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1부 6화

이경규·2026년 6월 2일

전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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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조건

6화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실패는 때때로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도 충분했다.

정확히 말하면,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이 더 위험할 때가 있었다.

실패는 원인을 찾으면 된다.
부서진 장비를 고치고, 잘못된 절차를 수정하고, 책임자를 문책하면 된다. 고통스럽고 정치적으로 비싸지만, 실패에는 적어도 실체가 있다.

실패처럼 보이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안개처럼 번진다.
누구도 정확히 무엇이 망가졌는지 말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어딘가 망가졌다고 느낀다.
장비는 정상이고, 보고서는 완성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절차대로 움직였는데도 결과는 어딘가 어긋난다.

그리고 그 어긋남이 몇 번 반복되면, 조직은 시스템보다 서로를 먼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적이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조직이 스스로 무너진다.

세종 벙커의 회의실에는 그 문장이 화면 한가운데 떠 있었다.

Make it look like failure.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문장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오히려 오래 남았다.

그 문장은 워싱턴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베이징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평양의 감청자료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경로를 역추적하던 중, 민간 기술검증 패키지의 임시 주석 파일에서 발견됐다. 파일은 삭제되어 있었고, 복구된 흔적은 조각에 가까웠다. 원래 문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성자도 없었고, 생성 시각도 일부 손상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장 하나는 살아남았다.

Make it look like failure.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하현민 대통령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문장은 명령처럼 보였고, 메모처럼도 보였다.
누군가의 작전 지시일 수도 있었고, 단순한 내부 테스트 메모일 수도 있었다. 혹은 그들이 그렇게 믿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남겨둔 미끼일 수도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미끼일 수 있었다.

그 점이 가장 불쾌했다.

윤태석 국가안보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문장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기술검증 패키지 안의 주석이라면 테스트 시나리오 설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세규 국방부 장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테스트 시나리오에 저런 말을 씁니까?”

사이버작전사령부 파견 유서진 소령이 답했다.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패 상황을 모의하는 내부 테스트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백승조 합참의장이 물었다.

“쉽게 말하면?”

유서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정상적인 맥락이면 ‘시스템 장애처럼 보이게 구성한 테스트’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맥락이면…… 실제 시스템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도록 데이터를 구성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백승조는 팔짱을 끼고 화면을 보았다.

“말장난 같군.”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전쟁은 그런 말장난으로 시작될 때가 있습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화면 옆에 새로 정리된 세 개의 사건을 보았다.

서해 11분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오염 가능성
동맹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 불확실성

세 사건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서해의 바다, 세종의 지하, 워싱턴의 식탁, 그리고 이제는 민간 기술검증 패키지. 그러나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한국군이 실제로 실패했는가.

아직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했다.

누가 한국군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가.

하현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문장이 진짜 지시라고 가정하면, 목표는 시스템 파괴가 아닙니다.”

윤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판 손상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전작권 전환 조건의 신뢰성을 흔드는 것.”

백승조가 짧게 정리했다.

“한국군 지휘능력 의심.”

하현민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종 코어 불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세종 코어는 도구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세종 코어는 이미 상징이 되어 있었다.

AI 대통령의 AI 국방.
한국형 통합전장판단체계.
전작권 전환 이후 한국군 독자 지휘능력의 핵심 보조체계.

세종 코어는 기술을 넘어 상징이 되어 있었다.

상징이 된 시스템은 기술적으로만 공격받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공격받고, 여론으로 공격받고, 농담으로 공격받고, 제목으로 공격받는다. 기술자는 로그를 보지만, 국민은 제목을 본다. 그리고 제목은 로그보다 빠르다.

하현민은 말했다.

“세종 코어를 망가뜨리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세종 코어가 맞는 판단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문장은 이미 여러 번 나왔지만, 이번에는 더 무겁게 들렸다.

유서진 소령은 화면의 주석 파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종 코어를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 코어를 운용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세종 코어는 추상적인 국가 AI가 아니었다. 밤새 로그를 보고, 이상값을 검토하고, 오류를 잡고, 설명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과 싸워온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시스템이 흔들린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공격이었다.

기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기계를 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

“대통령님.”

유서진이 말했다.

“문장 자체보다, 이 문장이 남아 있던 위치가 중요합니다.”

하현민이 고개를 들었다.

“말하세요.”

유서진은 화면을 넘겼다.

