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돈의 위계 —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

배바·1일 전

디지털시대의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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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돈의 위계 —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

평범한 결제에 숨겨진 비밀

토요일 오후 한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4,500원짜리 라떼 두 잔을 마셨다고 하자. 모두 9천 원이다. 당신은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결제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단말기에서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친절한 음성이 흘러나왔고, 친구와 당신은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이 평범한 결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단순하다. 당신의 카드가 9천 원을 카페에 지불했다. 그러나 그 1초 사이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화폐 시스템이 정교하게 작동했다. 그 작동을 잠시 슬로 모션으로 따라가 보자.

먼저 카페의 결제 단말기가 카드사에 신호를 보냈다. “이 카드의 9천 원 결제를 승인해도 됩니까?” 카드사는 당신의 은행에 즉시 조회한다. “이 사람의 계좌에 9천 원이 있습니까?” 당신의 은행이 확인하고 회신한다. “있습니다.” 카드사는 카페에 결제 승인을 보낸다. 동시에 당신의 은행은 당신 계좌에서 9천 원을 즉시 차감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단말기의 “띡” 소리 한 번에 끝난다.

그 다음 단계가 흥미롭다. 카드사와 당신 은행 사이, 그리고 카드사와 카페 은행 사이의 실제 자금 이동은 그날 즉시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 영업일이나 그 다음 영업일에 “일괄 정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한꺼번에 처리된다. 이 정산을 한국에서는 금융결제원이 담당한다. 하루 동안 여러 은행과 카드사 사이에서 일어난 수천만 건의 거래를 모아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보내야 하는가”를 계산하고, 그 결과를 일괄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정산의 마지막 단계가 본 장의 핵심이다. 당신의 은행과 카페의 은행이 같은 은행이 아니라면 — A은행과 B은행이라고 하자 — A은행에서 B은행으로 어떻게 돈이 이동했을까?

답은 의외다. 사실 돈이 이동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A은행에서 B은행으로 “종이로 된 9천 원”이 직접 옮겨간 것이 아니다. 대신 한국은행에 있는 A은행의 계좌에서 9천 원이 빠지고, 같은 한국은행에 있는 B은행의 계좌에 9천 원이 더해졌다. 결국 모든 결제는 한국은행이라는 한 곳에서 최종적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점이 있다. 만약 당신이 체크카드가 아니라 신용카드로 결제했다면, 위 과정이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신용카드는 본질적으로 “외상” 결제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단말기에서 결제가 승인되는 순간, 당신 은행 계좌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카드사가 며칠 안에 “자기 돈”으로 카페에 정산금을 송금해 준다. 그리고 한 달 정도 후의 결제일에, 카드사가 당신 은행 계좌에서 한 달치 사용 금액을 한꺼번에 인출해 간다. 즉 신용카드 결제에서는 “카드사가 일시적으로 신용을 제공하는” 단계가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동일하다. 카드사와 카페 은행 사이의 자금 이동, 카드사와 당신 은행 사이의 자금 이동 — 이 모든 은행 간 정산은 결국 한국은행에서 최종적으로 청산된다. 카드사 자신도 어느 시점에는 자기 거래 은행을 통해 그 청산 시스템에 참여한다.

여기서 한국은행이 무엇인가? 한국의 중앙은행이다. 즉 모든 민간은행 위에 있는 “은행들의 은행”이다. 평소에 우리는 한국은행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체크카드를 긁고, 신용카드로 외상을 지고, 계좌이체를 하고, 현금을 사용하면서 그 모든 것이 “같은 돈”인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것의 뒤편에는 한국은행이 있다. 한국은행이라는 정점이 있어서 비로소 A은행의 9천 원과 B은행의 9천 원이 “같은 9천 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폐의 위계(hierarchy of money)”라는 개념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우리 시대 화폐 시스템을 가장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 열쇠다.

모든 돈은 같지 않다

위계의 개념을 좀 더 손에 잡히게 만들기 위해,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자.

