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를 읽고

Roeniss Moon·2023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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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너무 실망스러웠다. 애초에 '휘게'가 철학자 이름일거라고 예상한 시점에서 완전히 잘못된 기대를 갖고 시작한 셈이다.

내가 예상한 것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운운하면서 한국인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글이었는데, 실상은 약간의 심리학을 곁들인 위로서(= 자기계발서 - 조언)였다. 많은 내용이 학부 때 '들어본 것'이었는데 나는 내가 학부 때 들었던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안좋아한다. 아무튼 이 책은 심리학과 행복에 전혀 고민해보지 않은 부류가 읽기 적절한 내용이었고, 나로서는 꽤나 라이트하게 책장을 넘겨가며 읽을 수 있었던 스낵같은 책이었다. 매 소단원이 끝날 때마다 이 한 단락만 읽는것으로 책의 90%는 이해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완전히 나쁘진 않았다. 책에서 나온 내용의 90% 정도에 대해선 "난 그렇게 생각안하는데"라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비판적 사고를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 행복에 대해 약간이나마 더 고민할 수 있었다는 부분은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를 꼭 언급하고 싶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없다. 챕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치 그때그때 생각나는 신변잡기를 휘갈겨 적어놓은 오만가지 에세이의 집합체같은 책이다. 논리는 즉흥적이고, 조금의 깊이도 없어 똑같은 주장을 반대로 뒤집어도 거의 동일한 수준의 논리를 구사할 수 있는 글들 뿐이다. 한 마디로, 나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부분이 수두룩했다.

뭐랄까, 이 책을 하나의 사진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특정)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를 읽고 심한 회의감을 느껴본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이 책의 분위기가 감이 잡혔으리라.

아무튼 읽긴 읽었으니 내가 생각하도록 만들어준 대목들은 적어놓으련다.


휘게 :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에서 오는 행복

우리가 행복의 비밀을 알고도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나의 삶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인지하는 생리적 흥분은 기본적으로 오래 견디기가 힘들다.

(입학, 출산 등) 이벤트는 대개 인생의 초반에 한정되어 있다 (...) 만약 행복을 어떤 사건에서 경험하는 긍정적 정서로 규정한다면 우리 인생에는 그럴 만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항상 개인주의 문화의 행복도가 집단주의 문화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의 경험조차 행복 아니면 불행이라는 구도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럼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구가 줄어야 할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과거의 기억을 바꾸는(미화하는) 이유는 현재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과거가 아름답기 위해서 현재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예전엔 좋았는데~ 하는 말투를 말하는 것임) 도피로 얻은 행복은 행복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우리도 (서양인이 동양인 비하하듯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잘 모르는 것 같다. 유럽 남자가 한국 남자보다 잘생겼다는 인식 말이다. 더 나쁜 것은 그래도 한국인들이 동남아 사람들보다는 잘생기고 예쁘다는 생각이다. 매우 악랄한 인종주의적 태도다.

큰 집에 사는 사람이 작은 집에 사는 사람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듯, 국토의 면적이 그 나라 사람들의 지위를 결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건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이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 같을 거라는 전제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신뢰 체계가 카페에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는 이유다. '저 사람이 설마 내 노트북을 가져가겠어?' << (몇 안되는) 공감하는 대목이다. 나는 한국인이 카페에 물건을 두고 다니는 현상을 "CCTV가 많으니까"로 해석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위화감을 느끼는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특징이 있다. 즉 자기 주변 사람 뿐만 아니라 재벌가나 특급 스타들에게서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정당하게 돈을 벌었더라도 말이다. (...) 사회학자들은 이를 '평등주의'라고 명명한다. 한국식 평등주의는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한다. '자식 교육 잘 시켜 신분상승 꾀해보자'가 이러한 의식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 한국인들은 누군가 무언가를 가진 것을 보면 자신도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고, 그걸 갖지 못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재벌가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딘가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다는 기사에는 어김없이 "한국엔 할 게 없어서 그런다"는 댓글이 발견된다. 갈 곳이 없어서 산천어 축제에 175만 명이 몰리고, 산에 등산객이 모이는 이유도 갈 데가 없어서고, 프로야구 관객이 몇백만 명인 이유도 하고 놀 게 없어서고,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는 이유도 딱히 할 게 없어서라는 거다. (...) 한국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우리나라의 시스템과 문화와 국민성 때문이고, 외국에서 범죄 소식이 들리면 우리는 더한 놈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황소개구리가 생태를 교란하면 "건강에 좋다고 소문만 내면 싹 사라질텐데"라고 예언하며, 일본이 지진에 질서있게 대응하면 "한국에서 지진 났으면 난장판 됐을텐데"라고 예측한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반성을 많이 하는 것일까? (...) 이를 사회 지향적 자기관이라고 한다. 보편적 원리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는 일에 익숙한 것이다. 서양의 반성은 self-reflection 에 강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 가능할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잠깐 그 일을 해보고서는 "재밌네, 할 만하네"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때로는 피땀으로 때로는 눈물로 고난을 견디며 엄숙하고 숭고하게 맞이하는 그 시간이 불행이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행복은 성취 그 자체나 결과가 아니다. 노력 자체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성취에서 오는 쾌감은 곧 사라지고 허무감이 뒤따를 뿐이다. '부정적 정서 = 불행'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

3포 세대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다르다. 일본인은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고 달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억울하고 화가 난다. 따라서 3포 세대라는 말은 절망의 결과로 일어난 포기, 합리화에 가깝다.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든다. 하지만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따라서 관계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소모가 아닌 투자로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이코노미스트다.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것이 행복이 될 수 있다. 나 자신과 주변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과연 비교를 많이 해서 불행할까?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남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리고 더 높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고통과 인내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감정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 다시 봐도 환단고기 느낌이 너무 나는 것 같다. 여기가 책의 절반 즈음인데 이 때부터 급속도로 이 책을 보는 것이 피로해졌다.

진정한 행복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지만 그 결과에 영향받지 않는 데서 온다.

나는 '어차피'라는 말을 대단히 싫어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게 없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몰입할 줄을 몰라서 불행했던가?

실존을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불안을 만나게 된다. 나의 불안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불안은 실존적 불안이 될 수 있다.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려면 뉴스 같은 건 멀리해야 한다. 뉴스에는 불쾌하고 화나는 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일까? 행복 연구들은 책임 있는 시민(신민이 아니라)이 되기 위해 불쾌한 감정을 이겨내고 당장의 행복과는 관계없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 필요도 있다는 사실은 왜 언급하지 않는걸까.

징징이가 찾으려는 행복은 자신의 현실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제 모습과도 동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추구하는 이상에 대비하여 현실은 더욱 남루해지고 함께하는 이들의 저급한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내가 사는 세살을 지옥으로 만들고 나와 사는 사람들을 상종 못 할 이들로 만들어 얻어지는 행복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실존주의 철학은 행복을 일시적인 긍정적 정서 같은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실존 철학자는 많지 않은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 니체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라 했다.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고 해야 할 역할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더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을 높이라는 조언은 독이 된다. 진정한 자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자존감은 답이 보이지 않는 현 상황을 지속하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목적의식과 즐거움의 관계는 역U자다.

행복이 긍정적 정서라면 무엇이든 모르는 채로 있는 편이 훨씬 행복하겠지만 알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때부터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를 불행하지 않게 사는 더 나은 방법은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스스로 찾는 삶의 의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주변에 폭넓게 관심을 가져라. 개인적인 관심으로 해오던 일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해봐라. 또한 일시적이지 않은, 장기적인 관심에 집중하라. 관심이 크고 장기적인 사람이라면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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