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보고서보다 오래 산다.
보고서는 반박할 수 있다.
숫자를 다시 계산하고, 출처를 따지고, 작성자를 추적하고, 표의 기준을 묻고, 문장에 숨어 있는 의도를 드러낼 수 있다. 보고서는 종이 위에 있다. 종이 위에 있는 것은 언젠가 찢을 수 있고, 태울 수 있고, 다른 종이로 덮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다르다.
기억은 사람 안에 산다.
정확하지 않아도 힘이 있고, 오래될수록 더 그럴듯해진다.
특히 군인의 기억은 더 위험하다. 젊은 장교였던 시절의 분노, 작전회의실의 침묵, 상급부대의 지시를 기다리던 시간, 누군가 결정하지 않아 죽을 뻔했던 순간, 혹은 누군가 너무 빨리 결정해 죽어야 했던 사람들.
그 기억들은 서류보다 질기다.
그리고 누군가 그 기억을 책으로 묶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회상이 아니라 시대의 증언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날 아침, 서울의 서점 물류창고에는 아직 진열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표지는 어두운 남색이었다.
제목은 흰색이었다.
《동맹의 그림자》
부제는 더 직접적이었다.
한 전직 연합사 부사령관의 기록
저자는 백발의 예비역 대장이었다.
이름은 강윤재.
그는 한때 한국군에서 가장 미국을 잘 아는 장군으로 불렸다.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거쳤고, 한미연합훈련의 거의 모든 층위를 경험했으며, 연합사 부사령관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군 내부에서는 실무에 강하고, 영어가 정확하고, 미국 장성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역 후에는 보수 안보진영의 원로가 되었다.
방송에도 나갔고, 국회 토론회에도 나갔고, 방산 포럼에도 자주 초청됐다.
그는 전작권 전환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말을 평생처럼 반복했다.
아직은 아니다.
그 말은 편리했다.
오늘도 아니고, 영원히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오늘의 결정은 미룬다.
정치적으로는 신중해 보이고, 군사적으로는 책임 있어 보이며, 외교적으로는 동맹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는 말이다.
출판사는 책을 다음 주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개 전날 새벽, 일부 원고가 먼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판계 관계자 몇 명에게 갔다.
그다음에는 안보 담당 기자들에게 갔다.
곧 국회 보좌진과 유튜브 정치 채널, 전직 장성들이 모인 단체방, 방산업계 임원들의 메신저까지 흘러갔다.
파일 제목은 단순했다.
Shadow_Alliance_Excerpt_OPCON.pdf
그 안에는 회고록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장 제목은 이랬다.
그날, 우리는 명령하지 못했다
문장은 조용하게 시작했다.
2010년대 후반 어느 한미연합 지휘소훈련에서, 나는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뼈아픈 장면을 보았다. 우리는 지도 위에 병력을 갖고 있었고, 화면 위에 표적을 갖고 있었고, 보고서 위에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정의 순간, 모두가 워싱턴과 평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전작권은 서명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반사신경이 바뀌어야 돌아온다.
그 문장은 좋았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빠르게 퍼졌다.
세종 벙커의 아침 회의는 회고록 발췌본으로 시작됐다.
윤태석 국가안보실장이 파일을 화면에 띄웠고, 오세규 국방부 장관은 이마를 문질렀다. 백승조 합참의장은 화면의 저자 이름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하현민 대통령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백승조는 짧게 답했다.
“예.”
“어떤 분입니까.”
백승조는 잠시 말을 골랐다.
군인은 선배를 평가할 때 조심한다.
특히 그 선배가 아직 살아 있고, 언론에 자주 나오고, 군 내부에서 존경과 불편함을 동시에 받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능력 있는 분입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문장이 있겠군요.”
백승조는 하현민을 보았다.
대통령은 기다렸다.
백승조가 말했다.
“그리고 본인이 능력 있다는 걸 잘 아는 분입니다.”
