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1부 7화

이경규·2026년 6월 2일

전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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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조건

7화 방산의 밤

방산은 밤에 더 솔직해졌다.

낮에는 전시장이 있었다.
대형 부스, 정장 차림의 임원들, 각국 국기가 꽂힌 상담 테이블, 세련된 홍보영상, 느리게 회전하는 전차 모형,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미사일 축소 모델,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악수하는 사람들.

낮의 방산은 늘 국가를 말했다.
안보를 말했다.
동맹을 말했다.
기술독립을 말했다.
수출을 말했다.
젊은 엔지니어의 땀과 장병들의 안전을 말했다.

그러나 밤의 방산은 조금 달랐다.

밤에는 계약서가 움직였다.
부품 단가가 움직였고, 시험평가 일정이 움직였고, 인증 기준이 움직였고, 로펌의 의견서와 컨설팅 회사의 검토보고서가 움직였다. 누군가는 국가를 위해 일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솔직한 사람들은 말했다.

돈을 위해 일한다고.

그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무기는 애국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차에는 강철이 필요하고, 자주포에는 포신이 필요하고, 전투기에는 엔진과 레이더와 수천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 미사일 방어체계에는 센서와 소프트웨어와 통신망이 필요하고, 전장 AI에는 데이터센터와 전력과 냉각장치와 밤새 로그를 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애국심은 연설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포탄은 공장에서 나온다.

그리고 공장은 돈으로 돈다.

하현민 대통령은 그 사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안보를 말하면서 돈을 모르는 척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돈을 모르는 척하는 순간, 돈을 아는 사람들이 국가안보의 뒷문으로 들어온다. 방산 비리는 대개 애국이라는 문패를 달고 들어온다. 방산 로비는 안보 공백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계약서의 작은 단서로 끝난다.

그래서 하현민은 방산을 좋아하면서도 경계했다.

한국 방산은 강해졌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K2 흑표는 더 이상 국내 전차만이 아니었다.
K9 자주포는 이미 여러 나라의 포병 지도를 바꿨다.
천무는 장거리 정밀타격 능력의 상징이 되었고, FA-50은 가성비 전투기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의 훈련장과 활주로에 섰다. KF-21 보라매는 아직 완성된 전설은 아니었지만, 한국이 남의 하늘만 빌려 쓰는 나라가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천궁-II와 L-SAM은 방어무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가졌다. 방어할 수 있는 나라는 결정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

그리고 이제 세종 코어가 있었다.

전작권이 돌아오면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무기 목록이 아니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지휘체계 안에서 묶여야 한다.
위성은 보고, AI는 정리하고, 합참은 판단하고, 각 군은 움직이고, 대통령은 책임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연결하는 순간, 방산은 더 이상 산업이 아니라 국가의 신경망이 된다.

문제는 신경망에는 늘 통증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통증으로 돈을 번다.


판교의 밤은 늦게 꺼졌다.

넥스브릿지 시스템즈 코리아가 있는 빌딩 17층은 이미 외부 조명이 낮아져 있었지만, 사무실 안쪽 회의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낮보다 더 딱딱했다. 직원들은 집에 가지 못했고, 임원들은 말을 줄였으며, 법무팀은 말이 많아졌다.

대표이사 차민규는 회의실 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노트북 세 대와 출력된 계약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국방부 기술검증 재확인팀이 요청한 자료 목록은 길었다.

전작권 전환 관련 검증 패키지 제출 이력.
상호운용성 데이터셋 접근 권한.
외부 기술자문 계약.
로펌 검토 의견서.
민간 협력사 하청 구조.
빌드 해시값.
최근 6개월간 수정 로그.
그리고 조한결이라는 이름으로 방문했던 외부 자문위원의 신원 확인 자료.

차민규는 마지막 항목을 오래 보았다.

조한결.

그 이름은 회사 방문기록에 있었다.
하지만 로펌은 그를 공식적으로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출입증은 정상 발급되어 있었고, 회의실 예약도 정상 절차를 거쳤다. 임원 중 한 명이 그를 알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임원은 “로펌 쪽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로펌은 “넥스브릿지 쪽 자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었다.

그래서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차민규는 그 구조를 너무 잘 알았다.

조직은 바쁠 때 정중하게 망한다.
확인했냐고 묻지 않고, 확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권한이 있냐고 묻지 않고, 권한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절차는 있었지만, 절차를 통과한 것이 사람이 아니라 분위기였을 때, 사후 보고서는 늘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시에는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차민규는 그 문장을 싫어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장이 자기 회사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

보안담당 이사가 말했다.

“대표님, 국방부 쪽에서 원본 로그 보존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삭제, 이동, 복사 모두 중지하라는 지시입니다.”

“당연히 해야지.”

차민규는 짧게 답했다.

법무팀장이 곧바로 말했다.

“다만 원본 로그를 그대로 제출하면, 고객사 기밀과 외부 협력사 계약정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범위를 조정해야 합니다.”

보안담당 이사가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따질 상황입니까?”

법무팀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이니까 따져야 합니다. 한 번 나간 자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차민규가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래서 더 짜증나는군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차민규는 화면을 돌렸다.

넥스브릿지의 주요 사업 구조가 떠 있었다.

국방 AI 신뢰성 검증.
연합 상호운용성 데이터 표준화.
방산 AI 모듈 검증 자동화.
전작권 전환 지휘소연습 데이터 보정.
민간·군 데이터 포맷 변환.
K-방산 수출용 체계 호환성 컨설팅.

문서 위에서는 모두 깨끗한 단어들이었다.

신뢰성.
표준화.
상호운용성.
검증.
호환성.

차민규는 예전에는 그 단어들을 좋아했다. 그 단어들 덕분에 투자도 받았고, 국방부 문도 열었고, 대형 방산기업들과 회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단어들이 전부 다리처럼 보였다.

세종 코어와 외부 데이터를 잇는 다리.
용산 합참과 민간 검증망을 잇는 다리.
한국 방산기업과 워싱턴 로펌을 잇는 다리.
전작권과 돈을 잇는 다리.