기술검증 패키지의 흐름이 추상화되어 나타났다. 실제 보안 정보와 세부 경로는 제거되어 있었지만, 구조는 보였다.

민간 협력사 검증 모듈.
방산 AI 상호운용성 테스트.
연합 데이터 교환 참조 포맷.
세종 코어 외부 검증 패키지.
국방부 전환준비단 검토.
합참 검증평가 라인 반영.

유서진은 손가락으로 가운데 노드를 가리켰다.

“이 패키지는 세종 코어의 본체에 직접 접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종 코어가 외부 데이터와 연동될 때 참조하는 검증 기준 일부를 제공합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다리군.”

“예.”

유서진이 답했다.

“성을 직접 공격한 게 아니라, 다리를 통과하는 차량의 번호판 인식 기준을 바꾼 것에 가깝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얼굴을 찡그렸다.

“더 쉽게 해봅시다.”

유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문은 그대로입니다. 경비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출입명부 양식이 조금 바뀐 겁니다.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도 정상 방문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백승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쉽군.”

오세규가 중얼거렸다.

“쉽긴 한데 기분은 더럽네요.”

하현민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패키지를 만든 협력사는 어디입니까.”

유서진은 대답하기 전에 윤태석을 보았다.
윤태석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 회사명이 떴다.

NEXBRIDGE SYSTEMS KOREA
(넥스브릿지 시스템즈 코리아)

하현민은 그 이름을 읽었다.

넥스브릿지.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읽었다.

요즘 기술기업들은 그런 이름을 좋아했다. 브릿지, 코어, 링크, 넥서스, 인사이트. 연결하는 척하는 이름들. 대개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연결하는지보다, 투자자들에게 무엇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일지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 이 이름은 거슬렸다.

“국내 회사입니까?”

윤태석이 답했다.

“국내 법인입니다. 판교에 본사가 있고, 일부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있습니다. 국방 AI 검증, 데이터 표준화, 연합 상호운용성 관련 컨설팅을 해왔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방산 대기업은 아니군요.”

“아닙니다. 중견 기술협력사입니다. 하지만 여러 대형 방산업체 프로젝트에 하청 또는 공동검증 형태로 들어가 있습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제일 귀찮은 위치군.”

그 말이 정확했다.

너무 크면 눈에 띈다.
너무 작으면 접근권한이 없다.
중간이 가장 위험하다. 모든 문을 직접 열 수는 없지만, 여러 문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크기. 책임은 작고, 접근은 넓은 위치.

하현민은 말했다.

“넥스브릿지의 전작권 전환 관련 계약과 인력, 외부 자문, 워싱턴 접점, 중국 자본 연계 여부까지 확인하세요.”

오세규 장관이 곧바로 말했다.

“국방부 감사관실과 방첩 라인 붙이겠습니다.”

“감사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하현민은 바로 말했다.

“일단은 데이터 경로 검증입니다. 회사 전체를 뒤집는 순간, 누군가는 숨어버립니다.”

윤태석이 받았다.

“비공개 기술검증 재확인 절차로 접근하겠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군 쪽 접촉자는 제가 조용히 확인하겠습니다.”

하현민은 백승조를 보았다.

“현직부터 봐야 합니다.”

백승조는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충분했다.


판교의 낮은 유리 건물들은 햇빛을 잘 반사했다.

서울과 세종의 정치적 공기, 용산과 계룡대의 군사적 무게와 달리 판교에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있었다. 회색 후드티, 스타트업 로고가 붙은 출입증, 전기차 충전소, 커피를 들고 뛰는 개발자들, 회의실 유리벽 너머의 화이트보드,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슬랙 메시지, 그리고 어디선가 늘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

이곳에서 국가안보는 군복을 입지 않았다.

후드티를 입고, 맥북을 들고, 스톡옵션을 계산했다.

넥스브릿지 시스템즈 코리아의 사무실은 판교의 한 빌딩 17층에 있었다. 안내판에는 회사 로고가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파란색과 회색이 섞인 다리 모양의 심볼. 접수 데스크에는 젊은 직원이 앉아 있었고, 뒤쪽 벽에는 회사의 비전 문구가 적혀 있었다.

Connecting Trusted Systems.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들을 연결하다.)

그 문구를 본 국정원 기술보안팀장은 잠시 멈췄다.

그는 이런 문구를 싫어했다.
너무 좋은 말이었다.

