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694년 런던 — 자본주의 돈의 탄생

배바·2일 전

디지털시대의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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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이전: 제1장. 돈이란 무엇인가 — 세 가지 답 | 다음: 제3장. 자유은행에서 연방준비제도까지


제2장. 1694년 런던 — 자본주의 돈의 탄생

한 회사의 탄생

1694년 7월 27일, 런던. 한 회사가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잉글랜드 은행의 총재와 회사(The Governor and Company of the Bank of England)”이며, 우리가 지금 영란은행으로 부르는 그 회사다.

오늘날 영란은행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 중앙은행”을 떠올린다. 정부 기관이고, 통화 정책을 결정하며,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책임지는 권위 있는 공적 기구다. 그러나 1694년 그날 영업을 시작한 영란은행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1,268명의 출자자들이 모은 자본금 120만 파운드로 설립된 평범한 민간 주식회사였다. 출자자 중에는 런던의 상인, 은행가, 부유한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동기는 단순했다. 이 회사가 돈을 벌어다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민간 회사의 탄생이, 그 후 300년 이상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폐 제도적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694년의 런던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두 가지 돈, 그리고 그 한계

1694년 무렵 유럽 경제는 두 가지 종류의 돈이 함께 작동하는 세계였다.

첫 번째 돈은 “국왕의 주화”였다.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이 발행한 금화와 은화가 가장 권위 있는 화폐였다. 이 주화에는 두 가지 가치가 결합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왕이 이것을 화폐로 인정한다”는 권위의 표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실제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있어 “내재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1장에서 본 표현으로 말하자면, 주화는 “주권화폐”이면서 동시에 “상품화폐”였다.

그러나 주화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첫째, 주화는 만들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었다. 금과 은은 채굴해야 했고, 채굴량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경제가 성장하고 거래량이 늘어나도 주화의 양은 그만큼 빨리 늘어나지 못했다. 둘째, 주화는 너무 무거웠다. 대규모 거래에는 부적합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국왕들은 재정난에 빠질 때마다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줄이는 “개주”의 유혹에 시달렸다. 한 시기에 주조된 주화와 다른 시기에 주조된 주화의 실제 가치가 달랐고, 이는 화폐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두 번째 돈은 “상인의 환어음”이었다. 유럽 각지의 상인들 사이에서는 “환어음”이라는 신용 증서가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예컨대 런던의 상인이 암스테르담의 상인에게 1,000파운드를 빚지고 있다면, 그 빚을 적은 종이가 발행되었다. 이 종이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있었고, 결국 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기능했다. 1장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환어음은 전형적인 “신용화폐”였다.

환어음은 매우 유용했다. 그것은 거래량에 따라 신축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고, 운반이 쉬웠으며, 국제 무역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환어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발행자 개인의 신용”에 의존했다. 어떤 환어음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려면 그 발행자가 누구인지, 신뢰할 만한지를 알아야 했다. 모르는 사람의 환어음은 받아주지 않거나, 큰 폭으로 할인해서 받았다. 즉 환어음은 “제한된 신뢰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는 화폐였다.

이렇게 1694년 무렵의 유럽은 “권위는 있지만 발행액이 부족한 국왕의 주화”와 “신축적이지만 신뢰 범위가 제한된 상인의 환어음”이라는 두 가지 화폐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결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등장할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윌리엄 왕의 곤란한 처지

이야기의 또 다른 축에는 한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3세였다. 그는 본래 네덜란드 출신이었으나,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3세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9년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재정은 빈약했고, 세금을 통한 자금 조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윌리엄 왕은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17세기 말 유럽에서 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은 매우 위험한 거래였다. 왕은 빌린 돈을 갚지 않을 수 있었다. 빌려준 사람이 왕을 법정에 세울 수도 없었다. 실제로 그 직전 세기에 프랑스의 여러 왕은 빌린 돈을 갚지 않거나 일방적으로 이자율을 깎아버린 전례가 있었다. 따라서 왕에게 돈을 빌려주려는 자본은 매우 비싼 이자를 요구했다.

윌리엄 왕의 자문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상인 윌리엄 패터슨이었다. 그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았다.

“왕이 직접 자본가 한 명 한 명에게서 돈을 빌리는 대신, 자본가들이 회사를 하나 세우게 합시다. 그 회사는 자본금을 모아 왕에게 한꺼번에 빌려줍니다. 그 대가로 왕은 그 회사에 특별한 권리를 부여합니다. 그 회사가 발행하는 종이(은행권)를 잉글랜드 안에서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제안에는 몇 가지 묘미가 있었다. 첫째,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안전성이 크게 높아졌다. 한 자본가가 왕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면 왕이 갚지 않을 위험이 있지만, 회사를 매개로 하면 그 회사의 존속이 왕의 정치적 정통성과 묶이게 된다. 즉 왕은 그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없다. 둘째, 회사는 왕에게 빌려준 채권을 담보로 자체적인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은행권이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되는 한, 잉글랜드 안에서는 누구나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새로운 화폐가 만들어진다. 셋째, 이 회사는 왕실 채권의 이자도 받고, 은행권 발행 수익도 얻을 수 있다. 매우 수익성 있는 사업이다.