지금 우리 손에 “1만 원”이라는 표시가 있는 다섯 가지 다른 형태의 가치 표상물이 있다고 하자. 모두 액면은 1만 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 같은 1만 원일까?

첫째, 한국은행이 발행한 1만 원짜리 지폐. 이것은 위계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화폐다. 한국 안에서 누구든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법정통화가 가진 효력이다. 위기가 닥쳐도 이 지폐는 마지막까지 1만 원의 가치를 유지한다.

둘째, 평범한 시중은행 예금의 1만 원. 일상 거래에서는 위의 지폐와 거의 동등하게 쓰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이 은행이 나에게 1만 원을 빚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은행이 망하면? 예금 보험이 일정 금액까지 보호해 주지만, 그 한도를 넘으면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셋째, 머니마켓펀드의 1만 원어치 지분. 이것도 “내가 1만 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표시되지만, 그 가치는 펀드 운용사의 신용에 달려 있다. 2008년 미국에서 보았듯, 이런 형태의 “돈”은 위기 시 1만 원이 아닐 수 있다.

넷째, 어떤 회사가 발행한 1만 원어치 어음. 그 회사가 정상적으로 약속을 지키면 만기에 1만 원으로 청산된다. 그러나 그 회사의 신용도에 따라 “오늘 이 어음을 1만 원으로 받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다섯째, 동네 가게에 적어둔 1만 원어치 외상. 가게 주인과 당신만 알고 있는 사적 채권 채무 관계다. 이것을 다른 곳에서 “화폐”로 쓸 수는 없다.

이 다섯 가지 “1만 원”은 모두 같은 액면을 표시하지만, 위계의 다른 위치에 있다. 평소에는 그 차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특히 위의 첫째와 둘째는 거의 동등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그 차이가 결정적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섯째에서 넷째로, 넷째에서 셋째로, 셋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첫째로 이동하려 한다.

이 단순한 사고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돈”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사실 매우 다른 종류의 가치 표상물들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위계로 조직되어 있고, 그 위계의 정점에는 결국 국가와 중앙은행이 있다. 이제 이 사고실험에서 본 직관을, 좀 더 체계적인 개념으로 정리해 보자.

“화폐의 위계”라는 표현은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순하다. 세상의 모든 돈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하 관계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처음 명확히 정리한 학자는 미국의 스테파니 벨(Stephanie Bell)이라는 경제학자였다. 그녀는 2001년에 발표한 “국가의 역할과 화폐의 위계”라는 짧은 논문에서, 모든 화폐를 “부채”로 파악하되 그 부채에 위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 학자는 그 후 “스테파니 켈튼(Stephanie Kelton)”이라는 이름으로 현대화폐이론(MMT)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 되었다. 1장에서 우리가 언급했던 그 사람이다.

벨의 통찰을 따라 화폐의 위계를 정리해 보자. 우리 시대의 화폐는 대체로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위에는 “국가의 돈”이 있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와 동전, 그리고 한국은행에 예치된 민간은행의 지급준비금이다. 이것이 위계의 정점이다. 왜 정점인가? 그것은 “국가가 발행하고, 국가가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하는” 화폐이기 때문이다. 한국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세금을 내야 하고, 세금을 내려면 결국 이 “국가의 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돈에 대한 수요는 사회 전체에 보장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민간은행의 돈”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은행 예금이다. 한국은행 지폐가 “한국은행이라는 국가 기관의 부채”라면, 은행 예금은 “민간은행이라는 회사의 부채”이다. 우리 통장에 적힌 100만 원은 사실 “이 은행이 나에게 100만 원을 빚지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그 돈을 인출하려 하면 은행은 한국은행 지폐로 그 빚을 갚는다.

그 아래에는 “기업이나 다른 금융기관의 돈”이 있다. 머니마켓펀드의 지분, 회사가 발행한 어음, 일부 신용카드 포인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도 일정한 의미에서 “돈”으로 기능하지만, 최종적으로 “민간은행의 돈”으로 청산되어야 한다.