좋은 말이 너무 많이 붙은 회사는 대개 내부 문서가 복잡하다.

팀장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국방부 기술검증 재확인팀이라는 이름의 임시 합동점검반 소속으로 들어왔다. 서류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다. 국가기관의 많은 일들이 그렇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의 전부도 아니다.

접수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방문 목적 확인 부탁드립니다.”

팀장은 준비된 공문을 내밀었다.

“국방부 상호운용성 데이터 검증 관련 재확인입니다.”

직원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내부 전화를 걸었다.

팀장은 사무실 안쪽을 보았다. 유리벽 너머 회의실 하나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장 차림의 임원 한 명, 개발자로 보이는 두 명, 그리고 외부인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 외부인처럼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개발자처럼 편하지 않았고, 임원처럼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방문객처럼 앉아 있었지만,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이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권한이 있는 방문객.

팀장은 그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잠시 뒤, 넥스브릿지의 보안담당 이사가 나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팀장도 웃었다.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오전에 연락드렸습니다.”

“그게 갑작스러운 겁니다.”

“국가안보는 원래 예고편이 짧습니다.”

보안담당 이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팀장은 공문을 다시 정리했다.

“검증 패키지 제출 이력, 승인 로그, 외부 검토자 명단, 빌드 해시값, 그리고 최근 6개월간 전작권 전환 관련 데이터셋 접근기록을 확인하겠습니다.”

이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 정도면 정식 감사 수준입니다.”

“아닙니다.”

팀장은 차분하게 말했다.

“정식 감사면 제가 더 불친절합니다.”

옆에 있던 젊은 조사관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이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법무팀을 부르겠습니다.”

“부르십시오.”

팀장은 유리벽 너머 회의실을 다시 보았다.

외부인처럼 보이는 남자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

팀장은 무전기를 만지지 않았다. 이 건물 안에서 갑자기 움직이면 소문이 난다. 대신 그는 옆의 조사관에게 아주 낮게 말했다.

“17층 남쪽 엘리베이터.”

조사관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움직였다.

보안담당 이사가 그 눈치를 본 듯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팀장은 그를 보았다.

“아직은요.”

“아직은?”

“예.”

그는 웃지 않았다.

“아직은.”


워싱턴의 강이준은 판교 소식을 거의 동시에 받았다.

한도윤은 대사관 보안실 한쪽에서 노트북과 태블릿 두 대를 동시에 열어놓고 있었다. 방산기업 리셉션 참석자 명단, 로펌 등록자료, 의회 로비 공개자료, 싱크탱크 후원자 명단, 세미나 패널 약력. 정상적인 방법으로도 공개된 자료는 많았다. 문제는 그 자료들이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강이준은 벽에 기대서 그 명단을 보고 있었다.

“넥스브릿지.”

그가 말했다.

한도윤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나옵니다.”

“어디에.”

“여러 군데요. 직접 로비 등록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자문 계약, 기술표준 세미나 후원, 한미 방산 상호운용성 포럼, 그리고 몇몇 로펌의 하위 고객으로 연결됩니다.”

“워싱턴의 친구들하고는요.”

한도윤은 화면을 넘겼다.

“Friends of the Alliance 참석자 중 방산기업 전략담당 임원이 넥스브릿지의 미국 측 기술자문사와 같은 로펌을 씁니다.”

“그 정도는 흔합니까?”

“워싱턴에서는 너무 흔해서 문제입니다.”

“그럼 더러운 건지 평범한 건지 구분이 안 되겠네요.”

“대체로 둘 다입니다.”

강이준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좋은 도시네.”

한도윤이 다른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넥스브릿지의 초기 투자자 중 하나가 싱가포르 펀드인데, 그 펀드가 중국계 자본과 연결됐다는 의혹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확정된 건 아닙니다.”

“의혹은 보통 어디서 시작됩니까?”

“돈에서 시작해서 변호사에게 죽습니다.”

“오늘따라 변호사님이 시적이네요.”

“잠을 못 자면 사람이 변합니다.”

강이준은 화면을 보았다.

넥스브릿지.
상호운용성.
워싱턴 로펌.
싱가포르 펀드.
중국계 자본 의혹.
한국 국방 AI 검증 패키지.

다리였다.

성보다 다리가 더 복잡했다.

그때 대사관 보안담당관이 들어왔다.

