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슴도치 컨셉에 대한 고민 중 신용과 현금흐름 창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자 고민한 내용을 일부 기록했습니다
- 문제되는 경우 알려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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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됐거나 이미 막대한 손해는 보게 돼 있는 것이었고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신용이 첫째인데, 무슨 수가 있어도 공사는 끝내기로 한 날짜에 맞춰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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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와중에서 공사 중의 사고로 인부가 죽기라도 하면 현장에 있던 매제는 시체와 함께 잠도 자야했다. 노임은 밀려 있지. 일하다가 동료는 죽었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는 인부들의 신경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이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 어느날 아우가 공사를 중단하자고 나섰다. 내가 말했다.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면 그건 간판을 내리고 말자는 얘기다.
사업가는 신용이 제일인데 신용을 잃으면 끝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건설업체 만들자는게 내 꿈인데 나더러 그걸 포기하라는 거냐?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사는 끝다. 끝내야한다.”
- 나는 조상들 제사 모실 집은 있어야 한다는 동생들 반대에 집 대신 초동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를 팔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9천9백70만 환을 들고 우리는 고령교 공사에 다시 달라 붙었다.
집들을 팔아 넣고도 얻을 수 있는 빚을 모두 다 끌어내 월 18%의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어쨌거나 1955년 5월, 결국은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그 지긋지긋했던 고령교를 완공시켰다.
- 계약 금액 5천4백78만 환에 적자 금액 6천 5백만환
- 나는 지금도 고령교 공사의 시련을 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공사를 따는 것에만 집착했지 다른 면에 대해서 치밀하게 계산하고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 장기 공사는 연차적으로 분할 계약을 해야 인플레에 의한 손실을 막을 수 있다. 그때 이미 인플레의 기미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껏 인플레가 된다고 해보았자 두 배 정도가 아니겠는가’ 하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일괄 계약을 한 것이 가장 큰 경솔함이었다.
- 낙동강 바닥의 토질도 모르는 채 공사에 뛰어들었던 것, 또 우리나라 당시의 형편없는 장비로는 고령교 정도의 공사도 어렵다는 사실을 몰랐던 내 경험 부족도 실패의 이유가 된다
- 결국 모든 실패의 원인은 내 탓이었다.
- 득의지시 변생실의지비
- 뜻을 이룰 때 실패의 뿌리가 생긴다’ 라는 말이 절실한 진리였다.
- 경쟁 건설업자들은 내 시련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소학교밖에 안 나온 친구니 인플레가 뭔지나 알았겠냐는 둥, 장기 공사에는 분할 계약을 한다는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건설업을 한다고 껍죽대다 망하는 거라는 둥..
- 그러나 나는 그대로 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확실히 내가 부족하고 미숙하고 몰랐던 탓이었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었다.
- 비싼 수업료를 내고 공부한 셈 치자고 생각했다.
-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니 상황만큼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편이었다.
- 어느날 아침 아우들 사는 곳에 가서 모양을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서 겨우 ‘내가 부자 되면 큰 집 사줄게’ 했는데, 매제도 울고 아우도 울고 그리고 나까지 그만 다같이 울어버렸던 생각이 난다
p69
그러나 고령교 덕분에
-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생긴 막대한 부채는 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다.
- 그러나 잃은 것이 있는 대신 얻은 것도 있었다
-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공사를 마무리했던 ‘현대건설’의 신용을 내무부가 높이 평가해, 그 후. 우리는 정부 공사를 수주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 1954년부터 미국 원조 자금으로 전후 복구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라서 할 일은 많았다. 가창댐 확장 공사, 내무부 중기…
- 고령교 공사로 인한 뼈아픈 시련에서 얻은 교훈 중에 하나로 나는 우선 장비 부족 해결을 첫째가는 목표로 삼았다.
- 시경에도 맨손으로는 호랑이를 때려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너지 못한다는 말이 있따
- 건설에는 장비가 첫째였다
p70
- 자동차 정비 공장을 할 때 다반사로 공원들과 야근하면서 고치고 배우고 터득한 덕분으로, 자동차 기계 원리와 기능, 쇠의 재질까지 어지간히는 알았기 때문에 장비 선택에 남보다 유리하기도 했다.
- ‘현대건설’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할까 주목받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하는 시점은, 우리가 1957년 9월에 착공했던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했을 때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전부터도 ‘현대건설’은 아무 공사 수주 경쟁에나 무조건 덤벼들어 끝까지 용을 써댔기 때문에, 건설업계에서는 그런 성향의 회사로 ‘현대’를 골치 아파하기도 하고. 한몫 봐주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한강인도교 공사가 낙찰되었을 때는 모두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