다리는 편리하다.

그래서 공격받기 좋다.

차민규는 낮게 말했다.

“조한결이 마지막으로 접근한 파일은?”

보안담당 이사가 자료를 넘겼다.

“직접 접근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회의실 화면 공유 세션에 들어온 기록이 있습니다.”

“화면 공유?”

“예. 검증 패키지 릴리즈 노트 설명 중이었습니다.”

“무슨 릴리즈 노트.”

보안담당 이사는 잠시 망설였다.

“상호운용성 참조 데이터셋 4차 보정안입니다.”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차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4차.”

“예.”

“파일명은?”

보안담당 이사는 화면을 띄웠다.

INTEROP-REFSET-4 / K-OPCON VALIDATION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 한국 전작권 검증)

차민규는 그 문장을 보았다.

요즘 그의 주변에는 이상하게 4라는 숫자가 많아지고 있었다.

COND-4.
네 번째 조건.
네 번째 자리.
참조세트 4.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자는 우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연이 반복되면 로그를 본다.

차민규는 말했다.

“그 파일을 격리해.”

법무팀장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 임의 격리는 증거훼손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삭제하라는 게 아니야.”

차민규가 날카롭게 답했다.

“읽기 전용으로 동결하고, 해시값 뜨고, 국방부 점검반 입회하에 보존해.”

보안담당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대표님.”

차민규는 짜증을 삼켰다.

“또 뭐야.”

“창원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창원?”

“K9 개량형 수출 패키지 관련 상호운용성 테스트 일정이 내일인데, 국방부 쪽에서 일정 확인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차민규는 눈을 감았다.

판교에서 시작된 불이 창원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러 곳에 불씨가 놓여 있었는지도 몰랐다.


창원의 밤은 판교와 달랐다.

판교의 밤이 유리와 모니터의 빛이라면, 창원의 밤은 철과 기름과 용접불의 빛이었다. 공장지대의 도로는 넓었고, 대형 트럭들이 느리게 움직였다. 가끔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공장 굴뚝 위로 낮은 연기가 올라갔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기계처럼 숨을 쉬는 곳이었다.

그곳의 한 방산 공장 안에는 K9 자주포 차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도색 전의 차체는 전시장에 놓인 완성품보다 더 솔직했다. 아직 매끈하게 포장되지 않은 강철, 조립을 기다리는 부품, 작업자의 손자국, 점검표, 바닥에 표시된 노란 선, 그리고 곳곳에 붙은 안전 표지. 무기는 뉴스 화면에서는 위엄 있게 보이지만, 공장 안에서는 결국 사람이 만든 물건이다.

누군가는 볼트를 조이고, 누군가는 용접을 하고, 누군가는 검사표에 서명한다.

국가의 화력은 사람의 손끝을 지나간다.

창원 공장의 야간 품질관리실에는 몇 명의 엔지니어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내일 예정된 수출형 K9 패키지의 상호운용성 테스트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테스트 자체는 무기 발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터 포맷, 통신 인터페이스, 수출 대상국의 지휘체계와 연결되는 모의 검증이었다. 겉으로 보면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전에서 지루한 작업이 가장 중요할 때가 많다.

포가 정확히 쏘려면, 먼저 데이터가 정확히 도착해야 한다.

품질관리팀장 박준호는 모니터를 보며 눈을 비볐다.

“또 판교에서 수정본 내려왔어?”

젊은 엔지니어가 답했다.

“예. 넥스브릿지 쪽 검증 패키지인데, 긴급 재확인 표시가 붙었습니다.”

박준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회사 오늘 뉴스 나온 거기 아니야?”

“아직 회사명은 안 나왔습니다.”

“안 나왔다는 건 곧 나온다는 뜻이지.”

젊은 엔지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준호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INTEROP-REFSET-4 / K-OPCON VALIDATION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 한국 전작권 검증)

“이거 왜 우리 쪽 수출 패키지에도 붙어?”

엔지니어가 말했다.

“공통 참조 라이브러리입니다. 전작권 검증 쪽에서 만든 데이터 포맷 일부가 수출형 상호운용성 테스트에도 재사용됩니다.”

박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재사용.”

“예.”

“누가 허가했어.”

“표준화팀에서 승인된 걸로 되어 있습니다.”

“표준화팀 누구.”

엔지니어는 로그를 열었다.

“승인자는 본사 표준화총괄. 검토자는 외부 기술자문. 이름은……”

그는 잠시 멈췄다.

“조한결.”

박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방산업계 내부 메신저에는 이미 돌고 있었다. 판교에서 사라진 외부 자문. 국방부 점검반이 찾는 사람. 넥스브릿지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

박준호는 낮게 욕을 했다.

“망했네.”

젊은 엔지니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서버 연결 끊어.”

“예?”

“외부 검증망하고 연결 끊고, 지금 화면 캡처하지 말고, 로그 보존 모드부터 걸어. 그리고 본사 보안팀 불러.”

“테스트 일정은요?”

박준호는 그를 보았다.

“지금 테스트가 문제냐?”

엔지니어는 입을 다물었다.

박준호는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본사 보안상황실 연결해. 긴급.”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품질관리실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아주 짧게.

하지만 공장에서 전기가 깜빡인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특히 군수품 테스트 구역에서.

박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야.”

엔지니어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순간 전압 강하입니다. 비상전원 전환은 안 됐습니다.”

“외부망은?”

“잠깐 끊겼다가 복구됐습니다.”

“끊어.”

“지금 복구됐는데요.”

“그러니까 끊으라고.”

박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품질관리실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야간 근무자라기엔 빠른 발소리였다.

박준호는 문 쪽을 보았다.

문이 열렸다.

보안팀 직원이 아니었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 둘이었다. 공장 협력업체 직원처럼 보였지만, 박준호는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창원 공장에 오래 있으면 사람 얼굴을 다 알지는 못해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의 공기는 안다.

모르는 공기였다.

박준호는 전화기를 든 손에 힘을 줬다.

“누구십니까?”

앞선 남자가 웃었다.

“시설점검 나왔습니다.”

