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디자인을 그만두고 개발을 시작한 이유

초록·2023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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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학창시절에 학용품이나 재밌는 아이디어 상품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쓸모있거나 예쁘거나 기발해서 사용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편리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제품디자인과에 진학했습니다. 초기엔 제품디자인을 위주로 공부했다가, UX/UI에 매료되어 전공소속을 이적하면서까지 UX/UI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8개의 UX/UI 프로젝트와 1번의 스타트업 1인디자이너와 1번의 UX디자인에이전시 인턴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본투비 디자이너야, 난 디자인이 너무 재밌어'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일련의 숙고과정을 거치고 나서,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하며 백엔드 개발자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디자인과 개발을 고민하고 계신 분들께 이글이 무언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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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대신 개발을 선택한 이유

첫 번째, 시각적 창조작업은 그만하고 문제해결은 계속하고 싶었어요.

제가 디자인을 좋아했던 이유는 문제해결 때문이었어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부분들을 시각적, 형태적, 인지심리적 요소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재밌었어요. 처음엔 제품디자인을 배우다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IoT에 관심갖다가 결국 UI/UX가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한 사용자경험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 UI/UX로 넘어왔었죠. UI디자인은 화면 구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사용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활동내용이 어느정도 데이터로 정량화 된다는 점 때문에 좋아했어요. 사용성을 개선하거나 비지니스 임팩트를 위해 특정 행동을 유도할 수 있죠. 인지심리를 기반으로한 UI 이론들도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프로젝트를 계속해보니 UI 구조는 어느정도 정형화되어있다고 느껴져 지루해졌고, 대신 달라질 수 있는 건 GUI인데(UI의 브랜딩이나 유려함 등 시각적인 부분), 제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너의 디자인이 낫니 나의 디자인이 낫니 이런 언쟁할 정도로 시각적인 부분에 열정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남이 만들어 놓은 형태를 따라해서 내 걸 그럴듯하게 만드는 건 잘했지만 온전히 저만의 디자인을 만들 시각적인 창의력이 부족하다고도 느꼈고 새로운 시각 언어를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평생 새로운 시각언어를 생각해야한다니 부담됐어요. 한 마디로, 제가 저의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디자인을 궁리하는 건 재밌지만, 그게 일이 되면 머리아파지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개발도 문제해결을 하지만 시각적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각언어나 사람의 마음과 같은 정성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고 CS지식이나 정량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작업하기 좀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기술은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의 성능을 올리려고 노력해도 시각영역이라는 특성상 주관이 크게 작용해, 성능 향상의 기준이 모호하고 객관화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컸습니다. 누군가 내 디자인이 별로라고 해도 그게 진짜 별로인건지 아닌건지 알 수가 없었죠. 제가 디자인을 배우려고해도 제 취향이나 감각에 의존해 다른 사람걸 모방하며 배워야하고, 성장의 방법이나 방향도 굉장히 모호했어요.

대신 개발은 성능지표와 성능개선의 원인과 결과를 비교적 명확하게 짚을 수 있어 그런 부분에서 스트레스가 적습니다.

세 번째, 개발자들의 공유 문화가 부러웠습니다.

디자인은 표절에 굉장히 민감하고 생존의 이유로 노하우를 공유하는 문화가 적습니다. 무언가를 새로 디자인하려고해도, 이게 누군가가 이미 시도한 디자인인건 아닐지 불안하고, 작업 다해놨는데 비슷한 작업물을 발견하면 그것도 스트레스였죠.

개발자들은 서로 공유하고 같이 성장하는 문화가 참 좋아보였습니다.

네 번째, 프로그래밍이라는 분야의 깊이감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는 수명이 짧다고들 많이 말합니다.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입장에서, 고연차의 비싼 디자이너의 능력이 필요한 경우는 잘 없고, 저연차의 적당한 디자인이어도 충분하다는 견해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연차가 젊은 감각으로 더 잘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연차로 갈수록 수요가 적어진다고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개발은 디자인에 비해, 한 명의 기술자로서 계속해서 성장해나갈 수 있는 시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생 파볼만큼 깊이도 깊고, 배울수록 업계에서 대우도 해주는 게 좋아보였습니다.

다섯 번째, 그냥 제가 공학이나 프로그래밍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

제품을 공부할때도 IoT를, UI/UX를 공부할때도 프론트엔드를 공부할정도로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냥 너무 멋져보이고 재밌어보였어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가 디자인 말고도 개발쪽도 끌리고 프로그래머가 되어보고 싶다는 걸 너무 아는데 프로그래머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발자의 길

프론트엔드? 백엔드?

