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Non Divina Commedia

양정훈·202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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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no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 속에서 헤메고 있었다.
단테 – 신곡

외계인이라는 존재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여지를 준다.
그것이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인간과 비슷한(어쩌면 뛰어난) 지성체를 가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콘택트’는 인간이 부딪히는 다양한 상황에 우리를 데려다준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 존재나 운명론의 관점, 외계인을 대하는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 등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과 인간의 태도를 중심으로 ‘콘택트’를 바라볼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특정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내부 세계에서는 자신이 딸을 잃는 경험과 슬픔이 중간중간 스쳐 지나간다.

주인공 본인은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겪을 뿐이다. 외부 세계에서는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외계인의 목적을 알기 위한 정부의 요청으로, 외계인이 머무는 지역으로 가게 된다. 우리는 주인공이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기존의 세계와 충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주인공은 혼란스러움과 이질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신곡의 단테가 어두운 숲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신곡은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이끌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모든 것을 이끌어주는 베아트리체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삶을 ‘비신곡(非神曲)’이라 칭하고 싶다. 나는 우리 삶에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인도해주는 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지(全知)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신성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이질적인 것을 접했을 때 두렵고 나약하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으로 향하게 된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의 문을 통과하고 지옥에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런데 단테의 관점에서 가장 두려웠던 곳은 문 너머의 지옥이었을까? 단테가 제일 두려웠던 곳은 베르길리우스가 없던 그 숲 속일 것이다. 어쩌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인 비신곡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세상이라는 어두운 숲 속에 던져졌지만, 우리에게 인도자는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야 하며, 우리가 단테이자 베르길리우스여야 한다. 그러나 길이란 것은 가야 할 곳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모른다면, 길을 만들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인생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길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다는 막막함만 보인다면, 우리의 삶은 인페르노(Inferno)에서 영원히 맴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단테이자 베르길리우스다. 우리가 무지(無知)라는 숲 속에서 방황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내적인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내부의 베르길리우스를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스스로 지옥의 문을 걸어 들어가는 용기와 믿음을 가진다.
‘여기 들어오려는 그대,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고 말하는 지옥의 문을 걸어 들어온 그대.
그대는 이미 충분히 위대한 존재이다.

Purgatorio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영화가 진행되어가면서, 주인공은 외계인과 언어를 나눈다.
우리의 언어를 알려주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정부에서는 외부적인 요인을 이유로 주인공에게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의견과 행동을 관철한다. 이 이방인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우주선을 공격하기도 하고, 전쟁도 일어날 뻔 한다.

신곡에서 연옥은 죄를 견디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신을 통찰하고 죄를 견디며, 속죄한다.
모든 속죄를 마치면 연옥의 죄인들은 천국으로 갈 수 있다. 단테는 연옥에 들어가기 전 일곱 개의 P를 이마에 새김 ‘당한다’. 거룩한 천사께서 우리에게 인내할 덕목을 정해주고, 견뎌낼 연옥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 속죄하는 연옥의 사람들을 보며, 이마의 P를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이곳에서는 지옥처럼 단테를 두렵게 만드는 것도 없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인내하는 죄인들을 보며 반성과 경건함을 느낀다.

이제 우리는 비신곡의 연옥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신곡의 연옥과 인간의 연옥은 다르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옥보다 더 격렬해야 한다.

우리의 노래에서 우리는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스스로 이마에 P를 새겨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은 수많은 가시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발걸음은 한걸음이 천근일 것이며, 그곳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비신곡의 연옥이 신곡의 연옥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가짐 역시 인간의 연옥에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우리는 저항하고 이겨내야 한다. 역경에 순응하고 인내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사자처럼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에게 포효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무서운 악마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며, 우리를 위태롭게까지 할 것이다. 때로 지치고 이 연옥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기억하라. 당신은 지옥의 문을 열고 자신을 이 곤경에 던져 놓은 사람이며,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 이마에 칼로 P를 새길 것이며, 역경의 피와 살로 P를 지워나간다.

영화의 주인공을 예시로 들면, 주인공이 겪은 외부적인 역경들은 주인공의 걸음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악마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정부이고, 외계인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들도 주인공의 삶을 끝내지는 못했으며, 주인공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주인공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며, 자신을 비신곡의 천국에 데려다 놓는다. 어떤 안내자도 없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낸 주인공.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Paradiso

인간은 노력하는한 방황하노라
괴테 – 파우스트

단테는 연옥까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다가, 천국에서는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는다. 천국을 오르며, 성스러운 영혼들에 시험을 받는다. 그 결과 훌륭히 천국의 끝까지 올라, 지고한 곳에서 ‘영원한 사랑’에 인도되고, 천국으로의 여행을 마친다.

자, 우리는 공포에 떨고 있던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를 막는 가시덤불과 악귀들을 잘라내며, 천국으로 왔다. 행복하게도 이곳에는 영원한 안식과 사랑 따위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지옥으로 우리를 내몰아야 한다.

간혹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 충분한 성공과 얻었음에도, 자신을 파멸로 던지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나는 그것을 비신곡의 천국에서 신의 천국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 그 어떤 곳에도, 영원한 안식을 찾을 곳은 없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우리가 삶이 끝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한 가지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그리고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이 대답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는 그동안 걸었던 모든 발자취가 천국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콘택트의 결말은 비신곡의 천국을 삶에서 경험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은 ‘헵타파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시간개념을 이해한다. 그 결과 주인공은 사람의 1차원적인 시간대가 아닌 다른 시간대를 살게 되며, 자신의 모든 삶의 과정을 알게 된다. 맨 마지막 장면에 남자 주인공과 키스를 하면서, 앞으로 후회하고 헤어질 모든 과정을 알지만, 다시 한 번 그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다양한 뜻을 이루며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그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바란다면, 그것은 당신을 끝없는 심연과 자기파괴로 이끌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그 방황에는 두려움에 떨었던 지옥 바깥도, 문을 열고 걸어나간 지옥도, 격렬하게 살아냈던 연옥과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국까지 모두 포함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천국을 경험했다면, 다시 웃으면서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긍정하고 기꺼이 그 삶을 다시 살아내고자 하는 인생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비신곡의 천국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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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현실로 만드는 성장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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