“이 시간에?”

“긴급 점검입니다.”

박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출입증 보여주세요.”

남자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 순간 박준호는 알았다.

오늘 밤은 길어질 것이다.


세종 벙커의 대형 화면에 창원 공장 상황이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6분 뒤였다.

국방부 방산보안상황실을 거쳐 올라온 짧은 보고였다.

창원 K9 수출형 상호운용성 테스트 구역 이상징후
외부 검증망 순간 연결 이상
무단 출입 의심 인원 2명 확인 중
현장 보안팀 출동

오세규 국방부 장관은 보고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원까지?”

백승조 합참의장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넥스브릿지 참조세트가 창원에도 들어갔군.”

유서진 소령이 빠르게 자료를 넘겼다.

“공통 상호운용성 라이브러리가 일부 방산 수출 패키지 검증에도 재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작권 검증 데이터와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포맷과 검증 기준 일부가 겹칩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그러면 이건 전작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산 신뢰성 문제로 번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전작권은 국내 정치와 동맹의 문제다.
하지만 방산 신뢰성은 시장의 문제다.
K-방산은 한국의 자부심이었고, 동시에 수출 산업이었다. 세종 코어와 방산 AI 검증망이 흔들린다는 인식이 생기면, 그것은 단순히 정부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 무기의 신뢰성과 연결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그 문장은 이제 세종 코어를 넘어 K-방산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하현민은 물었다.

“창원 현장 통제 가능합니까.”

오세규 장관이 답했다.

“공장 자체 보안팀과 방첩 라인이 들어갔습니다. 경찰에는 아직 일반 침입 시도로만 공유됐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군사기밀 구역이면 군도 움직입니다.”

오세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만 수출형 패키지라 민간기업 영역과 겹칩니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그는 그 구조가 싫었다.

군도 아니고, 완전한 민간도 아닌 곳.
국가 기밀과 기업 기밀이 겹치는 곳.
애국과 영업비밀이 같은 문장 안에 있는 곳.

그런 곳에는 늘 틈이 있다.

“강이준에게 창원 건 공유하세요.”

윤태석이 말했다.

“워싱턴에 있는 요원에게 창원 공장 상황을요?”

“네.”

“왜입니까?”

하현민은 화면의 연결 구조를 가리켰다.

“다리는 양쪽 끝을 봐야 합니다. 한쪽은 판교와 창원이고, 다른 한쪽은 워싱턴입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그리고 중간에는 돈이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하현민은 짧게 답했다.

“돈은 길을 압니다.”


창원 공장의 복도는 좁았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두 남자는 출입증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앞선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박준호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를 남자의 얼굴 쪽으로 던졌다. 스마트폰도 아니고 사무실 유선 전화 수화기였다. 오래된 물건은 쓸모가 있다. 무겁고, 선이 달려 있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날아간다.

수화기가 남자의 어깨를 맞았다.

“야!”

남자가 욕을 내뱉었다.

박준호는 뒤쪽 엔지니어에게 소리쳤다.

“비상벨!”

엔지니어가 벽 쪽으로 뛰었다.

두 번째 남자가 그를 막으려 했지만, 박준호가 책상 위의 금속 서류함을 밀어 넘어뜨렸다. 서류함이 바닥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안에 있던 점검표와 케이블 타이, 작은 공구들이 쏟아졌다.

공장은 소리에 민감하다.

평소에는 기계음이 모든 것을 덮지만, 특정한 소리는 사람을 움직인다. 넘어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비상벨 직전의 짧은 침묵. 야간 근무자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엔지니어의 손이 비상벨에 닿았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앞선 남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박준호에게 달려들었다. 박준호는 싸움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장 사람들은 몸을 쓸 줄 안다. 무거운 부품을 옮기고, 좁은 공간에서 몸을 피하고, 뜨거운 금속과 날카로운 모서리 옆에서 일하다 보면 몸이 먼저 위험을 읽는다.

박준호는 뒤로 물러서며 바닥의 공구를 발로 찼다.

작은 스패너가 남자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남자의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 틈에 박준호는 옆의 소화기를 잡았다.

“나 이거 진짜 쓴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박준호는 안전핀을 뽑았다.

하얀 분말이 좁은 품질관리실 안을 덮었다.

남자가 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두 번째 남자가 엔지니어 쪽으로 가려 했지만, 복도 쪽에서 보안팀의 발소리가 들렸다.

“보안팀입니다!”

그 말이 들리자 두 남자는 동시에 움직였다.

도망.

그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하러 왔고, 실패하자 빠져나가려 했다.

박준호는 분말 속에서 눈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저 새끼들 잡아!”

보안팀 직원 둘이 복도 끝에서 뛰어왔다. 그러나 침입자들은 이미 반대편 비상계단으로 몸을 틀었다. 한 명은 넘어질 뻔했지만, 곧 균형을 잡았다. 그들은 공장 구조를 알고 있었다.

박준호는 그 사실이 더 싫었다.

처음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기침을 하며 모니터 쪽으로 돌아섰다.

화면에는 아직 그 파일명이 떠 있었다.

INTEROP-REFSET-4 / K-OPCON VALIDATION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 한국 전작권 검증)

그 아래, 조금 전 순간 전압 강하와 외부망 재연결 기록이 남아 있었다.

박준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로그 떠.”

젊은 엔지니어가 기침하며 대답했다.

“예?”

“로그 뜨라고. 전체. 지금. 외부망, 전압, 파일 접근, 화면공유, 다.”

“예.”

박준호는 분말가루가 묻은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그는 국방정책을 몰랐다.
전작권 협상도 몰랐다.
워싱턴의 친구들도, 베이징의 축하 전문도 몰랐다.

하지만 하나는 알았다.

누군가 자기 공장에 들어와 자기 시스템을 건드리려 했다.

그건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그리고 박준호는 단순한 문제를 좋아했다.

“씨.”

그는 낮게 욕했다.

“우리 포는 아직 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전쟁이야.”