1694년 의회는 이 제안을 승인했다. ’영란은행법(Bank of England Act 1694)’이 통과되었고, 같은 해 7월 27일에 영란은행이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268명의 출자자가 모은 120만 파운드 전액이 즉시 왕실에 대출되었고, 그 대가로 영란은행은 잉글랜드 안에서 지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권리와, 그 지폐가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되는 특권을 얻었다.

새로운 종류의 돈이 탄생하다

영란은행이 발행한 지폐를 들여다보자. 이 지폐는 표면적으로는 “민간 회사가 발행한 차용증서”였다. 즉 “영란은행이 이 종이를 가져온 사람에게 액면가에 해당하는 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쓰인 종이였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환어음과 같은 신용화폐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지폐는 “국가의 약속”이기도 했다. 왕이 이 지폐를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은, 잉글랜드의 모든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이 지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지폐는 다른 환어음들과 달리, 잉글랜드 안에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보편적” 화폐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주권화폐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지폐는 “상품화폐”의 성격도 일부 띠고 있었다. 영란은행은 발행 지폐를 금으로 태환해 줄 의무를 졌고, 이를 위해 일정한 금 준비금을 보유했다. 따라서 이 지폐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금이라는 상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자, 이제 분명해진다. 영란은행 지폐는 1장에서 살펴본 화폐론의 세 가지 답 — 상품화폐론, 신용화폐론, 주권화폐론 — 을 동시에 충족하는 화폐였다. 그것은 어느 한 종류의 화폐가 아니라, 세 종류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화폐였다. 이것이 영란은행의 진정한 역사적 의의이다. 영란은행은 단지 새로운 은행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화폐, 즉 “하이브리드 화폐”를 창조한 제도적 발명이었다.

이 점은 영국의 경제사회학자 제프리 잉햄이 돈의 본성(2004)에서 가장 분명히 정리했다. 그는 영란은행이 “자본주의 화폐의 결정적 발명”이며, 이 발명 덕분에 그 후 300년의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다소 강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이어지는 역사를 보면 그의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을 떠받친 신용

영란은행의 발명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영란은행은 왕실 채권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해 시중에 유통시켰다. 이 지폐는 일상의 거래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무거운 주화 대신 가벼운 종이로 결제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종이의 신뢰성을 영란은행이라는 단일 기관이 보증한다는 점이 시중 상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다음으로 영란은행은 “할인”이라는 사업을 통해 민간 경제에 신용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보유한 환어음을 영란은행이 일정한 수수료(할인료)를 떼고 사들이면, 상인들은 만기 전에 현금(영란은행 지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영란은행은 만기에 환어음 발행인으로부터 액면가를 회수해 차익을 얻었다. 이 단순한 사업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영란은행이 사실상 “민간 경제의 신용 공급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활동을 통해 영란은행은 잉글랜드 경제의 “화폐 발행 중심”이 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민간은행들도 등장했지만, 그들은 점차 자체 지폐를 발행하기보다는 영란은행 지폐를 결제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즉 “영란은행 지폐를 본위로 한 화폐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 화폐 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장기 투자 자금의 안정적 공급”이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된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운하, 공장, 광산, 그리고 나중에는 철도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런 투자에는 단기간에 회수되지 않는 “인내심 있는 자본”이 필요했다. 영란은행 모델이 만들어낸 신용 시스템은 바로 그런 자본을 공급했다.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먼저 산업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화폐·금융 시스템의 우위였다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의 공통된 평가이다. 영국 역사학자 P. G. M. 딕슨은 이 변화를 “금융 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 산업혁명 이전에 “금융 혁명”이 먼저 일어났고, 그 금융 혁명의 핵심이 바로 영란은행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산업적 생산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공공의 신용(국가)”과 “민간의 신용(은행)”을 결합한 새로운 화폐 시스템이라는 제도적 발명을 필요로 했다. 영란은행은 바로 그 발명의 중심이었다.

진화하는 중앙은행 — 위기 속에서 다듬어진 모델

영란은행 모델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통해 점차 다듬어졌다.

가장 중요한 진화는 1844년 ’영란은행법(Bank Charter Act 1844)’과 그 후에 확립된 “최종대부자” 기능이었다. 영란은행이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의 중심이 되면서, 한 가지 새로운 책임이 부각되었다. 다른 민간은행이 위기에 빠져 파산할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그들에게 긴급 자금을 제공할 것인가? 만약 그런 안전장치가 없다면 한 은행의 파산이 다른 은행으로 전파되고, 결국 금융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19세기 영국 언론인 월터 배젓이 롬바드 스트리트(1873)에서 정리했다. 그는 “위기 시 영란은행은 우량 자산을 담보로 충분한 자금을 고금리로 대출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른바 “배젓의 원칙”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영란은행은 단지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책임지는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라고 불리는 이 기능은, 영란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진화하는 결정적 단계였다. 1694년의 영란은행은 평범한 민간 회사였지만, 19세기 후반의 영란은행은 화폐 발행과 금융 안정을 동시에 책임지는 공적 기능을 가진 기관이 되어 있었다. 1946년에 이르러 영란은행은 공식적으로 국유화되었지만, 사실상의 공적 기능은 그 훨씬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진화 과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은 “민간의 신용창출”과 “공적 안전장치”라는 두 축이 함께 작동해야 안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민간은행이 신용창출을 통해 경제의 신축적 자금 수요에 대응하고, 중앙은행은 위기 시 그 시스템 전체를 떠받친다. 이러한 “공공과 민간의 결합”이 영란은행이 정초한 자본주의 화폐 모델의 본질이다.

