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는 동떨어진 넓고 푸른 들판이 매력적인 '고즈넉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소꿉 친구였던 프랭크와 에일린 서로 티격태격하며 자랐지만 누구 보다도 의지하는 사이. 프랭크는 고즈넉 마을에서 함께 조용하지만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하지만 에일린은 큰 꿈이 있다. 바로 영웅적인 검사가 되어서 대륙을 돌며 선행을 하는 것. 오늘도 마을 한 구석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검술 연습에 매진한다. 식사를 가져다 주며 이를 지켜보는 프랭크. 가슴이 아프지만 결국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도움을 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마을의 대장간에서 일을 시작한 프랭크, 마을 용병 길드에서 의뢰를 받기 시작한 에일린. 두 사람 모두 운명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2년이 지난 후 프랭크는 대장간의 일이 고되고 심적으로 지쳤었지만 매일매일 검을 휘두르는 에일린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 잡아오며 신입 대장장이로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에일린은 고즈넉 마을 근처의 하급 마물, 야수 정도는 거뜬히 처리할 수 있는 용병이 되었고 길드에서의 공적을 인정 받아 더 큰 도시로 발령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고민하는 에일린. 고민의 주체는 당연히 프랭크이다. 늘 자신의 연습을 지켜봐주며 같이 식사 시간을 가지고... 더이상 두 사람의 감정은 소꿉친구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기엔 너무 커져버렸다.
이러한 고민을 모를리가 없는 프랭크. 그간 쌓아온 신뢰와 재화들을 탈탈 털어서 운석에서 채취한 철 '운철(隕鐵)'을 힘들게 입수하였고, 대장간의 도움을 받아 검을 완성시킨다. 검의 이름은 '성광검(星光劍)' 에일린의 검술은 그녀의 성격과 체형에 맞게 아주 호쾌하고 빠른 쾌검을 구사한다. 별빛을 담은 검.. 그녀에게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지 않는가! 그녀를 찾아간 프랭크는 검을 건네며 등을 밀어준다.
"네가 나에게 꿈을 이야기해 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을 그려왔어 에일린. 받아주지 않겠어? 내 마음이 담긴 검이야 널 지킬 것이고 날 떠올려 주렴. 그리고 지칠 때면, 검의 날이 상했을 때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와서 내게 맡겨주렴."
달빛이 깊어가는 밤 에일린의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점점 포개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
에일린이 떠나고 2년 프랭크는 어엿한 대장장이가 되었고, 에일린은 용병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선 이름을 말하면 알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주황색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푸른 초신성의 빛을 머금은 듯한 검을 날렵하게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비단 아름답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유명세가 올라갈 수록 임무의 위험도 또한 올라가고 마기에도 노출되는 일이 잦았다. 결국에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버리고 상급 마물의 토벌 작전에서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부상자가 되었지만 임무 중에 은퇴하게 된 것이니 명예는 실추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로써의 꿈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어진 에일린의 마음은 텅 비게 된다. 요양을 위해 고즈넉 마을로 돌아온 에일린. 소식을 들은 프랭크는 대장장이에겐 보물과도 같은 망치를 집어 던지며 대장간을 뛰쳐나와 그녀를 맞이한다. 그러나 총기를 잃은 두 눈, 부시시한 머리, 초췌해진 에일린의 모습... 프랭크는 말 없이 그저 그녀의 짐을 들어주고 곁에서 걷는다. 에일린이 어느정도 건강과 활기를 되찾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프랭크가 부단히도 노력한 결과다. 에일린은 일을 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어서 항상 미안해했지만 프랭크는 꽤나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되어 벌이가 나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마을의 축복 아래에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 '레나' 에일린과 닮은 주황색 머릿결과 총기가 가득한 눈이 빛나는 아이다.