워싱턴 대사관 보안실에서 강이준은 창원 영상을 봤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회색 작업복의 남자 둘.
품질관리실.
소화기 분말.
도망.
공장 구조를 아는 동선.

강이준은 짧게 웃었다.

“저 팀장님 마음에 드네요.”

한도윤이 물었다.

“왜요?”

“소화기 쓰는 타이밍이 좋습니다.”

“지금 그걸 평가하십니까?”

“현장에서는 그런 게 중요합니다.”

강이준은 화면을 멈췄다.

침입자 중 한 명의 손목이 보였다.
작은 문신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문신이라기보다는 작업자용 임시 식별 스티커가 떼어진 흔적 같았다. 붉은색의 아주 작은 자국.

“저거 확대.”

보안담당관이 화면을 확대했다.

선명하지 않았다.

강이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작업복은 가짜고, 동선은 진짜고, 표식은 임시 출입증 흔적.”

한도윤이 말했다.

“공장 내부 협력업체를 가장한 겁니까?”

“아니요.”

강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한 게 아니라, 협력업체 출입 흐름을 실제로 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내부 조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있거나, 출입 절차를 대행하는 업체가 뚫렸거나.”

그는 잠시 생각했다.

“넥스브릿지와 창원 공장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현장 검증업체 있습니까?”

한도윤은 자료를 뒤졌다.

“있습니다. 이름은 에이치라인 테크.”

“뭐 하는 회사입니까.”

“현장 상호운용성 테스트 지원, 데이터 로거 설치, 수출형 장비 검증 지원. 규모는 작습니다.”

“작은 회사.”

강이준은 중얼거렸다.

“좋네요. 너무 좋아요.”

한도윤은 이제 그 말의 뜻을 알았다.

좋다는 말은 전혀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강이준은 다시 물었다.

“계열사나 관계사는요.”

한도윤은 화면을 더 넘겼다.

“물류 쪽 이름이 하나 걸립니다. H-Line Marine Logistics. 아직 방산과 직접 연결됐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만 장비 반입과 현장 운송 쪽에서 몇 번 같은 하청망에 잡힙니다.”

“H-Line Marine Logistics.”

강이준은 그 이름을 천천히 되뇌었다.

“테크 회사가 물류 이름을 데리고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물류 쪽에서 테크 회사를 만든 걸 수도 있고요.”

“둘 다 냄새는 납니다.”

강이준은 세종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창원 침입자, 현장 협력업체 출입 흐름 이용 가능성. 넥스브릿지-창원 공통 하청: H-Line Tech 확인. 관계망에 H-Line Marine Logistics 이름 등장. 출입증 발급·장비 반입·운송 로그 확인 필요.

곧 답장이 왔다.

수신. 국내팀 이동.

강이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대사관 정무공사가 들어왔다.

“강 요원, 미국 쪽 방산기업 관계자가 비공식 접촉을 요청했습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어느 회사요.”

정무공사는 회사명을 말했다.

한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 회사면 조지타운 만찬 참석자 중 하나와 연결됩니다.”

강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보자고 합니까.”

“지금.”

“어디서.”

“알링턴 쪽 바입니다.”

한도윤이 바로 말했다.

“안 됩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왜요.”

“너무 뻔합니다.”

“뻔하면 함정이고, 함정이면 정보가 있죠.”

“그 논리로 살아남은 게 신기합니다.”

“저도 가끔 신기합니다.”

정무공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는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강이준은 피식 웃었다.

“워싱턴에선 다들 친구고, 다들 도와주겠대.”

그는 점퍼를 집어 들었다.

한도윤이 절망한 얼굴로 물었다.

“또 뛰어야 합니까?”

강이준은 문 쪽으로 걸으며 답했다.

“이번엔 바입니다.”

“그래서요?”

“담은 없을 겁니다.”

한도윤은 낮게 말했다.

“그 말 두 번째입니다.”

“두 번까지는 믿어보시죠.”


세종 벙커에서는 방산 축 지도가 새로 올라왔다.

판교.
창원.
대전.
사천.
구미.
용산.
평택.
워싱턴.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각 선 위에는 단어들이 붙었다.

상호운용성.
검증 데이터.
수출 패키지.
AI 신뢰성 평가.
연합 표준.
로펌 자문.
기술 인증.
하청 검증업체.

오세규 장관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전작권이 이렇게 돈이 되는 줄 알면, 다들 애국자가 되겠군요.”

백승조가 말했다.

“원래 돈 되는 애국이 제일 시끄럽습니다.”

윤태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현민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전작권이 돌아오면, 한국군은 더 많은 것을 스스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 연결을 누가 하느냐가 시장이 됩니다.”

유서진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 연결이 오염되면, 전체 지휘체계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거기입니다. 공격자는 가장 강한 무기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믿고 지나가는 연결부를 건드렸습니다.”

백승조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다리.”

“네.”

하현민은 말했다.

“그리고 방산은 지금 그 다리를 놓는 중입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전작권은 군의 문제이지만, 전작권 이후의 전쟁은 산업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이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 난리 납니다.”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맞는 말인데요.”

“맞는 말이라서 난리 납니다.”

백승조가 건조하게 말했다.

“정치라는 게 그렇습니까?”

오세규가 답했다.

“군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백승조는 부정하지 않았다.

“좀 그렇습니다.”

짧은 웃음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화면.

하현민은 방산 축 지도의 끝, 사천을 보았다.

KF-21.

아직 직접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공통 위협 라이브러리라는 단어가 뜬 순간, 하현민은 그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KF-21은 단순한 전투기가 아니었다. 한국 항공산업의 자존심이자, 미국 무기 생태계에 대한 한국의 첫 번째 독립선언에 가까웠다.

만약 누군가 K9 수출 패키지를 건드렸다면, 다음은 더 큰 상징일 수 있었다.

하현민은 말했다.

“사천 쪽도 조용히 확인하세요.”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KF-21 라인 말씀이십니까?”

“네. 직접 건드린 정황이 없어도,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가 겹치는지 봅니다.”

백승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군 쪽에 조용히 확인 넣겠습니다.”

유서진이 말했다.