서비스 개발을 하고 싶긴 한데, 프론트와 백 중 어느 걸 집중적으로 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프론트는 디자인할 때 이미 조금 해봤고 UI 디자인도 해봤으니 화면 만드는 일이 비교적 익숙하고 디자이너와 협업하기도 용이할거라 생각해서, 사실 프론트를 한다고 하면 빠르게 성장할 자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생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왜인지 설레지가 않았습니다. 프론트라는 특정 영역을 딱 정하고 그 곳을 깊게 파기보단, 그동안 해왔던 화면을 벗어나서 새로운 영역들을 탐색해보면서 저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인프라 등 디지털 프로덕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직접 해보면서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의 서비스 개발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결국 백엔드를 선택했어요.

개발자의 길 시작

그렇게, 4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에 인턴을 하며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컴퓨터공학 복수전공을 시작했습니다. 주전공 수업과 알바와 병행하며 수업을 듣느라 죽을맛이었지만, 제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이 길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웹이라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인프라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재밌고, 알고리즘이나 자료구조 같은 컨셉도 재미있고, 컴퓨터 동작 과정에 대해 알아 가는것도 재밌고, 그게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어떤 서비스가 되는 과정도 재밌습니다. 일이기도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파볼 수 있는 거대한 장난감을 찾은 느낌이랄까요?

디자인을 전공한 걸 후회하나?

늦은 시작과 복수전공으로 20살 때부터 컴퓨터공학을 주전공한 분들보다는 늦었고 관련 경험을 별로 못 해본 건 아쉽습니다. 하지만 디자인과 UX를 공부했기에 앞으로 평생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단걸 알게 됐습니다.

  • 일단 서비스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습니다. 디자인은 물론, 사용자와 비지니스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그동안 보고 듣고 직접 고민한 게 많기 때문에, 서비스를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남들은 오래 걸릴 시각자료나 사이드프로젝트 UI, 피그마로 뚝딱~합니다.
  • UI 디자인은 복잡한 정보를 어떻게 작은 화면 안에 보기 좋으면서 읽기 쉽고 사용성있게 정돈하느냐가 관건인데, 어떤 문서나 시각자료, 하다못해 코드 주석을 작성할 때에도 그 능력이 발휘되는 걸 느낍니다. 분명 커뮤니케이션이나 자료 공유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UI 컴포넌트 시스템을 만들 때 모듈화의 효율성을 고민한 경험덕에 코드도 객체지향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브잡스가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듣고 훗날 매킨토시에 적용했단 얘기가 유명하죠. 전공수업도 아닌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수강하고 타이포그래피의 예술성에 큰 감명을 받았지만 그 자신도 타이포그래피를 인생에서 써먹을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10년 후 매킨토시에 적용하게 되었죠. 저도 디자인 백그라운드가 프론트엔드도 아닌 백엔드 개발자로 사는데 큰 도움이 되진 않겠다 생각했었지만, 살다보니 분명 도움되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껴지네요. 다른 개발자들과 구분되는 분명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되고 이런 나라서 좋아요.

꿈 없던 고등학교 이과 3학년에 갑작스럽게 미대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고, 제품 디자이너와 UI/UX 디자이너를 지나 개발자까지. 직업은 계속 변했지만 뒤돌아보니 사용자의 문제해결과 making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기획~디자인~개발을 실습하는 저만의 학습 트랙을 밟아온 것 같기도 합니다. 모두 배우는 동안 너무 즐거웠고 값진 경험입니다.

[고등학교 생기부] 깊은 생각없이 적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계속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마무리

디자인과 개발의 갈림길에 선 분들 계신 분들, 저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아무쪼록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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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하고 성장하는 삶을 동경합니다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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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안녕하세요. 우연히 velog 탐방하다가 들어왔는데.. 저와 정말 똑같은 길을 걸어가시는 선배님이네요! 저는 제품디자인학과에서 제품디자인과 UXUI 모두 다뤘고 졸업 후 제품 에이전시를 다니다가 이젠 개발자로 틀었습니다. 제품디자인을 선택한 이유, 디자인에서 벗어나 개발을 선택한 이유도 정말 비슷해서 놀랐어요 ㅎㅎ 제품 디자인이 기술 뿐만 아니라 디자인으로 접근해 시각적/형태적/사용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기술과 심미성을 둘다 잡는 '발명가'란 느낌을 받았는데, 실무는 디자인 레퍼런스 조합으로 굴러가고 막상 어느 더 디자인이 낫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주관적인 영역이어서 참 진로 고민이 많았습니다...현재는 프론트엔드로 공부 중인데 나중에 백엔드도 다루며 풀스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록님의 앞으로의 커리어도 응원할게요..! 종종 들리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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