“판교 현장팀에서 연락 왔습니다. 넥스브릿지 사무실에서 외부 방문자 한 명이 점검반 도착 직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강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잡았습니까?”

“아직입니다. 건물 내 CCTV 확인 중입니다.”

“얼굴은요.”

“부분 확보됐습니다.”

보안담당관은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는 남자의 측면 얼굴이 있었다.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이준은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보았다.

한도윤이 물었다.

“아는 얼굴입니까?”

강이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워싱턴 조지타운 클럽.
방 안쪽.
흰 머리 남자의 뒤편.
명함을 주고받던 사람들 사이.
잠깐 보였던 얼굴.

그는 화면의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봤습니다.”

한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서요.”

“친구들 식탁 근처.”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강이준은 태블릿을 확대했다.

화질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이 사람, 워싱턴에 있었습니다.”

보안담당관이 말했다.

“하지만 CCTV 시각은 한국 시간 오늘 오후입니다.”

“그러니까요.”

강이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워싱턴에 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거나, 같은 얼굴을 쓰는 사람이거나, 제가 피곤해서 미쳤거나.”

한도윤이 낮게 말했다.

“셋 중 뭐가 제일 가능성 높습니까?”

강이준은 짧게 답했다.

“안 좋은 순서대로 다요.”

그는 세종에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브릿지 판교 현장 이탈자, 워싱턴 Friends 모임 참석자와 유사. 동일인 여부 확인 필요. 출입국 기록·위장 신분·대리인 가능성 동시 확인.

잠시 뒤 세종에서 답이 왔다.

수신. 동일인일 경우 시간상 불가능. 영상·얼굴·동선 재검증.

강이준은 그 답을 보고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제일 싫다니까.”

한도윤이 물었다.

“왜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 보이면, 둘 중 하나거든요.”

“뭔데요.”

“우리가 시간을 잘못 봤거나, 사람을 잘못 봤거나.”

그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아니면 누군가 우리에게 둘 다 잘못 보게 만들었거나.”


판교 넥스브릿지 사무실의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외부인처럼 보이던 남자는 로비를 빠져나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뛰지 않았다. 뛰면 눈에 띈다. 대신 조금 빠르게 걸었다.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이 있었고, 다른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그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점심시간 특유의 어수선함이 있었다. 배달 오토바이가 들어왔다 나가고, 누군가 차 안에서 통화를 하고, 전기차 충전구역에는 차량 두 대가 꽂혀 있었다. 환풍기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남자는 검은색 세단 쪽으로 걸었다.

그 순간, 기둥 뒤에서 국정원 조사관이 나왔다.

“잠시만요.”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조사관이 다시 말했다.

“국방부 기술검증 재확인팀입니다. 신원 확인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했다.

그는 한국어로 말했다.

“저는 여기 직원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방문 목적 확인만 하면 됩니다.”

“변호사입니다.”

“어느 로펌입니까.”

남자는 짧게 웃었다.

“그건 제 의뢰인 정보입니다.”

조사관은 한 걸음 다가갔다.

“국가안보 관련 검증 자료에 접근한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변화는 아주 짧았다.
그러나 조사관은 보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당연히 실수는 아니었다.

조사관의 시선이 아주 잠깐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남자는 노트북 가방을 휘둘렀다. 조사관은 팔로 막았지만, 충격이 컸다. 남자는 바로 차 사이로 몸을 틀었다.

조사관이 무전을 눌렀다.

“지하 2층, 대상 도주.”

그 말이 끝나기 전, 남자는 세단이 아니라 옆의 흰색 승합차 쪽으로 뛰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운전석에는 누군가 이미 앉아 있었다.

조사관은 달렸다.

승합차 문이 닫혔다.

엔진음이 올라갔다.

주차장 안에서 차량이 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사람을 치기 쉽고, 기둥에 부딪히기 쉽고, CCTV에 너무 잘 찍힌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했다. 그만큼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승합차가 출구 쪽으로 튀어나갔다.

조사관은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번호판을 봤다.
그리고 바로 무전했다.

“번호 확인. 단, 위장 가능성 높음. 출구 차단 요청.”

그때 위층에서 다른 조사관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출구 차단 어렵습니다. 민간 차량 다수.”

지하주차장 출구 쪽에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승합차는 차단봉이 내려오기 전, 앞차와의 간격을 억지로 비집고 빠져나갔다. 차단봉이 뒤쪽 유리를 때렸다. 유리가 금이 갔다.