회의실에 아주 짧은 웃음이 흘렀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그런 분들이 책을 잘 씁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안 써도 될 얘기도 잘 쓰죠.”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회고록 발췌본은 군사적 디테일을 많이 담고 있지는 않았다. 실제 작전계획명이나 민감한 좌표, 세부 절차는 빠져 있었다. 그 점은 오히려 노련했다. 보안 문제로 공격받지 않을 정도로만 구체적이고, 독자가 실제 장면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할 정도로는 생생했다.
그중 한 문장이 굵게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군은 강해졌다. 그러나 강해진 군대와 자기 전쟁을 직접 지휘할 준비가 된 군대는 다르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이 문장은 오늘 하루 종일 돌겠습니다.”
윤태석이 이미 확산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이미 돌고 있습니다. 일부 매체가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화면 한쪽에 기사 제목이 올라왔다.
예비역 대장 회고록 “한국군, 강하지만 지휘 준비는 별개”
연합사 전 부사령관 “전작권은 서명이 아니라 반사신경”
하현민 전작권 드라이브에 군 원로들 우려 확산
세종 코어 논란 속 예비역 장성 회고록 파장
백승조는 기사 제목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제목 뽑는 솜씨는 포병보다 빠르군.”
오세규가 받았다.
“정확도는 포병보다 떨어집니다.”
유서진 소령이 웃음을 참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현민은 웃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전작권은 서명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반사신경이 바뀌어야 돌아온다.
그 문장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틀리지 않은 문장이 언제, 누구의 손에, 어떤 맥락으로 던져졌느냐였다.
하현민이 말했다.
“이 책, 출간 일정이 원래 언제였습니까.”
윤태석이 답했다.
“다음 주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원고가 오늘 새벽 유출됐습니다.”
“유출입니까, 선공개입니까.”
“출판사 측은 유출이라고 합니다.”
백승조가 건조하게 말했다.
“출판사는 늘 유출이라고 합니다. 홍보팀은 속으로 웃고 있을 겁니다.”
오세규가 그를 보았다.
“의장님, 출판계도 아십니까?”
“회고록 쓰신 분들을 좀 봤습니다.”
회의실에 짧은 웃음이 돌았다.
하현민은 윤태석에게 물었다.
“확산 경로는요.”
윤태석은 유서진에게 눈짓했다.
유서진이 화면을 넘겼다.
“초기 확산 계정군 일부가 가짜 보고서 확산 경로와 겹칩니다. 특히 안보포럼 사무국 계정, 전직 장성 단체방, 방산업계 정책 메일링 리스트, 그리고 JH-ADVISORY와 연결된 워크스페이스 일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백승조의 얼굴이 더 굳었다.
“강윤재 대장님이 직접 관련됐다는 뜻은 아니군.”
유서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다. 현재로서는 원고 일부가 해당 경로를 통해 확산됐다는 뜻입니다. 저자 본인이 관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현민은 백승조를 보았다.
“의장님.”
“예.”
“이 회고록의 내용 자체는 어떻게 보십니까.”
백승조는 화면을 오래 보았다.
거기에 적힌 문장들은 군인의 마음을 찔렀다.
한국군이 강해진 것과 자기 전쟁을 지휘할 준비가 된 것은 다르다.
반사신경이 바뀌어야 한다.
위기 때 사람은 익숙한 지휘체계로 돌아간다.
미군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보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그 점이 문제였다.
백승조는 천천히 말했다.
“군사적으로는 새겨들을 말이 있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얼굴을 굳혔다.
백승조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용당하기 좋은 말입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백승조는 대통령을 보았다.
“대통령님, 이 회고록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백승조는 말했다.
“강윤재 대장님을 공격하면, 하현민 정부가 군 원로의 우려를 묵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회고록의 문장 중 상당수는 군 내부에서 실제로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그걸 부정하면 현역 군인들도 불편해집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럼 그냥 맞고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백승조는 그를 보았다.
“반박할 게 아니라 이어 받아야 합니다.”
하현민이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백승조는 회고록 문장을 가리켰다.
“전작권은 서명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반사신경이 바뀌어야 돌아온다.”
그는 잠시 멈췄다.
