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디지털 화폐 시대의 갈림길 — 세 갈래 미래

배바·1일 전

디지털시대의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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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디지털 화폐 시대의 갈림길 — 세 갈래 미래

결정해야 할 시간

지금까지 우리는 긴 화폐사의 여정을 함께 따라왔다. 1장에서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천 년의 질문에서 시작해, 1694년 런던의 영란은행, 19세기 미국 변경의 자유은행 시대, 1971년 캠프 데이비드의 비밀 회의, 2008년 가을의 금융 위기, 그리고 그 잿더미 위에서 태어난 비트코인까지. 마지막으로 7장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묶어 보는 큰 그림 — “화폐의 위계” — 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우리는 이 모든 화폐사적 통찰을 가지고, 디지털 시대의 화폐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추상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중앙은행, 정부, 금융기관, 그리고 핀테크 기업들이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질문이다. 미국에서는 GENIUS Act가 통과되어 스테이블코인의 규제 틀이 마련되었다. 유럽중앙은행은 “디지털 유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e-CNY)”를 이미 광범위하게 시범 운영 중이다. 한국은행은 “CBDC 활용성 테스트”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비트코인이 미국에서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각국이 서로 다른 길을 시도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은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길은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민간 화폐” 미래다. 두 번째 길은 중앙은행이 모든 디지털 화폐를 직접 발행하는 “전면 공공화폐” 미래다. 그리고 세 번째 길은 공공과 민간의 결합을 디지털 환경에서 재구현하는 “하이브리드 화폐” 미래다.

각각의 길을 차례로 살펴보자. 그리고 그 비교 끝에서, 화폐사가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첫 번째 길 — 민간 화폐의 미래

첫 번째 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나리오다. 6장에서 본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이 점점 더 큰 역할을 맡으며, 결국 우리 화폐 시스템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미래다.

이 시나리오의 옹호자들은 여러 매력적 주장을 한다. 첫째, 민간의 혁신이 자유롭게 발휘되어 더 효율적이고 사용자 친화적인 화폐가 만들어질 것이다. 둘째, 중앙집권적 권력에서 화폐가 해방되어 시민의 자유가 확대된다. 셋째, 국경을 가로지르는 24시간 결제가 가능해져 글로벌 경제 활동이 촉진된다. 넷째, 블록체인의 투명성으로 자금세탁이나 부정거래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이 주장들 중 일부는 분명한 진실을 담고 있다. 디지털 화폐의 사용자 경험 면에서 핀테크 기업들이 보여준 혁신은 인상적이었다. 국경 간 송금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보여준 효율성은 기존 은행 시스템보다 훨씬 우수한 면이 있다. 이런 장점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화폐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길에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은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6장에서 보았듯, 21세기 스테이블코인은 19세기 자유은행권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다. 민간 발행, 단일성 결여, 위기 시 안전장치 부재. 그리고 그 구조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도 우리는 이미 안다. 광범위한 파산과 패닉이었다.

미국 정부가 GENIUS Act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규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바로 이 위험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GENIUS Act도 19세기 미국의 “국법은행법”의 디지털 버전 정도에 그친다. 단일성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하지만, 위기 시 시스템 전체를 떠받칠 진정한 안전장치는 여전히 부재하다. 1907년 미국이 J. P. 모건의 사적 권위에 의존해 위기를 수습해야 했던 굴욕적 상황이, 21세기 디지털 환경에서 어떤 형태로 재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재현될 가능성은 높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제적 차원”에 있다. 만약 민간 화폐 미래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면, 그것은 사실상 “달러 표시 스테이블코인의 글로벌 지배”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시장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모두 미국 달러에 연동되어 있다. 만약 이 추세가 가속화되면, 신흥국과 중소국가들의 통화주권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자국민이 자국 통화 대신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나라의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 정책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디지털 달러화(digital dollarization)”라 부른다.

한국과 같은 중간 규모 개방경제는 이 문제에 특히 취약하다. 우리의 일상 결제에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점점 더 깊이 침투한다면,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 효과는 약화되고, 한국 경제는 미국 통화정책의 흐름에 더욱 종속된다. 이미 우리가 4장에서 본 1971년 이후의 “달러 본위제”가, 디지털 환경에서 한 단계 더 강화되는 셈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민간 화폐 미래는 효율성과 혁신을 가져올 수 있지만, 동시에 화폐사가 이미 가르쳐 준 모든 위험 — 단일성 결여, 위기 시 안전장치 부재, 그리고 통화주권의 약화 — 을 디지털 환경에서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200년 전 자유은행 시대의 디지털 부활이며, 그 시대의 운명을 그대로 따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길 — 전면 공공화폐의 미래

첫 번째 길의 약점이 분명하다면, 반대로 가는 길은 어떨까? 즉 모든 화폐를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길이다.

