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
이 얘길 듣자마자 나는 그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바늘은 분명 지진에 맞서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화재나 홍수, 녹, 그 밖에 그가 고려하지 못한 수천 가지 파괴 방식에 대해서는 어쩐단 말인가?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p.45
아가시는 신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부용 메스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껍질을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내부야말로 동물들의 "진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며, 그들의 뼛속과 연골, 내장 속이야말로 신의 생각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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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p.46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피조물들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그 위치에서 떨어질 수 있으며, 나쁜 습관들이 어떻게든 한 종을 육체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쇠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