그러나 프랭크 일가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일린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곤 하지만 한 생명을 몸에 품는 것은 축복이자 동시에 몸의 생명력이 상하게 된다. 레나의 출산과 동시에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레나가 두 살이 되던 해 성광검과 레나를 남긴 채 프랭크의 품에서 눈을 감는다. 그녀의 유언은 자신을 지켜주었 듯이 이 검과 함께 레나를 부디 지켜달라는 부탁... 프랭크는 절망 속에 몸부림 쳤지만 이내 에일린과 똑 닮은 레나를 보며 마음을 굳게 먹는다. 대장간에서의 고된 일도 버텨온 그다. 빨갛게 달궈지고 뭉개지고 망가지더라도 냉각의 과정을 거치면 이전 보다 단단하고 강해진다는 사실을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프랭크는 대장간을 이어 받아 마을 대표의 대장장이가 되었고, 레나도 건강하게 자라서 열 두살이 되었다. 마을 외의 사람들도 대장간을 이용할 정도로 프랭크의 실력은 발군이었고 수완도 좋아서 대장간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부와 유명세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와중 하나의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레나의 '검사'의 꿈... 에일린과 성광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나 또한 엄마와 같은 길을 걷고 싶어진 듯 하다. 대장간의 뒷 뜰에서 조막만한 손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레나를 보며 프랭크는 고심이 깊어진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으랴 결국 프랭크는 레나의 뜻을 막지 못하고 최상급의 무구들을 지원하여 안전하게 꿈을 이루기를 기도한다.
밤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뜨던 밤 하늘도 무심하여라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꺄아아악!!"
풀벌레 소리와 양서류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울려야 할 고즈넉 마을의 밤에 귀를 찢는 듯한 고함, 비명 소리가 가득 채운다. 마을 곳곳엔 불길이 치솟고 사람과 마물이 뒤엉켜 피가 낭자하였다. '마계의 공습'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도시의 전설, 마계와 현계를 잇는 포탈이 열리며 마물의 침공을 받는다는 무서운 전설이 지금 고즈넉 마을에서 지독하게 어둡고 사악한 발걸음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그 누가 알았으랴 어떤 전조도 없이 들이닥친 마물들은 마을의 용병들로 막아내기엔 한 없이 역부족이었다.
프랭크는 자신도 싸울 것이라는 레나를 억지로 집의 지하에 숨기고는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자신의 딸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었다. 그리곤 대장간의 무구들을 모두 개방하여 마을 사람들과 같이 항전한다. 프랭크는 자신의 망치를 챙기려는 찰나 오랜 시간 방치 되었지만 매일매일 세심하게 관리해온 성광검이 자신을 집어달라는 듯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검을 집어든 그는 대장간의 동료들과 맞서 싸웠다. 검을 만들고 시험을 위해 휘둘러는 봤지만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을 그였지만 이상하리만치 검이 자아라도 가진 듯 움직였다. 프랭크는 그저 성광검이 아름답게 그려내는 검로에 맞춰서 힘을 주면 마물들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검에서 푸른 빛의 별빛이 퍼져 나간다. 희망의 뻗어 나간다!
"흥미롭군."
낮은 목소리였지만 소름 돋게도 귀에 찢어지듯이 박히는 목소리.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소리의 발생지를 바라보는 프랭크. 온 몸이 굳는다. 저건...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다. 마물의 공습은 마계의 군대가 현계로 정복 전쟁을 나서는 것. 즉 지휘관이 존재한다. 눈 앞에 있는 저것이리라... 마물에 대해 연구한 서적에 적힌 바로는 마물은 하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며, 그저 힘의 차이로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상급 마물은 다른 마물들을 힘으로 굴복시켜 자신의 수하로 삼아 움직인다.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그리고 상급 마물 한 개체를 막기 위해선 대마법사, 소드마스터 최소 둘 이상은 있어야 적은 피해로 맞설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 상급 마물이 지금 프랭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사도 아닌 자가 이 정도의 무력을 보여주다니. 그 검 탓인가?"
인간의 말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와 내뿜는 기세는 인간을 한참 초월한 존재의 것이었다. 프랭크는 상황판단을 하기 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자질구레한 마물들은 눈치를 보더니 다른 곳으로 갔고 프랭크와 대장장이들, 그리고 그 앞의 상급 마물만 남은 상태였다.
"내가 두려운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성광검이 부르르 떨리며 여느때 보다 밝은 빛을 내뿜는다. 프랭크는 순간 제발 검이 가만히 있기를 그리고 검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 마저 해버린다.
"자세히 보니 그 검.. 내뿜은 기운, 검로가 익숙하군."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아아- 내 팔을 잘라갔던 주황 머리의 검사.. 그 녀석의 검이군!"
프랭크의 눈과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고 보니 마물의 팔 한짝이 없다. 위압감에 외견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기에 지금 깨달았다.
"그 검사는 어디로 갔는가? 그때 마기를 한 껏 뒤집어 씌우고 끝내려는 찰나 전투가 끝나버려서 아쉬웠는데 말이야. 그 검을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인가?"
