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지는 않고, 1년에 10만원정도 쓰는 편인데
이제부터 독후감을 온라인/로컬 상에 작성을 해야 뭐라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오늘부로 독후감 작성을 개시한다.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첫 권인데,
세계여행을 위한 배경지식으로 쌓을 겸,
평소 부족했던 18세기 이후 벨에포크까지의 유럽역사를 공부할 겸,
전 세계가 절대군주제였는데 어찌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만이 공화국을 처음(은 아니다) 세울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또한, 영국은 어떻게 그런 혁명을 겪지 않고 안정적인 체제를 지금까지 연착륙시켜왔는지, 프랑스와 영국의 차이도 궁금했다.
그 차이는 국민성 또는 국토의 지리적 환경에 있는게 아니라, 제도와 경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리적 환경은 제도와 경제에 간접적으로 영향은 미칠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라는 괜찮은 작품이 나와서
코로나 격리기간동안 최대한 읽어놓으려고 노력하고자 했고,
영국사는 대개 E북으로가 아니라 서적으로 출판된게 많아서
먼저 프랑스 18세기사를 다 읽고, 그 뒤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나, 절대왕정 시대에는 그전부터 느리게 진행되던 합리화정책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고 혁명 전 몇십 년 동안 인간, 물자, 정보의 유통이 전보다 거의 두 배나 빨라져 국가 통합의 이상을 실현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앙시앵레짐은 학교에서 배웠을 때는 "계몽사상이 퍼지고 왕권신수설에 대한 의문과 모순으로 가득찬 구체제에 대한 불만이 퍼지면서 신흥 브루주아 계층이 기존 기득권 제1, 제2 신분을 타격하고자 제3 신분을 모아 혁명을 일으켰다." 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사실 절대왕정시대는 대대적으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 너비를 규격화하는 등 여러 합리화정책이 추진되었다는 점에 놀랐다.
18세기 동안 여행기간을 절반보다 단축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가 대대적으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는 사업에 손댄 덕택이다....(중략)... 국가는 1720년에 도로의 규격을 정했다. 예를 들어 너비를 정하는 방식은...(중략)... 이러한 길은 왕국의 모든 사람, 법, 문명, 물자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참고로 혁명은 1789년이다.
부역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국가는 점점 더 많이 투자했다. 1700년대 초에는 해마다 100만 리브르를 썼는데, 1740년대에는 해마다 500만 리브르를 쓰고, 1786년에는 900만 리브르까지 썼다.
1789년 왕정이 타성에 젖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말을 조금 신중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서유럽 역사를 읽으면서 너무나 생소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왕령은 고등법원에 등록되어야 실효를 가졌으므로, 고등법원은 등기권을 이용해 왕권을 제한하려 했다. 이때, 법안의 잘못된 점을 '다시 보여주는' 과정이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상소하는 권리가 생겼다. 고등법원은 이 상소권을 이용해 왕령의 부당함을 알리고 왕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대중은 고등법원이야말로 왕국의 기본법, 관습법, 원칙을 지켜 왕이 제멋대로 하는 전제정을 막는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왕정이지만 왕은 무작정 법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등기'를 거쳐야 왕령은 실효를 가졌다.
그리고 고등법원은 등기를 거부할 수 있었고, 왕에게 상소할 수 있었다.
왕은 친림법정을 열고 자기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다...(중략)... 만일 고등법원 법관들이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 순서는 귀양이었다. 법관직은 법관 개개인의 소유물이라서 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귀양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왕은 자기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다. 행정부가 입법을 강행하는 점에서 나치독일의 수권법이 떠오르지만, 당시에는 전근대인데다 절차적 정당성보다는 신속성이 더 편했으리라.
사실 전근대에 근대의 틀을 끼우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아무튼
급기야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동아시아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렌 고등법원은 중앙정부의 뜻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6월 5일 그들은 그 법에 여러 단서조항을 달아 등기하는 한편, 그곳 지사와 군장관의 행위 때문에 브르타뉴 지방의 현실이 암울하다고 비판하는 명령을 함께 통과시켰다...(중략)...고등법원은 업무를 중단했다. 왕은 고등법원 판사들을 단체로 베르사유에 불러들여 상소에 대한 답변을 듣기 전에 업무에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렌 고등법원 판사의 다수가 1765년 5월에 사임했다.
법원이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약간 컬쳐쇼크를 받았는데 '어떻게 왕정시대에 공무원이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있지?' 다.
판사들이 조직적인 파업까지 하며 왕을 압박하는 모습, 그리고 사표를 내는 모습에 참 신기했다.
1766년 이후 고등법원들은 '부분들의 단결' 이론을 앞세우면서 계속 왕권에 도전하는 동시에 일종의 '계약이론' 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군주정의 전통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왕국의 헌법을 무시하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왕을 정치체의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갈등이 빚어지자 루이15세는 모푸를 등용하여 고등법원을 없앴다.
모푸는 법조계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관직보유자인 법관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관직을 폐기처분했다...(중략)...법관직은 이제 매매 대상이 아니었다. 새로운 법원을 설립한 결과, 누구나 신속한 재판을 받을 수 있고 전처럼 '재판세' 를 판사에게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무료로, 또 좀 더 쉽게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은 과거제가 아니라 천거제와 매관매직제를 선택한 문명이다.
후자에 따라서 관직은 소유물로 취급되었는데,
따라서 법관직을 박탈할 때 '매매'의 형식을 따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고등법원 법관들의 관직은 일종의 재산으로 보호받았다. 이 관직보유권은 1467년부터 평생의 권한이 되었다. 그 뒤, 관직을 매매할 수 있게 되자 왕의 법관 지명권은 힘을 잃고 관직보유자는 관직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왕은 관직보유자에게 관직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관직도 폐지할 수 없게 되었다.
