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자유은행에서 연방준비제도까지

배바·1일 전

디지털시대의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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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이전: 제2장. 1694년 런던 — 자본주의 돈의 탄생 | 다음: 제4장. 1971년 8월 15일 — 닉슨이 세상을 바꾼 일요일


제3장. 자유은행에서 연방준비제도까지

미시간 호숫가의 이상한 은행

1837년 가을, 미국 미시간 주의 한 외딴 마을. 두 명의 검사관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의 임무는 그 마을에 새로 설립된 은행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자유은행법에 따라 누구나 은행을 세울 수 있게 된 직후였고, 미시간 주에서만 이미 수십 개의 은행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상황이었다.

검사관들이 확인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담보 목적으로 주 당국에 예치한 채권의 현황이었다. 자유은행법은 발행 은행권 액면의 일정 비율 이상에 해당하는 주정부 채권 또는 연방 채권을 주 감사관 사무실에 미리 예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담보 채권의 예치가 자유은행 시스템의 첫 번째 안전장치였다. 다른 하나는 그 은행이 일상적인 태환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금고에 충분한 정화 — 금화와 은화 — 를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은행권을 가져온 사람이 “정화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 즉시 응해야 했고, 그 요구를 거절하면 은행은 사실상 파산으로 간주되었다.

검사관들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어느 통나무집에 도착했다. 간판에는 분명히 “OO 은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그리고 금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뒤에 앉은 “은행장”은 검사관들을 정중히 맞이했고, 미리 준비한 서류 한 묶음을 내밀었다. 주 감사관이 발급한 채권 예치 확인서였다. 액면 5만 달러 어치의 주정부 채권이 분명히 예치되어 있다는 증명이었다. 검사관들은 그 서류를 확인하고 다음으로 금고를 점검했다.

금고 안에는 금화와 은화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액수도 적지 않아 보였다. 검사관들은 무게를 가늠해 본 후 검사 결과를 “양호”로 기록하고 다음 마을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사실들이 있었다. 첫째, 금화 더미의 윗부분만 진짜 금화였고 아래쪽은 못이나 유리 조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둘째,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금화 더미 자체가 그 은행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같은 금화 더미가 검사관들의 동선을 따라 미리 다음 은행으로 옮겨져 있었다. 즉 여러 은행이 같은 한 더미의 금화를 돌려가며 검사를 통과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셋째, 어떤 사기는 더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주 감사관 사무실에 예치된 “5만 달러 어치 채권”이라는 것이 사실은 시장에서 거의 가치를 잃은 부실 주정부 채권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액면가는 5만 달러였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1~2만 달러도 받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검사관들은 시장 가치까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액면 5만 달러어치가 예치되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양호” 판정을 내렸다.

이런 은행들을 당시 사람들은 “와일드캣 은행(wildcat bank)”이라고 불렀다. 검사관도 찾기 힘들만큼 외딴 곳, “산 고양이”들이나 사는 변경에 위치한 은행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단지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은행들은 자유은행법의 두 가지 안전장치 — 채권 담보 예치와 정화 보유 — 를 모두 우회하는 사실상의 사기 행위를 통해 돈을 찍어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펼쳐진 “자유은행 시대”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이 흥미로우면서도 혼란스러웠던 시대가, 오늘날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는 결정적 열쇠가 된다.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전쟁”

자유은행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2장에서 우리는 영란은행의 탄생을 살펴보았다. 영국에서 시작된 “중앙은행 모델”은 19세기 초까지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생국 미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중앙은행을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격렬하게 다투었다.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이들은 영란은행을 모델로 한 중앙은행이 신생 미국의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1791년 “제1차 미국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은행은 20년 영업허가 기간이 끝나갈 무렵 갱신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자, 1816년 “제2차 미국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은행 역시 한 사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가 바로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었다.

잭슨은 미국 변경 출신의 거친 정치가였다. 그는 동부 도시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거대 은행을 본능적으로 불신했다. 그는”한 줌의 부유한 동부 은행가들이 변경의 평범한 농민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제2차 미국은행은 민주주의의 적이었고, 미국 정신에 반하는 “괴물”이었다.

1832년 잭슨은 제2차 미국은행의 영업허가 갱신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른바 “은행 전쟁(Bank War)”이었다. 이 전쟁에서 잭슨은 승리했다. 1836년 제2차 미국은행의 영업허가는 만료되었고, 미국은 다시 중앙은행 없는 나라가 되었다.