조사관은 주차장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는 화면이 검게 죽은 휴대폰을 보며 낮게 말했다.

“이건 선물이겠지.”

그는 주머니에서 차폐 파우치를 꺼냈다.

“오늘 다들 선물을 참 좋아하네.”


세종 벙커의 화면에 판교 지하주차장 영상이 올라왔다.

민감한 부분은 가려져 있었고, 차량 번호도 확정 전까지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상의 흐름은 분명했다. 넥스브릿지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외부 방문자. 지하주차장. 조사관과의 짧은 접촉. 도주. 버려진 휴대폰.

오세규 장관이 이마를 문질렀다.

“이제 진짜 사건이 됐군요.”

백승조가 말했다.

“처음부터 사건이었습니다.”

“아니요. 이제 언론에 새면 아무도 못 막는 사건이 됐다는 뜻입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아직은 막을 수 있습니다. 판교 현장팀이 일반 보안 점검으로 처리 중입니다.”

백승조가 그를 보았다.

“그런 말은 보통 30분 뒤에 틀립니다.”

유서진 소령이 새 자료를 띄웠다.

“버려진 휴대폰은 현재 격리 확보됐습니다. 전원을 켜지 않고 물리 분석으로 들어갑니다.”

하현민은 물었다.

“대상 신원은요.”

“확인 중입니다. 넥스브릿지 방문 기록상 이름은 조한결입니다. 로펌 소속 기술계약 자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신분증과 출입기록 모두 재검증이 필요합니다.”

워싱턴에서 강이준이 보낸 사진 비교 결과도 옆에 떴다.

워싱턴 Friends 모임 참석자와 판교 이탈자 얼굴 유사도: 63.8%
동일인 확정 불가
대리인 또는 유사 외형 인물 가능성 존재
영상 품질 한계

백승조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63.8이면 사람입니까, 숫자입니까.”

유서진이 답하려다가 멈췄다.

하현민이 대신 말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님까지 그러시면 저희는 뭘 믿습니까.”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고 절차를 믿어야 합니다.”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절차도 검증하면서.”

백승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하현민은 판교 영상을 다시 보았다.

도망친 남자.
버려진 휴대폰.
넥스브릿지.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오염 가능성.

이제 그림이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그 문장은 더 이상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다.

서해 11분은 한국군의 감시·지휘·연합조율이 흔들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워싱턴 보고서는 그 흔들림을 조건 문제로 번역했다.
베이징의 축하 전문은 전작권을 반미 프레임으로 밀었다.
세종 코어의 참조 데이터 오염은 AI 판단 자체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넥스브릿지의 검증 패키지는 그 모든 것을 정상 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누군가는 한국을 실패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면 됐다.

하현민은 낮게 말했다.

“이제 이 사건을 다르게 봐야 합니다.”

윤태석이 펜을 들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하현민은 화면의 영어 문장을 다시 보았다.

Make it look like failure.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실패 위장.”

윤태석이 받아 적으려다 멈췄다.

“실패 위장.”

“네.”

하현민은 말했다.

“실패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외형을 만드는 작전입니다.”

백승조가 조용히 말했다.

“군사적으로는 더럽게 효과적이군요.”

“네.”

하현민은 인정했다.

“그래서 더 빨리 잡아야 합니다.”

그때 윤태석의 단말기가 울렸다.

그는 확인한 뒤 얼굴을 굳혔다.

“대통령님.”

“말하세요.”

“언론에 일부 흘러갔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욕을 삼켰다.

“무슨 내용입니까.”

윤태석은 화면을 띄웠다.

온라인 매체의 속보 제목이었다.

세종 코어 검증 데이터 오류 의혹…전작권 전환 검증 신뢰성 흔들리나

회의실 안이 얼어붙었다.

기사 본문은 짧았다.
그러나 제목은 충분했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유서진의 얼굴이 굳었다.
오세규 장관은 입술을 깨물었고, 윤태석은 곧바로 대응 문안을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백승조는 아무 말 없이 기사 제목만 보고 있었다.

하현민은 천천히 말했다.

“빠르군요.”

윤태석이 말했다.

“판교 쪽에서 샌 것 같습니다.”

오세규가 말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거나요.”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목은 너무 정확했다.