이 시나리오는 흔히 “전면 소매형 CBDC(rCBDC)” 도입으로 표현된다. “소매형”이란 일반 시민이 직접 사용한다는 의미다. 모든 한국 시민이 한국은행에 직접 계좌를 가지고, 그 계좌의 디지털 화폐로 일상 결제를 하는 시스템을 상상하면 된다. 즉 현재의 민간은행 예금이 한국은행 직접 계좌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 길의 옹호자들 중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미국 코넬대학교의 법학자 사울 오마로바(Saule Omarova)다. 그녀는 2021년에 발표한 “국민 원장(The People’s Ledger)”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논문에서, 모든 시민이 중앙은행에 직접 계좌를 가지고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권한은 폐지하는 급진적 비전을 제시했다. 독일의 경제학자 요제프 후버(Joseph Huber)도 비슷한 “주권화폐” 개혁을 오래 옹호해 왔다.

이 길의 매력은 무엇인가? 첫째, 화폐 시스템의 단순화다. 위계의 모든 층이 통일되어 “한국은행 디지털 화폐 = 진짜 돈”이라는 단일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둘째, 금융 위기로부터의 해방이다. 5장에서 본 부동산-신용 cycle은 민간은행의 신용창출에서 비롯된다. 그 신용창출 권한을 폐지하면 cycle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셋째, 공공의 통제 강화다. 모든 화폐가 중앙은행을 통해 흐르므로, 자금세탁이나 탈세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또한 민간은행이 가져가는 화폐발행차익(시뇨리지)를 공공 부문으로 돌릴 수 있다. 넷째, 정치적 평등성이다.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국가의 돈”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 비전은 매력적이다. 특히 2008년 위기 이후 “민간은행이 너무 큰 권력을 가졌다”는 사회적 분노가 강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1933년 대공황 시대에 시카고 학파의 헨리 사이먼스 등이 제안했던 “100% 지급준비” 또는 “시카고 플랜”의 21세기적 부활로 볼 수도 있다.

신용창출은 어떻게 대체될 것인가 — 옹호자들의 답

지금까지의 매력적 비전 옆에는 한 가지 결정적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권한을 폐지하면, 경제가 필요로 하는 자금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이 질문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2장에서 우리가 본 영란은행 모델의 천재성은 정확히 “민간의 활기찬 신용창출”에 있었다.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막대한 자본도, 우리 시대 가계와 기업의 일상적 자금 수요도, 결국 민간은행의 신용창출을 통해 충족되어 왔다. 그 메커니즘을 폐지하면 그 빈자리를 무엇이 채우는가?

이 질문은 옹호자들 자신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Huber와 Omarova를 비롯한 주권화폐 개혁론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자신들의 답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답은 대략 세 가지 메커니즘으로 정리된다.

첫째, 중앙은행의 재할인창구를 통한 민간은행 대출 자금 공급이다. 이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민간은행은 더 이상 자체적으로 “무에서 화폐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민간은행이 차입자에게 대출을 하고 싶을 때, 그 대출에 필요한 자금을 중앙은행에서 “빌려 올” 수 있다. 즉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여 민간은행에 대출하고, 민간은행은 그 자금으로 차입자에게 대출한다. 이런 방식을 “패스스루(pass-through) 대출” 또는 “중앙은행 재할인창구”라고 부른다.

이 메커니즘의 핵심은 “누가 화폐를 창조할 권한을 가지는가”를 민간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옮기되, “누가 차입자를 심사하고 대출 위험을 부담할 것인가”는 여전히 민간은행에 두는 것이다. 화폐 창조는 공적 권한이 되지만, 신용 평가와 대출 결정은 민간의 전문성에 맡긴다는 것이다.

둘째, 지역공공은행(public banks)을 통한 지역 경제와 중소기업 지원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노스다코타주에서 100년 넘게 운영되어 온 “노스다코타 은행(Bank of North Dakota)”이라는 주립 공공은행이 있다. 이 은행은 영리 추구가 아니라 주민과 지역 경제를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Omarova 등은 이런 형태의 공공은행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하고, 그것을 신용 공급의 한 축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지역의 중소기업, 농민, 자영업자, 학생 등에게 영리 은행이 외면하기 쉬운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이다.

