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지극히 평범한 NPC 29였던 건에 대하여

soryeongk·2025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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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가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갈 때는 내 경력이 메리트가 없을 수도 있어.

약 7년 전, 당시 개발자로 일하던 언니의 말이었는데, 이따금 나를 채찍질하는 말이 되었다. 사실상 나는 이 말을 거의 무시하고, "나는 달라. 나는 특별해."라며 무작정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는데, 후회하진 않는다. 그냥 가끔 좀 당황스럽고 불안한 것..?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대박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기장 속의 나는 와들와들 떨고 있지만, 그 끝엔 찬란한 미래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거품 가득한 맥주처럼 겉으론 톡!쏘는 자신감이 점철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사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스타트업 3년을 다니면서 무작정 희망 회로를 돌리는 것이 미래의 나를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알았다. 여전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지만, 스스로를 희망고문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은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한 나의 생각정리와 다짐이다.

불나방처럼 뛰어들어버려

어릴 때부터 꿈이 많았다. 집안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어리광부릴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볼 수 있게 지원해주는 부모님 덕분이었다. 성적이 잘 나오길 강요하신 적은 없었지만, 하기로 한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크게 나무라셨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했던 선택 대부분은 "재밌을 것 같아서" "하고 싶어서"였다. 그 관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발견하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도드라지게 좋은 학교나 성적도 아니고, 스스로 혜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은 모순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홍대병 그 자체다. 진정으로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면 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직접 창업하진 않는다. 누군가 이런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그런가, 나 스스로를 엄청난 세계관의 특별한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인공에게도 시련은 있는 법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내 커리어에 대해서만큼은 "오케, 개꿀잼 퀘스트~"라고 유쾌하게 넘길만큼 단단하지 못함을 알았다. 너무 쉬운 길을 찾으려고 했던 어리석음이 조금씩 나를 갉아 먹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삼켜, 주변 친구들의 기쁨에 시기 질투를 느끼던 때가 있었다. 같이 놀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앞으로 쭉쭉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축하와 함께 불안이 밀려왔다. 이러다간 쓰다 남은 축하마저 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

원하는 도메인의 회사에 입사하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던 나의 불안은 다행히 성장을 갈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회사가 나의 로또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입사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반해버렸다. 그들의 능력을 카피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한 마음가짐으로 입사 3주년을 맞이했다.

3년 동안 확실해진 것

1. 아, 진짜 창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대표님과 코파운더 모두 RESPECT. 배가 작을수록 너울에도 크게 울렁이고, 몸집이 작은 생물일수록 나비의 날개짓에도 큰 상처를 입는다. 그 모든 어려움을 내가 앞장서 막아낸 것도 아니었는데, 스타트업에 남아있을 이유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다.

2.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맞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와중에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길 거야"하는 근거 없는 꽃밭을 쉽게 상상했다. 다행히 아주 지옥 같은 경험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꽃밭도 없었다.

신 혹은 운명이 내 편이라 확신할 수 없고, 내 인생의 구세주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스타트업 입사는 꼭 신중해야 한다. 논리가 없는 믿음으로 스타트업에 다닌다면 분명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스타트업, 계속 다닐 거야?

직장인들은 모두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하지... 회사에 대한 확신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변질될 때마다 나는 아래 고민을 처음부터 시작해 다시 짚어본다.

1. 이 회사는 여전히 나의 로또일까?

일확천금을 바란 적이 없었는데, 회사가 성장할수록 욕심이 생긴다. 인생은 한방이다-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는데, 지금은 거의 인생으로 도박하고 있다. 처음엔 재미와 함께 약간의 가능성을 보며 근무했는데, 지금은 "아 진짜 잘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나를 회사에 붙잡아둔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무서운 게 "될 것 같은데.."이다. 이 하찮은 희망고문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회사 상황을 몰라서 그래."
"진.짜.잘.될.것.같.아."

그냥 적당히 쓰기 좋은 체스 말이 될 생각이 없다면, 주기적으로 회사의 상황을 확인하고, 나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회사의 정확한 목표 시점과 객관적 지표, 솔직한 상황을 제대로 공유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꼭 요구해야 한다. 지금의 시장 상황과 회사의 위치를 면밀히 살피며 따지고 따져도, 결국 고꾸라지는 게 스타트업이다.

2. 성장하고 있나?

많은 스타트업이 그렇듯, 내 포지션의 일만 할 수는 없다. 예상보다 더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었고, 덕분에 많은 권한도 받았다. 나는 지금 회사에서 충분한 인정을 받고, 1인분 이상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현재 회사에서 가장 필요한 유형의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의 현재 시장에서 나의 직무는 매우 모호해졌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개발자"라고 소개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런 면에서, 한 서비스의 0 to 1을 경험하며, 서비스의 코어에서 회사의 의사결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귀한 경험이다. 그리고 저년차에 많은 권한을 부여받아 서비스 성장을 위한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값진가.

