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

milkboy2564·2021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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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전공자에 문과 출신이다.

수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고리즘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 개발자가 되기 위해 아둥바둥 대는 중이다. 오랫동안 나를 아는 사람이 보면 참 웃긴 일이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고해성사하듯 얘기함으로써 이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었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공부 대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책 대신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일진, 양아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지만 나는 남을 괴롭히지 않았고 부모님의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물론 이건 온전히 나의 생각이다..^^;) 어쨋든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당연히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고 나 또한 대학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곤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다보니 군대갈 시간이 왔고 남들과 같이 입대를 했다.

군대

본인은 자대배치를 받는 동시에 GOP근무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근무로 보내게 되었다. 총 8개월의 근무를 하게 되는데 그 중 초반 2~3개월은 상당히 시간이 잘 갔던거 같다. 내가 막내였다보니 나보다 선임들과 근무를 들어가게 되는데 그들과의 근무는 내가 유재석이고 신동엽이 되어야했다. 하나의 주제를 물어보면 나는 쥐어짜듯 나의 얘기를 내뿜었고 그동안 꽤나 재밌었던 인생을 살았는지 내 얘기에 선임들은 좋아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더이상 짜낼 얘기도 없을 찰나의 근무는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합쳐서 약 8시간의 근무를 하는 동안 서서 졸기도 하고 가끔 지나가는 고라니에 흠칫 놀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문득 전역하면 뭐 먹고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사회로 나갔을 때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보는데 마땅히 할 게 없다는걸 깨닫고는 나의 지나온 과거를 후회했다. 나는 원래 지난 일에 대한 후회를 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고 내가 온전히 나의 삶을 책임져야할 시기에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가 암울하니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후회가 내 인생을 바꿔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바뀌면 된다. 오랜기간 고심을 한 결과 그동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대학교를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공부하기로 결심을 하긴 했는데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나와 친하게 지내던 동기 두 명이 있었다. 그 둘은 한 살 형이었고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며 군대에서도 자기계발을 하려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를 물어봤고 너가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중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라고 말해줬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해 중학교 수학교과서를 모조리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군대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어느덧 전역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1월 28일날 전역을 하는데 전역하고 들어가게 될 재수종합학원이 2월 초에 개강을 한다는 걸 알고 조금은 우울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마지막 휴가를 나가 학원 등록을 하고 왔다.

재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재수의 기간은 솔직히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이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설명을 하자면 나는 우선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왜냐 떨어질 성적이 없기 때문이다(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 성적이 어이가 없긴 하네..) 바꿔 말하면 올라갈 일만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나는 3월 교육청부터 11월 수능까지 선형적으로 성적이 올라가서 수능을 가장 잘 봤다.
그리고 재수생활에 떠도는 괴담(?) 같은게 있는데 여름에 슬럼프가 찾아온다는 것과 이성문제(학원생들 사이의 연애 등)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도 연애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여름에 힘들어서 단체로 여행을 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남녀가 같은 공간에 12시간 이상 붙어있으면 없던 정도 생기는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든다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 덕분에(?) 나는 매 달 성적우수자로 학원비 감면 혜택을 받았고 현재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효도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학원비가 비싸도 너무 비쌌다. 매달 200만원 되는 돈을 내야 하는데 군대에서 적금으로 모아 나온 500만원도 첫 3달 학원비를 내는데 다 썻고 나머지는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너무나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랬기에 연애, 슬럼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부만 했었던 거 같다.
계속해서 미친듯이 공부만 했고 수능을 보게 됐다. 살면서 그렇게 떨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 날을 위해서 지난 날을 공부했기에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나는 수능을 그동안 봤던거 보다 잘 봤다. 누군가가 봤을 때는 잘봤다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내 노력이 보상받은거 같은 기분을 느꼈고 행복했다. 그렇게 인천대학교 무역학부에 입학을 하게 됐다.

무역 그리고 컴공

떨리는 마음으로 입학을 하고 학교 생활을 즐겼다. 우리 안에서 탈출한 사자처럼 그동안의 나를 옥죄어왔던 억압들을 벗어 던지고 캠퍼스라이프를 미친듯이 즐겼고 밤새 술을 먹고 다음날 수업도 안 들어가기도 하고 과방에서 허구헌날 자면서 1학기를 보냈다. 딱 6개월, 그거면 충분했다. 그동안의 내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무역학도로써 계속해서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3학년이 되자 취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무역학사라는 학위를 가지고 내가 사회에 나가서 기업의 구성원으로써 발전을 도모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컴퓨터공학부를 복수전공할 생각은 솔직히 말하면 뭐 엄청난 비전이 있어서 또는 무언가를 개발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쉽게 말해 취업에 더 많은 길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 당시 나의 여자친구도 같은 학교의 컴공과였는데 그 친구 때문에 고민에서 Go로 넘어간 것 같기도 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컴공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마치 거대한 바다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물 안에서 헤엄치는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프로그래밍을 시작할 때 C언어로 시작했는데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수업을 듣게 됐다. 처음은 좋았다. 마치 Hello World를 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변수를 배우고 제어문을 배우고 반복문을 배우고 이렇게 기본적인 기초들을 배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말했듯 우물 안의 개구리였지만 말이다. 그 이후 포인터를 배울 때는 뇌의 과부하가 걸렸고 순환을 배울 때는 왜 굳이 저렇게 가야하나 근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함수, 동적할당을 배울 때는 거의 포기 하다시피 했다. 사람이 겸손해지는 수업이었다.
프로그래밍은 재능이다 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다. C언어 수업을 들을 때 복수전공생이던 나는 빈 자리에 찾아가 앉아서 수업을 들었는데 매번 나와 같은 자리에 앉던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 학생은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만 했는데 실습시간에는 벌떡 일어나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를 누구보다 빠르게 끝내고 강의실을 항상 제일 먼저 나갔다. 나는 옆에서 끙끙대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옆에서 자다가 일어나서 홀라당 끝내고 나가버리니 현타가 굉장히 심하게 왔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가 군대에서 중학교 수학책으로 수능준비를 한 사람 아닌가. 공부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하는거라는걸 누구보다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써 포기하지않고 지금도 그렇듯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솔직히 개발은 내가 지금껏 했던 어떤 것보다도 어렵다. 내가 아닌 구글이 문제를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고 하루종일 머리는 싸잡고 고민을 해도 해결이 나지 않았던 것이 세미콜론 하나 때문에 디버깅이 안됐던 경우도 있었다.
개발은 어렵다.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다.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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