잭슨주의자들의 생각은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화폐 발행 권력은 위험하다. 그것이 한 곳에 집중되면 부패와 불평등을 낳는다. 따라서 화폐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 경쟁에 맡겨야 한다.” 1837년부터 1863년에 이르는 약 25년 동안, 미국은 이 잭슨주의 철학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자유은행 시대”이다.

이런 잭슨주의 철학은 21세기 비트코인 운동의 사상적 뿌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비트코인 백서가 발표된 직후 사토시 나카모토가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통적 화폐의 근본 문제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신뢰의 양이다. 중앙은행은 통화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 신뢰받아야 하지만, 화폐의 역사는 그 신뢰의 위반으로 가득 차 있다.”

잭슨도 사토시도 “중앙집권적 화폐 발행 권력에 대한 깊은 불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리고 둘 다 “화폐의 자유 발행”이 그 불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잭슨은 그것을 “자유은행”으로, 사토시는 “분산원장 위의 암호화폐”로 구현하려 했다. 20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사상이 다른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잭슨의 실험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자유은행법” — 누구나 은행을 세울 수 있다

자유은행 시대의 핵심 제도는 “자유은행법”이었다. 1837년 미시간 주를 시작으로, 1850년대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주가 잇따라 자유은행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핵심 내용은 간단했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은행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발행하려는 은행권 액면의 일정 비율(보통 100% 이상)에 해당하는 채권 — 주로 주정부 채권이나 연방 채권 — 을 주 당국에 담보로 예치해야 했다. 이런 방식을 “채권 담보 발행”이라고 불렀다.

이 제도의 발상은 합리적이었다.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은 본질적으로 “발행 은행이 이 종이를 가져온 사람에게 정화(금·은)로 액면가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차용증서”였다. 만약 그 은행이 망하면 보유자는 손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은행이 미리 채권을 담보로 예치해 두었다면, 은행이 망하더라도 주 당국이 그 담보 채권을 매각해 은행권 보유자들에게 보상해 줄 수 있다. 따라서 은행권은 안전하다 — 이것이 자유은행법 입안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제도는 “화폐 발행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화폐 발행 권력은 동부의 거대 은행가들에게 독점되지 않았다. 변경의 작은 마을에서도, 약간의 자본만 있으면 누구나 자기 이름의 은행을 세우고 자기 이름의 화폐를 찍어낼 수 있었다. 잭슨주의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되는 듯했다.

8,000종 이상의 돈

자유은행법이 도입된 후 미국 곳곳에서 새로운 은행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860년에 이르렀을 때, 미국 전역에서는 약 1,500개의 자유은행이 영업 중이었고, 이들이 발행한 은행권의 종류는 무려 약 8,000종 이상에 달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이 1855년의 평범한 미국 시민이라고 하자. 당신은 일을 마치고 임금으로 여러 장의 지폐를 받았다. 그 지폐들은 모두 다른 은행이 발행한 것이다. 한 장은 뉴욕의 어느 은행이, 한 장은 보스턴의 어느 은행이, 한 장은 인디애나의 외딴 마을에 있는 어느 은행이 발행한 것이다. 모두 “1달러”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같은 1달러가 아니다.

당신이 그 지폐들로 식료품을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지갑에서 두꺼운 책자를 꺼낸다. “은행권 보고서(banknote reporter)”라 불리는 정기 간행물이다. 이 책에는 미국 전역의 모든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현재 시세”가 적혀 있다. 가게 주인은 당신이 내민 각 지폐의 발행 은행을 확인하고, 책자에서 해당 은행의 은행권 시세를 찾는다.

뉴욕 은행의 지폐는 액면가 그대로 인정된다. 1달러는 1달러다. 그러나 보스턴 은행의 지폐는 98센트로 할인된다. 너무 멀어서 그 은행에 직접 가서 정화로 바꾸기가 번거롭기 때문이다. 인디애나 변경의 그 은행 지폐는? 가게 주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건 받지 않습니다. 그 은행이 진짜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이것이 자유은행 시대 미국의 일상이었다. 누구나 자기 돈을 찍을 수 있는 자유는 가져왔지만, 그 누구의 돈도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지 않는 혼란도 함께 가져왔다.

경제학자는 이런 상태를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 무너진 상태”라고 부른다. 단일성이란 “한 경제 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1달러가 동일한 1달러로 통용된다”는 원칙이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원칙은, 사실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보장해 주어야만 작동한다. 자유은행 시대에는 그것을 보장해 줄 누군가가 없었다. 결과는 8,000종의 1달러가 서로 다른 가격에 거래되는 “분열된 화폐의 세계”였다.