“이 문장은 맞습니다. 그러니까 정부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맞다. 그래서 검증하고 훈련한다. 그래서 지연의 핑계가 아니라 훈련의 이유로 삼아야 한다.”
하현민은 백승조를 보았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갑시다.”
세종 벙커와 대통령실 대변인 라인은 회고록 논란 대응 문안을 동시에 다듬고 있었다.
처음 초안은 평범했다.
정부는 전직 군 원로의 개인적 견해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 전작권 전환은 조건에 기초해 차분히 추진될 것이다.
하현민은 그 문장을 보고 바로 지웠다.
“이건 안 됩니다.”
대변인실 직원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현민은 말했다.
“이 문장은 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개인적 견해’라는 말은 군 원로를 낮춰보는 것처럼 들립니다.”
윤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쓰겠습니다.”
하현민은 펜을 들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갑시다.”
그가 직접 불렀다.
전작권은 서명만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실제 지휘 능력과 훈련된 반사신경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는 지적에 정부도 동의합니다.
대변인실 직원이 빠르게 받아 적었다.
하현민은 이어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검증과 훈련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 영구적 지연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며, 검증은 권한 반환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절차여야 합니다.
오세규 장관이 문장을 보며 낮게 말했다.
“이건 공격을 흡수하는 문장입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그리고 방향을 다시 잡는 문장입니다.”
백승조는 아무 말 없이 문장을 읽었다.
그는 만족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변인실 직원이 물었다.
“대통령님 발언으로 갑니까?”
하현민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국방부 장관 브리핑으로 갑니다.”
오세규가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네.”
오세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대통령님, 저도 피곤합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장관님은 원래 그런 일 하시라고 계신 겁니다.”
오세규가 그를 보았다.
“의장님, 아까부터 군이 너무 솔직합니다.”
백승조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전작권 때문에 반사신경 바꾸는 중입니다.”
회의실에 웃음이 흘렀다.
하현민도 짧게 웃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거두었다.
“장관님이 말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말하면 정치가 됩니다. 합참의장이 말하면 군 내부 논쟁처럼 됩니다. 국방부 장관이 정부의 입장으로 말하세요.”
오세규는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좋은 문장이네요.”
하현민이 말했다.
“좋은 문장은 위험합니다.”
오세규가 피곤하게 웃었다.
“그건 이제 우리 드라마 주제가 같습니다.”
국방부 브리핑룸은 세종 벙커보다 더 밝았다.
카메라 조명이 켜지고, 기자들이 손을 들 준비를 했다. 오세규 국방부 장관은 단상 앞에 섰다. 그는 정치인이었지만, 오늘은 정치인처럼 말하면 안 됐다. 군인의 우려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정부의 방향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는 준비한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전작권은 서명만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실제 지휘 능력과 훈련된 반사신경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는 군 원로의 지적에 정부도 동의합니다.”
기자들의 손이 멈췄다.
그들은 반박을 예상했다.
정부는 먼저 동의했다.
오세규는 이어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검증과 훈련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 영구적 지연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검증은 권한 반환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절차여야 합니다.”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오세규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최근 일부 비공식 문건과 회고록 발췌본이 함께 확산되며 전작권 전환 논의가 반미, 친중, AI 국방 실패, 동맹 불신이라는 여러 프레임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프레임에 끌려가지 않겠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정부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한미동맹은 유지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자기 군을 지휘할 책임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첫 질문이 나왔다.
“장관님, 강윤재 전 연합사 부사령관의 회고록 내용이 사실이라고 보십니까?”
오세규는 바로 답했다.
“회고록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저자가 설명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전작권 전환이 서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정부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질문.
“그러면 정부가 전작권 전환 일정을 늦출 가능성도 있습니까?”
오세규는 준비한 답을 했다.
“실제 능력 부족이 확인되면 보완해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 부족처럼 보이게 만드는 외부 또는 내부 구조가 확인된다면, 그 구조를 제거해야 합니다. 일정은 정치적 체면이 아니라 검증 결과와 국가안보상 필요에 따라 판단합니다.”
세 번째 질문.
