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사를 다니며 힘든 일이 많아서(인간관계관련), 불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침을 하는가 궁금해서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불교집안 출신이긴 하지만, 가족전체가 부처님오신날에 절을 안간지 5년이 넘은 사실상 무교다. 그러나, 단일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가톨릭같은 아브라함계 종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이성이 아니라 신앙에 기반한 교리가 많아서 그나마 불교가 가장 나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글재주가 없어서, 신기하게 여겼던 부분을 리스트형식으로 적고자 한다.
1. 불교는 경전이 계속 append되는 종교이다. 누군가 불교에 대해 훌륭한 저술을 남긴다면, 그것은 미래에 나올 대장경의 일부로 수록되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은 구약과 신약으로 끝나며 누군가가 저술을 남긴다고 할지라도 대장경같은 것에 영원히 수록되지는 않는다.
2. 무아의 가르침. 불교는 나를 나로 만드는 identity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서양에서는 영혼이 나를 타인과 구별짓지만, 합리적으로 그런건 있을 수 없다. 성격이 나의 identity가 될 수도 없다. 성격이 바뀌어도 나는 나니까. 결국 나의 본질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자네들 각각을 자네들이게끔 해 주는 무엇일 것이다. 나를 이 우주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unique한 존재자로 만들어 주는 어떤 굉장한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갓난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난 다음에라도 변치 않으며 파괴될 수 없고 또 그래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자네를 자네이게끔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 변치 않고 파괴되지 않아서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나를 나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영혼이나 참나는 없다. 눈감고 믿는 신앙으로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모를까, 합리적으로 이치를 따져 가면서는 결코 무아론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는 최소한 같은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아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곤 한다.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적, 종교적 신념은 변하고 애인도 변심할 수 있다.
생긴 모습은: 굳이 성형수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며 외모가 변한다.
DNA는?: DNA도 시간이 지나며 그 일부가 변한다. 방사선에 노출되면 변이되기도 한다.
부처는 무아와 연기를 존재세계를 관통하는 진리로 가르쳤다. 영어가 더 쉬운데, non-self 및 dependent arising 이다.
한국에서 "깨달음을 얻는다"이라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미국인이 봤을 때는 타동사인 enlight에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비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단말인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무아를, 세계에 대해서는 연기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깨달음에 집착하면,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깨달음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에 깨달음이 불가능하다.
고로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깨달으려는 집착은 좋은 집착이니 반드시 가져야 할 집착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강조했다. 본 패러독스 해결책의 허점을 찾아보라."
"그러면 좋은 집착과 그렇지 못한 집착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깨달음을 위해 도움이 되는 집착은 좋은 집착이고, 그 반대의 집착은 나쁜 집착이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깨달음은 좋은 집착에 의해 가능하고, 좋은 집착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는 말인데 순환논법의 오류입니다."
답: 집착을 통해 깨달음에 도움이 될 습관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 깨닫고자 하는 집착을 제거하면 된다.
논리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깨달음의 패러독스가 공부와 수행의 과정에서는 전혀 일어날 이유가 없다. 이 방법은 임제와 덕산의 할방 교수법과 같다.
윤회하는 주체는 없어도, 죽음-탄생-죽음-탄생이라는 인과관계가 지속된다. 즉 '윤회하는 것은 없지만 윤회는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여러 고뇌로 타오르는 촛불(삶)이 다른 초에 옮겨다닌다. 촛불사이를 옮겨가며 이동하는 어떤 한 주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라는 현상은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한다.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불꽃이 꺼졌다면 동서남북 어디로도 간게 아니다. 실제로 석가모니는 아라한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질문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무아의 진리를 터득해 열반에 든 아라한은 처음부터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 적이 없어서다. 다시말해 공해서 실재한 적이 없다.
열반에 대해서는 어떤 긍정적 표현도 오류가 되고, 단지 부정적 표현으로만 간접적으로 그 특성을 기술할 수 있다. nirvana는 원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이 그 개념의 전부이다. 더 이상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열반이 가져다준다고 허위광고된 굉장하고 근사한 어떤 선물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우리는 고해로 흘러가는 집착의 깊은 골로 빠져들게 된다.
