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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13일 금요일 오후. 미국 메릴랜드 주 캐탁틴 산맥에 자리 잡은 캠프 데이비드 별장.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자신의 핵심 경제 자문관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별장에 도착했다. 워싱턴의 무더운 공기에서 벗어난 산속 별장은 시원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과 달리, 그들이 그 주말에 내려야 할 결정은 인류 화폐사를 영원히 바꿀 만한 것이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인상적이었다. 재무장관 존 코널리는 텍사스 출신의 강성 정치가였다. 그의 옆에는 예산국장 조지 슐츠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 폴 매크라켄, 그리고 경제자문위원회 의장 허버트 스타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 명은 재무부 차관 폴 볼커였다. 그는 훗날 1980년대 미국 인플레이션을 잡은 전설적인 연준 의장이 될 인물이었다. 다른 한 명은 당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아서 번스였다.
이들이 그 주말에 토론할 의제는 단 하나였다. 달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미국은 “브레튼우즈 체제”라 불리는 국제 화폐 질서의 중심에 있었다. 이 체제 하에서 미국 달러는 1온스의 금을 35달러에 교환해 줄 것을 다른 나라들에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통화는 모두 달러에 고정되어 있었다. 즉 “달러는 금에, 다른 모든 통화는 달러에”라는 이중 구조였다. 이 구조 덕분에 전후 25년 동안 세계 경제는 환율 안정 속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체제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할 사람들이 캠프 데이비드에 모여 있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10여 년 전에 한 경제학자가 했던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9년, 벨기에 출신의 예일대학교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미국 의회 청문회 자리에 섰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미국 의원들에게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고, 이듬해 1960년에 출간한 저서 금과 달러 위기에서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정리했다. 훗날 “트리핀의 딜레마(Triffin Dilemma)”라 불리게 될 그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전 세계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국제 거래에 필요한 달러의 양이 늘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이 국제수지 적자를 통해 달러를 해외에 공급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미국 달러는 “언제든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이 보유한 금이 해외에 풀려나간 달러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두 조건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이다. 미국이 달러를 더 많이 공급할수록, 미국이 보유한 금에 비해 해외에 풀려나간 달러는 더 많아진다. 그러면 “이 달러를 정말 금으로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커진다. 반대로 미국이 그런 의심을 피하기 위해 국제수지 적자를 억제하면, 세계 경제가 필요로 하는 달러가 부족해진다.
트리핀의 결론은 단호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이 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모순이 깊어지며, 결국 어떤 형태로든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원들은 이 벨기에 학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핀의 예언은 이후 10년에 걸쳐 한 단계씩 현실이 되어갔다.
1960년대 미국은 두 가지 큰 일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다른 하나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이었다. 둘 다 좋은 명분이 있었지만, 둘 다 천문학적인 돈을 필요로 했다. 미국 정부는 적자 재정을 통해 그 돈을 조달했고, 그 결과 더 많은 달러가 시중에 풀려나갔다.
이 달러들 중 상당 부분은 결국 다른 나라들의 손에 들어갔다. 미국이 수입을 많이 하고 해외 군사 기지를 운영하면서, 달러가 일본·독일·프랑스 등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 흘러갔다. 그 나라의 중앙은행은 받은 달러를 자국 외환 보유고로 쌓아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외국 중앙은행들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진 이 달러를 정말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그들의 의심은 근거가 있었다. 1960년 미국이 보유한 금은 약 178억 달러어치였다. 그러나 외국 중앙은행들과 민간이 보유한 달러는 209억 달러였다. 1971년에 이르면 미국 금 보유는 약 102억 달러로 줄어든 반면, 해외 달러 부채는 678억 달러로 폭증해 있었다. 이론상 외국 보유자들이 한꺼번에 “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 미국은 절대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가장 노골적으로 의심을 표현한 사람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드골은 미국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은 자국 통화가 국제 본위 화폐인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은 적자를 내도 “자기 돈”으로 갚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이런 불평등에 항의하는 의미로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를 적극적으로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들도 점차 같은 길을 따랐다.
1971년 상반기, 미국에 대한 금 태환 요구는 약 22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이 가진 금은 그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닉슨 행정부에는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어떻게든 금 태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금 태환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후자는 사실상 브레튼우즈 체제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결정이었다.