와일드캣 — 화폐의 자유는 어떻게 사기로 귀결되는가

자유은행 시대의 혼란은 단일성 결여에 그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광범위한 은행 파산이었다.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의 경제학자 아서 롤닉과 워렌 웨버는 1980년대에 자유은행 시대를 면밀히 연구했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미시간·인디애나·일리노이·미네소타 등 일부 주에서는 자유은행 중 약 40~50%가 1850년대 후반에 파산했다. 그리고 그 파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흔히 알려진 “통화 남발”이 아니었다. 미묘하면서도 더 심각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자유은행은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했다. 따라서 은행권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 담보 채권의 가치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만약 담보 채권 — 주로 주정부 채권 — 의 시장 가격이 하락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여전히 그 채권을 보유하고 있고, 그 채권으로 발행한 은행권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채권의 시장 가치가 떨어졌다면, 그 은행권은 더 이상 액면가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는 즉시 은행으로 몰려가 은행권을 정화(금·은)로 바꿔달라고 요구한다. 은행은 보유한 정화가 떨어지면 파산한다.

이것이 1850년대 후반 자유은행 시대를 휩쓴 광범위한 파산의 메커니즘이었다. 1857년 경제 위기로 주정부 채권 가격이 하락하자, 그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했던 수많은 자유은행이 한꺼번에 파산했다. 그 결과 그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그것을 보유한 평범한 시민들은 평생 저축한 돈을 한순간에 잃었다.

이 발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보자. 자유은행은 “법이 정한 대로” 채권을 담보로 예치했고, “발행량은 담보 가치를 넘지 않는다”는 원칙도 지켰다. 그런데도 광범위한 파산이 일어났다. 왜인가? 그것은 “담보 자산 자체의 가치가 변동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기억해 두자. 같은 이야기가 200년 뒤 21세기에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스테이블코인도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발행자는 미국 국채나 현금 같은 “준비자산”을 보유하고, 그 자산을 담보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 만약 시장이 그 준비자산의 가치를 의심하거나 실제로 가치가 떨어지면, 자유은행 시대 미국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스테이블코인의 페그가 무너질 수 있다. 2022년 5월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테라(Terra)가 붕괴했을 때, 그리고 2023년 3월 서클(USDC)이 잠시 1달러 아래로 떨어졌을 때, 우리가 목격한 것은 19세기 자유은행 위기의 21세기 디지털 버전이었다.

서폭은행의 흥미로운 실험

자유은행 시대의 혼란을 시장 스스로가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실제로 그런 시도가 있었다. 보스턴의 “서폭은행(Suffolk Bank)” 이야기다.

1820년대에 보스턴의 서폭은행은 한 가지 영리한 사업 모델을 만들어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다른 은행들이 서폭은행에 일정한 준비금을 예치하면, 서폭은행이 그 은행들의 은행권을 액면가로 청산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일종의 자발적 청산 동맹이었다.

이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했는가? 어느 상인이 매사추세츠의 A 은행 지폐와 코네티컷의 B 은행 지폐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하자. 두 은행이 모두 서폭 시스템에 가입되어 있다면, 그 상인은 두 지폐를 모두 액면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제는 서폭은행을 통해 자동으로 이뤄지고, 두 은행 간의 채권채무 관계가 정리된다. 결과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안에서는 모든 은행의 지폐가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었다. 화폐의 단일성이 사적 기관에 의해 부분적으로 회복된 것이다.

이 사례는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일부 시장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민간 부문이 스스로 화폐 단일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한다. 즉 중앙은행 같은 공적 기관이 없어도, 시장의 자율적 메커니즘이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서폭 시스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첫째, 서폭은행은 청산 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은행들을 사실상 강제로 가입시켰다. 가입하지 않은 은행의 지폐를 대량으로 모아서 한꺼번에 정화 태환을 요구하는 “공격(note dueling)”을 가했던 것이다. 이는 시장 경쟁이라기보다 사적 권력에 의한 강제에 가까웠다.