“세종 코어 검증 데이터 이상과 회고록 내용이 연결된다고 보십니까?”
오세규는 잠시 기자를 보았다.
“세종 코어 문제는 기술 검증의 영역이고, 회고록은 군 지휘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다만 둘은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스스로 지휘할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부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브리핑룸이 조용해졌다.
기자들은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
하현민은 세종 벙커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완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가 위기 대응에서 완벽한 문장은 없다. 덜 나쁜 문장, 덜 흔들리는 문장, 그리고 나중에 부끄럽지 않을 문장이 있을 뿐이다.
오세규는 그럭저럭 해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장관님, 오늘은 잘하셨네요.”
윤태석이 옆에서 말했다.
“녹음해서 보내드릴까요?”
하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보내면 다음엔 못 합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맞습니다. 칭찬은 군에서도 위험합니다.”
유서진이 웃음을 참았다.
회고록의 저자 강윤재 예비역 대장은 서울 성북동의 자택 서재에 앉아 있었다.
책장은 오래된 군사서적과 외교안보 관련 서적으로 가득했다. 한쪽 벽에는 그가 현역 시절 받은 훈장과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젊은 장교 시절의 사진, 미군 장성과 악수하는 사진, 연합훈련 지휘소에서 작전상황도를 보는 사진, 전역식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강윤재는 자신의 얼굴이 젊어질수록 더 낯설다고 느꼈다.
그는 오전 내내 전화를 받았다.
기자.
출판사.
전직 장군.
야당 의원.
방송국 작가.
방산업계 관계자.
그리고 몇몇 알 수 없는 번호.
그는 대부분 받지 않았다.
그가 받은 전화는 하나뿐이었다.
백승조 합참의장.
후배였다.
강윤재는 전화를 받고 먼저 말했다.
“네가 나한테 전화할 줄 알았다.”
백승조의 목소리는 짧았다.
“선배님, 회고록 유출은 의도하신 겁니까.”
강윤재는 잠시 침묵했다.
질문은 정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아니다.”
“그럼 누가 했습니까.”
“출판사 쪽이겠지.”
“정말 그렇게 보십니까.”
강윤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는 내가 이 판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백승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후배의 예의이자, 의심이었다.
강윤재는 낮게 웃었다.
“많이 컸구나.”
“선배님.”
“아니다.”
강윤재는 다시 말했다.
“나는 책을 썼다. 내 기억을 썼고, 내 후회를 썼다. 그걸 오늘 이렇게 돌릴 생각은 없었다.”
백승조는 말했다.
“회고록 문장이 가짜 보고서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봤다.”
“선배님 문장이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윤재가 침묵했다.
그 말은 불쾌했다.
그러나 틀렸다고 바로 말할 수 없었다.
백승조는 이어 말했다.
“전작권은 서명한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반사신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 말씀 맞습니다.”
강윤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그 말이 전작권 전환을 영원히 미루는 문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서재 안이 조용해졌다.
강윤재는 창밖을 보았다.
겨울 햇빛이 마당의 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하현민을 믿지 않는다.”
백승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개발자 출신 대통령이 전쟁을 시스템처럼 보는 것도 불안하다. 세종 코어 같은 AI가 전장판단에 들어오는 것도 불안하다. 한국군이 정말 반사신경을 바꿨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잠시 멈췄다.
“하지만 미국이 영원히 우리 대신 반사신경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
백승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윤재는 말했다.
“오늘 저녁에 기자회견을 하겠다.”
백승조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내 문장을 누가 가져다 쓰든, 내 뜻은 내가 말해야지.”
“선배님.”
“걱정하지 마라.”
강윤재는 낮게 웃었다.
“나도 아직 보고서에 실려갈 정도로 늙지는 않았다.”
백승조는 잠시 침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일 아니다.”
강윤재는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승조야.”
“예, 선배님.”
“하현민에게 전해라. 대통령이 정말 책임질 생각이면, 군의 불안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백승조는 낮게 답했다.
“전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윤재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기억은 보고서보다 오래 산다.
