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원제: Age of Revolutions: Progress and Backlash from 1600 to the Present)
이 책은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이 1600년대부터 현재까지 약 400년간의 세계사 ― 혁명과 변화, 그에 대한 반동(backlash) ― 를 ‘진보’와 ‘퇴보’라는 양극의 틀로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Yes24)
저자는 변화의 물결이 단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되돌아가려는 힘’(反動)과 ‘반작용’이 반드시 존재함을 거듭 강조합니다. (세계일보)
즉, 혁명이 일어나고 제도가 바뀌고 기술이 혁신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무조건적인 진보’로 연결되지는 않으며, 그 진보 앞에는 필연적으로 반발과 퇴행의 기류가 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컨대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금융혁신, 무역해상력 등을 통해 자유주의 혁명의 원형을 만들었지만, 곧바로 내부 갈등과 외부 침략이라는 역풍에 직면했고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mediaccbb.com)
또한 현대의 정보혁명은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낙관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고독, 파편화, 정체성 혼란이라는 퇴행적 양상도 함께 불러왔음을 저자는 분석합니다. (Yes24)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진보와 퇴보가 함께 엮인 복합적 흐름임을 강조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특히 현재 우리가 마주한 기술적·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저자의 분석은 개별 사건을 넘어 ‘패턴’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이 패턴을 우리의 특정 맥락(한국, 아시아, 비서구권)에도 적용하려면 추가적인 비서구권 사례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변화의 파도 속에 있는 오늘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진보의 궤도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자원이 됩니다.
“인류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역사는 그것이 늘 선형이 아님을 증명해왔다.”
— 파리드 자카리아,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파리드 자카리아의 신작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해 21세기의 디지털 문명까지, 400년의 근대사를 ‘진보와 반동’의 교차로 읽어내려는 시도다. 그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혁명사를 축으로 삼아 “혁명이 일으킨 자유와 제도의 진보가 어떻게 퇴보의 반작용을 낳았는가”를 탐구한다.
책의 영어 원제 Age of Revolutions: Progress and Backlash from 1600 to the Present는 이 기획의 뼈대를 가장 잘 요약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카리아가 보여주는 ‘진보의 지도’는 너무나 서구적이다.
그는 “근대의 엔진은 서구 혁명에 있었다”고 단언하지만, 그 지도 위에는 러시아혁명이라는 20세기 최대의 사회적 실험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근대화의 물결은 서구의 제도적 혁신에서 비롯되었다.”
— 파리드 자카리아
자카리아는 근대화의 동력을 ‘시장경제 + 시민혁명 + 계몽사상’의 삼각형으로 본다. 그러나 이 도식은 러시아혁명을 완전히 소외시킨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산업화의 불균형, 농촌의 봉건 잔재, 제정의 붕괴라는 극한 조건 속에서 ‘비서구적 근대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는 공산주의 체제라는 또 다른 혁명적 진보였다. 물론 그것은 폭력과 전체주의를 동반했지만, 세계사의 절반을 재편한 실험이었다.
자카리아는 이를 단지 “서구 자유주의의 반대편에 선 정치적 실패” 정도로 암묵적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이 생략이야말로 책이 가진 가장 큰 한계다.
진보가 언제나 자유주의의 옳은 방향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 진보는 종종 ‘비자유적 경로’를 통해 나타났고, 러시아혁명은 그 전형이었다.
이 부재는 자카리아의 진보론을 “도덕적 낙관주의에 기댄 서구 근대의 자기서사”로 만들어버린다. 러시아혁명이라는 불편한 역사, 즉 ‘진보의 실패와 폭력의 그림자’를 외면함으로써 그는 진보의 복합성을 희생시킨다.
“모든 혁명은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잡아먹힌다.”
—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중에서
자카리아의 핵심 논지는 탁월하다. 혁명은 항상 반동을 낳는다.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 제국을 낳았고, 산업혁명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으며, 세계화는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의 귀환을 불렀다.
그는 이를 “진보-퇴보의 진자운동(pendulum of progress)”이라 부르며, 인류가 결코 직선의 길을 걷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진자의 운동이 서구의 궤적 안에서만 관찰된다는 점이 문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인도의 탈식민 경제개혁,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등 비서구의 ‘혁명적 진보’는 그의 렌즈 밖에 있다.
결국 자카리아의 ‘보편사’는 실은 “서구의 자기반성적 근대사”에 가깝다.
“진보란 무질서를 동반하는 행위이며, 질서는 진보의 반동으로 등장한다.”
“자유는 안정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혼란의 시대가 자유를 낳는다.”
“정보혁명은 개인을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인간을 고립시켰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명료하고, 리듬감이 있다. CNN과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답게 자카리아의 글은 복잡한 역사를 단정적인 통찰로 압축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문체의 힘이 때로는 함정이 된다. 모든 혁명의 복잡한 인과를 “진보와 반동의 도식”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역사의 다층성이 납작해진다.
마르크스적 계급투쟁, 식민주의의 폭력, 종교혁명의 파열음 같은 실질적 요인들이 ‘진보의 리듬’ 속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축약된다.
“오늘날의 혁명은 알고리즘과 정체성의 혁명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자카리아는 디지털 혁명과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를 다루며, 그것이 21세기의 새로운 반동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SNS와 정보기술은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켰지만, 동시에 사회를 파편화하고, 공동체적 합의의 기반을 붕괴시켰다.
그의 분석은 정확하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순환의 또 다른 사례”인지, 아니면 “근대 이후 인류의 전환점”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는 모든 변화를 ‘과거와 닮은 반복’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렇기에 ‘혁명의 질적 변화’, 즉 인공지능과 데이터 권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역사 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자카리아의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는 여전히 탁월한 ‘서사적 역사 교양서’다.
그는 근대 이후 인류의 궤적을 설득력 있게 정리하며, 진보의 낙관주의에 균열을 낸다. 그러나 이 책은 “서구 문명의 자기반성”이지, “세계사의 총체적 지도”는 아니다.
러시아혁명, 아시아의 반식민 근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처럼
‘진보의 대안적 경로들’을 배제한 채, 진보와 퇴보를 논하는 것은
마치 지구를 반쪽만 그려놓은 지도와 같다.
진보를 말하려면, 퇴보의 그림자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혁명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들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역사는 정말로 진보하는가,
아니면 단지 서구의 꿈만 진보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