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신이 끝난 직후 후기를 작성했다면 그때의 감정이 더 살아있는 후기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는 피신 또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후기를 써본다.
지금 하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취업 관련 사이트와 카페를 수시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42 서울 홍보 포스터를 보게 됐다. 한 달에 100만 원씩 주는 지원금과,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동료 학습과 자기 주도 학습으로 코딩 기본기를 다질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42 서울에 지원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한 방은 교육 장소가 분당선 개포동역이라는 것이었다. 일 때문에 분당선 생활권으로 이사를 왔던 터라 집에서 다니기에도 딱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 방식과 진행 장소 모두 딱 나를 위한 것 같았다.
42 서울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일을 그만두기는 쉽지 않았다. 이직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그만두고 백수와 학생 그 중간쯤으로 1년 이상을 보내는 건 나에게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20대 들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려 42 서울에 지원했다.
온라인 테스트 2~3주 전에 42 서울 지원자 네이버 카페를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온라인 테스트는 Robozzle 게임이 주고, Robozzle 문제 앱도 있어서 다운 받아서 풀어보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마켓에서 당장 다운받아 2주 동안 앱에 있는 문제를 풀었다. 온라인 테스트를 정말 통과하고 싶어서 출퇴근 시간, 점심 시간, 그리고 자기 전에도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풀었다.
온라인 테스트는 11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11월 1일은 금요일이라 출근을 해야 해서 못 했고, 11월 2일 토요일 오전에 시험을 봤다. 크게 두 가지 영역이 있는데, 첫 번째 영역은 순간기억능력 테스트이고, 두 번째 영역은 Robozzle 문제다. 첫 번째 영역은 두뇌를 풀가동한다면 누구나 통과할 것 같다. 다행히 나도 두뇌 풀가동을 해서 통과했다. 그리고 두 번째 영역은 2주 동안 시험 준비하듯이 문제를 풀어서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고 가뿐하게, 그 당시에는 감사하게도 통과했다. 피신에서 여러 사람에게 온라인 테스트 준비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봤는데, 나처럼 로보즐 문제를 열심히 풀었던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머쓱했다. 대부분 로보즐 문제를 몇 번 정도만 풀어보고 온라인 테스트를 응시했다. 내가 지나치게 준비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노력을 들인만큼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OT는 역삼의 어느 웨딩홀(?)에서 진행됐다. 스태프, 보칼, 그리고 지원자들이 42 서울에 오게 된 계기와 42 서울에서 기대하는 바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훌륭한 발표도, 그렇지 못한 발표도 있었다. 12월 말이라 롱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작은 의자를 따닥따닥 붙여놔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참석 기념품으로 펜과 마우스 패드를 받았는데, 마우스 패드는 아직도 클러스터에서 잘 쓰고 있다.
창의캠프는 2박 3일짜리였다. 정말 42 "서울"이니까 가능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은 프로그램으로 "창의"캠프를 진행하는 것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잔재가 어디 안 가는구나 싶어 슬펐다. 다른 동료들에게 창의캠프 경험을 물어보면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나는 창의캠프가 싫었다. 공무원이나 기업 연수랑 다를 게 뭔지? 소속감 증대? 친목? 창의캠프가 피신이나 본과정에 도움을 줬는지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피신을 떠올리면 첫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첫날 오전 10시부터 시작이라 9시 반쯤에 개포동에 도착했다. 전철에 출근 시간대라 사람이 정말 많았다. 개포동역에서 올라와서야 숨다운 숨을 쉬기 시작했는데, 1층에 들어가자마자 서류 제출하고 등록하는 줄이 꼬여있어서 다시 또 숨이 턱 막혔다. 겨우 등록하고 위로 올라갔다. 2층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애초에 4층에서 하기로 마음먹고 왔기 때문에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에 올라오니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선 가장 쓰기 편한 사물함을 골랐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pdf를 읽고 있으니까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아직도 피신 첫 날 내 양옆과 대각선에 누가 앉아 있는지 기억난다. 12시쯤 되니까 삼삼오오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점심을 먹지 못했다. 문제를 풀지 못해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첫 주에는 클러스터에 정수기가 없었다. 밥은 못 먹어도 버틸 수 있었지만, 목이 마른 건 참을 수 없어서 편의점에서 생수 두 병을 사 와서 그날 내내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첫날의 내가 불쌍하지만 그때는 자기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날에 왼쪽 옆에 앉으신 분이 천사여서 정말 도움을 많이 주셨다. git 문제가 나오길래 그분에게 github을 가입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그분 아니었으면 첫날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그분에게 감사하다. 동료 학습의 위대함을 첫날부터 배웠다. 그러나 결국 첫날 과제는 다 마무리하지 못 하고 집 가는 막차 시간이 되어 클러스터를 나왔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 전날 밤에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세 시간도 자지 못 했고, 심지어 그 세 시간 동안 피신 첫 날을 보내는 꿈을 꿔서 마치 피신 이틀 치를 해낸 기분이었다. 집 가는 길에도 스마트폰으로 과제 공부를 했다. 집에 와서 씻으니까 1시가 조금 안 됐다. 앞으로 4시간 뒤에 일어나 다시 또 열심히 해야지...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첫 주가 끝날 때는 이렇게 삼 주를 더 해야 하는 것이 막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번째 주가 끝나자마자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아침 일찍 와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막차 시간이 다 되어있을 때도 많았다. 