에 앉은 그는 휴대폰을 켜지 않았다.
대신 종이컵을 손에 들고 유리창을 보았다. 유리에는 그의 뒤쪽이 흐릿하게 비쳤다. 회색 양복의 남자는 사라졌고, 젊은 여자는 수하물 벨트 쪽으로 이동했다. 감색 코트의 한국계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그리고 새 인물이 하나 더 붙었다.
공항 청소 직원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회색 작업복에 장갑, 밀대. 그는 정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바닥을 닦고,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안내판 주변을 정리했다. 너무 성실하게.
강이준은 그런 성실함도 별로 믿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미국까지 와서 이 맛이면 이건 외교 문제지.”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다.
이어피스에서 아주 작은 잡음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세종이 아니었다.
주미 한국대사관 안보라인이었다. 목소리는 젊었다. 너무 젊었다. 긴장까지 숨기지 못했다.
“강이준 요원님 맞으십니까?”
강이준은 유리창을 보며 대답했다.
“틀리면요?”
잠시 침묵.
“예?”
“아닙니다. 맞습니다.”
“대사관에서 차량을 보냈습니다. B출구 쪽으로—”
“안 탑니다.”
또 침묵.
“예?”
“그 차, 누가 운전합니까.”
“대사관 소속 직원입니다.”
“그 직원이 오늘 아침 누구한테 점심 먹자고 연락받았는지 압니까?”
“그건 확인이—”
“그럼 안 탑니다.”
젊은 목소리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동 동선은 보안상—”
“보안상 정해진 차를 타고, 정해진 길로 가고, 정해진 건물로 들어가는 게 제일 위험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동하실 겁니까?”
강이준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워싱턴답게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친구 차 얻어 타야죠.”
그는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감색 코트의 한국계 남자에게 걸어갔다.
남자는 강이준을 보자마자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먼저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한국어였다.
강이준은 그의 옆에 섰다.
“아는 척 안 했습니다. 말 건 겁니다.”
“그게 그거죠.”
“워싱턴 오래 계시더니 한국말이 많이 딱딱해지셨네.”
남자는 강이준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다. 사십대 중후반. 머리는 단정했고, 눈 밑에는 워싱턴에서 오래 버틴 사람 특유의 피로가 있었다. 그는 주미대사관 소속 공식 직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늘 공식과 비공식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한도윤.
한도윤은 늘 공식과 비공식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재미 한국계 변호사 출신으로, 한때 의회 보좌진으로 일했고 이후 한국 기업과 미국 정책권 사이를 오갔다. 대사관도 그를 알았고, 의회도 그를 알았으며, 한국 방산기업들도 그를 알았다.
그러니까 위험한 사람이었다.
강이준은 그런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만났다.
한도윤이 낮게 말했다.
“뒤에 붙은 사람 있습니다.”
“몇 명으로 보입니까?”
“제 눈에는 둘.”
강이준은 웃었다.
“세 명부터 시작합시다. 워싱턴 물가 비싸서 감시도 외주 줬을 수 있으니까.”
한도윤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비행기에서부터 붙었습니까?”
“인천부터요.”
“한국에서부터?”
“국제 배송이 빠르더라고요.”
한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자동차 키를 돌렸다.
“차는 장기주차장에 있습니다. 대사관 차 아닙니다.”
“좋네요.”
“대신 낡았습니다.”
“더 좋네요.”
“히터가 잘 안 됩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방금부터 별로 안 좋네요.”
한도윤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멀리서 보면 오래된 지인처럼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서로를 조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정도 거리가 가장 안전했다.
세종 벙커의 아침은 워싱턴의 밤과 연결되어 있었다.
시간대가 다른 두 도시가 같은 사건의 양끝을 쥐고 있었다. 세종에서는 오전 브리핑이 끝났고, 국내 언론은 예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매체는 정부의 신중한 대응을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일부는 이미 제목을 정해놓은 듯 전작권 전환 재검토론을 밀어붙였다.
서해 이상징후에 한미 정보 엇박자
AI 국방의 첫 시험대, 세종 코어 믿을 수 있나
전작권 전환 앞두고 한국군 독자 지휘능력 논란
대통령실 “기록과 자료로 판단”
하현민은 기사 제목들을 읽었다.
제목은 총알보다 느리지만, 더 오래 날아간다.
총알은 맞은 사람을 쓰러뜨린다. 제목은 맞지 않은 사람까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국가안보실장 윤태석이 말했다.
“아직까지는 관리 가능한 수준입니다.”
하현민은 그 말을 들으며 화면을 넘겼다.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윤태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산 초기입니다.”
“그 표현이 낫네요.”
세종 벙커의 브리핑룸에는 밤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 마시지 못한 커피, 접힌 보고서, 충전 중인 태블릿, 그리고 누군가 벗어놓은 방한용 외투.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종종 계절을 잊었다. 그러나 몸은 잊지 않았다. 피로는 늦게라도 찾아와 목덜미를 잡았다.
백승조 합참의장은 여전히 서 있었다.
하현민은 그를 보다가 물었다.
“의장님은 안 피곤하십니까?”
백승조는 건조하게 답했다.
“피곤합니다.”
“그런데 왜 안 앉으십니까?”
“앉으면 일어나기 귀찮습니다.”
오세규 국방부 장관이 작게 웃었다.
“그건 군사적 판단입니까, 연령에 따른 판단입니까?”
백승조가 그를 보았다.
“장관님도 곧 이해하실 겁니다.”
브리핑룸에 짧은 웃음이 돌았다.
하현민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곧바로 새로운 보고가 이어졌다.
유서진 소령이 화면을 띄웠다.
“인천공항 저장장치 식별 문자열 COND-4 / PRELIM과 관련해 1차 표면 분석 결과입니다. 장치 자체는 실제 데이터 저장장치가 맞습니다. 다만 내부 데이터 접근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하현민이 물었다.
“외부 표식만으로 나온 거죠?”