불교는 참나(self)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세계를 사는 인격체(person)으로서의 나의 존재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진제(ultimate truth)와 속제(conventional truth)를 구별하는데, 인격체로서의 나는 색, 수, 상, 행, 식 여러 부분이 모인 복합체로서 진제의 입장에서는 허구이지만 속제의 입장에서는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개념이다.
무아와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불자들이 한없는 자비심을 가진다고 한다.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어떻게 자비심을 일으키는가?
자비심은 타인을 향한 이해타산없는 배려심이다. 사심없는 배려심은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체득하면 자연스레 우러나온다. 왜냐하면 누구나 가진 자기를 보살피는 마음에서 자기가 사라지게 되니 그 배려심과 보살피는 마음이 타인에게 흘러 넘쳐 이타행으로 나타나기 대문이다. 무아를 깨쳐야 진정으로 타인에 대해 사심없는 배려가 가능하게 된다. 만약 사람의 선행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고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순수하게 사심 없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철학에서 실체는 독립적 존재를 말하는데, 연기를 받아들이는 불교에서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만 생성, 지속, 소멸할 뿐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연기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만물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공의 통찰로 이끌어진다.
필자는 불자의 행위기준으로 "깨달음 산출원리"를 제안한다. 그냥 공리주의에서 행복을 깨달음으로 치환한 것에 불과해보이나, 나쁘진 않아보여서 적는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기여하면 그것은 좋거나 옳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역행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고 그르다.
심신의 고통은 대부분 깨달음과 열반의 길에 방해되기 때문에 나빠서 피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저런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깨달음과 열반을 가로막아서 나쁘다.
명상 수행은 깨달음과 열반의 산출에 유용하기 때문에 좋고 그것을 실천함이 불자로서 바른 길이다.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거친 말을 쓰는 것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초래하고, 이런 고통은 그들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 길에 역행하기 때문에 나쁘고 그르다.
적군이라도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것은 그의 회복이 그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좋고 또 옳다.
사회의 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옳다.
무아론이 옳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편리한 수단으로서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어떤 동일한 인격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다. 영혼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몸과 여러 의식상태들이 모여있는 이 오온덩어리를 인격체로 보자. 불변하는 인격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지나치게(?) 부정한다면, 나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전혀 다른 오온덩어리가 될 어떤 다른 사람만 좋으라고 오늘 밤 내가 피곤을 무릅쓰고 공부하고 양치하고 세수할 이유가 없다. 자성이 없이 공하여 무아인 인격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한 나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편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많은 이익이 있다. 인간의 심리 특성상 그렇게 해야 우리 일상이 더 잘 돌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동일한 인격체라는 나의 존재가 이렇게 쓸모있는 상이라면, 우리가 일상을 더 효율적으로 잘 살기 위해 이 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진제는 무아이지만, 일상을 위한 속제로서의 나의 존재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고, 이것은 서양철학에서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self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론이 옳을 수 있는가?
아래는 내 생각을 종합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봐야한다. 두 가지 안이 가능하다.
고정불변한 영혼(마음)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나이며 또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고정불변한 영혼이 무엇인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생각함 자체라면, 그것은 나를 언제까지나 동일한 나이게끔 해주는 고정불변한 무엇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함이 과연 그런 것인가? 생각함은 사고, 희망, 의심, 믿음 등 다양한 의식작용이 있다. 이 각각 의식작용은 쉼없이 변한다. 그래서 '생각함'도 끊임없이 변한다. 이렇게 뭉뚱그려진 의식이 어떻게 나를 언제나 동일한 나이게끔 만들어줄 수 있는가? 이것으로 반박된다.
고정불변한 영혼(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생각함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말인가?
그럼, 생각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존재했다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점멸하는 존재인가? 이것으로 반박된다.
맹목적인 신앙에 기반한 아브라함계 종교와 달리, 불교는 합리적이고 쿨한 종교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무아론이 허무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연기론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라는 가르침인데 너무 뻔한 소리같다) 아직 이해가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연기론은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자기기원 또는 자기소멸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다. 자기기원하거나 자기소멸하면 그것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무아론과 대치되기 때문에 무아한 모든 것은 연기로써 존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