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의 피로감

양정훈·2022년 12월 26일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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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짤막한 표현이 주를 이루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가 각광받고 있고 비교적 긴 의사표현이 가능한 페이스북에서조차 가볍게 볼 수 있는 링크나 미디어의 공유가 주를 이룬다. 블로그에 적는 긴 호흡의 글들은 기술정보나 면접 노하우와 같은 단편적이고 실용적인 정보가 아니고서야 널리 읽히지 않는다. 출판업계는 짤막한 시나 수필을 엮은 책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곱씹고 곱씹을수록 깊은 향이 풍겨나오지만 가볍게 맛만 보는 정도로도 충분히 즐길거리가 되는, 그런 글들. 다섯 권, 열 권 짜리 장편의 소설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장문은 피곤하다. 글쓴이와 같이 호흡을 이어가며 읽어 나가야한다. 우선 가볍게 음미하고 그 다음은 정신없이 빠져들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깊이있게 빠져들수록 그 향이 짙게 남는다. 이러한 과정은 당연하게도 피로를 준다. 유쾌한 피로감이지만 피로는 피로다. '한 번 읽어볼까'라는 가벼운 다짐이 필요한 것이다. 이 가벼운 다짐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있다. 읽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것들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비용이 늘고있기 때문이다.

뷔페에 가 접시에 음식을 담고 먹어보자. '이 연어초밥은 이렇게 맛을 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가? '아까 보니까 새우초밥도 있고 파스타도 괜찮아 보이던데'라는 생각 이 먼저 든다. 워낙에 선택지가 많아 그것들을 고르고 생각하느라 온전히 내 앞의 음식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엔 핸드폰을 켜보자.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정보의 습득을 주로 SNS에서 많이 하는 편이고 설치 되어있는 SNS의 종류도 꽤 많다. 우선 어떤 SNS를 켤지 선택하고, 타임라인을 쭉 내려본다. 정말 끝도 없는 정보들 이 이어진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미 수많은 타임라인들에 피로감이 쌓이고 눈에 보이는 다른 선택지들 때문에 '그럼 이걸 한 번 눌러볼까'라는 아주 가벼운 다짐조차 망설이게 된다. 어쩌다 누르게 되어도 내 귀 꽂힌 이어폰으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곧 내릴때가 되진 않았는지 지하철 방송에 의식의 한 구석을 계속 내어두어야 한다. 온전히 빠져들기가 쉽지 않다. 퇴근 후에 카페나 도서관에 진득이 앉아 책을 한 권 읽어볼까했지만 막상 퇴근시간이 되니 당장 집에가서 눕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 다. 보통의 일상이다.

나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의 게임들도 비슷한 맥락을 이어가고있다. '선택지의 다양성'이라기보다는 '이거 말고도 피곤한 일 투성이인데 취미생활을 하 면서까지 피곤해야 하나' 정도일 것 같다. '피곤한 게임'은 사람들이 기피하기 시작했다. 해서 예전처럼 마치 공부하듯이 공략을 익히고, 노하우를 익혀야 제대로된 플레 이가 가능한 게임들은 점차 줄고있다. '일단 게임만 켜세요.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가 주를 이룬다. 정말 말 그대로 하라는 대로만 하면 막힘없이 플레이가 가능하 다. 거기서 유저는 화려한 그래픽, 타격감, 단순한 성취감만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전처럼 게임의 컨셉을 익히고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고 그것이 먹혀 들었을때의 깊이 있는 성취감은 얻기 힘들다. 모바일게임들 또한 비슷하다. 모바일이라는 플랫폼 특성도 있겠지만, 최근의 모바일 게임들은 자동사냥 투성이이다. 앱을 켜고, 플레이할 컨 텐츠를 선택하고, 자동사냥을 걸어두면 캐릭터가 알아서 다 해준다. 다른 일을 하다가 잠시 화면을 보면 이미 알아서 성장해있다. 심지어 버튼 한 번으로 새로 습득한 장 비라던지 스킬들이 맞춤 설정된다. 내가 할 일은 '레벨이 얼마나 올랐나' 눈으로 확인하며 얕은 성취감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생겨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것들 외에도 신경쓸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경각심을 잃지 말아야 할 부분도 있다. 깊이있는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활동들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나가야 하는 Todo들 (직장생활...)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머지 것들까지 모두 신경쓰기가 쉽지 않으니 다른 것들은 깊이를 가볍게 유지하는걸 '선택과 집중'이라고 보는게 과연 맞는 일일까. 이런 때일수록 선택의 가짓수를 줄이고 그 선택들의 깊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다 읽은 책 한 권, 우연히 만난 한 명의 사람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융합이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록 그 사람의 향기는 점차 짙어지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향이 나는 것이다. 그것이 경험의 진짜 의의가 아닐까 싶다. 다른 세계와의 융합은 나 자신과 상대의 밀접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깊이있는 대화'의 끈을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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