셋째, 국가투자청(National Investment Authority) 등을 통한 전략 부문 신용 공급이다. 이것은 기후 위기 대응, 인프라 투자, 첨단 산업 육성 등 사회적으로 중요하지만 단기 수익성이 부족해 민간 자본이 충분히 흘러가지 않는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는 메커니즘이다. 한국의 산업은행이나 신용보증기금, 또는 독일의 KfW(부흥신용은행)와 같은 기관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런 공적 투자 기관들이 신용 공급의 한 축으로 기능한다.

이 세 가지 메커니즘이 결합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중앙은행을 통한 거시적 화폐 공급, 민간은행을 통한 일반 시장 신용 공급, 공공은행을 통한 지역 경제와 사회적 약자 지원, 그리고 공적 투자 기관을 통한 전략 부문 투자가 함께 작동하는 다층적 시스템이다. 옹호자들은 이 시스템이 현재의 “민간은행 독점 신용창출”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공공적인 목적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 비전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단지 “신용창출이 사라진다”는 우려를 넘어서, 옹호자들은 실제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들 — 기후 위기 대응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 지역 경제의 쇠퇴, 사회적 불평등 — 에 대한 새로운 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이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할수록, 한 가지 새로운 질문이 점점 또렷해진다. “누가 무엇에 얼마의 신용을 공급할 것인가”라는 결정이 시장에서 정치로 옮겨가는 것이 정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이 결정이 주로 민간은행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어떤 차입자에게 얼마를 빌려줄지, 어떤 부문에 신용을 집중할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 이 모든 것이 시장 경쟁 속에서 개별 은행이 결정한다. 이 방식의 한계는 분명하다. 단기 수익성에 치우치고, 부동산에 과도하게 집중되며, 사회적으로 중요하지만 수익성이 낮은 부문에는 자금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 이런 한계는 우리가 5장에서 본 부동산-신용 cycle의 모든 폐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결정을 정치 영역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정치적 결정은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떤 지역, 어떤 산업, 어떤 집단에 자금이 흘러갈지가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정실주의(crony capitalism)의 위험, 효율성의 손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용 배분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을 때의 권력 남용 위험이 발생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 우려는 결코 가설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의 여러 권위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신용 배분을 직접 통제하는 시스템이 처음에는 효과적으로 보였지만 결국 비효율과 부패로 귀결된 사례들이 있다. 한국도 1960~70년대 정부 주도 산업금융 시기에 그런 명암을 함께 경험한 바 있다. 정부의 신용 배분이 한편으로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경유착과 자원 배분 왜곡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결정적 문제가 있다. 이 모든 대안 메커니즘들이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폐지”와 함께 작동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하고 광범위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중앙은행 재할인창구의 운영 원칙, 지역공공은행의 거버넌스, 국가투자청의 의사결정 절차 — 이 모든 것이 새롭게 설계되고 정치적으로 합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설계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타협과 이해관계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론상의 우아한 시스템”과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두 번째 길에 대한 이 책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이 길은 단지 “불가능하다” 또는 “위험하다”고 일축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에 대한 진지한 답을 시도하고 있고, 그 답이 가진 매력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길에는 결정적 우려들이 존재한다. 시장의 자율적 신용 배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정치적 결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나은 답인지는 별도의 진지한 질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길은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의 본질적 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변화의 방향인지, 그리고 그 변화의 비용을 우리 사회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단지 “민간은행 신용창출이 문제다”라는 진단만으로 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이다.

이런 신중한 검토 끝에, 이 책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길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두 번째 길의 매력을 일부 살리면서도, 그 결정적 우려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세 번째 길 — 하이브리드 화폐의 미래

그렇다면 남은 길은 무엇인가? “공공과 민간의 결합”을 디지털 환경에서 새롭게 구현하는 길이다. 즉 위계의 정점에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를 두되, 그 아래에 민간의 디지털 화폐를 함께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이 길은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우리가 이 책 전체에서 이미 만난 모델이다. 1694년 영란은행이 정초한 “하이브리드 화폐” 모델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구현하는 것이다.

이 길의 구체적 모습을 정리해 보자. 위계의 정점에는 도매형 CBDC(wholesale CBDC, 줄여서 wCBDC)가 있다. “도매형”이란 일반 시민이 직접 사용하지 않고, 은행 등 금융기관 사이의 결제에 사용된다는 의미다. 즉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본원통화(지급준비금)로서, 민간은행들 사이의 최종 청산 자산 역할을 한다.

그 아래에는 예금토큰(deposit token) 또는 잘 규제된 스테이블코인이 있다. 예금토큰은 “민간은행 예금의 디지털 토큰화 버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은행 예금이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토큰 형태로 발행되는 것이다. 이 토큰은 발행 민간은행의 부채이며, 위계의 정점인 wCBDC로 청산된다.