가장 아래에는 “개인이나 작은 단체의 돈”이 있다. 개인이 발행한 약속 어음, 동네 가게의 외상 장부, 친구 사이의 빚 등이다. 이것들도 일정한 의미에서 “부채로서의 화폐” 역할을 하지만, 그 통용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 네 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각 층의 화폐는 자신의 윗 층 화폐로만 최종적으로 청산될 수 있다. 개인의 빚은 결국 은행 예금이나 현금으로 갚아야 한다. 기업의 어음은 결국 은행 예금으로 결제된다. 은행 간의 결제는 한국은행에 있는 지급준비금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한국은행 자신은 — 1971년 이전에는 “금”으로, 그 이후에는 “국가 권력 자체”로 — 뒷받침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

여기서 짚어둘 점은, 이 위계가 평소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내 지갑에 있는 1만 원”과 “내 통장에 있는 1만 원”이 같은 1만 원이라고 느낀다. 둘은 자유롭게 교환된다. ATM에서 통장의 돈을 지폐로 바꿀 수 있고, 은행 창구에서 지폐를 통장에 넣을 수 있다. 둘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는지 우리는 의식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머니마켓펀드의 지분, 금융기관의 채권 같은 “하위 화폐”들도 평소에는 마치 동등한 화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들도 “몇 원”이라는 액면가로 표기되어 있고, 거의 자유롭게 다른 형태의 돈으로 변환될 수 있다.

위계는 평소에 왜 보이지 않을까? 그것은 위계의 위쪽에 있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위계를 “평평하게”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모든 민간은행 예금이 한국은행 지폐와 1:1로 교환되도록 보장한다. 예금 보험은 은행이 망해도 일정 금액까지는 100% 보장해준다. 결제 시스템은 매일 24시간 작동하면서 다양한 화폐 형태 간의 교환을 매끄럽게 처리한다. 이 모든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위계의 존재를 잊고 모든 돈이 “같은 돈”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멋진 표현을 만들어냈다. “통화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라는 표현이다. 즉 한 경제 안에서 유통되는 모든 1원이 동일한 1원으로 통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정상적인 화폐 시스템의 모습이다.

그러나 단일성이 “자연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위계의 정점에 있는 중앙은행과 그 주변의 제도적 장치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다. 만약 그런 장치들이 무너지거나, 또는 그런 장치 밖에서 새로운 형태의 “돈”이 등장한다면, 단일성은 즉시 무너질 수 있다.

3장에서 우리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시대 —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 — 를 살펴보았다. 그 시대에는 단일성이 무너져 있었기에 8,000종의 1달러가 서로 다른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리고 6장에서는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이 같은 문제를 디지털 환경에서 다시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았다.

위기가 드러내는 위계

화폐의 위계가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때는 위기다. 5장에서 본 2008년 9월의 며칠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위험해 보이는 자산에서 안전해 보이는 자산으로, 신용도가 낮은 화폐에서 높은 화폐로,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도주의 방향은 정확히 위계의 “아래에서 위로”였다. 회사채에서 머니마켓펀드로, 머니마켓펀드에서 은행 예금으로, 은행 예금에서 한국은행 본원통화와 정부 국채로. 평소에 “같은 돈”처럼 보이던 것들이 위기의 순간 서로 다른 층위로 갈라진 것이다.

이 위계를 가장 명료하게 정식화한 학자가 미국의 페리 메를링(Perry Mehrling)이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그는, 위계가 화폐 시스템의 “본질적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적 특징”이라고 보았다. 위계 없는 화폐 시스템 — 모든 화폐가 평면적으로 동등한 시스템 — 은 작동할 수 없다. 위기 시에 누군가가 마지막 안전장치 역할을 해야 하고, 그 누군가는 결국 위계의 정점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란은행에서 시작된 위계

이 위계의 역사적 기원은 어디인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2장에서 본 1694년의 영란은행이다.