깨달았다. 에일린의 꿈을 접게 만든 존재가, 죽음에 이르게 한 존재가 저것이로구나. 에일린은 저런 존재와 맞서 싸웠고 살아남았구나.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프랭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동시에 몸의 경직이 풀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싣는다.
프랭크는 튕겨 나가듯 검을 휘둘렀고 그게 신호가 되어서 대장장이들의 공세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전사가 아니었고 마물의 손짓 한 번에 둘 셋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터져 나갔다.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것은 프랭크 아니 성광검 뿐. 합을 이어갈 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요동치며 울어댔다. 십수년을 대장간에서 단련한 몸이었지만 저 존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랴.
"크하하하"
웃는다. 저 마물이 즐겁다는 듯 광포한 웃음을 뱉어낸다. 공격을 받아내던 프랭크는 이미 빈사 상태. 지나가던 사람이 보았다면 산송장이라고 불렀을 모양새다. 순간 눈을 감고 마물의 웃음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마음 속으로 기도한다.
'에일린... 날 지켜보고 있다면 도와주지 않겠어? 레나를 위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
순간 성광검이 붉은 빛을 내뿜었다가 이내 푸른 빛과 합쳐져 보라색 빛을 내뿜는다.
'서걱- 툭'
무언가 칼에 베이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 마물의 하나 남은 팔이 떨어져 나갔다. 울부짖으며 프랭크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숨을 거둔 듯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기운과 불길한 보라색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 있는 검. 프랭크는 검에 의해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 검로에 맞춰서 몸이 움직일 뿐이었다. 둘의 공방은 한참이 이어졌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마침내 마물의 가슴에 꽂힌 성광검.
"저승에 가면 그 검사와 너를 반드시 찾아가리라.. 죽어서도 너흰 편하지 못하리라."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주변의 공기를 떨리게 만들던 존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것과 동시에 스러지는 프랭크의 몸. 이미 생기가 남아 있지 않으며 목적을 잃은 검만이 빛날 뿐이었다. 고즈넉 마을은 그렇게 역사의 한 켠으로 사라지고야 말았다.
마계의 공습은 도시의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수도와 각 도시의 영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들의 안위에만 집중하였다. 썩어버린 관료들 때문에 고즈넉 마을과 같은 소규모의 마을들 수십개가 불에 타오르며 마물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레나는 일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되었지만 모두 망가지고 불타버린 잿더미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빛을 내는 검과 그 검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는 프랭크를 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검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지만 레나만은 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프랭크를 끌어 안고 한참을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레나는 감정과 말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그나마 안전한 마을로 떠났고, 무일푼으로 한 주점에서 숙식하며 일을 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존재들이 성광검의 강함과 빛에 이끌려 검을 집으려 몰려들었지만 검에 가까이 다가가면 환각에라도 걸린 듯 미쳐버려 이성을 잃고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가 되어 그 주변은 폐허를 뛰어넘어 마치 지옥도라도 펼쳐진 곳이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마계의 공습이 멈추었고 새로운 싹이 현계에 움튼다. 잿더미가 된, 미쳐버린 존재들이 배회하는 고즈넉 마을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지옥도가 펼쳐진 곳이라 도시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소탕하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던 곳이라 악명이 높아진 상태이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오는 존재들을 귀찮다는 듯 한 손으로 털어내며 묵묵히 폐허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지옥도를 펼치게한 장본인 성광검에 다다른 노인.
"이제 그만 기운을 거두시게."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마치 듣는 이라도 있는 듯 말을 건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테지만 범상치 않은 솜씨와 기운을 가진 노인이었기에 그 행동에 토를 달 사람은 없으리라. 그때 일어날리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내게 말을 거는 것이오?"
검이 허공에 떠오르며 소리를 내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말 그대로 검이 대답을 하였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은 익히 들었소. 그리고 자네가 자아를 가졌으리라고 예상하고 내 이리로 찾아오게 되었지."
노인이 덤덤히 말을 건넨다.
"당신은 누구시오? 그리고 난.. 무슨 존재인지 알고 있소?"
검의 말을 들은 노인은 근처 돌덩이를 털어내고 앉으며 어디부터 애기를 꺼내야할지 고민하며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말을 이어갔다.
"난 퇴역한 왕실 직속 군대의 기사 마르쿠스요. 그리고 자네는 자아를 가진 무구 '에고 웨폰'일세. 에고 웨폰은 보통 신이나 드래곤 마왕 등의 세계에 영향을 줄수 있는 존재들의 힘을 받거나 노출되면 만들어지는 기물(奇物)이네."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노인은 말을 이어간다.