“세종 코어와 KF-21 전술보조 AI 사이 직접 연결은 없습니다. 다만 훈련 시나리오와 공통 위협 라이브러리 일부가 겹칠 수 있습니다.”

하현민의 눈이 움직였다.

“공통 위협 라이브러리.”

또 하나의 다리였다.

그는 말했다.

“거기도 봅니다.”

윤태석이 받아 적었다.

“판교, 창원, 사천. 그리고 대전 ADD 관련 검증 데이터 경로.”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범위가 커집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원하는 게 그거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우리가 너무 넓게 보느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것.”

백승조가 말했다.

“그럼 좁혀야 합니다.”

“네.”

하현민은 화면을 가리켰다.

“공통 단어로 좁힙니다.”

유서진이 물었다.

“상호운용성입니까?”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실패 시뮬레이션, 외부 검증 패키지, 그리고 조한결.”

그는 잠시 멈췄다.

“이 다섯 개가 만나는 지점을 찾으세요.”

세종 벙커의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도 위의 선들은 더 어두운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알링턴의 바는 조용했다.

강이준이 상상한 것보다 더 조용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가 너무 시끄러우면 대화가 어렵고, 너무 조용하면 도망치기가 어렵다. 이곳은 중간을 아주 정교하게 피하고 있었다. 낮은 조명, 몇 개의 테이블, 느린 재즈,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각자 남의 대화를 듣지 않는 척하는 사람들.

방산기업 관계자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짧은 회색 머리, 값비싼 시계, 정중한 자세.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눈은 흐리지 않았다. 그는 강이준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Mr. Lee?”
(미스터 리?)

강이준은 앉지 않고 그를 보았다.

“Depends on who's asking.”
(누가 묻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는 작게 웃었다.

“My name is Daniel Pierce.”
(제 이름은 대니얼 피어스입니다.)

“Good for you.”
(좋으시겠네요.)

피어스의 웃음이 아주 잠깐 굳었다.

한도윤은 뒤에서 거의 체념한 얼굴로 서 있었다.

피어스는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I asked for this meeting because your people are looking in the wrong direction.”
(내가 이 만남을 요청한 이유는, 당신들 쪽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이준은 천천히 앉았다.

“People usually say that when they want us to look where they point.”
(사람들은 보통 우리가 자기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게 만들고 싶을 때 그런 말을 하죠.)

피어스는 술잔을 들지 않았다.

“This isn't about Washington.”
(이건 워싱턴 문제가 아닙니다.)

강이준은 그를 보았다.

“That's what Beijing said.”
(베이징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피어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주 짧았다.

그러나 오늘 강이준은 그런 짧은 변화들을 계속 보고 있었다.

피어스는 낮게 말했다.

“Beijing doesn't understand alliance systems.”
(베이징은 동맹 체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강이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Washington understands them too well.”
(워싱턴은 너무 잘 이해하죠.)

피어스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작은 봉투를 올렸다.

강이준은 손대지 않았다.

피어스가 말했다.

“Inside is a list of subcontractors tied to interoperability validation packages used in Korean defense AI projects.”
(안에는 한국 국방 AI 프로젝트에 사용된 상호운용성 검증 패키지와 연결된 하청업체 명단이 들어 있습니다.)

강이준은 봉투를 보았다.

요즘 모두가 봉투를 좋아했다.

“Why give this to me?”
(왜 이걸 나에게 줍니까?)

피어스는 대답을 고르는 듯했다.

“Because someone is making interoperability look like dependency.”
(누군가 상호운용성을 의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이준은 처음으로 표정을 조금 바꿨다.

그 문장은 중요했다.

상호운용성을 의존처럼 보이게 만든다.

워싱턴의 매파는 한국이 모든 열쇠를 가질 준비가 되었는지 물었다.
베이징은 한국이 외부 군사결정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 방산기업 관계자는 누군가 상호운용성을 의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단어를 놓고 세 방향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이준은 물었다.

“Someone?”
(누군가?)

피어스는 고개를 저었다.

“I don't know who. But I know what they're doing.”
(누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Convenient.”
(편리한 말이군요.)

“True.”
(사실입니다.)

“Also convenient.”
(역시 편리하고요.)

피어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Mr. Lee, if Korean systems fail to interoperate with U.S. systems, Washington will call Seoul unready. If they interoperate too deeply, Beijing will call Seoul dependent. Either way, your president loses the narrative.”
(리 선생, 한국 시스템이 미국 시스템과 상호운용되지 못하면 워싱턴은 서울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할 겁니다. 반대로 너무 깊게 상호운용되면 베이징은 서울이 의존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어느 쪽이든 당신들의 대통령은 서사를 잃습니다.)

강이준은 그 문장을 조용히 들었다.

이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은 맞았다.

피어스는 봉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Look at H-Line Tech.”
(에이치라인 테크를 보십시오.)

강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H-Line.”
(에이치라인.)

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They are small enough to be ignored and connected enough to be useful.”
(그들은 무시당할 만큼 작고, 쓸모 있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이준은 봉투를 집지 않았다.

“That's a good line.”
(좋은 문장이군요.)

피어스는 피곤하게 웃었다.

“In Washington, that's a survival skill.”
(워싱턴에서는 그게 생존 기술입니다.)

“Or a disease.”
(아니면 병이거나요.)

피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바 입구 쪽에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강이준은 그를 보지 않는 척했다.
그러나 유리잔에 비친 모습은 봤다.

회색 양복.

덜레스 공항 비즈니스석에서 봤던 남자.

강이준은 천천히 봉투를 손끝으로 눌렀다.

피어스도 그 변화를 느꼈다.

“Problem?”
(문제 있습니까?)

강이준은 낮게 말했다.

“Your friends are punctual.”
(당신 친구들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군요.)

피어스의 얼굴이 굳었다.

“He's not mine.”
(내 쪽 사람이 아닙니다.)

“Everyone says that.”
(다들 그렇게 말하죠.)

회색 양복의 남자는 바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도윤은 뒤쪽에서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코트 단추를 풀었다. 뛰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워싱턴은 사람을 빠르게 교육했다.