“예. 장치 표면의 미세 음각과 칩셋 제조 정보, 그리고 케이스 내부 잔여 패턴 기준입니다. 제조사 고유번호는 위장되어 있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위장이라면?”
“정상 제품처럼 보이게 했지만, 생산 로트와 부품 조합이 맞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주민등록번호와 얼굴이 따로 노는 겁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그럼 간첩도 아니고 사기꾼이군.”
유서진은 아주 잠깐 당황했다가 말했다.
“비슷합니다.”
하현민이 손가락으로 화면의 문자열을 가리켰다.
“COND-4. 이 단어가 저장장치 밖에 새겨져 있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누군가 우리가 이 단어를 보길 원했다는 뜻입니다.”
“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 우리를 잘못된 네 번째 조건으로 유도하려는 미끼. 둘, 내부자가 위험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남긴 표식.”
백승조가 말했다.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맞습니다.”
그 대답에 유서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세 번째 가능성도 있습니다.”
“말하세요.”
“미끼이면서 동시에 경고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전체 설계에는 참여했지만, 특정 선을 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브리핑룸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의미가 있었다.
흑막은 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큰 판에는 여러 이해관계가 붙는다. 미국 매파, 방산기업, 싱크탱크, 한국 내 정보원, 중국의 관찰자, 북한의 도발 라인. 그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볼 수는 있어도 같은 목표를 가질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돈을 원하고, 누군가는 권력을 원하고, 누군가는 전작권 전환 지연을 원하며, 누군가는 한국이 전작권을 가져간 뒤 실패하기를 원할 수도 있었다.
하현민은 말했다.
“강이준에게 그 가능성도 보냅시다.”
윤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싱턴 도착 확인됐습니다.”
“따라붙은 쪽은요?”
“공항부터 감시가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지 접촉자와 이동 중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그 친구는 왜 가는 곳마다 붙습니까?”
백승조가 대답했다.
“본인이 미끼처럼 생겼나 보죠.”
하현민이 짧게 말했다.
“성격은 덫에 가깝습니다.”
이번에는 유서진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현민은 웃음이 지나간 뒤 다시 화면을 보았다.
“워싱턴의 친구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우리 편인지, 자기 편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한도윤의 차는 정말 낡았다.
미국 영화에서 보던 멋진 검은 SUV도 아니었고, 외교 번호판이 붙은 대사관 차량도 아니었다. 은색 일본산 세단. 범퍼에는 작은 흠집이 있었고, 조수석 문은 닫을 때 힘을 조금 더 줘야 했다. 히터는 한도윤이 말한 대로 시원찮았다.
강이준은 조수석에 앉자마자 말했다.
“미국까지 와서 일본차 타니까 애국심이 살짝 아픈데요.”
한도윤은 시동을 걸며 대꾸했다.
“한국차 타면 누가 따라오기 더 쉽습니다.”
“그럼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차, 아무도 안 훔쳐갑니다.”
“그건 또 신뢰가 가네요.”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올랐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길은 넓고 어두웠다. 도로 위의 차들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고, 멀리 보이는 불빛은 차갑게 흩어졌다.
강이준은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검은색 SUV 한 대가 세 차선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뒤차.”
한도윤이 물었다.
“SUV?”
“네.”
“공항부터 있었습니다.”
“운전 계속하세요. 너무 잘 피하려고 하지 마시고.”
“제가 그런 걸 잘 못합니다.”
“그게 장점입니다.”
한도윤은 잠깐 그를 보았다.
“칭찬입니까?”
“워싱턴에서는 칭찬입니다.”
강이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세종에서 받은 단어 하나가 적혀 있었다.
COND-4
그는 그 종이를 한도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워싱턴에서 요즘 한국 전작권으로 밥 먹는 사람들, 누가 제일 바쁩니까?”
한도윤은 운전대를 잡은 채 대답했다.
“누구나 바쁩니다. 싱크탱크, 방산기업, 의회, 전직 관료, 로펌, 컨설팅 회사. 한국이 뭔가 결정하려고 하면 워싱턴에서는 다들 밥값이 오릅니다.”
“그중에서 보고서 문장을 만들 만한 사람.”
“여럿입니다.”
“군사위기 절차를 알고, 한국군 표현도 알고, 언론에 흘리는 법도 알고, 미국 의회 언어도 아는 사람.”
한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차 안에는 도로 소음만 낮게 깔렸다.
“그 정도면 범위가 많이 좁아집니다.”
“이름.”
한도윤은 바로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름보다 모임을 먼저 봐야 합니다.”
“모임?”
“사람들은 각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식탁에서 만납니다. 공식 세미나가 아니라 비공식 만찬. 자선재단 행사. 동맹 포럼. 참전용사 기금 모금회. 방산기업 리셉션. 거기서 문장이 정리됩니다.”
“보고서가 아니라 식탁에서?”
“보고서는 식탁에서 나온 말을 점잖게 씻어서 내는 겁니다.”
강이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럽게 우아하네요.”
“워싱턴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럼 그 식탁 이름이 뭡니까.”
한도윤은 잠시 망설였다.
“공식 이름은 없습니다.”
“비공식 이름은요.”
“Friends of the Alliance.”
강이준은 피식 웃었다.
“동맹의 친구들.”
“한국 쪽에서는 그냥 워싱턴의 친구들이라고 부릅니다.”
강이준은 창밖을 보았다.
워싱턴의 친구들.
너무 좋은 이름이었다.
좋은 이름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나쁜 일은 늘 좋은 이름을 달고 온다.
“누가 모입니까.”
한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전직 국방부 차관보급 인사, 상원 군사위원회 쪽 보좌진, 방산기업 전략담당자, 한국계 로비스트 몇 명, 싱크탱크 연구위원들. 가끔 한국 정치권 인사도 화상으로 들어옵니다.”
“한국 군 출신은요?”
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이준은 그 침묵을 들었다.
“있군요.”
“전직입니다.”
“전직은 늘 현직보다 말이 많죠.”