영란은행이 만들어낸 화폐 시스템의 본질을 위계의 관점에서 다시 보자. 영란은행 이전의 유럽 경제에는 두 종류의 돈 — 국왕의 주화와 상인의 환어음 — 이 “수평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명확한 위계가 없었다. 영란은행이 한 일은 이 둘을 “수직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었다. 영란은행 지폐는 한편으로 상인 어음과 같은 신용화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왕이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하는 주권화폐이기도 했다. 즉 영란은행 지폐는 “위계의 새로운 정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정점 아래에 다른 민간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과 예금이 위치하게 되었다. 모든 하위 화폐는 영란은행 지폐로 청산되었다. 영란은행은 위계의 정점에서 시스템 전체를 떠받쳤다. 19세기 후반 영국 언론인 월터 배젓이 “위기 시 우량 자산을 담보로 충분한 자금을 고금리로 대출하라”는 원칙을 정립했을 때,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위계의 정점에 있는 자의 책임”이었다.

이 영란은행 모델은 20세기를 거치며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로 확산되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1913), 한국은행(1950),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중앙은행이 모두 영란은행 모델의 변형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동시키는 화폐 시스템도 모두 동일한 위계 구조를 가진다. 위에는 중앙은행과 국가의 돈, 그 아래에는 민간은행의 예금, 그 아래에는 다양한 금융기관의 “유사 화폐”, 그 아래에는 개인 차원의 신용.

즉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은 300년 이상 동일한 위계 구조를 유지해 왔다. 형태는 변했다. 영란은행 지폐는 한국은행 본원통화로 진화했고, 18세기 영국에서 금세공인(goldsmith)이 발행하던 금 보관증 — 근대 은행 예금의 원형이 된 종이 — 은 21세기 카카오뱅크 예금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위계의 정점에 공적 안전장치가 있고, 그 아래에 민간의 신용창출이 작동하는” 본질적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들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 책의 핵심 질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디지털 화폐들 — 비트코인,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이 책의 후반부에서 살펴볼 CBDC(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 은 이 위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질문은 단지 분류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 화폐들이 위계의 어디에 자리매김하느냐가 곧 그 화폐들의 본질적 운명을 결정한다.

먼저 비트코인부터 보자. 6장에서 본 것처럼, 비트코인은 의도적으로 “위계 외부에 있는 화폐”가 되려 했다. 누구의 부채도 아니고, 어떤 국가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전에서 비트코인은 위계 자체를 거부하는 화폐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비트코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위계 외부에 있는 자산”이 되었다. 화폐가 아니라 자산. 결제 수단이 아니라 투기적 보유 대상. 그것이 “위계 외부”에 있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결과는 사토시가 의도한 바와 다르다. 위계 외부에 있기 때문에 일상의 결제에 사용할 수 없고, 위계 외부에 있기 때문에 가격이 극심하게 변동한다. 위계 외부에 있다는 것이 비트코인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그것이 “화폐”가 되는 것을 막는 결정적 제약이 된다.

다음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보자.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달리 분명한 위계적 위치를 가진다. 1 스테이블코인 = 1 달러라는 약속이 그것을 말해준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한 화폐 위계 안의 한 층”이 되고자 한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이 그 위계 안에서 어느 층에 해당하느냐이다. 1 스테이블코인이 1 달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민간은행 예금 수준의 안전성”을 가진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진정한 의미의 민간은행 예금이 아니다. 예금 보험이 없고, 중앙은행의 직접 안전장치도 없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은행 예금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한두 단계 아래에 있는 화폐”이다.

그리고 6장의 마지막에 본 USDC 사건이 정확히 그 점을 드러냈다. 평소에 USDC는 마치 1달러와 동등한 듯 작동하지만, 실리콘밸리은행의 위기가 닥치자 즉시 0.87달러까지 떨어졌다. 위계의 진실이 한순간에 드러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테이블코인은 5장에서 본 머니마켓펀드와 매우 유사하다. 둘 다 “민간은행 예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단계 아래에 있는 화폐”다. 그리고 둘 다 평소에는 마치 위계의 상위에 있는 듯 작동하지만, 위기 시 진정한 위치가 드러난다.

CBDC — 위계의 디지털 재구성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화폐를 더 살펴보자.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줄여서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다.

