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우주에서의 사랑

윤상면·2025년 12월 31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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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봤다. 내가 평소에 흥미롭게 보는 웹툰 쿠베라와 유사한 점이 많기도 하고, 나에게 울림을 주는 장면들이 많아 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0. 다중우주란?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중우주란 가능성에 따라 우주가 분기하여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면 생명체의 선택에 따라 하나의 우주가 여러 가지 갈래로 분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Part 3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에블린이 영수증을 왼쪽에 놓을지, 오른쪽으로 놓을지 고민하다가 양쪽의 우주를 겹쳐 보여주는 장면이 이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상적인 선택에 의해서도 분기되는 우주니, 셀 수 없이 많은 다중우주가 존재할 것이다.


웹툰 쿠베라의 3부에서도 다중우주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선택에 따라 우주가 분기한다는 것이다.
다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쿠베라가 다른 점은, 쿠베라에서는 가능성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남겨진 우주는 붕괴한다고 언급된다. 즉, 현실로 판정된 단 하나의 세계선을 제외하면 가능성의 세계는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딜레마가 생긴다.

  • 가능성으로 남겨진 우주의 생명체들이 멸망하는 것이 정당한가?
  • 가능성의 우주에 남겨진 생명체가 현실 우주를 대체하면 어떻게 되는가?

더 근본적으로, 가능성과 현실을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1. 수많은 우주의 수많은 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 2개를 뽑으라면 '에블린'-'조이'와 '에블린'-'웨이먼드'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우주에서 내 손가락이 핫도그가 되든, 내가 돌이 되어버리든 상관없이 그 관계성은 일관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에블린이 어떤 가능성의 우주에 가도 상응하는 그녀의 웨이먼드가 있다. 비록 그와 그녀가 이어지지 않은 우주도 있지만, 그 우주의 성공한 웨이먼드는 그녀와 소박하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우주를 꿈꾼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에블린은 바로 그 빨래방을 운영하는 세계선의 에블린이었고, 크게 성공한 자신의 인생을 동경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이후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우주든 어떤 인생을 살든, 함께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계속 던져주는 것으로 느껴졌고 나에게는 굉장히 와닿았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수많은 우주를 넘나들 정도로 스케일이 거대하지만 정작 그들이 묘사하는 범위는 굉장히 작다는 것이다. 메인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으로 등장하는 디어드리가 처음에는 비중이 적은 줄 알았으나, 거의 모든 우주에 다양한 역할로 관객의 눈에 띄게 된다. 결국 우주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다양해도 한 개인에게 우주란 자신의 주변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웨이먼드는 멸망하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에블린에게 찾아왔지만, 에블린은 그런 대의보다는 그저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처럼 보인다.

쿠베라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한 범위를 우주라고 지칭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우주를 구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앞서 언급했듯 쿠베라에서 가능성으로만 남겨진 우주는 멸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의 사랑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예시를 살펴보자. 적 챕터에서 가능성의 세계에 도착한 '란'은 자신의 아내인 '라나'와 아이들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현실 세계로 넘어갈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라나는 원래 우주에 있을 자신과 아이들의 몸을 빼앗을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다중우주에서는 관계성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차마 다른 우주의 자신의 몸을 빼앗는 선택은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건 다른 우주의 나에게도 똑같을 것이기 때문에.

2. 다중우주로 표현된 거대한 사랑

앞서 에블린-웨이먼드의 관계를 이야기했지만, 사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에블린과 조이의 이야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둘의 서사가 중요하다. 딸을 몰아붙이는 엄마라는 설정은 주변에 있을 법한 흔한 설정이지만 다중우주 SF라는 장르가 이를 극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메인 우주에 있는 에블린은 조이가 여자친구를 두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살좀 빼라며 딸을 몰아붙이지만, 다른 우주의 과학자 에블린은 딸이 다중우주를 넘나들며 모든 능력을 학습하도록 딸을 몰아붙이게 된다.

쿠베라에서는 꿈이 다른 우주를 의미할거라는 추측이 있는데, 영화와 비슷하게 꿈을 이용하여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설정이 존재한다. 쿠베라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기술이지만, 에블린은 자신의 딸을 어느 우주와 다름없이 끝까지 몰아붙여 결국 자신의 딸인 조이를 괴물 조부 투바키로 만들어 낸다. 조부 투바키는 다중우주에 있는 모든 자신에게 접속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다. 조부 투바키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허무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무로 되돌리려고 한다.
쿠베라에서 정확히 조부 투바키에 대응되는 인물이 존재한다. 앞서 쿠베라에서는 가능성의 우주가 붕괴한다고 했는데, 이 우주에 살던 생명체들의 원한이 뭉쳐 만든 괴물인 '유타'가 존재한다. 유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뭉쳐진 원한 때문에 세계를 멸망시키게끔 움직인다.

한편, 영화에서 세계를 무로 돌리려는 조부 투바키를 막아서는건 가장 실패한 세계의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남편 웨이먼드와 닮은 친절한 자세로 조부 투바키에게 다가가 그녀를 조이로 되돌려 놓았다.

에블린에게 대응되는 쿠베라 속의 인물인 리즈는 유타의 애인이다. 리즈도 에블린과 마찬가지로 가장 실패한 세계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고향 마을이 폭격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 에블린과 조이가 모녀 관계이지만 세계의 존망을 두고 대립하였듯 리즈와 유타도 정확히 같은 이유로 대립하게 된다.

작중에서 유타가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리즈는 시간축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시간은 단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여 역사에 기록한다. 시간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의 우주들은 모두 에너지를 잃고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둘의 사랑은 더욱 애절해진다.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이라는 역할 때문에 수없이 많은 애인들을 모두 소멸시켜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결국 우주를 구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영화와 똑같이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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