강이준은 봉투를 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피어스에게 말했다.

“Bathroom?”
(화장실은요?)

피어스는 눈을 깜빡였다.

“What?”
(뭐라고요?)

“Where is it?”
(어디입니까?)

피어스가 짧게 답했다.

“Back left.”
(뒤쪽 왼편입니다.)

강이준은 일어났다.

한도윤이 낮게 말했다.

“또 화장실입니까?”

강이준은 대답했다.

“국제정세가 원래 화장실에서 많이 풀립니다.”

“그건 어떤 학파입니까?”

“현장학파요.”

두 사람은 바 뒤쪽으로 움직였다.

회색 양복도 방향을 바꿨다.

강이준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화장실 앞 복도는 좁았다.
왼쪽에는 비상구 표시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직원 전용 문이 있었다.
강이준은 비상구로 가지 않았다.

대신 직원 전용 문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한도윤을 먼저 밀어 넣었다.

“이번엔 문이 착하네.”

한도윤이 낮게 말했다.

“이런 걸 기뻐하는 제가 싫습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회색 양복의 손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강이준은 문을 다시 밀었다.

손가락이 끼였다.

남자가 낮게 신음했다.

강이준은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국 문이 무겁네요.”

그리고 문을 열어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짧은 몸싸움이었다.

남자는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좁은 문틈에서 손목이 잡히면 선택지가 줄어든다. 강이준은 그의 팔을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어깨를 문틀에 부딪히게 했다. 남자의 숨이 짧게 끊겼다. 한도윤은 뒤에서 비켜서려다 쓰레기통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저는 진짜 이런 일에 재능이 없습니다.”

“보입니다.”

강이준은 남자의 손목을 꺾어 바닥에 눌렀다.

“성함이?”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즘 다들 이름을 아끼시네.”

그때 남자의 다른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강이준은 기다리지 않았다.

무릎으로 손목을 눌렀다.

작은 금속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칼은 아니었다.
소형 데이터 삭제 장치처럼 보였다.

한도윤이 숨을 삼켰다.

“저게 뭡니까?”

강이준은 남자를 눌러둔 채 말했다.

“워싱턴식 지우개요.”

남자는 갑자기 몸을 틀었다.

예상보다 힘이 셌다.
강이준의 팔이 밀렸다. 남자는 몸을 빼내 직원 통로 안쪽으로 뛰었다. 강이준은 바로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금속 장치를 발로 밟았다.

작은 파열음이 났다.

한도윤이 놀라 물었다.

“왜 부숴요?”

“저게 우리 걸 지우기 전에요.”

“증거 아닙니까?”

“미끼일 수도 있고요.”

“요즘은 세상 모든 게 미끼군요.”

“이제 적응하시네요.”

강이준은 통로 안쪽을 보았다.

회색 양복은 이미 사라졌다.

대신 바닥에 작은 카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강이준은 장갑을 끼고 집었다.

카드에는 회사 로고가 있었다.

H-LINE TECH
(에이치라인 테크)

그리고 뒤쪽에는 손으로 쓴 짧은 문장이 있었다.

Failure sells faster than readiness.
(실패는 준비태세보다 더 빨리 팔린다.)

강이준은 카드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세종 벙커에서 그 문장이 도착했을 때, 하현민은 창원 상황 보고를 받고 있었다.

Failure sells faster than readiness.
(실패는 준비태세보다 더 빨리 팔린다.)

그 문장은 방산의 밤에 어울렸다.

실패는 돈이 된다.
준비태세는 유지비가 들지만, 실패는 긴급 예산을 부른다.
준비됐다는 말은 계약을 끝내지만,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은 새로운 계약을 만든다.
위협은 예산을 부르고, 의심은 검증을 부르고, 검증은 컨설팅을 부르고, 컨설팅은 또 다른 조건을 만든다.

오세규 장관은 문장을 읽고 얼굴을 굳혔다.

“이건 너무 노골적입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그래서 미끼일 수 있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미끼라도 냄새가 맞습니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넥스브릿지.
에이치라인 테크.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실패 시뮬레이션.
K-OPCON.
창원 침입.
워싱턴 방산 관계자.
그리고 이제, 실패는 준비태세보다 더 빨리 팔린다는 문장.

그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봐야 할 건 방산기업 전체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실패를 팔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윤태석이 펜을 들었다.

하현민은 이어 말했다.

“전작권 전환이 성공하면 줄어드는 시장이 있고, 실패하거나 지연되면 커지는 시장이 있습니다. 추가 검증, 상호운용성 보강, 미국산 체계 연동, 컨설팅, 인증, 긴급 패치, 보안 점검.”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실패 산업.”

하현민은 그 말을 들었다.

실패 산업.

그 표현은 불쾌했지만 정확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화면의 문장을 다시 보았다.

Failure sells faster than readiness.
(실패는 준비태세보다 더 빨리 팔린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준비됐다는 사실보다,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돈을 법니다.”

백승조의 얼굴은 차가웠다.

“군은 그런 장사에 끌려가면 안 됩니다.”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현민은 답했다.

그때 유서진 소령이 새 분석 결과를 올렸다.

“대통령님, 세종 코어가 에이치라인 테크와 넥스브릿지, 그리고 일부 방산 수출 패키지 검증 이력 사이의 접점을 정리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H-LINE TECH / CROSS-LINK ANALYSIS
(에이치라인 테크 / 교차 연결 분석)

  1. 넥스브릿지 검증 패키지 현장 설치 지원
  2. 창원 K9 수출형 상호운용성 테스트 보조
  3. 사천 항공전자 모의 위협 라이브러리 장비 반입 이력
  4. 대전 국방연구시설 비상주 유지보수 계약 참여
  5. 워싱턴 기술표준 세미나 후원 명단에 간접 등장
  6. H-Line Marine Logistics와 장비 운송 하청망 일부 중첩

사천.

하현민의 시선이 그 단어에서 멈췄다.

백승조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공군 쪽으로 번집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KF-21.”

