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사토시의 반란 — 위기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돈

배바·1일 전

디지털시대의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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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이전: 제5장. 빚으로 지은 세상 — 부동산, 그림자금융, 그리고 2008년 | 다음: 제7장. 돈의 위계 —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


제6장. 사토시의 반란 — 위기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돈

한 통의 메일

2008년 10월 31일 오후 2시 10분. 미국 동부 시간. 한 통의 이메일이 “메칠패커 암호학 메일링 리스트(metzdowd.com cryptography mailing list)”라는 작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다.

이 메일링 리스트는 암호학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연구자와 엔지니어들이 가입해 기술적 토론을 나누는 폐쇄적 공간이었다. 대중적인 곳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그 한 통의 메일은 화폐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

메일의 제목은 “Bitcoin P2P e-cash paper”였다. 본문은 짧았다.

“저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 없이 완전히 peer-to-peer 방식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전자 현금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일에는 9페이지 분량의 PDF 백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제목은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저자는 “Satoshi Nakamoto(사토시 나카모토)”.

이 메일은 그 후 거의 모든 측면에서 수수께끼였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누구인가? 그가 정말 일본인일까? 그 이름은 가명일까, 본명일까? 그는 한 사람일까, 여러 사람일까? 약 2년 후 사토시는 인터넷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 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내가 사토시”라고 주장했고, 수많은 사람이 “이 사람이 사토시일 것이다”라는 추측의 대상이 되었지만, 어느 것도 결정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토시가 누구였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가 백서를 발표한 시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백서가 공개된 2008년 10월 31일은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부터 정확히 6주 후였고, 미국 의회가 부실자산 구제 프로그램(TARP)을 통과시킨 지 4주 후였다. 5장에서 본 그 “무너진 화폐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가장 뜨거웠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리고 사토시는 그 시점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백서 발표 후 두 달이 지난 2009년 1월 3일, 사토시는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제네시스 블록” — 즉 최초의 블록 — 을 생성했다. 그리고 그 블록에 특별한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번역하면 “타임즈 2009년 1월 3일. 재무장관, 은행에 대한 두 번째 구제금융 직전”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날 영국 타임즈지의 1면 헤드라인이었다. 사토시는 자신의 새로운 화폐가 어떤 시대의 분노 위에서 태어났는지를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사토시의 야망 — 신뢰 없는 돈

사토시가 백서에서 제안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누구의 신뢰도 필요로 하지 않는 돈을 만들겠다.”

이 야망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돈”이 사실 얼마나 많은 신뢰의 그물 위에 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를 생각해 보자. 그 결제가 성립하려면 다음과 같은 신뢰들이 필요하다.

먼저 우리는 카드 회사를 신뢰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 결제 정보를 정확히 처리할 것이고, 우리 카드를 도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드 회사는 또한 거래 상대방인 은행을 신뢰해야 한다. 그 은행이 약속한 금액을 정확히 지급할 것이라고. 그 은행은 또한 중앙은행을 신뢰해야 한다. 위기 시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사람은 정부를 신뢰해야 한다. 그 정부가 화폐 가치를 유지할 것이고, 시스템 전체를 떠받칠 것이라고.

이 모든 신뢰의 그물망이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카드를 긁고 결제가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5장에서 본 것처럼, 위기가 닥치면 이 신뢰의 그물망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드러난다. 어딘가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전체 시스템이 함께 무너질 수 있다.