“그리고 더 자유롭습니다.”
강이준은 사이드미러를 다시 보았다.
검은 SUV는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모임 있습니까?”
한도윤은 그를 보았다.
“도착하자마자 거기부터 가겠다고요?”
“보고서가 나왔으니까 축하파티 정도는 하겠죠.”
“그런 표현은 위험합니다.”
“왜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국을 돕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강이준은 웃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위험했다.
돈만 밝히는 사람은 거래가 된다.
권력만 원하는 사람은 계산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장소.”
한도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는 워싱턴 외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 낮은 건물들의 불빛이 늘어서 있었다.
“조지타운 쪽 사적 클럽입니다.”
“회원제?”
“예.”
“초대장 필요합니까?”
“당연합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있습니까?”
한도윤은 앞만 보고 운전했다.
“있습니다.”
“역시 친구 많으시네.”
“친구 아닙니다.”
“워싱턴에서는 그게 친구라면서요.”
한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더 싫습니다.”
그때 뒤쪽 SUV가 차선을 바꿨다. 거리를 조금 좁혔다.
강이준은 안전벨트를 손으로 가볍게 만졌다.
“한 변호사님.”
“예.”
“운전 못하신다고 했죠.”
“예.”
“지금부터는 조금 더 못해보세요.”
한도윤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아.”
그는 핸들을 조금 어색하게 틀었다.
차가 차선을 살짝 벗어날 듯 흔들렸다. 뒤쪽 SUV가 속도를 줄였다. 강이준은 사이드미러로 그 반응을 봤다. 훈련받은 운전자였다. 일반인은 욕을 하거나 경적을 울렸을 것이다. 저쪽은 거리를 다시 계산했다.
“잘하십니다.”
강이준이 말했다.
“방금 못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못하는 걸 잘하신다고요.”
“기분이 이상하군요.”
“워싱턴 칭찬입니다.”
한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랑 있으면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강이준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대신 지루하진 않잖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워싱턴의 흰 머리 남자는 아침을 늦게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 늦잠을 자지 않았다. 늦잠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처럼 보이지만, 실제 권력은 남들이 잠들어 있을 때 이미 전화 한 통을 끝낸 사람에게 간다. 그는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화려하지 않았다.
책장에는 국제정치와 군사전략 관련 서적이 꽂혀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지도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한반도 지도였다. 미국 사람들이 보는 한반도 지도는 한국 사람들이 보는 지도와 조금 달랐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반도는 삶의 중심이지만, 미국 전략가들에게 한반도는 동북아 전체 설계도 위의 좁은 목이었다. 작지만, 막히면 모든 흐름이 꼬이는 곳.
그는 그 좁은 목을 오래 보아왔다.
비서가 조용히 들어와 파일을 내려놓았다.
“서울 반응입니다.”
그는 안경을 썼다.
대통령실 브리핑 요약문, 한국 주요 언론 제목, 국회 반응, 군 내부 비공식 평가, 평택 보고, 그리고 별도 표시된 이름 하나.
Kang Lee-jun arrived in Washington.
(강이준이 워싱턴에 도착함.)
강이준.
그는 그 이름을 잠시 보았다.
“생각보다 빠르군.”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파일을 넘겼다.
COND-4 / PRELIM
이 문구가 표시된 별도 보고도 있었다.
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누가 이걸 노출했지?”
비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인천공항 접촉 과정에서 장치가 한국 측에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넘어간 것이 아니라 넘어가게 했겠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흰 머리 남자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 그는 보고서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이르다.”
그가 말했다.
“네 번째 조건은 아직 이름을 가질 단계가 아니야.”
“그럼 회수 지시를—”
“아니.”
그는 비서의 말을 끊었다.
“이미 봤다면 회수는 의미가 없다. 회수하려는 순간 더 중요해 보일 뿐이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워싱턴의 아침은 평온했다. 출근 차량들이 움직이고,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카페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 도시는 많은 전쟁을 논의했지만, 정작 전쟁의 냄새는 거의 맡지 않았다. 그것이 워싱턴의 힘이자 약점이었다.
“오늘 저녁 모임은 예정대로 진행하나?”
비서가 답했다.
“예. Friends of the Alliance. 참석자는 일부 조정했습니다.”
“한국 쪽은?”
“한도윤이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흰 머리 남자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강이준도 오겠군.”
“막을까요?”
“왜 막지?”
그는 파일을 덮었다.
“가끔은 현장 요원에게 식탁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자신이 본 것을 보고서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
비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흰 머리 남자는 설명하지 않았다.
첩보요원들은 흔적을 찾는다.
문서, 돈, 통화, 이동, 물건.
하지만 워싱턴에서 가장 중요한 흔적은 때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식탁에서 오간 문장, 웃으며 건넨 농담, 잔을 들기 전의 침묵,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방식. 그런 것들은 녹음되어도 증거가 되기 어렵고, 보고서에 적어도 음모처럼 보인다.
그래서 강이준 같은 사람은 불편해진다.
그는 거짓을 잘 잡아내지만,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해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에게 보여줘.”
흰 머리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한국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비서가 물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흰 머리 남자는 비서를 보았다.
“우리는 한국의 적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진심에 가까웠다.
“우리는 한국이 실수하지 않게 막고 있을 뿐이지.”
그는 다시 한반도 지도를 보았다.
“서울은 운전대를 원한다. 하지만 운전대만 있다고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야. 엔진, 연료, 보험, 도로, 신호체계. 그 모든 것을 누가 관리하는지 알아야 한다.”
비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흰 머리 남자는 낮게 덧붙였다.
“문제는 하현민이 그걸 너무 빨리 알아차린다는 거다.”
차는 조지타운 근처로 들어섰다.
거리는 좁아졌고,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양옆으로 늘어섰다. 워싱턴의 이쪽은 권력의 정문보다 옆문에 가까웠다. 관광객이 보는 기념비의 도시가 아니라, 정책과 돈과 인맥이 저녁 식사 예약표 안에서 움직이는 도시.
