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희곡으로 총 4막으로 구성되어있다.
1막.
뜨레플레프는 가족들 앞에서 니나를 주연으로 자신의 희곡을 공연한다. 하지만 아르카지나는 아들의 희곡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 때문에 화가 난 뜨레플레프는 공연을 중단한다. 뜨레플레프가 자리를 떠난 사이 니나는 뜨레고린을 소개받게 된다. 니나는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금방 자리를 떠나고,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은 마샤는 도른에게 자신이 뜨레플레프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2막.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르카지나는 자신을 자랑해 보이고, 소린과 도른은 논쟁을 벌인다. 아르카지나는 시내로 나가겠다고 하지만 샤므라예프는 말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 자리에 동석해있던 니나는 갈매기를 사냥하고 돌아오던 뜨레플레프와 마주치지만, 뜨레플레프는 뜨레고린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자리를 떠난다. 뜨레고린과 니나는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뜨레고린은 창작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지만 니나는 그에 대한 동경과 함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친다. 뜨레고린은 뜨레플레프가 사냥한 갈매기를 보며 새로운 소설을 구상한다.
3막.
뜨레플레프와 뜨레고린의 사이는 악화되어 있고, 결국 뜨레플레프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했다. 아르카지나와 뜨레고린은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로 한다. 마샤는 뜨레고린에게 메드베첸코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아르카지나와 뜨레플레프가 만나고, 뜨레플레프는 아르카지나에게 붕대를 갈아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은 뜨레고린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충돌하지만 곧 화해하는 듯 보인다. 아르카지나는 완전히 떠나고, 뜨레고린은 놓고 온 물건을 찾으려다 니나와 마주친다. 니나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고, 뜨레고린은 그녀와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키스를 한다.
4막.
2년이 흐른 배경 설정이 나온다. 그 사이 뜨레플레프는 소설가가 되었고 니나는 뜨레고린과 연인이 되어 그의 사생아를 낳았지만 아이는 죽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고 니나는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고향으로 잠시 되돌아 온 상태다. 메드베첸코와 마샤는 결국 결혼했다. 하지만, 폴리나가 그렇듯이, 마샤는 메드베첸코를 사랑하지 않는다. 도른의 부름으로 아르카지나와 뜨레고린이 소린을 만나기 위해 돌아온다.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사이 혼자 작업실에 남아있던 뜨레플레프는 돌아온 니나와 마주친다. 뜨레플레프는 아직도 니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만, 니나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나는 당신에게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다며,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할 수도 당신에게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말을 하고 떠난다. 절망한 뜨레플레프는 권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한다. 그 때 카드놀이에 모두 빠져있었는데, 뜨레플레프를 찾던 도른이 이 상황을 목격하고, 뜨레고린에게만 귓속말로 뜨레플레프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충격 받은 뜨레고린의 모습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
극을 읽으며 처음한 생각은, '어렵다'였다. 희곡인 만큼 여러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성격, 사건들의 배경과 상황 등 여러가지를 파악하며 극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해야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글을 정리하면서도 극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움이 있지만 생각을 정리하여 남겨보고자 한다.
먼저 안톤 체홉은 갈매기의 의미가 ‘꿈’이라는 가정 하에 두고 이 글을 씀을 밝힌다. 근거로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갈매기의 죽음과 뜨레쁠례프의 죽음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갈매기는 뜨레쁠례프의 손에 죽었고 뜨레쁠례프는 자살했다. 뜨레쁠례프는 죽은 갈매기를 니나의 앞에 바치며 ‘이렇게 곧 나도 나 자신을 죽일 겁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 문장에서 ‘내가 갈매기를 죽인 것처럼’이라는 어구가 삭제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갈매기를 죽인 행위는 나의 꿈이 처참히 짓밟혔다는 시위 행위이며 이 꿈으로 인해서 자신마저 파괴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는 니나가 자신을 갈매기라 칭하며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다고 밝힌다는 점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니나는 갈매기가 되어가고 있었고 자신을 갈매기라 칭할 수 있었다.
셋째는 뜨리고린이 갈매기를 박제해 두었으나 니나와 헤어진 뒤 갈매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뜨리고린에게 니나와 맺어지는 것은 자신의 꿈이었다. 그러나 니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고 아르까지나에게 돌아온 뜨리고린은 갈매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니나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꿈을 잃은 그가 ‘꿈’을 의미하는 박제된 갈매기를 기억할리 만무하다.
위의 세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삼아 갈매기가 꿈이라는 가정 하에서 각 인물들이 꿈을 대하는 모습을 범주화하여 비교·분석하고 작품이 말하는 꿈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2. 호수(바다)를 벗어난 갈매기
갈매기는 호수(바다, 이하 호수)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갈매기가 물고기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곳이 호수다.
교수는 지난 11월 28일 수업에서 “갈매기는 호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호수는 인간 삶에 필요한 것들이 있는 세속적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필자는 호수가 등장인물들이 바라는 이상향이라고 생각한다. 갈매기는 겨울철새라서 바다를 찾아 이동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러니 바다는 갈매기의 이상향이 된다. 또 희곡 속 니나의 대사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아버지와 계모는 이곳에 못 오게 해요. 여기는 보헤미안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면서…… 배우라도 될까 봐 걱정들이시죠……. 하지만 이곳 호수로 갈매기처럼 끌려요…….
여기서 이곳은 ‘호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생명체는 보헤미안(집시)과 갈매기다. 다음 국어사전에서는 보헤미안을 사회 관습에 거리낌 없이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거나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호수는 사회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곳이다. 또한 호수는 갈매기의 이상향이다. 꿈을 꾸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이상적이고 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근거로 무대 위 극장을 들 수 있다. 막이 있고 그 뒤로 첫 번째, 두 번째 측면 장치가 있고 그 뒷면은 텅 빈 공간이다. 전혀 장치를 하지 않아서 호수와 수평선이 그대로 보이는 무대다.
이 무대는 주인공 뜨레쁠례프와 니나의 꿈이 실현되었어야 할 이상적 공간이다. 무대에서 호수와 수평선이 그대로 보였다는 것은 무대가 가리키는 곳이 호수이며 호수가 이상향이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필자는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이 이상향인 호수를 벗어나 방황하는 갈매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