CBDC라는 표현은 한국에서도 이미 종종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행이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진행 중이라는 뉴스를 본 적 있을 것이다. 미국, 유럽, 중국, 영국 등 거의 모든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이 CBDC를 어떤 형태로든 검토하고 있다.

CBDC가 무엇인지를 위계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매우 간단하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돈”이다. 즉 한국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한국형 CBDC가 된다.

위계의 관점에서 보면 CBDC는 위계의 가장 정점에 있는 디지털 화폐다. 한국은행 본원통화와 같은 위계에 있다. 즉 다른 디지털 화폐들(스테이블코인, 비트코인 등)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화폐인 것이다.

왜 그럴까? CBDC는 한국은행의 부채다. 한국은행이 망하지 않는 한(즉 한국이라는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CBDC의 가치는 보장된다. 다른 누구의 신용도 거치지 않는다. 발행자가 “국가 자체”인 것이다.

이 점이 CBDC와 다른 디지털 화폐들의 결정적 차이다. 비트코인은 “위계 외부”에 있어서 결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스테이블코인은 “위계의 중하위”에 있어서 위기 시 흔들린다. 그러나 CBDC는 “위계의 정점”에 있어서 두 약점을 모두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CBDC가 최종적인 답인가? “그렇다, 모든 디지털 화폐를 CBDC로 대체하자!”가 결론인가?

그러나 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CBDC는 우리 시대 화폐 시스템의 어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CBDC는 여러 가지 형태로 설계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직접 발행하는 “소매형 CBDC”가 있는가 하면, 은행 간 결제용으로만 사용되는 “도매형 CBDC”도 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바로 이 질문을 다룬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어떤 화폐 시스템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설계해야 화폐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가?

위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화폐의 위계라는 개념이 이 책의 전체 메시지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정리해 보자.

첫째, 위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비트코인 운동이 보여주었듯, 위계 외부의 화폐를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화폐”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화폐는 본질적으로 “신뢰”의 표현이며, 신뢰는 위계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마지막 안전장치”가 필요하고, 그 안전장치를 가진 자가 위계의 정점이 된다.

둘째, 위계의 정점에는 “공적 책임”이 따른다. 한국은행이 위계의 정점에 있다는 것은 곧 한국은행이 한국 화폐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평상시에는 통화 단일성을 유지하고, 위기 시에는 마지막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부여된 “권력”이라기보다는, 화폐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누군가가 떠맡아야 하는 “책임”이다.

셋째, 위계는 “공공과 민간의 결합”으로 가장 잘 작동한다. 위계의 정점만 있고 그 아래가 비어 있는 시스템 — 즉 “중앙은행 단독 화폐 시스템” — 은 경제의 신축적 신용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위계의 정점이 비어 있고 아래만 있는 시스템 — 즉 “민간 화폐만 있는 시스템” — 은 위기에 취약하다. 우리가 자유은행 시대에서 본 모습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은 “강한 정점과 활기찬 아래”가 결합된 시스템이다. 영란은행이 1694년에 정초한, 그리고 그 후 300년간 자본주의가 검증한 그 시스템이다.

넷째, 디지털 시대는 위계를 다시 설계할 기회를 제공한다. 종이와 청산이 중심이었던 시대에는 위계의 형태가 일정한 제약 안에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과 프로그래밍 가능성이 화폐의 인프라가 된 시대에, 우리는 위계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전보다 뱅크런 등의 유동성 위기와 연쇄적인 금융회사 파산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전자산으로의 도주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설계해야 한다. 그 디자인의 방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가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다.

다음 장 —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 — 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을 시도한다. 디지털 시대 화폐의 세 갈래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민간 화폐” 미래. 모든 화폐를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전면 공공화폐” 미래. 그리고 화폐사가 가르쳐 주는 “공공과 민간의 결합”을 디지털 환경에서 재구현하는 “하이브리드 화폐” 미래. 어느 길이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가?

답은 이미 이 책의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지막 장은 그 흩어진 답들을 한자리에 모아 분명한 결론을 제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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