사토시의 통찰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이 모든 신뢰가 필요하지 않은 돈이 있다면 어떨까? 카드 회사도, 은행도, 중앙은행도, 정부도 신뢰하지 않아도 되는 돈. 오직 “수학”과 “코드”만 신뢰하면 되는 돈.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2008년 가을과 같은 시스템 붕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사토시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었다. 이미 1980년대부터 “사이퍼펑크(cypherpunk)”라 불린 일군의 암호학자와 자유주의 활동가들이 이런 비전을 추구해 왔다.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의 “디지캐시(DigiCash)”, 닉 사보(Nick Szabo)의 “비트골드(Bit Gold)”, 웨이 다이(Wei Dai)의 “b-money” 등 여러 선구적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들은 모두 한 가지 결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 “이중지불 문제(double spending problem)”였다. 디지털 화폐의 본질적 약점은 “디지털 파일은 무한히 복사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가진 1디지털달러를 두 곳에 동시에 쓰려고 한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전통적인 답은 “중앙 권위 있는 기관(예: 은행)이 모든 거래를 기록하고 이중지불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퍼펑크들이 피하고 싶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토시의 백서가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해법의 이름이 바로 “블록체인(blockchain)”이었다.

블록체인 — 어떻게 신뢰 없이 합의에 도달하는가

블록체인의 작동 원리를 일반 독자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핵심 아이디어는 의외로 단순하다.

상상해 보자. 한 마을에 100명의 주민이 있다. 그들은 거래를 기록할 중앙 은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약속을 한다. 모든 주민이 자기 집에 똑같은 거대한 장부 하나씩을 가지고 있고, 어떤 거래든 발생하면 모든 주민이 그 거래를 자기 장부에 동시에 기록한다는 약속이다.

“민수가 영희에게 100원을 주었다”는 거래가 생기면, 100명 모두가 자기 장부에 그 사실을 적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장부를 위조하려 해도, 다른 99명의 장부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들통 난다. 따라서 위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가 모든 사람에게 투명하게 알려져 있으므로, “같은 돈을 두 번 쓰는” 이중지불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블록체인의 기본 아이디어다. 다만 “100명이 동시에 한 거래를 기록하는” 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누가 이 모든 사람들을 조정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사토시의 천재성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한 것이었다.

그의 해법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이번 거래들을 기록할 권리”를 얻기 위해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한 대의 컴퓨터로는 수 시간 이상 걸리지만, 일단 풀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 답이 맞는지는 매우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문제를 푼 사람이 “이번 회차의 기록자”가 되고, 그 보상으로 새로 만들어진 비트코인을 받는다. 다른 모든 참여자들은 그 사람의 기록을 받아들이고, 자기 장부에 동일하게 복사한다. 그리고 다음 회차가 시작된다.

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행위를 “채굴(mining)”이라 부르고,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을 “채굴자(miner)”라 부른다. 그리고 매 회차마다 만들어지는 거래 기록 묶음을 “블록(block)”이라 부른다. 이 블록들이 시간 순서대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시스템의 결과는 놀라웠다. 누구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가 처음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사토시 이전에는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토시 이후에는 누구나 이 해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트코인의 화폐론적 정체성

화폐론의 관점에서 비트코인을 분석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1장에서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답” — 상품화폐론, 신용화폐론, 주권화폐론 — 중에서 비트코인은 어디에 속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비트코인은 의도적으로 상품화폐론을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다.

이 점은 비트코인의 설계 곳곳에서 드러난다. 첫째, 비트코인의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토시는 의도적으로 이 한계를 설정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채굴할 수 있는 양이 제한된 금처럼, 비트코인도 “희소성”을 통해 가치를 보장하려는 것이다.

둘째, 비트코인은 “채굴”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더 많은 비트코인을 얻으려면 더 많은 컴퓨팅 자원과 전기를 투입해야 한다. 이는 금광에서 더 많은 금을 캐려면 더 많은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원리다.

셋째, 비트코인은 누구의 부채도 아니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신용화폐 — 은행 예금, 채권, 심지어 종이 지폐까지 — 는 모두 누군가의 부채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다르다. 누군가가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무언가를 갚아야 할 의무는 없다. 비트코인은 마치 금처럼 “순수한 자산”이지 “신용 관계의 표현”이 아니다.

