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건, 내게 늘 하나의 지도 같았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2차원의 루트. 시작점이 있고 끝점이 있고, 그 사이에는 직선이든 곡선이든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들이 있다. 좋은 영화는 그 길을 안다. 어디서 머뭇거려야 하는지, 어디서 속도를 붙여야 하는지, 어디쯤에서 관객의 숨을 한번 붙잡아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끝내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마지막 지점에 도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왕과 사는 남자는 분명 영리한 영화다.
시작점과 끝점을 잘 만들었다. 재미도 있다. 내가 말한 그 루트들 역시 대체로 정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그래서 재밌다. 적어도 지루하진 않다. 많은 관객이 재미를 느꼈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멈칫하게 된다.
문제는 장면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장면과 장면 사이에 흐르는 무드다.

나는 잘 만든 영화라는 건 결국 조화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장면이 하나의 줄에 꿰어진 사진처럼 걸려 있다면, 그 사진들은 적어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혹은 방향이 바뀌더라도, 관객이 그 변화를 느낄 수 있게 천천히, 순차적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끌려간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내게 장면들의 온도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무드가 전부 다른 장면들의 묶음 같다. 왜 여기서 저기로 튀지. 이 장면은 좀 안 어울리는데. 여기까지 온 감정이 갑자기 왜 저 높이까지 올라가지. 방금 전까지 저 인물이 품고 있던 온도와 지금의 표정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영화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아, 그냥 그렇다고 가정하고 봐야 하나 보다, 하고.

그 순간 나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된다.
그건 조금 슬픈 일이다.

그 장면들을 보며 짧고 강한 영상에 익숙해진 감각을 떠올렸다. 다만 이것은 내 연상이며 제작 의도나 관객의 심리를 확인한 분석은 아니다.
숏츠에 길들여진 감각. 한 장면, 한 장면이 계속해서 자극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 모든 순간이 클라이맥스처럼 번쩍여야 한다는 믿음. 그런 인상이 들었지만 흥행의 이유를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면을 따라갈 호흡이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정도다.

그러니까 어쩌면 문제는 영화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아니다 싶은 것들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
예전 같으면 확신할 수 있었던 감각이, 이제는 혼자만의 취향처럼 밀려난다. 예전에는 완성도라고 믿었던 것들이 지금은 답답함이 되고, 예전에는 지나치다고 느꼈던 것들이 지금은 세련됨이 된다. 세상은 계속 바뀌는데, 나는 어느 지점에서 조금 오래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사실이 조금 안타깝다.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믿어온 방식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나는 원래 공영방송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 내 돈을 걷어서 KBS를 운영하지, 싶었다. 미디어를 쥐고 있다는 느낌도 싫었다. 너무 크고, 너무 안전하고, 너무 정답 같은 얼굴이라서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KBS 드라마를 보면 묘한 마음이 든다. 너무 정직한 것이다. 장면의 무드가 서로 쉽게 부딪히지 않고, 감정이 감정답게 쌓인다. 인물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 장면이 자기 존재를 과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도 시청률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최소한 지켜야 할 질서 같은 것을 버리지 않는 느낌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정직함을 촌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게 귀하게 보인다. 모두가 더 세게, 더 빠르게,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쪽으로 달려갈 때, 누군가는 이야기의 기본을 붙들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무드의 연결을 믿고, 감정의 시간을 믿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일은, 지금 같은 시대일수록 더 공적인 곳이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장만으로는 끝내 남지 않을 것들을, 누군가는 남겨야 하니까.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이상하게도 내가 KBS에 내고 있던 돈이 전처럼 마냥 아깝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방향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영화에서 어떤 호흡을 기다리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아직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했으니까.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재미만으로 영화를 사랑하진 못하겠다.
내가 아직 영화에서 보고 싶은 건, 장면의 자극이 아니라 장면들 사이를 흐르는 하나의 무드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이어져 있는 어떤 결.
나는 아직도 그런 결을 가진 영화를 오래 좋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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