둘째, 서폭 시스템은 뉴잉글랜드라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작동했다. 전국적 단일성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서폭 시스템 자체가 1858년 경제위기 과정에서 와해되었다. 위기 상황에서 시스템 안의 은행들이 한꺼번에 어려움에 빠지자, 서폭은행은 더 이상 그들을 떠받칠 수 없었다. 위기 시에 안전장치를 제공해 줄 “최종 청산자”가 없는 사적 청산 동맹은, 결국 그 자체가 위기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서폭은행의 흥미로운 흥망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적 청산 메커니즘은 평상시에는 화폐 단일성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위기 시에는 그 자체가 무너진다. 시스템 전체를 떠받칠 수 있는 공적 안전장치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화폐 단일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21세기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직접적인 시사를 준다. 오늘날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들은 자체적으로 준비자산을 관리하고, 신용평가를 받고, 일부는 보험까지 가입한다. 평상시에는 이런 자발적 안전장치들이 작동한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가 닥쳤을 때 — 즉 시장 전체가 패닉에 빠지고 모든 보유자가 동시에 환매를 요구할 때 — 그런 사적 안전장치가 충분할까? 19세기 서폭은행의 경험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위기, 위기, 그리고 또 위기

자유은행 시대의 혼란은 1863~1864년 국법은행법의 제정으로 일정 부분 정리되었다. 이 법은 연방정부의 인가를 받은 “국법은행”이 통일된 양식의 “국법은행권”을 발행하도록 했고, 주(州) 인가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에는 10%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8,000종 이상의 다양한 은행권은 점차 사라지고, 통일된 양식의 국법은행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화폐의 단일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결정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위기 시 안전장치를 제공할 중앙은행이 없다는 문제였다.

국법은행 시스템 하에서 미국은 1873년, 1893년, 그리고 1907년에 대규모 금융 패닉을 잇따라 겪었다. 매번 비슷한 패턴이었다. 어떤 큰 은행이 어려움에 빠진다는 소문이 돌면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예금을 인출하려 한다. 그 은행이 무너지면 그 은행과 거래하던 다른 은행들도 어려움에 빠진다. 도미노처럼 위기가 전파된다.

1907년의 패닉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위기가 너무 심각해지자, 결국 한 사람의 민간 금융가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가 바로 당대 미국 최대의 금융가 J. P. 모건이었다. 모건은 자신의 자택 도서관(Morgan Library)에 뉴욕의 주요 은행가들을 불러 모았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에게 자금 출자를 강요해 위기에 빠진 은행들을 구제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금융 시스템이 한 민간 금융가의 개인적 권위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정치권을 흔들었다. 미국은 더 이상 “중앙은행 없는 나라”로 남을 수 없었다. 1908년 의회는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를 설치해 다른 나라들의 중앙은행 제도를 면밀히 연구했다. 위원회는 4년에 걸친 조사 끝에 미국에도 영란은행 모델을 적용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13년 12월 23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에 서명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영란은행이 설립된 1694년으로부터 약 220년, 잭슨이 제2차 미국은행을 폐지한 1836년으로부터 약 80년이 지나서야, 미국은 마침내 영란은행 모델로 합류했다.


연방준비제도가 완성한 시스템

연방준비제도의 설립은 80년에 걸친 미국 화폐사의 분기점이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미국 화폐 시스템의 모습 —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화폐 시스템의 모습 — 은 그 후 약 20년에 걸쳐 차근차근 완성되었다.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그것이 6장과 8장에서 우리가 다룰 디지털 화폐 시대의 선택지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연준이 출범한 1913년 당시, 미국에는 한 가지 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국법은행법(1863)이 민간은행의 자체 은행권 발행 권한을 사실상 폐지한 이후, 민간은행들은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새로운 화폐가 바로 자기앞수표(cashier’s check)와 요구불예금이었다.

원리는 단순했다. 은행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의 지폐를 인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객의 “예금 계좌”에 일정 금액을 기록하고, 그 고객이 수표를 발행하여 결제에 사용하는 것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표는 다른 은행에서도 받아주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은행권이라는 “종이 화폐”가 폐지된 자리를 “예금과 수표”라는 새로운 결제 시스템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민간은행이 자체적으로 “화폐 비슷한 것”을 발행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변화는 처음에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1900년 무렵에도 미국 일반 시민의 일상 결제에서는 여전히 현금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을 거치며 자기앞수표와 요구불예금의 사용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도시 상거래에서, 그리고 점차 일반 가계 거래에서도 “현금 대신 수표”의 시대가 열렸다. 그 결과 1920년대에 이르면 미국 화폐 공급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민간은행 예금”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결정적 질문이 제기된다. 민간은행 예금이 “화폐”로 작동하려면, 그것이 “진짜 돈”과 동등한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민간은행은 망할 수 있다. 은행이 망하면 그 은행에 예치된 예금은 어떻게 되는가? 만약 예금자들이 그 위험을 진지하게 의식하기 시작하면, 평소 “화폐”처럼 작동하던 은행 예금은 한순간에 위태로운 자산으로 변할 수 있다.