고등법원을 억누르고 왕이 자유롭게 임명하고 해임할 법관직을 창설하는 제도는 모푸 정변의 중요한 요소였고, 이는 국가를 좀 더 자유롭게 개혁하는 길이었다.
서유럽과 동아시아 역사의 느낌이 너무 다른 근본적 원인은 역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봉건영주들은 원래 왕의 권한이던 것을 자기 것처럼 휘둘렀는데, 왕이 그것을 되찾으면서 왕국을 통일했다.
봉건제의 사회는 충성조차 계약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충이 무엇보다 큰 가치이다.
또한, 관직이 재산이라고 할지라도 왕이 그것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는게 낯설었다.
조선에서는 치안, 정치의 문제로 상인이 재산권을 지키기 힘들었다.
반면, 서양에서의 시민의 재산권은 '왕조차 침해할 수 없는 것' 이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7년 전쟁 + 독립전쟁 지원의 탓에 예산이 매우 불건전한 상태였다.
이에 왕은 계몽사상가이자 자유주의자인 튀르고를 재무총감에 임명한다.
1774년 8월 24일, 튀르고는 루이16세에게 재무총감직을 수락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앞으로 세 가지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국가재정을 파산하지 않게 하겠다. 더는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꾸지 않겠다...(중략)...이 세 가지 방향을 모두 충족시키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국고에서 나가는 돈을 아끼고 아껴서 옛날에 진 빚을 해마다 2000만 리브르씩 갚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라 살림이 거덜난다.
자유주의자 튀르고는 1770년에 이미 재무총감 테레 신부에게 '곡식의 자유거래' 를 주제로 편지를 쓴 이력이 있다.
튀르고는 마침내 9월 14일 곡식을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법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농민은 자기가 생산한 곡식을 반드시 시장에 내다팔아야 했다. 왕은 곡식의 문제를 치안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이다...(중략)...그전까지는 농민은 곡식상인과 제빵업자에게 곡식을 팔기 전에 시장에서 개인들에게 먼저 곡식을 팔아야 했다. 장이 세 번 서는 동안 팔지 못한 곡식은 아주 헐값에 넘겨야 했다.
자유주의를 도입하면 효율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단기적으로 역풍을 불러왔다.
그리고 프랑스 소비자는 그 역풍을 견딜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이미 제한적이나마 곡물 자유거래를 허용한 1764년, 아래 일이 있었다.
특히 국가가 보호해줘야 하는 가난한 소비자는 갑자기 자유주의 바람에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몹시 불만스러워졌다...(중략)...결국 대신들이 물자가 부족한 상태를 이용해 인민의 빵을 빼앗고 은밀하게 불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774년 튀르고는 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튀르고는 파리의 재무총감청에 앉아 곡식의 자유로운 거래가 "필요한 수량과 과잉의 균형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 이고, 정부가 생활필수품을 통제하는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며, 비록 품귀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겠으나 정부가 값을 매겨서는 안 되고, 정부는 오직 상황이 악화되지 않게 개입해야 할 뿐이라는 정신을 반영하는 법안을 공포했다. 이제 1763년의 법이 되살아나 곡식의 외국 반출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러나, 농사법이 크게 바뀌지 않고 농기구나 비료가 개선되지 않은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품귀현상은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전임자 테레신부는 밀관리공사를 파리에 세우고, 상인에게 맡겼으며 제빵업자에게 위원회의 감독으로 일정한 값에 밀가루를 공급해 빵값을 8수~10수로 묶어두었다.
그런데
튀르고가 재무총감이 되어 가을에 비축분을 전부 팔아버렸다. 이미 그해 3월부터 빵값은 덩어리 당 12수였고 1775년 4월 빵값은 24리브르까지 치솟았다(1리브르=20수)
그리고 폭동이 일어났다. 이를 밀가루 전쟁이라고 한다.
밀가루 전쟁은 다른 차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튀르고와 네케르 두 사람의 담론의 전쟁이기도 했다. 튀르고가 곡식의 자유거래를 주장할 때 네케르는 규제를 주장했기 때문이다...(중략)...네케르는 거물급 도매업자가 곡식을 독점하면 일반 민중을 상대하는 소매업자가 죽고 민중도 못 견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리 고등법원 내 보수 성향 인사들이 그를 지지했다.
당시의 보수(규제중시)가 지금의 진보고, 당시의 진보(자유주의)가 지금의 보수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워낙 유명한 병크니... 얼마나 손해를 끼쳤는지만 보자.
루이 16세와 베르젠은 우선 100만 리브르를 지원하면서 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지켜보았지만 1778년 정식 군사개입을 한 뒤 1783년 전쟁을 마칠 때까지 모두 10억 리브르를 전비로 썼다. 이 일을 1776년에 어찌 예견할 수 있었으랴.
튀르고가 매년 긴축재정으로 2000만 리브르씩 안아끼면 나라 파산한다고 경고했는데
베르젠 외무대신은 이걸 개입해버리고 예산을 플렉스해버린다.
루이 16세는 국내 명사들의 반발로 재정적자를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타국보다 비싼 이자를 주면서 돈을 빌렸다. 7년 전쟁 이전에 프랑스 정부는 빚을 갚는데 수입의 30% 정도를 썼지만 아메리카 독립전쟁이 끝난 뒤, 특히 1786년경에는 수입의 50% 정도를 빚과 이자를 갚는데 써야 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정리하고나니 30% 정도만 서술한 것 같은데도 내용이 상당히 많다.
앞으로는 좀 더 간략하게, 그러나 자주 독후감을 작성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