한도윤은 골목 안쪽의 작은 주차장으로 차를 넣었다.
뒤쪽 SUV는 큰길에서 지나쳤다. 따라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강이준은 믿지 않았다.
“너무 쉽게 떨어졌습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그럼 안 떨어진 겁니다.”
강이준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니면 우리가 떨어졌다고 믿게 만든 거죠.”
“당신은 세상을 너무 피곤하게 봅니다.”
“그래서 아직 살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한도윤이 코트 안쪽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초대장 두 장이 있었다. 두꺼운 종이, 엷은 회색 인쇄, 아무런 로고도 없는 디자인. 겉으로 보기에는 품격 있었고, 내용은 간단했다.
Private Dinner
Friends of the Alliance
Georgetown, Washington D.C.
Discussion: The Future of Combined Deterrence
(비공개 만찬)
(동맹의 친구들)
(워싱턴 D.C. 조지타운)
(논의 주제: 연합 억제의 미래)
동맹의 미래.
연합 억제.
좋은 단어들이었다.
강이준은 초대장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밥은 맛있습니까?”
한도윤은 그를 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맛없는 밥 먹으면서 나라 걱정하면 더 화나니까.”
“비싸고 맛은 적당합니다.”
“워싱턴답네요.”
한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들어가면 말조심하십시오.”
“제가요?”
“예.”
“제가 원래 말이 별로 없습니다.”
한도윤은 강이준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건 말수가 적다는 뜻이지, 말조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이준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시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세종에서 온 암호화 메시지였다.
내용은 짧았다.
COND-4는 미끼이자 경고일 수 있음. 같은 문자열 또는 조건 관련 표현 발견 시 추적.
강이준은 메시지를 읽고 바로 지웠다.
한도윤이 물었다.
“새로운 지시입니까?”
“숙제요.”
“어떤?”
강이준은 초대장을 다시 보았다.
Combined Deterrence.
연합 억제.
그 말은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좋은 말일수록 안쪽을 봐야 한다.
“오늘 저녁에 누가 조건을 말하는지 봐야겠습니다.”
“조건?”
“네.”
강이준은 초대장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친구들이 보통 밥 먹으면서 조건을 붙이거든요.”
세종 벙커에서는 워싱턴 모임 참석자 명단이 화면에 떠올랐다.
모두 공개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료.
상원 군사위원회 소속 보좌진.
방산기업 전략담당 임원.
동북아 안보를 연구하는 싱크탱크 연구위원.
한국계 로비스트.
전직 주한미군 장성.
그리고 한국 방산기업의 워싱턴 법률자문.
윤태석 실장이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민간 정책모임입니다. 정부가 직접 문제 삼기 어렵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런 모임에서 실제 문장이 나옵니다. 공식 회의록에는 안 남고, 다음 날 보고서에는 남죠.”
백승조 합참의장은 참석자 명단 중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전직 주한미군 장성.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국군 장교들과 술도 마셨고, 전역 후에도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말투는 늘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백승조는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한국을 너무 잘 아는 외국인은 때때로 한국의 약점을 한국인보다 더 편하게 말한다.
하현민은 참석자 명단을 보며 물었다.
“우리 쪽 현직 인사는 없습니까?”
윤태석이 답했다.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요.”
윤태석은 잠시 말을 골랐다.
“전직 군 인사와 민간 자문단 일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직과의 접촉 가능성은 확인 중입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준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한도윤을 통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공식 신분은 민간 자문 보좌역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그 친구가 민간 자문 보좌역처럼 보입니까?”
백승조가 대답했다.
“보좌역이 누구를 보좌하는지에 따라 다르죠.”
하현민은 건조하게 말했다.
“적어도 조용한 보좌는 아닐 겁니다.”
상황실에 짧은 웃음이 흘렀다.
윤태석 실장이 이어 말했다.
“문제는 모임 자체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오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노골적인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증거를 찾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찾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문장을 찾으라고 하세요.”
윤태석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현민은 설명했다.
“워싱턴 보고서에 나온 표현들. 감시, 지휘 판단, 동맹 조율, 압축된 전시 시간표. 그리고 COND-4와 연결될 만한 단어들. 사람은 자기가 만든 문장을 다시 씁니다. 조금 바꿔도 리듬은 남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개발자들이 코드 스타일 못 숨기는 것처럼.”
유서진 소령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승조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게 맞나?”
유서진은 당황했다.
“예. 대체로 맞습니다. 주석 다는 습관이나 변수명 짓는 방식 같은 게 남습니다.”
백승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으로 치면 보고서 문체군.”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군 보고서는 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백승조가 그를 보았다.
“아닙니다. 누가 썼는지 보입니다.”
“정말입니까?”
“예. 쓸데없이 ‘적시적인’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놈들이 있습니다.”
유서진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현민도 살짝 웃었다.
“그럼 강이준에게 문장을 수집하라고 하세요.”
윤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현민은 참석자 명단을 다시 보았다.
워싱턴의 친구들.
그들은 적이 아닐 수 있었다.
실제로 적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들은 한국을 도우려 한다고 믿을 수도 있었고, 동맹을 지키려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현민은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조건은 더 조용히 들어온다.
친구니까 이해하라.
친구니까 기다려라.
친구니까 이 정도는 받아들여라.
친구니까 이번 한 번만 양보하라.
그것이 오래된 동맹의 언어였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그 언어를 이용해 네 번째 조건을 쓰고 있었다.
조지타운의 클럽은 밖에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 검은 철제 난간, 작은 황동 명패. 명패에는 클럽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읽기 어려웠다. 일부러 그런 듯했다. 진짜 권력은 간판을 크게 달지 않는다. 찾아올 사람은 어차피 찾아온다.
입구 안쪽에는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 서 있었다.
그는 초대장을 확인했고, 한도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Good evening, Mr. Han.”
(좋은 저녁입니다, 한 선생님.)
“Good evening.”