이 위험은 1929년 대공황 직후 현실이 되었다. 1930년부터 1933년 사이 미국에서는 약 9,000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한 동네에서 어느 은행이 망했다는 소문이 돌면 옆 동네 다른 은행에서도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인출을 요구했다. 결국 1933년 3월,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전역의 모든 은행에 일주일간 영업 정지를 명령해야 했다. 이른바 “은행 휴일(Bank Holiday)”이었다.

이 위기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했다. 민간은행 예금이 진정한 의미의 “화폐”로 작동하려면, 그 안전성을 공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33년에 만들어진 그 장치가 바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였다. FDIC는 일정 한도 안에서 모든 은행 예금을 연방정부가 직접 보장하는 제도였다. 처음에는 2,500달러였던 보장 한도가 점차 올라 오늘날에는 25만 달러에 이른다. 그리고 이 장치 덕분에 평범한 미국 시민은 은행 예금을 “현금과 동등한 화폐”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화폐 시스템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연방준비제도가 발행하는 본원통화(현금과 지급준비금)가 위계의 정점에 있다. 둘째, 그 아래에 민간은행이 신용창출을 통해 만들어내는 예금통화가 작동한다. 셋째, 이 예금통화는 FDIC의 예금보험으로 일정 한도까지 안전성이 공적으로 보장된다. 넷째, 위기 시에는 연준이 최종대부자로 시스템 전체를 떠받친다.

이 시스템은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특성을 가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돈”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사실은 민간은행이 만들어낸 신용화폐라는 점이다. 영란은행이 2014년에 공식적으로 인정한 한 가지 사실 — “현대 경제에서 화폐의 약 90% 이상은 민간은행이 대출을 통해 창출한 예금통화”라는 사실 — 이 바로 이 시스템의 결과다. 우리 지갑 속의 현금이나 한국은행 본원통화는 화폐 공급 전체에서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의 대부분은 사실 시중은행이 대출 행위를 통해 무에서 창조한 신용이다.

이 시스템을 다시 한번 큰 그림에서 보자. 그것은 사실상 1694년 영란은행이 정초한 “하이브리드 화폐 모델”의 미국적 완성형이다. 영란은행이 시작한 “공공의 신용과 민간의 신용을 결합한 화폐 시스템”이, 미국에서는 80년의 우회와 시행착오를 거쳐 1930년대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그 후 한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로 확산되었다. 한국은행이 1950년에 설립되고, 한국 시중은행들의 예금이 화폐 시스템의 중심이 되며, 1996년에 한국 예금보험공사가 출범한 일련의 과정도 사실은 같은 “미국 모델의 한국적 적용”이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한국의 화폐 시스템은, 멀리는 1694년 런던에서, 가까이는 1930년대 워싱턴에서 그 골격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통찰이 분명해진다. 민간은행 예금이 “화폐”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공적 안전장치들의 망”이 필요하다. 자기앞수표 발달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 간 청산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고, 그 청산 시스템의 정점에 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금이 “진짜 돈”처럼 사용될 수 있는 것은 FDIC의 예금보험이 있기 때문이다. 위기 시에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연준의 최종대부자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공적 안전장치의 망 위에서 비로소 “민간 신용창출이라는 활기찬 메커니즘”이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다.

이 통찰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21세기 디지털 화폐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 화폐” — 스테이블코인 — 도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폐”로 작동하려면, 어떤 공적 안전장치의 망이 그것을 떠받쳐야 하는가? 19세기 자유은행권은 그런 망이 없었기에 무너졌다. 20세기 자기앞수표와 요구불예금은 약 70년에 걸친 제도 진화 끝에 그런 망을 갖추었다.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은 어느 쪽 길을 갈 것인가? 이 질문이 이 책의 6장과 8장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핵심 질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에 이름을 붙여 두자. 1863년 국법은행법은 주(州) 인가 자유은행들이 발행하던 은행권에 무거운 세금을 매겨 사실상 폐지시켰다. 정책적으로 보면 “민간이 자기 돈을 찍어내던 시대”는 그때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랐다. 민간 발행 화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은행권이라는 옷을 벗고 “요구불예금”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채 부활했다. 통계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미국 통화 공급에서 요구불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860년 무렵 약 30%에서 1929년에는 약 87%까지 커졌다. 폐지된 줄 알았던 민간 화폐가 오히려 화폐 시스템의 주역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 책은 이 패턴을 “보이지 않는 자유은행의 부활”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패턴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 스테이블코인의 운명을 예측하는 강력한 렌즈다. 어떤 형태의 민간 화폐를 정책적으로 억누르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시장 수요에 응답하는 한 새로운 기술적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 이것이 자본주의 화폐사가 거듭 보여준 동학이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민간 디지털 화폐를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차피 부활할 것이라면 어떤 공적 안전장치의 망 안에서 부활하게 할 것인가”이다. 이 질문은 이 책의 8장에서 우리가 디지털 화폐의 세 갈래 미래를 평가할 때 결정적 기준이 된다.