세계로 퍼져나간 모델

영란은행 모델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거치며 세계 거의 모든 나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방크 드 프랑스(1800), 독일의 라이히스방크(1876), 일본의 일본은행(1882), 그리고 한국의 한국은행(1950)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국가의 거의 모든 중앙은행은 영란은행 모델의 변형이다.

미국은 의외로 늦었다. 미국은 1791년에 “제1차 미국은행”을, 1816년에 “제2차 미국은행”을 설립했지만, 두 은행 모두 정치적 반대 때문에 영업허가가 갱신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미국이 영구적 중앙은행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의 출범에 이르러서였다. 즉 미국은 영란은행이 설립된 1694년으로부터 약 220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자유은행 시대의 혹독한 경험을 거친 뒤에야 영란은행 모델로 합류한 것이다. 이 미국의 우회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중앙은행”이라고 부르는 모든 기관은, 어떤 형태로든 영란은행이 1694년에 시작한 실험의 후예이다. 그리고 그 실험의 핵심 원리 — “공공의 신용과 민간의 신용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화폐” — 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늘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영란은행 모델의 영광스러운 측면이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발명에는 그늘이 있다. 영란은행 모델도 예외가 아니다.

영란은행 모델의 천재성은 “민간은행이 신용창출을 통해 화폐를 만들고, 중앙은행이 그 시스템을 떠받치는” 구조에 있었다. 이 구조는 경제의 신축적 자금 수요에 대응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조에는 본질적 약점이 있었다. 민간은행의 신용창출은 본질적으로 경기순응적(procyclical)이라는 점이다.

호황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자산 가격이 오르고, 담보 가치가 늘어나며, 사람과 기업들의 신용도가 높아 보인다. 그러면 은행은 대출을 늘리고 싶어 한다. 대출이 늘면 새로운 화폐(예금통화)가 창출되고, 그 돈이 다시 자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자산 가격을 더 끌어올린다. 이런 자기강화적 순환이 “신용 호황”을 만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순환은 거꾸로 돈다. 자산 가격이 더 이상 오르지 않거나 꺾이기 시작하면, 담보 가치가 줄어들고, 대출은 위축된다. 줄어든 신용이 자산 가격을 더 끌어내리고, 이것이 다시 신용을 위축시킨다. 이른바 “신용 위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위기가 심해지면, 결국 중앙은행이 등장해 최종대부자로서 시스템을 떠받쳐야 한다.

이 자기강화적 순환 — 경제학자들이 “신용 사이클” 또는 “부동산-신용 사이클”이라고 부르는 현상 — 은 영란은행 모델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그 모델에 내재한 본질적 특징이다. 민간이 신용을 창출하는 한, 그 신용은 경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산 시장, 특히 부동산 시장이 그 사이클의 진폭을 증폭시킨다.

영란은행 모델이 정초한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은 그 후 300년 동안 수많은 금융위기를 겪어왔다. 1825년 영국 금융위기, 1873년 빈 주식시장 공황, 1907년 미국 패닉, 1929년 대공황,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위기는 형태와 규모는 달랐지만, 그 핵심에는 동일한 메커니즘 — 민간 신용창출의 경기순응성과 그것이 자산 시장과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거대한 사이클 — 이 있었다.

영란은행 모델은 자본주의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화폐의 만성적인 불안정성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불안정성은 1971년 이후 — 즉 4장에서 다룰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 결정적으로 심해진다.

자유은행이라는 다른 길

영란은행 모델이 자본주의의 표준이 되기 전, 미국에서는 한 가지 “다른 길”이 시도되었다. 영란은행처럼 중앙은행을 두는 대신, 누구나 자기 돈을 찍어낼 수 있게 하는 “자유은행” 시스템이었다. 19세기 미국 변경에서 그 실험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다음 장의 주제다.

미리 약간의 힌트를 주자면, 그 실험은 “누구나 돈을 찍어내는 자유”가 어떻게 “누구도 그 돈을 믿지 못하는 혼란”으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교훈적인 역사다. 그리고 이 19세기 미국의 경험은, 우연찮게도 21세기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 운동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자, 그럼 1830년대 미국 미시간 주의 황량한 변경 마을로 떠나보자. 거기에는 “와일드캣 뱅크”라 불린 매우 이상한 은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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