(좋은 저녁입니다.)
직원은 강이준을 보았다.
한도윤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My associate from Seoul.”
(서울에서 온 제 동료입니다.)
직원은 강이준을 잠시 보았다.
그 짧은 시선 안에 많은 것이 있었다.
어떤 직업인지, 어떤 계급의 사람인지, 어떤 방에 들여보내도 되는지, 어떤 테이블에는 앉히지 말아야 하는지. 오래된 클럽의 직원들은 웬만한 정보요원보다 사람 분류를 잘한다.
강이준은 미소를 지었다.
직원은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Welcome.”
(환영합니다.)
강이준은 안으로 들어가며 낮게 말했다.
“여긴 입구부터 기분 나쁘게 친절하네요.”
한도윤이 속삭였다.
“제발 영어로는 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없어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클럽 안쪽은 따뜻했다. 벽난로가 있었고, 조명은 낮았으며, 오래된 나무 냄새와 와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방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작은 원형 테이블, 유리잔, 낮은 대화, 종종 터지는 웃음.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크게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도윤은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Good to see you.”
(만나서 반갑습니다.)
“It's been a while.”
(오랜만입니다.)
“How's Seoul?”
(서울은 어떻습니까?)
“Complicated, as always.”
(늘 그렇듯 복잡합니다.)
강이준은 그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손을 보았다.
시선보다 손이 솔직할 때가 많다.
누가 악수를 먼저 청하는지, 누가 잔을 내려놓는지, 누가 특정 이름이 나올 때 손가락을 멈추는지.
방 안쪽 벽난로 옆에 흰 머리 남자가 있었다.
강이준은 그를 알지 못했다. 이름도, 직함도, 그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방 안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가장 크게 말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화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그쪽을 확인했다.
그런 사람은 명함보다 주변의 시선으로 직함을 드러낸다.
한도윤이 낮게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공식적으로는 민간 전략자문가입니다.”
“비공식적으로는요.”
“워싱턴에서 한국 안보 문제를 다룰 때, 모두가 한 번쯤 전화를 거는 사람.”
강이준은 흰 머리 남자를 보았다.
“이름은요.”
한도윤은 말하지 않았다.
강이준도 더 묻지 않았다.
아직 이름을 알 필요는 없었다.
때로 이름은 너무 이르다.
이름을 아는 순간 사람은 그 이름에 갇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가 만드는 문장이었다.
흰 머리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있었다.
“Mr. Han.”
(한 선생.)
한도윤이 악수했다.
“Good evening.”
(좋은 저녁입니다.)
흰 머리 남자의 시선이 강이준에게 옮겨왔다.
“And your associate?”
(그리고 이쪽 동료분은요?)
한도윤이 말했다.
“From Seoul. Policy side.”
(서울에서 왔습니다. 정책 쪽입니다.)
강이준은 악수를 받았다.
손은 차갑지 않았다.
힘은 과하지 않았다.
상대의 손을 오래 잡지도 않았다.
익숙한 사람의 악수였다.
흰 머리 남자가 물었다.
“First time in Washington?”
(워싱턴은 처음입니까?)
강이준은 영어로 답했다.
“First time today.”
(오늘은 처음입니다.)
흰 머리 남자는 잠시 그를 보더니 웃었다.
“That's an interesting answer.”
(흥미로운 대답이군요.)
강이준도 웃었다.
“Washington seems to like interesting answers.”
(워싱턴은 흥미로운 대답을 좋아하는 것 같군요.)
“Washington likes useful answers.”
(워싱턴은 쓸모 있는 대답을 좋아합니다.)
강이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Then I should be careful.”
(그럼 조심해야겠군요.)
흰 머리 남자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Yes. You should.”
(네. 그래야 할 겁니다.)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강이준은 알았다.
상대도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단순한 정책 보좌역이 아니라는 것을.
만찬은 느리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날씨 이야기였다. 워싱턴의 겨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 서울은 얼마나 추운지, 한국 음식점이 요즘 좋아졌다는 말, 김치가 건강식품으로 더 알려지고 있다는 말. 그런 말들은 안전하다. 안전한 말은 사람들이 위험한 말로 들어가기 전 발을 닦는 매트 같은 것이다.
곧 대화는 동맹으로 옮겨갔다.
전직 주한미군 장성이 먼저 말했다.
“한국군은 지난 20년 동안 놀라운 발전을 했습니다. 누구도 그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강이준은 물을 마셨다.
첫 문장이 칭찬이면 조심해야 한다.
대개 다음 문장이 진짜다.
장성은 계속했다.
“하지만 전시 지휘는 장비와 병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속도의 문제입니다. 판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합 조율의 문제입니다.”
강이준은 속으로 문장을 접었다.
속도.
판단.
연합 조율.
보고서의 문장과 닮아 있었다.
싱크탱크 연구위원이 말을 받았다.
“Exactly. The question is not whether Seoul has capable forces. It does. The question is whether Seoul can integrate surveillance, command judgment, and alliance coordination under compressed timelines.”
(정확합니다. 문제는 서울이 유능한 전력을 갖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서울이 압축된 시간표 속에서 감시, 지휘 판단, 동맹 조율을 통합할 수 있느냐입니다.)
강이준의 손가락이 잔 옆에서 멈췄다.
그 문장.
감시.
지휘 판단.
동맹 조율.
압축된 시간표.
워싱턴 보고서의 문장과 거의 같은 리듬이었다.
한도윤도 그것을 느낀 듯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돌렸다. 강이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하는 순간, 상대는 자신이 맞혔다는 것을 안다.
흰 머리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와인잔을 들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한국계 로비스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서울에서는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는 조금 더 차분하게 봐야 합니다. 전작권 전환은 한국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동맹 전체의 안정성 문제니까요.”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한국말을 잘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영어로만 말했다. 한국계 로비스트들은 종종 그랬다. 한국어로 말하면 감정이 섞이고, 영어로 말하면 구조가 생긴다. 그는 구조 뒤에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해 보였다.