넷째, 비트코인은 국가와 명시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국가도 비트코인을 발행하지 않으며, 어떤 국가도 비트코인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특성은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보여준다. 비트코인은 명시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금이 되고자 만들어진 화폐다. 이 점은 비트코인이 “새로운 발명”이면서 동시에 “매우 오래된 사상의 부활”이라는 모순적 성격을 가지게 한다.

오래된 사상이란 무엇인가? 19세기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의 사상이다. 카를 멩거, 루트비히 폰 미제스, 그리고 20세기에 그 전통을 이어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화폐가 본질적으로 “안정적 내재가치를 가진 상품”이어야 하며, 국가의 화폐 발행 독점은 위험하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하이에크는 1976년에 발표한 화폐의 비국유화라는 책에서, 민간 부문이 발행하는 경쟁 화폐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시스템을 옹호했다.

비트코인은 어떤 의미에서 하이에크의 비전을 21세기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 3장에서 본 — 19세기 미국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전쟁”과도 사상적으로 연결된다. 200년에 걸쳐 “중앙집권적 화폐 발행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일한 사상이 다른 형태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가 되기에는

비트코인은 사상적으로도 흥미롭고, 기술적으로도 혁신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 질문이 남는다. 그것은 실제로 “화폐”로 기능할 수 있는가?

답을 미리 말하자면, “매우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화폐로 기능하기에는 두 가지 근본적 한계가 있다.

첫째, 가격 변동성이 너무 크다. 화폐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안정적 가치 척도”가 되는 것이다. 빵 한 개가 어제는 비트코인 0.0001개였는데 오늘은 0.0002개라면, 빵 가격이 두 배가 된 것인지 비트코인 가격이 절반이 된 것인지를 누구도 알 수 없다. 가격이 안정되지 않으면 거래의 매개체로 사용하기 어렵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은 처음 등장한 이후 줄곧 극심했다. 2010년 5월 22일 미국 플로리다의 한 프로그래머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샀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 1만 비트코인은 2024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수억 달러에 해당한다. 같은 비트코인이 14년 만에 그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는 사실은, 비트코인을 보유한 투자자에게는 환상적인 수익이지만, 그것을 “화폐”로 사용하려는 사람에게는 악몽이다. 화폐로 쓰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이익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화폐로 쓰지 않는다.

둘째, 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다. 비트코인 네트워크는 초당 약 7건의 거래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비교를 위해 말하자면, 전통적 신용카드 네트워크는 초당 수만 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비트코인이 일상적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

이런 한계는 비트코인이 등장한 직후부터 분명해졌다. 그래서 비트코인은 점차 “일상의 결제 수단”에서 “투자 자산”으로 그 정체성이 변해 갔다.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가치 저장 수단” 또는 “인플레이션 헷지”로 보유하기 시작했다. 즉 비트코인은 “디지털 화폐”로 출발했지만 “디지털 금”으로 진화한 셈이다.

이런 정체성 변화는 단지 일부 관찰자의 인상이 아니라, 시장과 제도 양 측면에서 광범위한 합의로 자리잡았다. 시장에서는 비트코인이 일상 결제에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장기 보유(HODL) 자산으로 분류되는 현상이 통계적으로 굳어졌다. 온체인 데이터를 보면 발행된 비트코인의 70% 이상이 1년 이상 한 번도 거래되지 않은 채 보관되어 있다. 이는 활발히 유통되는 결제 수단의 모습과는 정반대이며, 오히려 금 보유 행태에 훨씬 가깝다. 제도적으로도 같은 흐름이 분명해졌다. 2024년 1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한 이후 BlackRock, Fidelity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출시했고, 그들이 작성한 투자설명서에서 비트코인은 한결같이 “디지털 금” 또는 “인플레이션 헷지 자산”으로 분류된다. 회계 기준 역시 이 흐름을 따라가 미국 회계기준위원회(FASB)는 2023년 비트코인을 “무형자산”에서 “공정가치 평가 대상 자산”으로 재분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024~2025년에는 미국 정부 내부에서 비트코인을 “전략적 비축 자산(Strategic Bitcoin Reserve)”으로 보유하자는 논의까지 등장했다. 한 국가가 어떤 자산을 전략적으로 비축한다는 것은, 그 자산이 본질적으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19세기 이후 각국이 금을 비축해 온 논리와 정확히 동일하다. 결국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명제는 더 이상 한 입장의 주장이 아니라, 시장 행태, 회계 처리, 그리고 국가 정책 차원에서 폭넓게 수용되는 합의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사토시의 본래 비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결과였다. 백서의 제목은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 즉 “P2P 전자 현금 시스템”이었다. 사토시는 비트코인이 일상의 결제 수단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비트코인은 결제 수단이 아니라 투자 자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의 결제 수단 기능을 살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다.