하지만 오래 산 기억도, 때로는 자신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는 책상 위 회고록 원고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쓴 문장들이 두려워졌다.
그날 저녁, 강윤재 예비역 대장은 짧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장소는 출판사 회의실이었다. 기자들은 몰려들었다. 카메라는 켜졌고, 방송국들은 자막을 준비했다.
강윤재는 단상에 섰다.
그는 준비한 종이를 꺼냈지만, 거의 보지 않았다.
“오늘 제 회고록 일부가 의도치 않게 공개됐습니다.”
그는 말했다.
“저는 한국군이 전작권 전환을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훈련과 더 냉정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기자들이 받아 적었다.
강윤재는 잠시 멈췄다.
“저는 여전히 현 정부의 속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속도를 의심하는 것과, 영원히 남의 판단에 기대자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제 기억이 전작권 전환을 영원히 미루자는 주장으로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전작권은 정치적 구호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미룰 수도 없습니다. 전작권은 미국을 몰아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며, 중국이 축하할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군과 정부가 더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제가 회고록에서 말한 반사신경은 미국을 계속 바라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판단할 반사신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강윤재는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말했다.
“정부는 성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신중함으로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 문장은 곧바로 퍼졌다.
강윤재 “전작권,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미룰 수 없어”
전 연합사 부사령관 “미국 몰아내자는 이야기 아냐…스스로 판단할 반사신경 필요”
회고록 논란 새 국면…군 원로, 정부 비판하면서도 전작권 지연론 선 긋기
세종 벙커에서 그 장면을 보던 오세규 장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살았습니다.”
윤태석이 말했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백승조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풀려 있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좋은 장군이셨군요.”
백승조는 짧게 답했다.
“피곤한 장군이십니다.”
“좋은 장군들은 원래 피곤합니까?”
백승조는 잠시 생각했다.
“대체로 그렇습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럼 정치인도 좋은 정치인은 피곤해야겠군요.”
윤태석이 건조하게 말했다.
“이미 충분히 피곤합니다.”
이번에는 세종 벙커 안에 조금 더 긴 웃음이 돌았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서진 소령이 새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님, 회고록 유출 파일의 최초 업로드 지점이 일부 확인됐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입니까.”
“출판사 내부가 아닙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유서진은 화면을 띄웠다.
“최초 업로드는 한국 안보포럼 사무국 계정과 연결된 외부 클라우드 폴더입니다. 그리고 그 폴더에는 JH-ADVISORY 접근 흔적이 있습니다.”
백승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결국 다시 JH.”
윤태석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회고록도 우편함을 거쳤군요.”
하현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고록의 기억.
가짜 보고서의 문장.
전직 장성들의 우려.
JH-ADVISORY.
안보포럼.
금은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 달랐다.
강윤재는 자기 문장을 되찾았다.
그것은 작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가짜 보고서는 사람의 기억을 빌려 균열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기억의 주인이 직접 말하는 순간, 균열의 방향은 조금 틀어졌다.
하현민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기억도 탈취당할 수 있군요.”
윤태석이 대답했다.
“그리고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회고록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그날, 우리는 명령하지 못했다.
그 문장은 아픈 문장이었다.
그러나 아픈 문장은 반드시 적의 무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술도구가 된다.
하현민은 말했다.
“강윤재 장군의 회고록 전문을 확보하세요. 공격하려는 게 아닙니다. 배워야 할 게 있을 겁니다.”
백승조가 그를 보았다.
“그 말씀은 선배님께 전하겠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보포럼 계정은 계속 추적합니다.”
유서진이 대답했다.
“예.”
하현민은 화면 아래에 떠 있는 사건명을 보았다.
FALSE BRIEF / 가짜 보고서
MEMOIR LEAK / 회고록 유출
JH-ADVISORY / 우편함 추적
가짜 보고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회고록은 이제 막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하나는 분명해졌다.
기억은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의 주인이 침묵하지 않으면, 그 무기는 때로 되돌아간다.
세종의 밤은 다시 깊어졌다.
금은 더 벌어졌다.
그러나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둠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