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2 +5]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shinychan95·2020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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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글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허지웅 칼럼

옛날 옛적 착한 피해자가 살았습니다(처음 제목)

기술 아티클을 매번 읽기로 했지만, 요즘 읽고 싶은 기술 아티클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을 낳는 기사를 읽어서 이렇게 정리한다.

 

정리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도대체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낸 게 누구야. 누구냔 말이야? 네놈들이라고, (전쟁을 일삼은) 바로 사무라이라고! 이 나쁜 자식들아!"

위를 설명하자면, 도적떼에게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사무라이를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은 과거 농민들이 사무라이들에게 했던 짓들에 배신감을 느껴 그만두려 한다. 와중에 농민 출신 사무라이가 한 말이다.

"순백의 피해자"라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비난 여론을 보며 만든 개념이 있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순결 판타지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n번방 피해자에 대해서도 이 프레임을 씌우려 하는 모습이 보인다. 피해자들이 아주 순전한 형태의 피해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나 순수한 피해자인지 측정해보았더니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논하며 피해자의 진짜 얼굴은 이거라고 다투는 동안 정작 피해자는 유기된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느낀 점

마침 "인문과예술의세계" 수업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자유에 대해서, 또 사회에 속한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우리 사회 속에 자연스럽고 지배적인 가치로써 자연화시킨다. 이러한 이념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경쟁 이데올로기, 성공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만연하고 이에 대해 나는 항상 이들을 의식하며 지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일 익숙하지만 어려운 노력들에 내 머리가 지쳐갈 때쯤 고민으로 자리잡은 생각이 있다. 그게 바로 순백의 피해자라는 이데올로기였던 것 같다. (아직 이데올로기라 불릴 지 모르겠지만)

 

뉴스를 보며 항상 판단하려 했다.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을 판단했고, 댓글 속의 사람들도 판단했고, 누군가의 주장을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결국 하나의 입장에 서있는 내가 되었고, 나는 그 입장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분열이었다.

심지어 갈등하는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입장에 감정 이입하여 판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면 편향된 감정 이입으로 인해 쌓아온 편견들을 내새우며 피해자든 가해자든 어떤 개인을 판단하여 주장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옳고 그름 혹은 맞고 틀림을 따지는 문제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하지만, 논하는 과정에서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은 각 개인이 가진 배경이나 수식어 혹은 이미지가 아니라, 명백한 사건 혹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던 것 같다.

 

허지웅이 n번방 사건에 대해 "한국 사회 인성교육의 대실패"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충격 받았었다.

n번방 사건 가해자들과 나 자신을 분리하고 그들이 과거부터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혹은 어떤 원인에 의해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나는 가해자 개인 혹은 그 무리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혹은 남자와 여자로 집단을 분리하여 감정 이입했었다.

심지어 다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간혹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피해자가 혹시나 의도한 것은 아닌지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느껴왔다. 어쩌면 그 피해자의 상황에 이입했다기보다 남자로서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억울함을 풀기 위한 입장으로 이입한 것이다.

 

다시금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 어떠한 이입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나는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이입과 판단 그리고 갈등 속에서 승리가 아닌 이러한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적인 배경 및 원인에 대해서 면밀히 따질 필요가 있었고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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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로 일하는 김찬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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