타협안 — 스테이블코인의 등장

비트코인의 결정적 한계는 가격 변동성이었다. 그렇다면 가격이 변동하지 않는 암호화폐를 만들면 어떨까? 이것이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의 기본 아이디어였다.

스테이블코인의 기본 발상은 단순했다. 암호화폐의 기술적 인프라 — 블록체인, 분산원장, 글로벌 송금 능력 — 는 그대로 유지하되, 그 가치는 기존의 안정적 자산(주로 미국 달러)에 1:1로 고정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1 스테이블코인은 항상 1달러와 같은 가치를 가지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가치를 고정시키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그에 상응하는 달러 자산을 실제로 보유하는 것이다. 1억 개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했다면 1억 달러어치의 자산을 준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법정화폐 담보형 스테이블코인”이라 부른다.

이 방식의 효시는 2014년 등장한 “테더(Tether, USDT)”였다. 테더는 빠르게 성장해 한때 암호화폐 거래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거래소 간 자금 이동, 국경 간 송금, 그리고 암호화폐 시장의 결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테더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2018년에 설립된 “서클(Circle, USDC)”, 그 외 여러 스테이블코인이 잇따라 등장했다. 2024년에 이르러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1,5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어떤 측정 기준으로는 그것이 전통적 결제 네트워크 일부를 위협할 수 있는 규모에 도달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트코인보다 “화폐”에 가까웠다. 첫째, 가격이 안정되어 있어 거래의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었다. 둘째, 처리 속도가 훨씬 빨랐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 아닌 더 빠른 블록체인들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 못한 일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암호화폐 정산수단으로 쓰였지만, 점차 국경 간 송금, 24시간 결제,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일상적 결제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스테이블코인이 채우는 빈자리

스테이블코인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를 단지 “투기 자산을 거래하기 위한 도구”로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물론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비트코인과 다른 코인들을 사고팔 때 스테이블코인이 “안정적 결제 단위”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이 정도로 커질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몇 가지 구체적 영역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 영역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왜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투기 현상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진지한 경제 현상인지가 분명해진다.

첫째, 국경 간 송금이다. 이것이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가장 분명한 실용적 활용처다. 멕시코에서 일하는 미국 이민자가 본국의 가족에게 한 달 생활비를 보낸다고 하자. 전통적 방식 — 웨스턴유니온이나 은행 송금 — 으로는 5~10% 정도의 수수료가 들고, 송금이 완료되기까지 며칠이 걸린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면 같은 송금이 수 분 안에, 수수료 1% 미만으로 완료된다. 한국에서도 동남아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돈을 보낼 때 비슷한 차이가 발생한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8천억 달러에 달하는 국경 간 송금 시장에서, 그 비용 차이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 효율성의 원천은 단순하다. 전통적 국제 송금은 “외환거래상대방 은행(correspondent bank)”이라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거쳐야 한다. 송금하는 은행이 받는 은행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이에 여러 중간 은행을 거치면서 각각 수수료를 떼고 시간이 걸린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에 송금관련 정보를 올리면 그런 중간 단계 없이 디지털로 직접 전송된다. 24시간, 주말과 공휴일에도 작동한다.