"아마 대장장이와 여검사의 염원이 우연히도 이루어져 자네에게 힘이 깃든 것이겠지. 본인들의 딸을 지켜달라고 말이야."
검은 질문한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에 생기를 띈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날 찾아오는 존재들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거부하게 되더군. 이것도 염원과 관련된 것인가?"
"맞네. 자네는 기억에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딸 외에는 모든 존재를 부정할 것이야. 나도 사실 자네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기운을 쓰고 있다네."
"그렇다면 난 이제 어떡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 딸은 어디에 있는지도 이름 조차도 모른다네."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
검이 스르륵 노인의 앞에 다가가며 기운이 짙어진다.
"당신이 왜? 무슨 의도인가."
노인은 기운을 끌어올리며 대답한다.
"자네가 이 세계를 바꿔줬으면 하네. 지금의 왕과 귀족들은 썩어버렸어. 마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양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저 본인들의 안위만 신경쓰고 있지."
검은 기운을 거두며 경청한다.
"물론 내가 막아서고 싶지만 난 이미 노쇠하였다네. 보다시피 자네 앞에서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지 않는가? 20년만 젊었어도 자네를 쥐고 혁명을 꿈꿨겠지만... 난 이미 틀렸다네."
"에고 웨폰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대상의 기운을 흡수하고 강해지네. 비단 생기를 띈 존재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가 담긴,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온 것들을 파괴하면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 것이지. 예를 들어 요리할 때 쓰는 식기구들이나 타인을 해치기 위해 쓰이는 무구들이 있지. 특히 무구들은 생명을 빼앗는 용도인 만큼 더욱더 강한 기운인 '무구의 혼'이 깃들어 있다네."
"난 자네가 강해져서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을 해치워 주었으면 한다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검이 대답한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일을 하게 되면 딸이 안전해 지는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딸에게 데려가주겠다고 답한다.
이어서 검이 묻는다.
"딸과 나의 이름도 알고 있는가?"
"레나, 그리고 자네는 성광검이라네."
목표가 생긴 성광검은 이내 기운을 거두었고 주변에서 배회하던 존재들도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마물과 야수, 탐욕스러운 인간 등이 동시에 뒤섞여 또다른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 난장판을 뒤로하고 마르쿠스와 성광검은 레나가 있는 도시로 떠난다. 마르쿠스의 망토 안에 숨겨져서 레나가 일하는 주점으로 들어섰고 레나를 마주하자 검은 자아를 가진 뒤 처음으로 겪는 '감정의 요동침'이 내면에서 일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주점에 주인장과 대화하여 뒷 뜰에서 레나와 독대하게 되었다. 레나를 살펴보니 초점이 없는 눈, 정리되지 않은 외견, 축 처진 어깨 등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눈에는 금새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레나..."
망토 속에서 성광검이 조심스레 나타나며 말을 걸었다. 초점이 없던 레나의 눈이 점점 커지며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동시에 레나를 마주보는 성광검의 내면에 레나의 기억들이 스며든다. 프랭크 부부의 염원이 이유일 것이다.
"프랭크와 에일린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만은 절대로 잃지 않겠어. 기다려 주지 않겠어? 널 지킬 힘을 얻고 반드시 돌아올게. 이 세상 무엇에게서도 아니 이 세상을 초월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널 지켜내겠어."
레나는 부모님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내 검을 끌어안고는 한참을 있는다. 마르쿠스는 주점의 주인장에게 금화를 건네며 레나를 잘 보살펴 주기를 부탁한다. 비열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왕실에서 고위 관직에게 발급하는 신분패도 함께 보여주며 눈짓으로 허튼 짓 했다가는 명줄이 짧아지리라 경고도 잊지 않았다.
레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는 노인과 검 한 자루. 마르쿠스는 성광검에게 한 가지 마법을 건다. 이미 의심을 거둔 그는 담담히 마법을 받아들이는데, 설명을 듣자하니 검에게 강해지는 길을 안내할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군대의 검사가 왜 이런 마법을 다룰 수 있는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미 레나와의 만남에서 강력한 목표가 새겨진 뒤이기도 하고 자아를 가졌다지만 세상 물정은 모르기에 그저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게 마르쿠스는 되도록이면 살생은 피하고 무구들을 부수어 기운, 무구의 혼을 흡수하며 강해지는 것이 자아의 유지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고, 그와 같은 에고 웨폰을 흡수한다면 힘이 몇 배는 강해질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길을 떠났다.