캠프 데이비드의 그 주말, 자문관들은 격렬하게 토론했다. 누구는 평가절하 쪽을, 누구는 금 태환 정지 쪽을 옹호했다. 닉슨 자신도 두 선택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가장 강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재무장관 존 코널리였다. 그는 정치적 본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평가절하는 약점의 표시로 보일 것입니다. 미국은 강한 결단을 보여야 합니다. 금 태환을 일방적으로 정지하고, 우리가 통제권을 쥡시다.” 코널리의 논리는 닉슨의 정치적 감각에 호소력이 있었다. 평가절하는 “미국이 굴복했다”는 인상을 남기는 반면, 금 태환 정지는 “미국이 규칙을 다시 쓴다”는 메시지가 될 것이었다.
연준 의장 아서 번스는 다른 의견이었다. 그는 금 태환 정지가 가져올 국제적 충격과 미국의 신뢰 손상을 우려했다. 그러나 번스의 목소리는 닉슨이 듣고 싶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무렵 닉슨은 1972년 재선을 1년여 앞두고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동시에 오르는 것이었다. 금 태환 유지가 그 두 가지를 모두 악화시킬 수 있다는 코널리의 경고는 닉슨의 정치적 본능을 자극했다.
8월 14일 토요일 밤, 닉슨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금 태환을 일방적으로 정지한다”. 이와 함께 90일간의 임금·가격 동결, 그리고 수입품에 대한 10% 추가 관세 부과까지 포함하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패키지가 마련되었다.
이 결정은 일요일 저녁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 국민과 전 세계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일러둘 사실이 있다. 닉슨은 이 결정을 “동맹국 정부들에게 사전에 알려야 한다”는 외교적 관행을 깨버렸다. 일본·독일·영국·프랑스 등 주요 동맹국 정부들은 일요일 저녁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서야 이 충격적 결정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닉슨 쇼크(Nixon Shock)”라는 표현이 만들어졌고, 그 표현이 이후 전 세계에 정착되었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9시. 닉슨은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임금·가격 동결, 수입 관세, 그리고 결정적인 한 문장이 그 사이에 있었다.
“저는 코널리 재무장관에게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즉, 달러의 금 태환을 일시적으로 정지합니다.”
“일시적으로”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미국 정부의 의도된 외교적 수사였다. 마치 “잠시 멈춘다,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인상을 주려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날의 발표는 영원한 결별이었다. 그 후로 미국 달러는 다시는 금으로 태환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도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노력을 점차 포기했다. 1973년에 이르면 주요국들은 모두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1976년 자메이카 협정에서 변동환율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법적으로도 종결되었다.
미국 시청자들은 그날의 발표를 그저 “또 하나의 경제 정책”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화폐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일요일 저녁은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날 이후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모든 주요 화폐가 어떤 상품과도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신용”이 되었다.
이 변화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1장에서 우리는 화폐에 대한 세 가지 답 — 상품화폐론, 신용화폐론, 주권화폐론 — 을 살펴보았다. 1971년 이전의 세계는 그 세 가지가 결합된 세계였다. 한편으로 화폐는 신용이었지만(은행 예금, 영란은행 지폐 등), 다른 한편으로 그 신용 시스템 전체가 궁극적으로 “금”이라는 상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금은 인류 화폐 시스템의 “외부 닻”이었다. 화폐가 아무리 추상화되고 신용 형태로 진화해도, 그 뿌리에는 “손에 잡히는 가치 있는 물건”인 금이 있었다.
1971년 8월 15일, 그 외부 닻이 끊어졌다. 이제 화폐는 어떤 상품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1달러가 “1달러”인 이유는, 미국 연준이 “그것이 1달러이다”라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다. 화폐는 이제 순수한 사회적 약속, 순수한 신용이 되었다.
이 변화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자유의 확대였다. 다른 하나는 안정성의 상실이었다.
자유의 측면을 먼저 보자. 외부 닻이 끊어진 화폐 시스템은 훨씬 신축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중앙은행은 더 이상 금 보유량에 묶여 있지 않았다. 경제 위기 때 정부와 중앙은행은 적극적으로 통화 공급을 늘려 위기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 때 각국이 금본위제 때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 미국 연준이 신속하게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해 시스템 붕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71년 이후의 새로운 화폐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러나 안정성의 측면은 정반대였다. 외부 닻이 사라진 화폐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더 불안정해졌다. 그 불안정성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것은 “신용의 폭발적 확장”이라는 형태였다.