이 점은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큰 그림과 직접 연결된다. 우리는 7장에서 “화폐 위계”라는 개념을 살펴볼 텐데, 미리 짚어 두자면 현재의 국제 송금 시스템은 그 위계가 만들어내는 마찰의 산물이다. 각국이 별도의 화폐 위계를 가지고 있고, 그 위계들 사이의 청산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그 마찰을 우회하는 새로운 길을 제공한다. 그것이 “기존 시스템보다 더 나은”것인지 “기존 시스템의 안전장치를 우회한 것”인지는 이 책의 마지막에 다시 다룰 질문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채우는 수요가 실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인공지능 에이전트의 결제 수단이다. 이것은 다소 새롭고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향후 10년 안에 우리 경제의 모습을 크게 바꿀 가능성이 있는 영역이다.

“AI 에이전트”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의 직접적 개입 없이 자율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AI 에이전트가 사무 비품을 자동으로 주문하고, 다른 회사의 AI 에이전트가 클라우드 서버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조정하며 그에 따라 결제를 처리한다고 상상해 보자. 이런 “AI들끼리의 거래”가 24시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래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거래에 기존의 결제 시스템은 잘 맞지 않는다. 신용카드는 사람의 서명이나 비밀번호 인증을 전제로 한다. 은행 송금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결제 시스템은 “AI가 결제 주체로 등장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지 않았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24시간 자동으로 작동한다. 둘째,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 즉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결제한다”는 식의 코드를 결제에 직접 내장할 수 있다. 셋째, 금액의 크기에 제한이 없다 — 마이크로 결제(1센트 단위)부터 대규모 결제까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부 기술 회사들은 이미 AI 에이전트의 결제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AI 에이전트가 다른 AI 에이전트에게 데이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0.001달러를 자동 결제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인간이 결제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 결제가 거래의 일부로 코드 안에 녹아 있다.

이 새로운 활용 영역의 규모를 지금 단계에서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AI 기술의 빠른 발전을 고려하면, 그 수요가 향후 매우 커질 것이라는 점은 의심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수요를 누가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는, 디지털 화폐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실물자산 토큰화의 결제 수단이다. 이것은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실물자산 토큰화(RWA, Real-World Asset tokenization)”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부동산·채권·주식·예술품 등 실제 세계의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디지털 토큰 형태로 표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빌딩의 소유권을 100만 개의 토큰으로 나누어, 각 토큰이 빌딩의 100만 분의 1을 표상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그 빌딩의 부분 소유권을 인터넷에서 토큰 거래의 형태로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다.

이 개념은 처음에는 “기술적 호기심” 수준에 머물렀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본격적인 금융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토큰증권 발행(STO, Security Token Offering)이다. 회사가 주식이나 채권을 토큰 형태로 발행하여 자본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BlackRock 같은 글로벌 자산운용사가 미국 단기 국채에 투자하는 토큰화 펀드를 운용하고 있고, 그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토큰화된 실물자산을 거래하려면, 그 거래의 결제도 디지털로 이루어져야 한다. 빌딩의 1만 분의 1을 표상하는 토큰을 1초 안에 거래했는데, 그 대금 결제는 은행을 통해 며칠 걸린다면 모순이다. 자산은 디지털로 즉시 이동하는데 결제는 아날로그 시간으로 처리되면, 그 사이의 “결제 위험(settlement risk)”이 발생한다. 따라서 토큰화된 자산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것과 동시에 작동하는 디지털 결제 수단이 필요하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이 자연스러운 답으로 떠오른다. 토큰화된 자산을 사고팔 때 스테이블코인으로 즉시 결제하면, 자산과 결제가 같은 속도로 같은 인프라 위에서 진행될 수 있다. 이른바 “동시청산결제(Delivery versus Payment, DvP)”가 디지털로 가능해진다. 이미 일부 거래소와 결제 인프라에서는 이런 구조가 실험되고 있고, 향후 자산 토큰화 시장이 커질수록 스테이블코인의 이런 활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수요라는 사실의 의미