세종 코어.
검증 데이터 오류.
전작권 전환 검증 신뢰성.
흔들리나.

누군가 사건의 본질을 이미 제목으로 준비해두고 있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시작됐습니다.”

백승조가 물었다.

“공식 대응합니까.”

“합니다.”

“어떻게요.”

하현민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숨기면 의심이 커진다.
너무 많이 말하면 보안이 무너진다.
방어적으로 말하면 프레임에 들어간다.
공격적으로 말하면 정치 논쟁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세종 코어를 성역처럼 감싸면 안 된다.

“정부는 세종 코어 관련 일부 검증 데이터의 이상 가능성을 확인하고, 독립 검증 절차에 착수했다.”

윤태석이 빠르게 받아 적었다.

하현민은 이어 말했다.

“전작권 전환 검증은 특정 AI 시스템 하나에 의존하지 않으며, 군 원자료, 각 군 독립 평가, 연합 자료 대조, 민간 데이터 검증을 병행한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이상 가능성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합니다.”

하현민의 대답은 짧았다.

브리핑룸이 조용해졌다.

“대통령님, 정치적으로 부담이 큽니다.”

“감추는 쪽이 더 큽니다.”

“야당과 언론이 AI 국방 실패라고 몰고 갈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세요.”

하현민은 화면의 제목을 보았다.

“정부는 AI를 맹신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 가능성을 확인했고, AI를 성역화하지 않기 때문에 검증 절차를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설명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세종 코어가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감독과 독립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백승조는 하현민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이전과 달랐다. 이번 침묵에는 반대가 없었다.

유서진 소령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정부가 이상 가능성을 인정하면 세종 코어는 공격받을 것이다. 자신들도 공격받을 것이다. 하지만 숨기면 끝이었다.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순간, 시스템은 이미 쓸모를 잃는다.

하현민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윤태석이 고개를 들었다.

“세종 코어는 명령하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안보 판단은 헌법과 민주적 통제 아래 인간 지휘체계가 책임진다.”

그 문장은 회의실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그들이 그렇게 설계했다면, 답은 하나였다.

실패를 숨기는 정부처럼 보이지 않는 것.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우기지 않습니다.”

그는 방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는 실패인지 아닌지 확인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판교의 넥스브릿지 사무실에서는 점심시간이 사라졌다.

직원들은 자리로 돌아갔지만 아무도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 메신저 알림이 계속 울렸고, 일부는 휴대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다. 세종 코어 검증 데이터 오류 의혹. 전작권 검증 신뢰성. 국방 AI. 정부 대응 예정.

개발자 하나가 옆자리 동료에게 낮게 말했다.

“우리 회사 이름은 안 나왔지?”

동료가 화면을 보며 답했다.

“아직.”

“아직이라는 말 진짜 싫다.”

“나도.”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안에서는 넥스브릿지 임원들이 모여 있었다.

대표이사 차민규는 마른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원래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말이 빠르고, 숫자에 강하고, 투자자 앞에서는 자신감 있게 웃을 줄 알았다. 국방 쪽 일을 시작한 뒤로는 웃는 횟수가 줄었지만, 회사는 커졌다. 상호운용성, 검증 자동화, AI 신뢰성 평가. 그런 말들은 시장에서 잘 팔렸다. 특히 한국군이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하는 시대에는 더 잘 팔렸다.

전작권 전환은 차민규에게 국가적 과제이자 사업 기회였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혹은 그렇게 믿는 편이 편했다.

보안담당 이사가 말했다.

“대표님, 점검반이 접근기록 전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차민규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법무 검토 없이 넘기면 안 됩니다.”

“국방부 공문입니다.”

“공문에도 범위가 있습니다.”

“지금 그 범위를 따질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차민규는 그를 보았다.

“그래서 더 따져야 합니다. 이런 때 급하게 넘기면 나중에 우리가 다 뒤집어씁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회사 대표로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른 두려움도 있었다. 차민규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대표님, 조한결 자문위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차민규의 손가락이 멈췄다.

“휴대폰은?”

“꺼져 있습니다.”

“로펌은 뭐래.”

“오늘 넥스브릿지 방문 일정은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보안담당 이사가 낮게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 이름으로 들어온 겁니까.”

비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민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출입기록 가져와.”

“점검반이 이미 확보했습니다.”

“사본.”

“예.”

비서가 나간 뒤, 차민규는 창밖을 보았다.