마르쿠스가 걸어준 마법은 성광검이 강해질 수 있는 장소, 즉 '무구의 혼'이 여럿 존재하는 곳을 감지하여 알려준다. 무구들의 기운이 짙어지는 곳은 보통 무구에 의해 생명이 꺼지는 곳이니 전장이거나 약탈 장소가 대부분이다. 마법의 안내에 따라 공중을 날아가던 검은 마침내 기운을 내뿜는 장소에 도착하였는데 역시나 도적떼들이 행상인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보통은 통행세를 내면 목숨은 빼앗지 않는 것이 불문율일진데 이 도적떼들의 칼에 자비란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의 도적이 한 여인을 해치려 검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푸른 빛과 함께 쏘아져 나간 성광검. 순식간에 도적의 팔을 잘라내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가슴에 검신을 박아 넣는다.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한 도적떼들은 금새 누가 이검을 던졌냐고 소리쳐 보지만 주변은 자신들과 행상인들 뿐이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고 살아남은 행상인들 눈에는 그저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 검이 귀신 들린 듯 혼자 춤을 추며 도적떼들을 도륙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아 자리에 주저 앉아서 숨만 고를 뿐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 검이 도적떼들의 무구들을 다 부수어 놓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대륙 곳곳에서 도적, 산적 등 파락호들이 혼자서 움직이는 검에 의해 소탕이 되었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나뉘었지만 크게 세 가지였다. 양민들은 마계의 공습 때문에 세상이 흉흉해져서 신이 자신의 검을 현세에 내려주어 악적들을 소탕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첫 번째요. 오히려 검을 습득하여 길들이고 싶어하는 악인들 사이에서 정보들을 사고 파는 경우가 두 번째. 이미 고즈넉 마을의 일과 성광검의 정보를 지니고 있는 자들의 제발 자신들에게는 검이 향하지 않기를 바라는 반응이 세 번째이다.
그 시각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의 호수에서 이런 반응들을 알리가 없는 성광검은 물에 핏자국을 씻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불쾌하군.'
확실히 마르쿠스의 말대로 생기를 띈 존재들을 해치거나 무구들을 부수었을 때 그들의 기운이 검신에 스며들어와서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피에 적셔지는 감각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기에 최대한 살생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사방에 피가 튄 뒤였다. 처음에 도적떼를 해치운 것에서 이미 발을 잘못 들인 것일까 후회하는 그였지만 강해져서 레나를 지켜내겠다는 목표 하나 만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으니 잡념을 비워내고는 핏자국을 씻는 데에 집중하였다.
1년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자아가 흔들린 검은 그저 마르쿠스의 마법이 안내하는 곳으로 날아가서 그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그의 형태도 점점 '마검(魔劍)'의 형태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양민들은 피해가 아주 적었고 결과를 보아하니 귀족들, 악인들, 마물 야수 등에게만 막대한 피해를 끼친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게 자아가 깃든 계기 때문일 것이다. 성광검의 소문은 점점 불어나서 시민들을 지키지 않는 왕실을 벌하러 신이 내려준 존재까지 확산되었다. 물론 왕의 귀에도 소문이 흘러 들어갔으며 검을 소탕할 군대가 편성 되었다.
성광검의 행보를 지켜보던 마르쿠스는 그가 살생의 길을 걷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강해진다는 목표는 지켜지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서포트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 출정하는 군대를 보고는 곧장 검에게 달려갔지만 근처에 다가가자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기운에 더 노쇠해진 그의 몸으로는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성(聖)이 아닌 마(魔)에 가까운 기운이라 더욱 더 지독한 기운이 되어서 마르쿠스의 폐부를 찔러온다.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다가간 그는 소리친다.
"나일세 기운을 거두어 주게!"
가까이서 본 성광검은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마계에서 온 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모습이 변해 있었다. 제 얘기가 들리기는 할까 싶은 찰나 그가 걸어둔 마법 덕분인지 기운을 점점 거두기 시작했다. 검은 천천히 내려와 눈높이에 검신을 맞춘다.
"오랜만이네 마르쿠스. 자네 덕분에 힘을 많이 키울 수 있었어. 고마움을 표하지."