이렇게 세 가지 활용처를 살펴보면,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이 단지 “투기 광풍”이나 “기술 유행”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경제 활동이 만들어내는 진짜 수요의 표현임이 분명해진다. 국경 간 송금, AI 에이전트의 자율 결제, 실물자산 토큰화의 결제 — 이 모든 영역에서 기존의 화폐와 결제 시스템은 디지털 시대의 요구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그 빈자리를 빠르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을 “위험하니까 막아야 할 것”으로만 보는 시각은 그래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충족하는 수요는 실재하며, 디지털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따라서 진짜 질문은 “스테이블코인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 새로운 수요를 어떻게 안전한 화폐 시스템 안에서 충족시킬 것인가”이다.

이는 19세기 미국이 자유은행권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의 문제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당시에도 자유은행권 자체가 충족하는 수요 — 변경 지역의 신용 공급, 화폐 부족 해결 — 는 실재했다. 그래서 미국이 채택한 해법은 “자유은행권을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니었고 “민간 화폐 발행을 전부 금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3장 마지막에서 본 것처럼, 미국은 약 70년에 걸친 제도 진화를 통해 “민간이 신용창출을 하되, 공적 안전장치의 망이 그것을 떠받치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이 진화는 자유은행권의 “수요는 인정하되 그 형태를 안전한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21세기에는 이 진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스테이블코인이 충족하는 수요는 그대로 두면서 그 형태를 안전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제도 설계가 필요한가? 이 질문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답해야 할 핵심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론으로 가기 전에, 우리는 스테이블코인이 현재 가진 본질적 한계를 좀 더 분명히 봐야 한다. 그 한계는 그것이 “비트코인이 거부했던 것들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런 다양한 실제 수요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스테이블코인의 강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강점이 어떤 대가 위에서 성립하는지도 봐야 한다.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스테이블코인이 비트코인이 본래 거부했던 모든 것을 사실상 다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은 “누구의 신뢰도 필요로 하지 않는 돈”을 표방했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자(테더 회사, USDC 회사 등)를 신뢰해야 한다. 그 발행자가 정말로 충분한 준비자산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환매 요청 시 응할 것인지 — 모든 것이 발행자에 대한 신뢰에 달려 있다.

비트코인은 “국가와 분리된 돈”을 표방했다. 그러나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본질적으로 미국 달러에 종속되어 있다. 미 연준이 통화 정책을 결정하면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도 그에 따라 움직인다.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를 제재하면 그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사용 불가능해진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달러”인 셈이고, 미국 달러 시스템에 새로운 층위를 더한 것에 가깝다.

비트코인은 “중앙 발행자 없는 돈”을 표방했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명백한 중앙 발행자를 가진다. 테더는 테더 회사가, USDC는 그 발행 회사가 발행한다. 누가 얼마를 발행할지, 누구에게 발행할지 — 모두 발행 회사의 결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사토시 비전의 “타협안”이다. 비트코인 운동이 추구했던 이상은 일정 부분 포기하되, 그 대신 실용성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타협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우리가 이미 본 적 있는 어떤 것과 매우 닮아 있다.

다시 한번, 자유은행

스테이블코인의 구조를 천천히 들여다보자. 발행자가 있다. 그 발행자는 자체적으로 보유한 자산(주로 미국 국채와 현금)을 준비금으로 가지고 있다. 그 준비금을 담보로 “1달러 = 1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을 기반으로 디지털 토큰(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어 시장에서 유통된다. 보유자는 언제든 발행자에게 토큰을 가져가 1달러로 환매할 수 있다 — 발행자가 정말로 그 약속을 이행한다면 말이다.

