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지다

강연주·2025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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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 남기다. 남겨지다. 태(국어 문법이 어려워 '태'라는 글자 하나로 퉁치는 것이 민망하다)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친다.

  • 남다 : 어, 이거 남았다. 개이득.
  • 남기다 : 아깝게 음식을 남기냐. 그럴 거면 여지를 남기지 말든가.
  • 남겨지다 : (충격 받은 표정으로 일단 숨을 한번 들이마신다.) 남겨진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행사할 권리도, 또는 그것을 되찾을 의지도,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도 없는 채로 당신으로 인해 나는 남겨진 것이다. 홀로.

가을이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 쾌청함과 햇살의 바스락거림을 함께 나눌 이 없음이 물씬 다가온다. 행복하고 쓸쓸한 기분. 그런데 가을이라서 내가 저렇게 청승맞은 문장을 쓴 것은 아니고. 남겨지다의 주체가 생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자연스럽게 생물, 그것도 감정이 풍부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그 쇠락한 도시에는 구축 아파트만이 남겨졌고, 어쩌고... 주체가 아파트인데도 미안하고 슬픈 거야. 왜냐면, 남겨지려면 누군가는 혹은 무엇인가는 그것을 그곳에 남겨두거나 떠나야 하니까.

아까 CSS 공부하는데 지피티가 저렇게 설명을 했다.
'남아 있는 것들'... 별것도 아닌데 울렁거리는 나라서 미안해. 하지만 '사랑이 내게 남긴 것들'이라든가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할 기억' 따위의 관용구에 가까운 표현들이 두둥실 떠오르잖아.

개발자 = 감정 없는 로봇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래가지곤 개발자를 할 수 있나, 프린세스메이커의 감성만 풍부한 딸내미 엔딩처럼 음유시인으로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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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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