방산기업 임원이 말했다.
“Stability requires interoperability.”
(안정성에는 상호운용성이 필요합니다.)
상호운용성.
좋은 단어였다.
그리고 비싼 단어였다.
그 단어가 등장하면 대개 뒤에는 장비 구매, 통신체계 통합, 소프트웨어 인증, 유지보수 계약, 기술 접근권 문제가 따라온다. 상호운용성은 군사적으로 필요했다. 동시에 방산기업에는 아주 훌륭한 청구서 제목이었다.
전직 관료가 말했다.
“한국이 더 큰 책임을 원한다면, 더 깊은 integration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깊은 통합.
강이준은 물었다.
“Integration with what?”
(무엇과의 통합입니까?)
방 안의 대화가 아주 잠깐 멈췄다.
한도윤이 옆에서 눈으로 욕했다.
강이준은 모른 척했다.
전직 관료가 미소 지었다.
“With the alliance architecture, of course.”
(물론 동맹 구조와의 통합입니다.)
“Architecture includes locks.”
(구조에는 잠금장치도 포함됩니다.)
강이준이 말했다.
이번에는 몇 사람이 그를 보았다.
흰 머리 남자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강이준은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문에는 구조가 있고, 구조에는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통합을 말할 때는 누가 열쇠를 갖는지도 같이 말해야 하죠.”
대화는 부드럽게 얼어붙었다.
워싱턴에서 너무 직접적인 은유는 촌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때로 촌스러움은 쓸모가 있다. 너무 세련된 방에서는 투박한 질문이 가장 크게 들린다.
싱크탱크 연구위원이 웃으며 말했다.
“That's a very Korean way to put it.”
(아주 한국적인 표현이군요.)
강이준도 웃었다.
“Thank you. I try.”
(감사합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몇 사람이 웃었다.
긴장은 조금 풀렸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흰 머리 남자가 처음으로 대화에 들어왔다.
“Mr...?”
한도윤이 대신 답하려 했지만, 강이준이 먼저 말했다.
“Lee.”
“Mr. Lee.”
흰 머리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No one is trying to take the keys away from Seoul.”
(누구도 서울에게서 열쇠를 빼앗으려는 게 아닙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흰 머리 남자는 계속했다.
“The question is whether Seoul is ready to carry all the keys at once.”
(문제는 서울이 모든 열쇠를 한꺼번에 들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그 문장도 좋았다.
좋은 문장이었다.
강이준은 좋은 문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문장을 너무 잘 쓰는 사람을 경계했다.
“Sometimes people keep asking if you're ready until you forget the door was yours.”
(때로는 사람들이 당신이 준비됐는지 계속 묻다가, 결국 그 문이 원래 당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한도윤은 이제 거의 포기한 얼굴이었다.
흰 머리 남자는 강이준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웃었다.
“Interesting.”
(흥미롭군요.)
강이준은 물을 마셨다.
“Useful?”
(쓸모도 있습니까?)
흰 머리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대답이었다.
세종 벙커에서는 강이준의 음성 기록 일부가 실시간 요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클럽 내부를 도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의 자료는 외교적으로 폭탄이 된다. 대신 강이준은 대화 직후 짧은 문장 단위로 기억한 표현을 암호화 메모 형태로 남기고 있었다. 현장 요원들은 모든 것을 녹음하지 않는다. 때로는 기억이 더 안전한 저장장치다. 틀릴 수는 있지만, 빼앗기지는 않는다.
화면에 문장들이 떴다.
capable forces / not the issue
integrate surveillance, command judgment, alliance coordination
compressed timelines
stability requires interoperability
deeper integration with alliance architecture
carry all the keys at once
(유능한 전력 / 핵심 문제가 아님)
(감시, 지휘 판단, 동맹 조율을 통합하다)
(압축된 시간표)
(안정성에는 상호운용성이 필요하다)
(동맹 구조와의 더 깊은 통합)
(모든 열쇠를 한꺼번에 들다)
하현민은 문장을 하나씩 읽었다.
워싱턴 보고서의 리듬이 그 안에 있었다.
백승조 합참의장이 낮게 말했다.
“같은 사람이 썼거나, 같은 방에서 나온 문장입니다.”
윤태석이 덧붙였다.
“또는 같은 초안을 공유했거나요.”
오세규 장관은 화면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 있었다.
carry all the keys at once.
모든 열쇠를 한꺼번에 들 준비.
오세규가 말했다.
“열쇠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된 열쇠.
네 번째 자리.
모든 열쇠.
아직 우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 반복되면 패턴이 된다.
“강이준에게 COND-4 직접 언급은 하지 말라고 하세요.”
윤태석이 물었다.
“왜입니까?”
“상대가 그 단어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꺼내면 반응을 잴 수 없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그 친구가 참을까요?”
하현민은 잠시 생각했다.
“짧게 보내세요. ‘아직 물지 마라.’”
오세규 장관이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개한테 보내는 문자 같군요.”
하현민도 아주 잠깐 웃었다.
“실제로 비슷하게 반응할 겁니다.”
윤태석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물지 마라. COND-4 언급 금지. 문장만 수집.
잠시 뒤 강이준에게서 답장이 왔다.
멍.
브리핑룸에 웃음이 터졌다.
처음으로 조금 길게.
그러나 웃음이 끝난 뒤, 모두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문장들은 웃기지 않았다.
그 문장들은 조건표 주변을 돌고 있었다.
아직 정면으로 네 번째 조건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상호운용성.
더 깊은 통합.
동맹 구조.
모든 열쇠.
압축된 전시 시간표.
말은 다 달랐지만, 향하는 곳은 같았다.
한국이 전작권을 가져가더라도, 특정 핵심 판단은 여전히 동맹 구조 안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것은 아직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건이 되기 직전의 문장이었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 흰 머리 남자는 강이준에게 따로 말을 걸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명함을 교환했으며, 누군가는 다음 주 세미나 이야기를 했다. 한도윤은 일부러 조금 떨어져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계속 강이준 쪽을 놓치지 않았다.