이 구조를 다시 한번 보자.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3장에서 우리가 본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은행권 구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자유은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보자. 누구나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은행을 세우고 자기 이름의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그 은행권은 발행 은행이 보유한 채권(주로 주정부 채권)을 담보로 했다. 보유자는 언제든 발행 은행에 은행권을 가져가 정화(금·은)로 환매할 수 있었다 — 발행 은행이 정말로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두 시스템을 나란히 놓고 보면 거의 모든 핵심 요소가 일치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본질적으로 19세기 자유은행권의 디지털 부활이다. 사용되는 기술은 다르고(종이 vs 블록체인), 담보 자산도 다르며(주채권 vs 미 국채), 발행자의 성격도 다르다(작은 변경 은행 vs 글로벌 핀테크 기업). 그러나 화폐로서의 본질적 구조는 동일하다.

이 통찰을 가장 분명히 정리한 학자가 미국 예일대의 게리 고튼과 그의 동료 제프리 장이다. 두 사람은 2023년에 “야생 고양이 스테이블코인 길들이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야생 고양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이미 안다. 19세기 미국의 “와일드캣 뱅킹”을 가리킨다. 고튼과 장은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이 정확히 그 19세기 와일드캣 뱅킹의 디지털 부활임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가 우리 시대의 과제임을 제시했다.

무너지는 약속들

19세기 자유은행 시대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기억하는가? 광범위한 파산과 패닉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은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증거는 “매우 어렵다”는 쪽을 가리킨다. 이미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는 작은 규모이지만 여러 번 “위기”가 발생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022년 5월 “테라(Terra)”의 붕괴였다. 테라는 단순한 법정화폐 담보형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알고리즘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었다. 즉 미 달러를 직접 준비금으로 보유하지 않고, 자체 코인(루나, LUNA)과의 알고리즘적 연동을 통해 1달러 가치를 유지하려 했다. 이론적으로는 영리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시장이 신뢰를 잃기 시작하자 그 알고리즘 자체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특유의 “데스 스파이럴(death spiral)”이다. 신뢰가 빠지면 알고리즘이 가격 방어를 위해 자체 코인을 더 많이 발행하고, 그 발행이 다시 신뢰 하락을 가속화하며, 이 악순환이 자기증식적으로 가속되어 결국 시스템 전체가 며칠 만에 무너진다. 알고리즘만으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본질적 구조적 결함이었다. 며칠 사이에 테라와 루나가 함께 무너졌고, 약 400억 달러 규모의 가치가 증발했다. 그 사이에 자살한 투자자들의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테라가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의 한계를 보여줬다면, 2023년 3월의 USDC 사건은 “법정화폐 담보형”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USDC는 가장 평판이 좋은 스테이블코인 중 하나였다. 발행 회사인 서클(Circle)은 미국의 합법적 핀테크 기업이었고, 그들의 준비금은 주로 미국 단기 국채와 은행 예금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2023년 3월, 서클의 준비금 중 33억 달러가 갑자기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 (Silicon Valley Bank, SVB)에 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사실이 알려진 직후 USDC의 가격이 1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0.87달러까지 하락한 후, 결국 미국 정부가 SVB 예금자 전액 보호를 결정하면서 USDC도 가격을 회복했다.

이 사건의 화폐론적 의미를 정확히 짚어야 한다. USDC는 합법적이고, 평판 좋고, 충분히 담보된 스테이블코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발행자가 보유한 준비자산의 신뢰성”에 의존했다. 준비자산을 맡긴 은행 한 곳이 흔들리자 스테이블코인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위기를 결국 해결한 것은 “민간 자율 메커니즘”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공적 개입”이었다. 사토시의 비전을 가장 진지하게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스테이블코인조차도, 위기의 순간에는 결국 그것이 거부하려 했던 바로 그 국가 권력에 구원을 요청한 셈이다.

이 패턴이 무엇을 닮았는가? 그렇다. 19세기 자유은행 시대의 광범위한 파산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 자유은행들도 “합법적이고 담보된” 은행권을 발행했지만, 담보 자산의 가치가 흔들리자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 그 위기는 결국 “중앙은행의 도입”이라는 공적 해법으로 정리되었다.