판교의 빌딩들은 평온했다. 아래 도로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들이 걷는 이 거리 위에서, 국가의 AI 전장판단체계와 전작권 전환 조건과 미국의 보고서와 중국의 축하 전문이 한데 엉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차민규는 작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검증 툴을 만든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가 전쟁을 만든 게 아니야.”

보안담당 이사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대개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워싱턴의 흰 머리 남자는 한국 속보를 보고 있었다.

세종 코어 검증 데이터 오류 의혹…전작권 전환 검증 신뢰성 흔들리나

그는 제목을 읽고도 웃지 않았다.

비서가 물었다.

“원하던 방향입니까?”

그는 잠시 침묵했다.

“너무 빠르다.”

비서는 그 말을 이미 한 번 들었다.

네 번째 조건이 너무 일찍 이름을 가졌을 때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한국 쪽에서 내부 확인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하현민은 숨기지 않을 거다.”

흰 머리 남자는 말했다.

“그는 개발자다. 버그를 숨기는 순간 더 큰 장애가 난다는 걸 안다.”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히려 불리합니까?”

“아직 모른다.”

그는 화면을 보았다.

“그가 방어적으로 움직이면 우리가 이긴다. 세종 코어를 감싸고, 언론을 탓하고, 미국 보고서를 공격하고, 중국 프레임을 반박하느라 자기 말을 잃으면 된다.”

“그 반대라면요.”

“그가 먼저 결함 가능성을 인정하고, 독립 검증을 말하고, AI는 명령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다시 세우면……”

그는 말을 멈췄다.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흰 머리 남자는 창밖을 보았다.

워싱턴의 하늘은 맑았다.

“그러면 그는 강해진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실패를 숨기지 않는 정부는 공격하기 까다롭다.”

그는 다시 한국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모든 정부가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그는 파일 하나를 열었다.

제목은 짧았다.

ROK Domestic Vulnerability Matrix
(대한민국 내부 취약성 매트릭스)

그 안에는 한국 정치권과 언론, 방산업계, 전직 군 인사, 기술협력사, 온라인 여론 흐름이 한 장의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한 항목에 시선을 멈췄다.

Defense Industrial Anxiety
(방산 산업 불안)

방산업계가 흔들리면 전작권 논의도 흔들린다.
전작권 전환은 한국 방산의 자부심과 연결되어 있었고, 동시에 방산 이권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세종 코어가 흔들리고, 방산 AI 검증 라인이 의심받고, K-방산 수출 신뢰성에 작은 흠집이 생기면, 정부는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떠안게 된다.

안보와 산업.

둘 중 하나만 흔들어도 충분한데, 둘을 같이 흔들면 더 좋다.

비서가 물었다.

“다음 단계는?”

흰 머리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지 않습니까?”

“지금 움직이면 보인다.”

그는 파일을 닫았다.

“한국 안에서 움직이게 둬라. 언론, 국회, 방산업계, 전직 장군들. 그들이 알아서 질문하게 만들어라.”

“어떤 질문입니까?”

흰 머리 남자는 낮게 말했다.

“하현민의 AI 국방은 믿을 수 있는가.”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국은 정말 자기 전쟁을 스스로 지휘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 문장은 다시 돌아왔다.

처음부터 그 문장이었다.


세종 벙커의 공식 대응문은 오후 늦게 나갔다.

문장은 짧고 건조했다.

정부는 세종 코어 관련 일부 검증 데이터의 이상 가능성을 확인하고, 독립 검증 절차에 착수했다. 전작권 전환 검증은 특정 AI 시스템 하나에 의존하지 않으며, 군 원자료, 각 군 독립 평가, 연합 자료 대조, 민간 데이터 검증을 병행한다. 세종 코어는 명령하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안보 판단은 헌법과 민주적 통제 아래 인간 지휘체계가 책임진다.

기자들은 곧바로 제목을 뽑았다.

정부, 세종 코어 데이터 이상 가능성 인정
하현민 “AI가 명령하지 않는다”…국방 AI 논란 정면돌파
전작권 검증, AI 의존도 낮춰 재검증
야권 “AI 국방 실패 인정한 것” 공세 예고

하현민은 기사 제목들을 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좋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숨기는 정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종 벙커의 작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윤태석, 오세규, 백승조, 유서진만 남아 있었다. 화면에는 넥스브릿지,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 판교 도주자, 워싱턴 연결 가능성, 중국 프레임 확산 계정군이 정리되어 있었다.