문득 피신 생활에 익숙해진 내가 신기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간절해서 가능한 생활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해외 42 피신 후기에서 하루에 최소 13시간씩은 했다길래 나도 그래야 되겠구나 해서 28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오전 5시에 일어나 오전 1시에 잠들었다. 클러스터 출입 카드를 찍을 때는 오전 6시 37분 언저리였고, 막차는 11시 15분... 오고 가면서 지하철에서 한 헤드뱅잉은 불가항력이었다. 신기하게도 오후 9시만 되면 맛이 가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체력이 갈수록 떨어져 실리마린으로 연명하고, 살과 근육이 하루하루 빠져갔다. 첫 주에 교육장이 너무 추워서 슬리퍼 모양을 따라 발등이 트기도 했다. 살다 살다 발등이 튼 건 처음이었다. 동료평가하러 갈 때나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발등이 쓰라려서 고생했다. 교육장 내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한겨울에 밖에서 덜덜 떨면서 구운 계란과 두유를 먹는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좌절하기도 했다.
게다가 과제는 또 산 넘어 산이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걸 해내면 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과제를 진행할 때마다 과제를 빠르게 풀고 넘어가는 게 중요한지, 아니면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는 게 중요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진도 빼기와 개념 이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과제를 진행하다가 다른 동료에게 내가 도움이 되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에 대한 위로가 되다가도, 문제 하나도 빠릿빠릿하게 풀어내지 못 하는 나를 보면 갑갑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겨우 과제를 해내는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요령 없이 맨땅에 헤딩을 몇 번이나 했는지, 삽질로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날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내 코딩 실력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변곡점에 다다르지 못 한 거라고 애써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이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피신 생활은 행복한 게 더 컸다.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있던 회사와 다르게 또래들과 함께 공부하고 얘기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평가를 주고받으면서, 팀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니면 근처에 앉게 되어서 알게 되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동료들로부터 하나씩 배워가면서 갈수록 재밌게 지냈다.
정말 동료와 함께했기 때문에 피신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동료 덕분에 나의 어려움을 공감받을 수 있었고, 내가 하지 못한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진심으로 피신을 할 수 있는 매일 매일에 감사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나니 아쉬웠다. 문제를 못 푼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정든 피신 생활이 끝이라는 게 정말 아쉬웠다. 학교를 졸업할 때도 이렇게 아쉬워 본 적은 없는데...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산 4주였다.
피신 다음 날에도 아쉬웠다. 오늘이라도 교육장에 가서 코딩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 아쉬웠다.
피신 결과가 나왔을 때는 같이 열심히 하던 사람과 본과정에서 만날 수 없어 아쉬웠다.
결과 판정이 너무 아쉬웠다. 어떤 사람은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아도 본과정을 합격하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는데도 본과정을 합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시간이 아주 흐른 지금은 내가 보낸 피신 생활에 아쉬움이 든다. 요령이 전혀 없었다.
Vim 대신 VSCode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코드 보기, 복사 붙여넣기, 컴파일 등을 훨씬 수월하게 했을 것 같다. 몇 시간은 벌었을 텐데... 그때는 Vim 이외에 새로운 에디터를 받아들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또, man이나 인터넷 페이지 말고도 실제 코드를 적극 참고했으면 함수 구현 능력이 더 빨리 늘지 않았을까 싶다.
붙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여유를 조금 더 가졌으면 어땠을까 싶다. 하루에 4시간보다는 더 자고, 사람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눴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 모든 아쉬움이 피신을 열심히 보냈기 때문에 드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피신이 어떤 시스템인지 끝나고 나서야 그 설계와 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맥락으로, 피신 전에 찾아봤던 많은 후기들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역시 직접 경험해보는 것만큼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피신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개념을 본과정 과제를 진행하면서 많이 깨달았다. 피신 때 모든 걸 이해하지 못 했던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구나 싶어서 위로가 됐다.
과제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그렇고 피신은 본과정을 하기 위한 필수 준비 단계라는 걸 느꼈다.
여전한 산 넘어 산, 그리고 산을 넘으면서 에러를 맞닥뜨리는 내 자신이 피신 때와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끔 과제 때문에 피폐해진 나를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피신에는 정말 이유가 있다...
본과정에 합격하고 오랜만에 피신 전부터 피신 생활까지를 돌이켜보니, 더욱더 열심히 코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간절함과 감사함을 잊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자. 피신도 인생도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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