회의실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KF-21은 아직 직접 공격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이 연결망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전차와 자주포는 땅의 신뢰다.
전투기는 하늘의 자존심이다.

한국 방산의 밤은 이제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하현민은 말했다.

“사천 확인을 앞당깁니다.”

백승조가 바로 답했다.

“공군작전사령부와 관련 기관에 비공개 점검 지시하겠습니다.”

“비공개로 하되, 현장에는 명확히 말하세요. 단순 감사가 아니라 데이터 경로 점검이라고.”

“알겠습니다.”

윤태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통령님, 사천까지 움직이면 방산업계에 소문이 빠르게 돌 겁니다.”

“이미 돌고 있을 겁니다.”

하현민은 답했다.

“소문보다 우리가 늦으면 안 됩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넥스브릿지 차민규 대표, 비공개로 세종에 부르세요.”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소환입니까?”

“아닙니다.”

하현민은 말했다.

“아직은 질문입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질문이 제일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대통령이 직접 묻겠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통령이 민간 방산 AI 협력사 대표를 직접 만난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의 말투와 눈동자와 침묵을 봐야 할 때였다. 보고서는 필요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을 직접 봐야 한다. 특히 그 사람이 자신이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믿고 있을 때는 더더욱.

하현민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돈의 냄새는 더 선명해졌다.


차민규는 세종행 차량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넥스브릿지 대표로서 그는 여러 번 정부청사에 간 적이 있었다. 국방부, 과기부, 방사청, 국회 의원회관, 각종 포럼과 비공개 간담회. 그는 정부 건물의 냄새를 알았다. 오래된 카펫, 커피, 복사기 열기, 그리고 책임을 서로 미루는 사람들의 숨소리.

하지만 세종 벙커는 달랐다.

그곳은 아직 가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초대받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차량 창밖으로 세종의 밤이 지나갔다. 도시는 서울보다 어두웠고, 더 넓었다. 정부청사의 긴 건물들이 낮게 누워 있었고, 도로는 정리되어 있었다. 차민규는 문득 자신이 만든 회사의 로고를 떠올렸다.

넥스브릿지.

새로운 다리.

그 이름은 원래 좋은 뜻이었다.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고, 한국 국방 AI가 외국 체계와 안전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처음에는.

하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다리는 많아졌다.
다리가 많아지자 통행료가 생겼고, 통행료가 생기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투자자, 로펌, 전직 관료, 군 출신 자문위원, 해외 컨설턴트, 인증기관, 수출 브로커.

그들은 모두 연결을 말했다.

그러나 차민규는 이제 묻고 싶었다.

우리는 무엇을 연결했는가.

그리고 누구를 들여보냈는가.

차량이 지하 진입로로 내려갔다.

휴대폰은 이미 회수되어 있었다.
그는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안내 요원은 정중했다. 지나치게 정중했다. 신원 확인, 출입 절차, 보안 설명. 모든 것이 차분했다. 차분한 절차는 사람을 더 겁나게 한다. 화를 내는 사람은 예측할 수 있지만, 차분한 조직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차민규는 작은 회의실로 안내됐다.

그곳에는 하현민 대통령이 있었다.

차민규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대통령을 여러 행사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연설하는 모습, 방산전시회에서 전투기 모형 앞에 서 있는 모습, AI 전략회의에서 질문하는 모습. 그러나 이런 방에서 보는 대통령은 달랐다. 하현민은 화려하지 않았다. 피곤해 보였고, 셔츠 소매는 조금 접혀 있었으며,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보고서가 아니라 얇은 문장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하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차민규 대표님.”

“예, 대통령님.”

차민규의 목소리가 조금 말랐다.

하현민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차민규는 앉았다.

방 안에는 윤태석, 오세규, 백승조, 유서진이 있었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오히려 너무 많지 않아서 더 무거웠다.

하현민은 바로 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차민규를 보았다.

“넥스브릿지라는 이름은 대표님이 지으셨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차민규는 잠시 멈췄다가 답했다.

“예.”

“왜 그렇게 지었습니까.”

차민규는 손가락을 맞잡았다.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한국 국방체계가 고립된 시스템이 아니라, 동맹과 수출시장, 민간 기술과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였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뜻입니다.”

차민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현민은 테이블 위의 종이 한 장을 밀었다.

거기에는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Make it look like failure.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차민규의 얼굴에서 피가 조금 빠졌다.

하현민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 문장, 아십니까.”

차민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을 아느냐는 질문은 어렵다.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비슷한 표현은 수없이 많다. 실패 시나리오. 장애 모의. 실패처럼 보이는 상태. 테스트 케이스.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은 그런 문장과 달랐다. 너무 노골적이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차민규가 말했다.

백승조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하현민은 차분히 물었다.

“정확히는 모른다는 건, 비슷한 표현은 본 적이 있다는 뜻입니까.”

차민규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미 늦었다.

“테스트 문맥에서는 비슷한 표현을 씁니다.”

“어떤 테스트입니까.”

“시스템이 실패했을 때를 가정한 UI나 로그 재현 테스트입니다. 실제로 실패를 유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 상황을 모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유서진이 조용히 말했다.

“그 경우 보통 ‘simulate failure condition’이나 ‘failure state reproduction’ 같은 표현을 씁니다.”
(그 경우 보통 ‘실패 조건 모의’나 ‘실패 상태 재현’ 같은 표현을 씁니다.)

차민규는 그녀를 보았다.

유서진의 표정은 차가웠다.

하현민은 다시 종이를 밀었다.

이번에는 다른 문장이었다.

FAIL-SIM / K-OPCON
(실패 시뮬레이션 / 한국 전작권)

차민규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이번에는 숨길 수 없었다.

하현민은 낮게 물었다.

“이건 아십니까.”

차민규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실의 공기는 차가웠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프로젝트명은 아닙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그럼 뭡니까.”

“내부 테스트 폴더명일 수는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확인해야 합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참 편리한 대답이군.”

차민규는 그를 보았다.

“장군님, 제가 지금 거짓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확인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

“우리 회사는 실패를 팔려고 만든 회사가 아닙니다.”

