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체 방학 중 급 감성 폭발

내가 개발자? 무섭다. 떨린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시작해서 소설 ⌜천 개의 파랑⌟으로 되짚어본 개발 도전기 중간 점검

2020년부턴 휴가를 내도 마땅히 할 것도, 갈 곳도 없었다. 재택근무 중에 내는 휴가란 어차피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에 손을 대게 되는 업무의 연장이었다. 이렇게 계속 연차와 근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일부러 일정을 만들어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그날 하루뿐 이런 짧은 일정으로는 이전과 같은 휴가의 효과를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확진자만은, 격리자만은 되고 싶지 않아서 여행이라는 휴가의 명분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 6년 연속 근무자라며 받은 2주 휴가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2주 동안 회사를 안 가면 일을 안 하게 되나? 어차피 노트북만 열면 사무실인데. 달리 갈 데도 없고 어차피 집에만 있을 텐데? 오래 다녔답시고 그렇게 휴가를 내면 내 일은 팀원들이 짊어지고? 1년에 낼 수 있는 휴가가 30일이었지만 이게 곧 자가 격리와 비슷한 민폐라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포기하고 퇴사해버렸다. 그러고 3일 후에 출근하듯이 boot camp를 시작했다. 분명 이번 주 금요일이 마지막 출근이어서 다음 주엔 한가롭고도 초조한 월요일이 시작되어야 자연스러운데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boot camp가 시작됐다. 그 과정인 3개월이 지난 지금, 오랜만에 한 번 쉬어보고 싶었다. 진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난 2주간을 자체 방학으로 지정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았다. 그 와중에 참아왔던 덕력을 올릴 겸 Netflix, YouTube 등을 보는데 잠시라도 이 마약 같은 OTT들을 멀리하고 있노라면 스멀스멀 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 어쩌자고 내가 배운 개념을 족족 blog에 옮겨 쓴 거지? 내가 이해한 문장을 blog에 옮기면 그건 그냥 강의의 자막 아닌가? 이게 blog posting 거리가 되나? 이런 건 blog 생태계의 오염 아닌가?
• 하지만 학습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이렇게라도 적지 않으면 따로 어디에 정리해두지 않는 이상 놓치고 가는 개념이 많을 것 같다. 미련해 보이지만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 동기들은 이력서를 적었구나. 나도 얼른 적어야겠다. 벌써 취직한 사람도 있네!
• TOSS는 언제 Web 접근성 project까지 했냐... 대단하다. 내가 다녔던 회사랑 출발선이 비슷한 것 같은데 성장 속도가 너무 다르다.
• design system도 만들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걸 접목한 후 나온 feedback으로 자기들만의 협업 tool을 만들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 할 맛 나겠다. 부럽다.
• 나는 개발자가 되기로 한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건가? 3개월 간 경험해 봤고, 지금 바꾸기에도 늦지 않았는데.

사실 2주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기간을 위해 소소하지만 루틴을 만들었다. 그동안 꾸준히 무엇인가를 했기에 그 속도를 아예 0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웠다. 그래서 정한 소소한 루틴은 바로 '매일 ⌜초등 키 수학 총정리 12일 완성⌟ 풀기! ･ᴗ･;ㅎㅎ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 초등 수학이라니. 조금 웃기지만 이 조치는 매일 무엇이라도 꾸준히 하겠다는 나의 진지한 목표였다. (그리고 막상 풀어보면 뒤로 갈수록 의외로(?) 어렵다.) 이 참고서는 내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성공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 마련해둔 것인데, 그간 어려운 coding과 programming으로 고통스러웠던 나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자 pace를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이었다.

2015년인가 2016년이었던 것 같다. 회사 사람 중에 운동에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는 사람이 건강 상의 이유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 목표가 플랭크를 하루에 10초 동안 하는 거였다. 앞에서 티 내지 못했지만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겨우 그 정도에 '목표'라는 단어는 과하지 않나? 그렇게 한다고 건강해지나?'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다 퍼뜩 기시감이 들어 웃음이 그쳐졌다. 이보다 더 예전인 대학생 때가 떠올랐다. 한 번은 체력 테스트를 했어야 했는데 그 종목 중에 하나가 윗몸일으키기였고, 난 감사하게도 큰 노력 없이 1분에 50개 정도를 해내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놀랍게도 윗몸일으키기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상체를 일으키는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윗몸일으키기보다 어려운 푸시업을 연습할 때 이 선배는 윗몸일으키기 연습에 집중했다. 본의 아니게 크런치만 한 것이다. 이후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 이 선배는 결국 '윗몸일으키기 한 개'라는 기록을 세웠다. 기시감은 이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 사람의 상체를 올릴 코어 힘이 45º가 최대였는데 상체를 일으키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연습에 연습을 해서 해낸 것이다.