자, 이제 미국 화폐사의 긴 여정 — 자유은행에서 시작해 연방준비제도와 FDIC를 거쳐 현행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 을 마쳤다. 이 여정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정리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자.

자유은행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19세기 미국의 자유은행 시대에서 시작해 연방준비제도와 FDIC가 완성한 현대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 약 100년에 걸친 미국 화폐사의 여정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적어도 다음 네 가지는 분명하다.

첫째, 화폐의 단일성은 시장 스스로 보장할 수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할 수 있게 되면, 발행자마다 신뢰도가 다르기 때문에 단일성이 무너진다. 시장이 발행자에 대한 정보를 평가하는 데에는 본질적으로 비용이 들고, 그 평가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둘째, 발행자의 자체 담보 자산만으로는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자유은행의 은행권은 채권 담보로 발행되었지만, 담보 자산의 가치 자체가 변동하면 은행권의 가치도 흔들렸다. 오늘날의 스테이블코인도 동일한 구조적 한계를 가진다.

셋째, 사적 청산 동맹은 위기 시 무너진다. 서폭은행의 사례는 사적 자율 메커니즘이 평상시에는 작동할 수 있지만, 위기 시에는 그 자체가 위기에 휩쓸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정한 안전장치는 공적 기관이 제공해야 한다.

넷째, 결국 중앙은행은 필요하다. 미국이 자유은행 → 국법은행 → 연방준비제도로 진화한 80년의 역사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화폐 시스템의 안정성은 위기 시 최종 청산 자산과 안전장치를 제공할 수 있는 공적 주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교훈은 19세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 시스템의 본질에 관한 보편적 통찰이다. 그리고 이 교훈들은 오늘날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 운동에 직접적인 시사를 준다.

비트코인 운동은 잭슨주의의 21세기 부활이다. “중앙은행은 위험하다, 화폐 발행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그 주장은 잭슨이 1830년대에 했던 주장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화폐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사실 — 너무나 큰 가격 변동성과 처리 속도의 한계 — 도 동시에 분명해졌다.

이에 대한 절충안으로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준비자산 담보”라는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1837년 미시간 주의 자유은행법이 채택한 “채권 담보 발행”과 거의 똑같은 구조다. 자유은행이 주정부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했듯,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국채를 담보로 디지털 토큰을 발행한다. 자유은행이 발행자마다 신뢰도가 달랐듯, 스테이블코인도 발행자마다 신뢰도가 다르다. 자유은행 시대에 “은행권 보고서”가 발달했듯, 오늘날에는 스테이블코인 등급평가와 모니터링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게리 고튼과 제프리 장은 2023년에 “야생 고양이 스테이블코인 길들이기(Taming Wildcat Stablecoin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제목에 그들의 통찰이 함축되어 있다.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은 19세기 와일드캣 은행권의 디지털 부활이다. 그렇다면 19세기에 와일드캣 뱅킹이 결국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공적 안전장치와 결합된 화폐 시스템”으로의 진화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문제

자유은행 시대의 교훈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교훈을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71년 8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그날 미국의 한 대통령이 텔레비전 앞에 섰다. 그가 발표한 결정은 미국 국내 정책처럼 들렸지만, 그 결과는 전 세계의 화폐 시스템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 결정 이후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주요 화폐가 어떤 상품과도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신용”이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이후 50년에 걸쳐 진행될 거대한 부동산 거품, 부채 누적, 그리고 결국 2008년 금융위기의 배경을 만들었다.

다음 장의 무대는 1971년 8월의 캠프 데이비드 별장이다. 거기서 우리는 닉슨 대통령과 그의 자문관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인류 화폐사의 결정적 갈림길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함께 목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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