이전과 말투는 같지만 그 소리와 파동이 뇌에 직접 전달이 되는 듯 아주 컸고 주변의 공기가 떨릴 정도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살생은 내 피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강해지긴 했지만 자네는 지금 마검이나 다를 바가 없네..."
마르쿠스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내 말을 건넸다.
"내가 마검이든 성검이든 무엇이 중요한가? 난 레나를 지킬 힘만 있으면 되네. 자네가 잘 알지 않는가?"
궤변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라 에고 웨폰,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식을 배울 주인도 환경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힘만 거대해졌을 뿐이다. 마르쿠스는 탄식하고야 말았다. 자신의 실수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말일세 이 정도의 힘을 얻고 나니 더이상은 자네가 걸어준 마법이 왕실 말고는 반응하지 않더군. 아마 나와 같은 에고 웨폰들이 아니면 이제 힘을 흡수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왕실의 군대에는 에고 웨폰과 아티팩트들이 존재한다. 마르쿠스는 기운이 점점 쇠하여 검의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때 자신이 걸어둔 마법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와 머리 위에 멤돈다.
'설마...'
그렇다 마법이 검의 의지에 잡아 먹혀 마르쿠스 본인 마저 흡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검의 영역 안에 들어와서 그의 기운이 쇠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의지인 왕실의 척결은 내가 이루어 주겠네"
거두었던 기운을 다시 내뿜기 시작한 성광검. 마르쿠스는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임을 직감하고는 마음을 다 잡고 전투 태세를 취한다. 지금은 쇠약하였지만 그는 한때 왕실 직속 기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고 잘 버텼지만 결국 치명상을 입고 만다. 힘겹게 입을 떼는 마르쿠스.
"왕실이 자네를 파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네.. 이 말을 전해주러 왔지..."
검은 묵묵히 듣는다.
"자네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둬서 미안하네..."
그 말을 끝으로 마르쿠스의 몸이 스러졌고 그의 기운이 검에 깃든다.
"난.. 틀리지 않았어. 이제 레나를 만나러 갈 차례야."
지금 왕실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면 부서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성광검. 마침내 주인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레나가 머물던 주점의 창문으로 지켜보는 성광검. 마르쿠스의 부탁이 있었음에도 레나의 처지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정돈되지 못한 모습, 생기가 없는 듯 창백한 얼굴. 그리고 어느새 숙녀의 모습이 되어 취객들의 저질스런 추파를 말 없이 받아내는 그녀. 검은 지체 없이 레나 앞으로 꽂혔고 기운을 방출하여 주변의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기의 폭풍 중심에서 놀란 눈으로 검을 바라보는 레나.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그 마기 속에서도 성광검의 기운을 알아본다.
"내가 너무 늦었어 레나... 날 손에 쥐어주지 않겠어..?"
레나는 망설인다. 마기라면 치가 떨리도록 증오하는 그녀기에 성광검의 모습과 내뿜는 기운은 망설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옥 같은 생활을 모조리 부숴버리는 광경을 보며 이내 마음을 굳게 먹는다.
"...응"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었던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레나가 쥐기 쉽게 손 앞에 손잡이를 가까이 대주는 성광검. 여리지만 굳은 살과 상처가 가득한 손이 덜덜 떨리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그러자 레나의 모습이 바뀌었다. 에일린을 닮았던 주황색의 머리카락은 거의 핏빛에 가깝에 변하였고 수척했던 몸은 어느새 활기가 가득 찼으며 초점이 없던 눈에선 붉은색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출정했던 왕실의 군대는 신원 미상의 한 소녀에 의해 궤멸. 소녀는 멈추지 않고 왕의 목전에 도달하였으며 수많은 대마법사, 소드마스터들이 항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왕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무슨 마법을 쓰는 것인지 궁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무구와 아티팩트 들을 부수었으며, 주변에 살고 있던 왕족, 귀족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 뒤로 소녀의 행방은 묘연해졌으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마기가 흘러 나오는 '틈'이 생겼는데 마치 마계의 공습과 같더라.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실루엣이 아른거렸고 틈이 닫히더라는 말이 떠돌았다.
무주공산이 된 현계는 소녀와 검이 새겨놓은 상흔을 수습하는 데에만 수 년이 걸렸다. 지도자 층이 모두 궤멸하였으니 누군가 권력욕을 나타낼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 '검의 마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대부분 이었기에 언제 그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자리에 앉을 멍청한 자는 없으리라.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 이야기는 기록이 된다.
배드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