그 사람한텐 그간의 연습이 회사 동료의 플랭크 10초와 같았을 것 같다. 누구는 쉽게 해내지만 자신은 온 힘을 집중해서 버텨야 하는. 플랭크로 건강을 증진하고 싶다는 회사 동료는 수줍게 말했었다. '10초를 성공하고 나면, 15초도 버틸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간 1분도 버틸 수 있을 거고, 1분씩 몇 세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선배도 최종 테스트 땐 1개보다 훨씬 많이 해냈던 것 같다.

맞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건방지게 웃을 일이 아니다. 나한텐 이런 게 있나 하는 마음에 방학용으로 마련한 거였다. 초등 수학 풀기. coding 하다가 또 막히면 '적어도 내가 이 문제는 척척 풀 수 있다.'라며 중등 수학을 풀어야지.

나한테 개발은 뭘까.

방학 동안 한 다른 일은 책을 읽은 것이다. 아, 책 이야기를 하기 전 잠시 내가 개발자라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계기 중 하나를 소개하고 싶은데 이 이야기는 아래의 드라마 대사로 갈음할 수 있다.

“어디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거야.
잘 못하는데, 엄청 열심히 하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로 했다는데... 나중에 물어봤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그랬더니?”

“... 좋대. 바이올린이.
    “좋으니까. 자꾸 하고 싶고, 잘하고 싶어.”
자꾸 하고 싶고, 잘하고 싶대.
그때 알았어.
‘아, 나는 그냥 바이올린을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걔처럼 사랑하려고 애써봤는데
그게 안 되더라.
그래서 그만둔 거야, 바이올린.”

“그래도 진짜 그만두는 건 대단한 건데... 용감했네, 너.”

“이 일 재밌어.
하면 할수록 잘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고, 평생 하고 싶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쿵쾅거리는 느낌 뭔 줄 아냐?”

“... (씁쓸함, 미어짐, 그리움, 아픔) 알지.”

“그래, 그거야.
응? 내가 특별히 용감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게 다야.
심장이 반응하는데 어쩔 거야.
직진하는 거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것 같고 인정하기 싫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생각에 확신이 들 때,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해하고만 있을 때 나한텐 주인공에게 주어진 바이올린이 없는 게 서러워서 아닌 밤중에 펑펑 울었었다. 나도 이 사람처럼 막연히 사랑하는 바이올린 같은 걸 갖고 싶었다.

아니면 꼭 그런 게 없더라도 어딘가에 몰두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한 coding이 나에겐 그 '어딘가'이다. 조심스럽지만 지금 나에게 개발은 개발자, 즉 되고 싶은 wanna be가 아니라 언젠가 찾게 될 wanna be를 이루어줄 how-to이다. operation이 좋아서 이전 회사에 오래 다녔다기 보다 나에게 operation이라는 직무가 주어졌고, 내가 좋아하는 제품의 성장을 내 업무로써 함께하고 싶었다. 지금은 upgrade 되었다. UI/UX로써 내가 했던 운영으로 닿기 힘들었던 효율화를 이끌어내는 '개발' 직군을 선택했고, 얼른 내가 좋아하는 service를 찾아 직접 개발하고 그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개발을 upgrade하고 구체화하고 싶다.

책 얘기로 돌아와서 내가 책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진 건 아래 내용 이후이지만 묵직한 무언가가 토르의 망치처럼 내 마음에 확 와닿은 건 아래 부분이다.

콜리는 그런 연재의 둥글게 말린 등과 뒤통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콜리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수리할 때 자주 빛을 뿜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중하며 콜리의 다리를 만지던 순간과 그릇에 담아 온 씨리얼을 퍼먹으며 어느 부분이 잘못 연결되어 있는지 도면을 살펴볼 때에도 빛이 나왔다.
지금도 연재의 몸에서는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콜리가 연재의 등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연재는 “뭐야?” 하고 물었지만 콜리의 손을 치우거나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콜리는 오래도록, 연재의 진동이 느껴질 때까지 손을 올려둘 수 있었다.
떨린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늘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투데이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작은 화면에 기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인데.

⌜천 개의 파랑⌟ 중

boot camp 과정 중 내가 맡은 부분을 엉금엉금 해낼 때, 이후 혼자 공부하며 천천히 하나하나 이해할 때 정말 오랜만에 몰입을 통해 내 몸에서 빛이 나고 에너지가 뿜어나온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취미 생활도 아닌 일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는 건 너무나 이상적인 삶일 것 같은데 이 일이 실현될 수 있는 직무가 개발 직군 아닌가. 그래서 아직 부족하지만 도전을 철회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조금 더, 아니 더 강하게 느껴보고 싶다.

나도 드라마 주인공의 violin과 비슷한 걸 찾았고, 어렵지 않은 곡이어도 내가 선택한 violin으로 열심을 다해 연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초조하고 떨리지만 설레기도 한 방학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