흰 머리 남자는 벽난로 옆에 섰다.
“Mr. Lee.”
(미스터 리.)
강이준은 잔을 내려놓았다.
“Yes.”
(예.)
“You're not really policy side, are you?”
(정책 쪽 사람은 아니군요, 그렇죠?)
강이준은 미소를 지었다.
“Depends on the policy.”
(어떤 정책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흰 머리 남자는 웃었다.
“Seoul sends interesting people.”
(서울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보내는군요.)
“Washington invites interesting friends.”
(워싱턴은 흥미로운 친구들을 초대하더군요.)
“Touché.”
(한 방 먹었군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놓였다.
벽난로의 불이 낮게 흔들렸다.
방 안의 대화 소리는 멀게 들렸다.
흰 머리 남자가 말했다.
“Your president is a smart man.”
(당신들의 대통령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제가 뽑은 건 아니라서요.”
영어로 말하기 애매한 농담이었다.
강이준은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흰 머리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조는 읽었다.
“He thinks systems can be redesigned.”
(그는 시스템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강이준이 대답했다.
“Sometimes they can.”
(때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Sometimes systems exist because history has already tested alternatives.”
(때로는 역사가 이미 다른 대안들을 시험했기 때문에 시스템이 존재하는 겁니다.)
“Sometimes history is just a long excuse.”
(때로는 역사라는 것도 긴 변명일 뿐입니다.)
흰 머리 남자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강이준을 바라보았다.
“Careful, Mr. Lee. In this town, people who talk like that are either revolutionaries or amateurs.”
(조심하세요, 미스터 리. 이 도시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혁명가이거나 아마추어입니다.)
“Which one do I look like?”
(저는 어느 쪽으로 보입니까?)
“Neither.”
(둘 다 아닙니다.)
흰 머리 남자의 미소가 사라졌다.
“You look like a man sent to find a culprit. But there may not be one.”
(당신은 범인을 찾으라고 보내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범인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강이준은 그의 눈을 보았다.
“That's convenient.”
(편리한 말이군요.)
“It's reality.”
(그게 현실입니다.)
“Reality usually has receipts.”
(현실에는 보통 영수증이 남습니다.)
“Not always.”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흰 머리 남자는 벽난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Sometimes countries drift into necessary arrangements. No villain. No conspiracy. Just interests, fears, responsibilities.”
(때로 국가는 필요한 준비, 즉 불가피한 구조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악당도 없고, 음모도 없습니다. 그저 이해관계와 두려움과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조건도 그렇게 생깁니까?”
강이준은 한국어로 물었다.
흰 머리 남자는 이번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한 단어는 들은 듯했다.
“Condition?”
(조건?)
강이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아직 물지 마라.
세종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Conditions.”
(조건들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영어로 바꾸었다.
“Every friendship has them.”
(모든 우정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흰 머리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Yes. Mature ones do.”
(그렇습니다. 성숙한 관계라면 그렇죠.)
“Then the question is who writes them.”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그 조건을 작성하느냐입니다.)
그 말에 흰 머리 남자의 눈빛이 아주 잠깐 변했다.
아주 잠깐.
그러나 강이준은 보았다.
문장이 닿았다.
흰 머리 남자는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
“Seoul is fortunate to have vigilant people.”
(서울은 경계심 있는 사람들을 두어 다행이군요.)
강이준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Washington is fortunate to have many friends.”
(워싱턴은 친구가 많아서 다행이군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웃음은 악수와 비슷했다.
겉으로는 예의였고, 안쪽으로는 힘겨루기였다.
그때 흰 머리 남자가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를 꺼냈다.
명함이 아니었다.
연락처도 없었다.
그저 두꺼운 종이에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The fourth seat is always empty until the table is set.
(네 번째 자리는 식탁이 차려질 때까지 늘 비어 있다.)
강이준은 카드를 받았다.
흰 머리 남자는 말했다.
“Something I heard from an old negotiator.”
(늙은 협상가에게 들은 말입니다.)
“좋은 말이네요.”
강이준은 한국어로 말했다.
이번에는 번역하지 않았다.
흰 머리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Enjoy Washington.”
(워싱턴을 즐기십시오.)
그리고 그는 돌아섰다.
강이준은 카드를 손바닥 안에 감쌌다.
네 번째 자리.
조건 4.
COND-4.
그는 세종에 바로 보내지 않았다.
우선 한 번 더 읽었다.
문장이 지나치게 멋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워싱턴 사람들은 협박도 인용문처럼 한다.
강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클럽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한도윤은 강이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강이준은 카드를 보여주지 않았다.
“친구는 조건이 있어야 성숙하답니다.”
한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은 여기서 아주 흔합니다.”
“그다음이 중요하죠.”
“뭡니까?”
강이준은 주변을 보았다.
골목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네 번째 자리는 식탁이 차려질 때까지 늘 비어 있다.”
한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흰 머리.”
“그 사람이 직접요?”
“네.”
한도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골목 끝에서 검은 SUV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숨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 쪽으로 느리게 다가왔다.
강이준은 손을 코트 안쪽으로 넣지 않았다.
총이 있는 곳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대신 주변의 출입문, 낮은 담장, 쓰레기통, 가로등 위치를 봤다. 총격전은 마지막 수단이다. 도시 한복판에서는 총을 꺼내는 순간 사건의 주도권이 자신에게서 사라진다.
SUV가 멈췄다.
뒷문이 열렸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봉투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한도윤이 움직이려 하자, 강이준이 손으로 막았다.
“만지지 마세요.”
“폭발물입니까?”
“워싱턴에서 폭발물보다 귀찮은 게 뭔지 아십니까?”
“뭡니까?”
“문서요.”
강이준은 주변을 확인한 뒤, 장갑을 꺼내 봉투를 집었다. 봉투는 가벼웠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봉투를 살짝 열었다.
