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_한 스푼의 시간_5

jkky98·2023년 9월 9일
0

소재는 로봇, 공상과학의 느낌은 전혀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아들의 회사로부터 부쳐진 택배 속 들어있던 은결이라는 로봇이 주인인 명정의 세탁소를 중심으로 인간다운 삶을 경험한다. 인공지능을 공부하는 처지에서 읽었을 때 이 정도의 로봇이라면 인터스텔라의 타스와 아이언맨의 자비스를 넘어, 현대에 등장한다면 곧바로 양복 차림의 누군가에게 붙잡혀 해부라도 당했을 기능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내용에 파묻혀 그러한 생각은 사라졌다.

작가의 여느 소설처럼, 이 소설도 서늘한 이야기에 대해 담백하고 덤덤하게 묘사된다. 은결이 내려다볼 수 있게, 어렸던 시호와 준교가 은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결이 준교를 올려다보게 될 때까지 시간적 흐름에 따른 인물들의 변화와 로봇의 변화를 보여준다. 어느 시점을 지나 인간과 로봇에 대한 기존 상식의 경계가 다른 경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경계라 함은 수명이나 충전 방법 같은 걸까. 0과 1을 근간으로 한 회로로 학습과 반응을 보이는 은결이나, 뇌의 구조로 학습과 반응을 하는 인간 인물들이 점점 인간의 관점에서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사람은 지우고 또 지웁니다. 어차피 다시 졸릴 테니 잠자리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요."

한 스푼의 시간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기나긴 이야기를 관통하는 얼룩들을 어떤 얼룩으로 남길 것인지 세제 한 스푼과 함께 정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책 후반에 주인인 명정이 죽고 은결은 처음으로 명정의 명령을 거부한다. 명정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그리고는 명정의 흔적이 남은 이불을 직접 대야에 세제 한 스푼을 넣고 거품 속에서 뭉그러뜨리며 명정과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무너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은결은 거품 속에 잠들며 꺼져가는 자신의 인공장기를 느끼다 시호와 준교에 의해 구조된다. 일어나고서야 은결은 시호와 준교의 의미를 담은 화분을 두고 "알고 싶지만 더는 알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라는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보였다. 로봇을 통해 전하지만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느낌과 조용히 격렬한 골목길의 이야기에서 여운이 길고, 감정에 서투른 성격에 놓친 것이 있을까 다시 한번 볼까?싶은 소설이었다.

profile
자바집사의 거북이 수련법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