영국 경제학자 모리츠 슐라릭과 미국 경제학자 앨런 테일러가 2012년에 발표한 한 논문은 1971년 이후의 변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17개 선진국의 약 140년 데이터를 모아서, GDP 대비 은행 대출의 비율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870년부터 197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선진국 평균 GDP 대비 은행 대출 비율은 대체로 50% 안팎에서 거의 변동이 없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대공황, 전후 복구 등 굴곡 많은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이 비율은 큰 흐름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이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치며 약 70%로, 1990년대에 약 90%로, 그리고 2007년에는 약 110%에 이르렀다. 40년 만에 약 두 배가 된 것이다. 1970년 이전 100년 동안의 변화보다, 1970년 이후 40년 동안의 변화가 훨씬 컸다.
이것은 단순히 통계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본질적 변화이다.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는 점점 더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가 되었다. 가계는 부동산 담보 대출로 집을 사고, 기업은 차입으로 자본을 조달하며, 국가는 국채로 재정을 운영한다. 이 모든 부채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신용화폐”로서 경제 안에서 작동한다. 우리 시대는 “신용으로 굴러가는 시대”이며, 그 신용은 1971년 이후 외부 닻이 끊긴 화폐 시스템 위에서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신용 확장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두 가지를 가져왔다. 하나는 성장이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 특히 신흥국 경제는 풍부한 신용 공급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에서 우리가 경험한 한강의 기적도 이 흐름의 일부였다.
다른 하나는 위기였다. 슐라릭과 테일러의 같은 연구는 매우 결정적인 발견을 함께 보고했다. GDP 대비 신용 비율이 빠르게 증가할수록 그 후 몇 년 안에 금융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아진다. 즉 신용 호황은 결코 일방적인 축복이 아니라, 거의 필연적으로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신호였다.
1970년 이전과 이후의 금융위기 발생 빈도를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1970년 이전 100년 동안 발생한 주요 금융위기의 수는 1970년 이후 40여 년 동안 발생한 위기의 수와 거의 같다. 즉 1971년 이후의 화폐 시스템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본질적으로 더 위기에 취약해졌다.
이 변화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닉슨 쇼크가 일어난 다음 해인 1972년, 한국에서는 “8.3 사채동결 조치”라는 충격적 정책이 발표되었다. 한국 경제가 처한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1971년의 국제 화폐 질서 변화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1970년대 한국이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도 막대한 신용 공급에 의존했고, 그 신용 공급은 1971년 이후 새로운 국제 화폐 환경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변화는 한국 가계의 일상에서 일어났다. 1970년대까지 한국의 평범한 가정은 은행 예금과 약간의 현금이 자산의 거의 전부였다. 부동산 대출도, 신용카드도, 주식 투자도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며 한국 가계도 점차 부채와 자산 시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거친 후 2000년대에는 “가계 부채 증가”가 한국 경제의 만성적 화두가 되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가계 부채가 GDP를 넘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가계 부채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의 어느 직장인이 영끌로 아파트를 사고, 그 아파트 가격에 일희일비하며, 부동산 시장의 동향에 가계 전체의 운명이 좌우되는 풍경 — 이 모든 것은 1971년 이후의 새로운 화폐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다. 한국 사람들이 “부동산 공화국”이라 부르는 그 현상은, 한국 특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971년 이후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보편적 현상의 한국적 표현이기도 하다.
자유은행 시대가 우리에게 “중앙은행 없는 화폐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면, 1971년 이후의 화폐사는 그와는 다른, 그러나 같은 정도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중앙은행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화폐 시스템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므로 잠시 더 생각해 보자.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문제는 명확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하니, 단일성이 무너지고 위기가 반복되었다. 그 답은 중앙은행을 두는 것이었다. 미국은 1913년에 그렇게 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있어도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났고, 그 후 화폐 시스템에 또 한 번의 큰 개혁이 필요했다. 그리고 1944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는 “중앙은행 + 금이라는 외부 닻”이라는 이중 안전장치를 가진 시스템이었다.
1971년 그 외부 닻이 끊어지면서, 시스템은 “중앙은행만 남은 시스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풍부한 신용 공급과 동시에 만성적 금융 불안정을 함께 가져왔다. 1980년대 일본의 거품과 붕괴,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초의 닷컴 버블,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10년대 유럽 재정위기에 이르기까지, 1971년 이후 우리는 끊임없는 금융위기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외부 닻”인 금을 다시 가져와야 할까? 비트코인 옹호자들이 주장하듯, “디지털 금”을 새로운 외부 닻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차근차근 풀어나갈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 답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1971년 이후 50년 동안 화폐 시스템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외부 닻을 잃은 화폐 시스템은 단순히 신용 공급만 늘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화폐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림자금융, 머니마켓펀드, 자산담보부증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 새로운 “유사 화폐”들이, 결국 2008년 가을 미국 금융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릴 뻔한 위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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