미국의 답 — GENIUS Act

스테이블코인의 한계가 점점 분명해지면서, 각국 정부도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이 고민이 2025년 7월 “GENIUS Act”라는 이름의 법률로 결실을 맺었다. 정식 명칭은 “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 Act of 2025”이고, 줄여서 GENIUS Act라 부른다.

이 법은 미국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규제 틀을 도입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발행한 토큰 액면의 100%에 해당하는 “허용된 준비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허용된 준비자산은 현금, 단기 미국 국채, 일정한 환매조건부채권(repo) 등으로 제한된다. 둘째, 발행자는 매월 준비자산을 공시하고 매년 독립 감사를 받아야 한다. 셋째, 발행자는 연방 또는 주 차원의 면허를 받아야 하며, 자금세탁방지 등 은행 수준의 규제를 받는다.

이 법의 의미를 화폐사적 맥락에서 읽어 보자. GENIUS Act는 사실상 “스테이블코인을 자유은행이 아니라 국법은행으로 만드는” 시도다. 3장에서 본 19세기 미국의 진화 경로를 떠올려 보자. 자유은행의 혼란을 정리한 첫 단계는 1863년의 국법은행법이었다. 그 법은 “통일된 양식의 은행권, 통일된 담보(연방 채권), 통일된 규제”를 도입함으로써 자유은행권의 단일성 결여 문제를 해결했다.

GENIUS Act는 21세기 디지털 환경에서 정확히 같은 일을 하려는 시도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을 “통일된 규제 틀” 안으로 끌어들여, 단일성과 안전성을 일정 부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진전이다. 그러나 우리가 3장에서 봤듯, 국법은행법조차도 결국 충분하지 못했다. 위기 시 시스템을 떠받칠 진정한 안전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07년의 패닉 끝에야 미국은 마침내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의 시대에도 같은 진화 경로가 펼쳐질 것인가? GENIUS Act는 “디지털 자유은행에서 디지털 국법은행으로”의 진화일 뿐이고, 결국 “디지털 연방준비제도” — 즉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 — 가 필요해질 것인가?

사토시의 역설

이 장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역설을 짚어두자.

2008년 가을 사토시 나카모토는 “중앙은행 없는 돈”을 만들기 위해 비트코인을 제안했다. 그 비전은 정당한 사회적 분노 — 5장에서 본 2008년 위기 이후의 광범위한 불신 — 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그 비전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자.

비트코인은 “화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디지털 금”이 되었다. 일상의 결제 수단이 아니라 투기적 자산이다. 사토시가 원했던 “P2P 전자 현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비트코인의 결제 수단 기능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전되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 거부했던 모든 것 — 중앙 발행자, 신뢰, 국가 통화 시스템에 대한 종속 — 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스테이블코인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미국 정부는 GENIUS Act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통일된 규제 틀”로 끌어들였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점점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은행”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발행하려면 면허가 필요하고, 규제를 받아야 하며, 결국 중앙은행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토시의 역설이다. 중앙은행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운동이, 결국 새로운 형태의 중앙은행 시스템을 요구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역설은 사토시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3장에서 본 자유은행 시대의 교훈, 그리고 5장에서 본 2008년 위기의 교훈 — 둘 다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화폐는 신뢰 없이 작동하지 않으며, 그 신뢰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공적 안전장치”를 필요로 한다. 사토시는 그 진실을 우회하려 했지만, 결국 그 진실에 다시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화폐는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 비트코인의 길도 막혔고, 스테이블코인의 길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1971년 이전의 외부 닻 — 금본위제 — 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또 그렇다고 “중앙은행 단독”의 시스템이 만족스러운 답도 아니다(5장에서 본 2008년이 그것을 증명했다).

다음 두 장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 간다. 먼저 7장에서 “화폐의 위계”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지금까지 본 화폐 형태들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정리하고, 마지막 8장에서 디지털 시대 화폐의 세 갈래 미래를 비교하며 어느 길이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지를 함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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