종이에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서해의 초계함.
정확한 위치나 민감한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은 분명히 한국군 함정을 찍은 것이었다. 문제는 촬영 시각이었다.
서해 11분이 발생하기 전.
사진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Your eleven minutes began before your clocks did.
(너희의 11분은 너희 시계보다 먼저 시작됐다.)
한도윤은 얼굴이 굳었다.
“이건 어디서—”
강이준은 봉투를 닫았다.
“그 질문은 나중에.”
“지금 바로 세종에 보내야 합니다.”
“보냅니다.”
“그런데요?”
강이준은 골목 끝을 보았다. SUV는 이미 사라졌다.
“먼저 여기서 나가야죠.”
“왜요?”
그 순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희미했다.
곧 가까워졌다.
강이준은 한도윤을 보았다.
“워싱턴의 친구들이 선물을 줬으면, 보통 계산서도 같이 옵니다.”
“무슨 계산서요?”
골목 반대편에서 경찰차의 불빛이 번쩍였다.
강이준은 짧게 말했다.
“우리 이름으로 된 거요.”
그는 한도윤의 팔을 잡고 골목 안쪽으로 끌었다.
“뛰세요.”
“제가요?”
“예.”
“저 운동 안 합니다.”
“티 납니다. 그래도 뛰세요.”
두 사람은 골목 안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경찰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영어로 외쳤다.
“Stop!”
(멈춰!)
강이준은 뛰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워싱턴 친구들, 환영식 한번 요란하네.”
한도윤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게 환영식입니까?”
“총 안 쐈잖습니까.”
“그게 기준입니까?”
“오늘은 그렇습니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벽돌 건물 사이로 찬바람이 몰렸다.
강이준은 앞쪽의 낮은 철문을 보았다. 잠겨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오래된 문은 늘 한쪽이 약하다.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철문 앞에서 몸을 낮추고 어깨로 밀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
강이준이 짧게 말했다.
한도윤이 헐떡이며 물었다.
“왜요?”
“생각보다 튼튼하네요.”
“그걸 지금—”
뒤쪽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강이준은 철문 옆의 낮은 벽을 보았다.
높이는 어중간했다.
한도윤에게는 높고, 자신에게는 귀찮은 정도였다.
“올라갑니다.”
“저는 못 올라갑니다.”
“올라갑니다.”
“못 한다니까요.”
강이준은 한도윤의 코트 뒷덜미를 잡았다.
“오늘부터 합니다.”
그는 한도윤을 거의 밀어 올렸다.
한도윤이 욕을 삼키며 벽을 넘었다. 강이준은 뒤따라 올라가며 골목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경찰인지, 사설 보안인지, 아니면 경찰처럼 보이게 만든 사람들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잡히면 봉투가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는 벽을 넘었다.
반대편은 좁은 주차장이었다.
한도윤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나이에 담을 넘을 줄은 몰랐습니다.”
강이준은 봉투를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축하합니다. 워싱턴 적응 빠르시네요.”
“이게 적응입니까?”
“여긴 친구 만나도 담 넘는 도시잖습니까.”
두 사람은 다시 뛰었다.
세종 벙커에서 강이준의 긴급 보고가 들어왔을 때, 하현민은 회의실을 나서던 중이었다.
보고는 짧았다.
워싱턴 모임에서 COND-4 암시 문구 확보.
네 번째 자리 관련 발언.
서해 11분 이전 촬영 추정 한국군 함정 사진 수령.
현지 경찰 또는 위장 추적 발생. 이동 중.
하현민은 멈춰 섰다.
윤태석 실장이 화면을 확인하고 얼굴을 굳혔다.
“서해 11분 이전 촬영이라면, 누군가 사전에 해당 함정을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또는 그렇게 믿게 만들려는 겁니다.”
백승조 합참의장이 낮게 말했다.
“둘 다 문제입니다.”
하현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건은 검증의 도구이지, 지연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조건표 밖에서 다른 증거가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해의 11분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었다고 믿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여론전보다 더 위험했다.
하현민이 말했다.
“사진 원본성 검증부터 하세요. 메타데이터 믿지 말고, 픽셀 단위 합성 흔적, 촬영 각도, 공개자료 재가공 가능성, 전부 확인합니다.”
유서진 소령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백승조가 말했다.
“해군에 확인시키겠습니다. 단, 현장 함정명은 최소 인원에게만 공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윤태석 실장이 물었다.
“강이준 요원은?”
하현민은 잠시 화면을 보았다.
워싱턴의 골목.
친구들의 식탁.
네 번째 자리.
서해 11분 이전의 사진.
그는 조용히 말했다.
“빠져나오라고 하세요.”
윤태석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하현민이 덧붙였다.
“아니.”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말고, 잡히지도 말라고 하세요.”
윤태석이 대통령을 보았다.
“그게 더 어렵습니다.”
“그 친구 특기 아닙니까.”
백승조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 특기는 보통 오래 못 갑니다.”
하현민은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빨리 끝내야죠.”
그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워싱턴의 친구들.
그들은 웃으며 조건을 말했다.
그들은 한국의 발전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동맹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이 모든 열쇠를 한꺼번에 들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있었다.
그러나 하현민은 이제 다른 질문을 해야 했다.
누가 네 번째 자리를 비워두었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을 권리를 누가 갖고 있다고 믿는가.
그는 낮게 말했다.
“워싱턴의 친구들이 식탁을 차렸군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현민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도 자리에 앉아야겠습니다.”
세종 벙커의 화면 위로 새로운 사건 표시가 올라왔다.
FRIENDS / 워싱턴 비공개 모임
COND-4 관련 가능성: 높음
서해 11분 사전 인지 가능성: 확인 필요
하현민은 그 문장들을 보았다.
조건은 더 이상 세 줄짜리 평가표에만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갔고,
식탁 위의 농담과 조언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친구라는 이름의 네트워크 안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는 한국이 운전대를 잡기 전, 조용히 조수석에 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워싱턴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종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