절망적이게도,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직무는 없다. 그러니 이 경험을 통해 내 커리어를 어디로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는 나의 숙제다. 아무도 대신 고민해주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의 방향을 설정하고, 회사에서 무엇을 더 해보고 싶은지 고민하고, 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고 요구해야 한다.

"특정 시점이 지나면 회사가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듣거나, 나 혼자 멋대로 그 시기를 정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결국, 그 시점까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내가 이곳에 남아있을 수 있는지, 그 이유는 뭔지 정확히 짚어야 한다. 나는 그게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성장"이었다.

3. 재밌어?

퇴사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쇼츠나 영상이 자주 보인다. 답답함을 재치있게 표현하는 것이 너무 웃기고 재밌지만, 크게 공감하진 못한다. 나는 회사 다니는 게 너무 재밌다. 공감하는 게 있다면 "이렇게 일 안 해도 그냥 돈이 진짜 많았으면 좋겠다" 정도?

지금 일이 재밌는지를 확인하는 나만의 기준

1. 돈이 진짜 많고, 일을 취미로 일한다면?

재미를 찾아다니는 불나방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월마다 들어오는 소소한 금융치료 월급에 눈이 멀어서 재밌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근로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건물주가 되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1층에 내 사무실이나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답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취미로 해도 좋을 만큼 지금 하는 일이 재밌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도메인, 서비스, 하는 일, 일하는 방식, 동료 등 모두 만족스러운지를 체크한다.

2. 근무시간 중에 시계를 몇 번이나 보는가?

부모님이 갑자기 재벌이 되어, 내가 재벌 2세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평생 일을 해야 한다. 주식에는 재능도 없을뿐더러 깡도 없다. 그럼 남은 인생의 시간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낼 텐데, 그 시간을 퇴근 시간만 바라보고 싶지 않다. 몰입해서 일하고, 내 일이 끝나면 퇴근하고 싶다. 일도 안 끝나는데 놀러 가면, 응가 하다 만 기분이라 찝찝하다. 으-

주간회고로 지난주의 근태를 회상하고, 나는 몰입해서 일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시계를 자주 보거나, 몰입하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를 찾아본다.

엄빠의 말을 잘 듣자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안 듣지만, 그래도 부모님 말씀은 잘 듣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신의 말을 되새김질해본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봐.
대신,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최선을 다 해.
아, 그때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바보 같은 후회는 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이 말을 취소한 적이 없다. 늘 나를 응원하고, 힘들 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셨다. 전공과 관계없는 개발자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말리지 않으셨다. 내가 좀 더 큰 회사에서 돈 걱정 없이 살길 바라시는 것을 알지만, 가끔 툭 내놓는 마음 일부분일 뿐, 잔소리는 하지 않으신다. 그 정도의 우려는 입 밖으로 내셔도 서운하지 않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감히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들을 실천해야지. 그러기 위해 나는 불안이 밀려오면, 아래의 질문을 하면서 회고를 해본다.

지금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 있을까?
어디 가서 "나 진짜 열심히 했어요"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지금 그만두면 "아, 그때 좀 더 열심히 할 걸.."하는 말 안 할 수 있나?
내가 없는 회사를 보면서 배 아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좀 더 불태워 볼게요

이 말은 참 무거운 말이다.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사장이 아닌 구성원으로서 회사에 내 시간을 도박으로 걸고, 그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의 무게를 공감하지 못하는 동료뿐이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텐데... 안타깝고 고맙게도 회사는 나의 고민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해 주었다.

실패의 경험이 적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오타쿠라서 나에게 주인공 버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분명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운이 찾아오는 만화 속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시나리오가 바뀌는 어느 게임처럼, 내 선택 하나하나가 나를 만들어 간다. 그러니 나는 더 단단하게 마음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좀 더 불태울 수 있잖아- 스스로에게 토닥토닥 해본다. 근거 없이 들뜨지 말고, 이유 없이 떨지 말고, 후회 없이 일 해보자. 지금의 회사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 이제 다 해봤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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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프론트엔드 개발자 령이의 어쩌구 저쩌구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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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0일

솔직하고 깊은 고민이 담긴 글이 인상적이네요. 재미와 성장, 커리어 여러 측면에서 생각하고 건강한 결론을 내리신 것 같네요! 다시 앞만 보고 달려봅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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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0일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직무는 없다. 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저 역시도 프론트엔드 개발자이지만,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프론트엔드 역량을 유지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아닌 것 같아서요 ㅎㅎ 최근 제가 하던 고민과도 비슷한 부분이라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 글이 너무 재밌어요. 오타쿠 같은 썸네일도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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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5일

소령씨 글 잘 쓴다.. 이정도 깊이의 고민이라면 앞으로의 인생에 정말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아요 자극 받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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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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