백승조가 말했다.

“대통령님, 이제 내부가 흔들릴 겁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세종 코어 운용팀, 전환준비단, 합참 검증평가 라인, 민간 협력사. 서로 책임을 미루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묻는 순서를 늦춥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시죠.”

“아닙니다.”

하현민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책임자를 찾는 척하다가 원인을 놓치면, 그게 상대가 원하는 겁니다. 누군가 한 명을 잡고 끝내기에는 구조가 너무 넓습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실패 위장.”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처럼 보이게 하는 작전이라면, 우리도 누가 실패했는지를 서둘러 정하면 안 됩니다.”

유서진 소령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현민은 그녀를 보았다.

“유 소령.”

“예, 대통령님.”

“세종 코어 운용팀에 전하세요. 지금부터 그들은 피의자가 아니라 검증자입니다.”

유서진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예.”

“다만 자신들도 검증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세요.”

유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군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겠습니다. 현장 함장, 합참 라인, 검증평가 실무자들. 몰아가지 않겠습니다.”

하현민은 백승조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백승조는 잠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요.”

“대통령님.”

“예.”

“군은 실수를 덮으면 망합니다. 하지만 실수할까 봐 아무것도 못 해도 망합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도 같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같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

그때 윤태석의 단말기에 새 보고가 들어왔다.

“대통령님.”

“말하세요.”

“판교에서 도주한 조한결 명의 인물의 휴대폰에서 전원이 꺼진 상태로도 남아 있던 물리 식별정보 일부가 나왔습니다.”

“내용은요.”

윤태석은 화면을 띄웠다.

짧은 영문 폴더명이 하나 복구되어 있었다.

FAIL-SIM / K-OPCON
(실패 시뮬레이션 / 한국 전작권)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유서진 소령이 거의 숨을 멈춘 듯 화면을 보았다.

백승조는 낮게 말했다.

“실패 시뮬레이션.”

오세규 장관이 입을 다물었다.

하현민은 문장을 오래 보았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하라.

그리고 이제 실패 시뮬레이션.

누군가는 한국 전작권 전환을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실패하는 모양을 설계하고 있었다.

하현민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파일은 열지 않습니다.”

윤태석이 고개를 들었다.

“예?”

“열지 않습니다. 복제도 하지 않습니다. 포렌식 절차를 격리하고, 물리 이미지부터 뜹니다. 접근 인원은 최소화하세요.”

유서진이 바로 말했다.

“예. 논리폭탄 또는 추적형 미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승조가 물었다.

“그 안에 진짜 증거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있을 수 있습니다.”

하현민이 답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대는 우리가 증거를 원한다는 걸 압니다. 증거처럼 생긴 것을 던질 겁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물면?”

하현민은 대답했다.

“우리가 실패한 것처럼 보이겠죠.”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 속에서 세종 코어의 상태 표시가 다시 떠올랐다.

CORE STATUS: DEGRADED CONFIDENCE / HUMAN OVERSIGHT REQUIRED
(코어 상태: 신뢰도 저하 / 인간 감독 필요)

인간 감독 필요.

그 문장이 이제는 경고처럼 보였다.

하현민은 말했다.

“오늘부터 이 사건의 모든 증거는 증거이자 미끼입니다.”

윤태석이 받아 적었다.

“모든 문장은 정보이자 프레임입니다.”

백승조가 덧붙였다.

“모든 절차는 방어이자 공격로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모든 친구는 조건을 들고 옵니다.”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그 문장은 좋았다.

좋은 문장은 위험하지만, 때로는 필요하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는 화면의 폴더명을 다시 보았다.

FAIL-SIM / K-OPCON
(실패 시뮬레이션 / 한국 전작권)

세종 벙커의 공기는 차가웠다.

밖에서는 평범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종시의 도로에는 퇴근 전의 차량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고, 정부청사 창문에는 햇빛이 비쳤다. 누군가는 오늘 저녁 약속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아이 학원 시간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구내식당 메뉴가 별로라며 투덜거렸다.

그 모든 평범함 아래에서,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실패하는 모습을 설계하고 있었다.

아직 실패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의 모양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가 실패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방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패했다고 믿는 겁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세종 벙커의 모든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전작권은 아직 반환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게 만드는 절차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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