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네시스

김현수·2022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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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말해. 나는 아주 멋진 인생을 보냈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유언이다.

매일 나는 해리적 자아를 마주한다. 그것은 목소리의 형태이기도 하며,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당위적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어떠한 의식의 형태로 아마 프로이트에게는 초자아, 헤겔이나 사르트르에게는 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무언가는 나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자기객관적 관조자라고 하고싶다. 아마도 칸트를 읽으며 보았던 것 같은데 더이상 철학에 깊게 빠져들 시간도, 스스로에게 침잠하는 시간도, 철학의 저변에서 뛰어놀 수 있었던 시기는 떠나버려 더이상 찾아볼 여력도 없다. 무슨 단어인지가 중요한가? 아무튼 필자는 그것을 자기객관적 관조자라고 할 것이다.

그 관조자는 나에게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나는 매번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아와 현실간의 간극이 커지면 고통스럽다. 실력없는 자존심은 결국에는 추락한다.

나 또한 지식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식은 많지만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니 내가 능력 없는 선생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를 가르치는 저 교수는 지혜 있는 자일지 아니면 나처럼 지식을 좇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말 해본 적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학생을 바라보듯이 저 교수도 학생들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려나. 덕 없는 자가 덕을 가르치려니 덕은 교육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공상에 빠진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가리킨다면 적어도 달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그 언저리에 무언가가 있다는 인식까지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저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까지만 알려주고 선현들은 죽고 말았다. 나 또한 그렇게 죽고야 말 것인가?

스스로들을 미발(未發)한 요소가 있다고 여기는 이 사회의 풍조가 필자는 갑갑하다. 각 개인에게 미발(未發)한 요소, 즉 완전한 잠재력 따위는 없다. 이는 정약용의 성리학 비판과 같다. 정약용은 성리학에서의 성선설을 부정한다. 그렇다고 인간의 선하여지고자 함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덕인 인의예지가 인간의 본성이고 완전한 형태를 이미 가지고 있음은 각 개인에게 윤리적이어야 함에 대한 욕구를 일으키지 않다고 주장했다. 희철학에서 덕(Arete)를 최고의 탁월성의 상태라 하듯. 탁월성은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실천적 지혜니 중용이니 그런 개념에서 벗어나서 윤리의 본질을 정리해야한다면 그것은 주체가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지각하고, 동시에 옳은 것을 선택할 의무감, 그리고 기꺼이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를 책임지려는 의지, 그리고 책임의 범위의 확장이 윤리에서 가르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이미 완성되어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삶을 살려 하지 않고 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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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학교 소프트웨어학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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