하현민은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차민규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억울함도 있었다. 분노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는, 자신이 만든 다리가 무언가 다른 용도로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하현민은 그 감정을 알아보았다.

개발자들은 자신이 만든 시스템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쓰일 때, 이상한 죄책감을 느낀다. 법적으로 책임이 없어도, 마음속 어딘가가 먼저 무너진다.

“대표님.”

하현민이 말했다.

“저는 지금 넥스브릿지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차민규는 그를 보았다.

“그럼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다리를 지은 사람이니까요.”

차민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현민은 이어 말했다.

“성이 공격받으면 성주에게 묻습니다. 다리가 공격받으면 다리를 지은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 다리를 누가 지나갔는지, 어떤 차량이 허가받았는지, 어느 난간이 약한지, 어느 표지판이 바뀌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대표님 회사가 만든 연결부가 누군가에게 이용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겁니다.”

차민규는 시선을 내렸다.

그는 한동안 테이블 위의 문장을 보았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그 문장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회사도, 세종 코어도, 한국군도, 전작권도.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차민규가 낮게 말했다.

“조한결은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윤태석이 물었다.

“그럼 누구 사람입니까.”

차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로펌 자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워싱턴 표준화 포럼 쪽에서 연결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강이준이 워싱턴에서 보낸 보고와 일치했다.

하현민은 말했다.

“누가 소개했습니까.”

차민규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이 나오자 오세규 장관의 얼굴이 굳었다.

백승조도 고개를 들었다.

윤태석은 곧바로 메모를 확인했다.

유서진은 화면을 조작했다.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전직 공군 준장.
현재 방산전략 자문위원.
워싱턴 Friends of the Alliance 참석자 명단에도 있던 인물.
KF-21 관련 자문회의에도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는 사람.

하현민은 그 이름을 화면에 띄우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은 너무 이르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그분이 조한결을 소개했습니까.”

차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말로요.”

차민규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미 상호운용성 인증 쪽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전작권 전환 검증 이후 수출 패키지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수출 패키지.”

“예.”

“실패하면 더 커지는 시장이군요.”

차민규는 하현민을 보았다.

그 말은 공격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현민의 표정에는 비난보다 피로가 있었다.

차민규는 낮게 말했다.

“대통령님, 방산기업은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백승조가 바로 말했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차민규는 백승조를 보았다.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백승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현민이 말했다.

“믿고 싶습니다.”

차민규의 얼굴이 굳었다.

믿는다는 말보다 믿고 싶다는 말이 더 무거울 때가 있다.

하현민은 말했다.

“대표님이 협조해야 그 말을 사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차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하겠습니다.”

“전부요.”

“전부.”

“법무팀이 싫어할 겁니다.”

차민규가 피곤하게 웃었다.

“이미 싫어하고 있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외교관, 법무팀, 장군들. 요즘 다들 싫어하는 일이 많군요.”

백승조가 말했다.

“장군들은 원래 많습니다.”

차민규는 그 농담에 웃지 못했다.

하현민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대표님.”

“예.”

“지금부터 넥스브릿지는 두 가지 중 하나가 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한민국 전작권 전환을 흔든 통로.”

그는 잠시 멈췄다.

“또는 그 통로를 스스로 밝혀낸 회사.”

차민규는 고개를 들었다.

하현민은 그를 보며 말했다.

“선택하십시오.”

차민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세종 벙커의 밤은 다시 깊어졌다.

차민규는 별도 보안실로 이동했고, 넥스브릿지 자료 제공 절차가 시작됐다. 창원 공장에서는 침입자들의 동선이 일부 확인됐고, 에이치라인 테크의 현장 출입기록은 국방부와 국정원 공동팀이 확보하고 있었다. 에이치라인 마린 로지스틱스의 장비 운송 기록도 별도 확인 대상으로 올라갔다. 사천 쪽에는 조용한 점검 지시가 내려갔다. 대전의 연구시설도 외부 검증 패키지 반입 이력을 다시 보고 있었다.

지도 위의 선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하현민은 이제 조금 더 분명히 보고 있었다.

실패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의 시장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 시장에서는 불안이 팔리고, 의심이 팔리고, 검증이 팔리고, 지연이 팔렸다. 준비됐다는 말보다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많은 예산을 불렀고, 독립할 수 있다는 말보다 아직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 더 많은 계약을 만들었다.

그것이 이 밤의 어두운 장부였다.

그러나 같은 밤, 창원 공장의 박준호는 로그를 보존했다.
판교의 어떤 개발자는 몰래 지우려던 파일을 멈췄다.
사천의 한 정비장교는 공통 위협 라이브러리 점검표를 다시 열었다.
대전의 연구원은 오래된 반입기록을 꺼냈다.
워싱턴의 강이준은 에이치라인 테크의 이름을 주머니에 넣고 다음 사람을 찾으러 나섰다.

방산은 돈으로 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다리는 무너질 수도 있고, 다시 놓일 수도 있었다.

하현민은 세종 코어의 상태 표시를 보았다.

DEGRADED CONFIDENCE / HUMAN OVERSIGHT REQUIRED
(신뢰도 저하 / 인간 감독 필요)

그 문장은 이제 익숙해지고 있었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 문장이었지만, 그래도 위로가 됐다.

기계는 말했다.

인간이 필요하다고.

하현민은 낮게 말했다.

“좋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세종 코어에게인지, 자기 자신에게인지, 아니면 이 나라의 피곤한 사람들에게인지.

“그럼 사람이 해보자.”

세종 벙커의 화면 위로 새로운 분류가 올라왔다.

DEF-CHAIN / INTEROP TRACE
(방산 연결망 / 상호운용성 추적)

핵심 축: NEXBRIDGE - H-LINE - INTEROP-REFSET-4
(핵심 축: 넥스브릿지 - 에이치라인 - 상호운용성 참조세트 4)

위험: 실패 위장을 통한 전작권 검증 신뢰성 훼손

다음 확인 대상: 사천 항공전자 모의 위협 라이브러리

하현민은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사천.

하늘의 문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은 이미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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