전체 시스템은 “통합 원장(unified ledger)”이라는 디지털 인프라 위에서 작동한다. 이 통합 원장에서 wCBDC와 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이 실시간으로 청산되며, 다양한 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 사이에도 자유로운 교환이 가능해진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실시간 동시청산결제”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이미 여러 나라 중앙은행이 은행 간 지급준비금 결제에 실시간총액결제(RTGS)를 확대하고 있다. 다만 기존 방식은 중앙은행의 결제 시스템과 민간의 결제 시스템이 서로 분리된 채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장부를 맞추는 구조여서, 두 시스템 사이에는 미세한 시차와 그에 따른 결제 위험이 늘 남았다. 블록체인 기반의 “원자적 결제(atomic settlement)” 기술은 바로 이 마지막 틈을 없앤다. 자산의 이전과 대금의 지급을 쪼갤 수 없는 하나의 거래로 묶어, 둘이 같은 순간에 함께 이뤄지거나 둘 다 무산되도록 만드는 것이다(“전부 아니면 전무”). 요컨대 동시청산결제와 원자적 결제는 같은 것이 아니다. 동시청산결제는 중앙은행들이 이미 넓혀 가고 있는 정책의 방향이고, 원자적 결제는 그 방향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 시차 없는 실시간 자동화로 — 구현해 내는 수단이다. 통합 원장 위에서 wCBDC와 예금토큰이 원자적으로 청산된다는 말은, 바로 이 완전한 실시간 자동화가 현실이 된다는 뜻이다.

이 구조의 의미를 풀어 보자. 위계의 정점인 wCBDC가 시스템 전체의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위기 시에는 한국은행이 wCBDC를 통해 민간 시스템에 무제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 동시에 그 아래의 민간은행들은 예금토큰을 통한 신용창출을 자유롭게 수행한다. 즉 공공의 안전성과 민간의 신축성이 모두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디지털 환경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가능성도 있다. 통합 원장 위에서 작동하는 화폐는 사전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즉 일정한 조건을 화폐 자체에 내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담보대출의 LTV(주택담보인정비율) 규제나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한도를 결제 단계에서 자동으로 확인하고 강제할 수 있다. 또한 부동산 등 특정 부문에서 급격하게 대출과 예금토큰이 증가하는 경우 이를 동시청산결제하는데 필요한 wCBDC의 수량을 제한하거나 금리를 올리는 조건을 사전 프로그래밍을 통해 부과함으로써 급격한 신용 팽창을 제어할 수 있다. 5장에서 우리가 본 “부동산-신용 cycle”의 자기 강화 메커니즘을, 디지털 화폐 인프라를 통해 사후 규제가 아닌 사전 제어로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 비전은 추상적인 학술 논의가 아니다. 이미 실제 정책 영역에서 활발히 검토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202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통합 원장(Unified Ledger)” 비전이 정확히 이 방향이다. 그리고 그 비전을 구체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BIS와 미국 연준, 한국은행, 영란은행, 일본은행, 유럽중앙은행, 그리고 프랑스, 스위스, 멕시코 중앙은행이 함께 참여한 “Project Agorá”라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즉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하이브리드 화폐” 미래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길의 한계, 그리고 그 답

그러나 세 번째 길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이 이 길을 옹호하는 만큼, 그 한계를 솔직히 짚고 어떤 답이 가능한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정직한 태도다. 적어도 세 가지 우려가 제기된다.

첫째, 감시와 통제의 문제 — 이른바 “빅브라더 우려”다. 디지털 화폐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모든 거래가 기록되는 시스템이다. wCBDC와 예금토큰이 통합 원장 위에서 작동한다면, 중앙은행과 정부는 원리상 모든 거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는 권력의 화폐 감시·통제 가능성을 전례 없이 확장시킨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가 이미 그러한 우려를 한층 부각시킨다. 이 우려에 대한 답은 “설계의 문제”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wCBDC 메인넷과 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 메인넷을 엄격히 분리하고, 둘 사이를 “동시청산결제(DvP/PvP) 브릿지”라는 좁고 통제된 통로로만 연결하는 설계다. 일반 시민의 일상 거래는 민간 메인넷 위의 예금토큰 차원에서 이뤄지고, 그 위에 적용되는 개인정보 보호 규제는 현재의 은행 예금에 적용되는 규제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된다. 중앙은행은 거래의 최종 청산만 보장할 뿐, 개별 거래의 세부 정보에는 직접 접근하지 않는다. 이 “층위 분리” 원칙이 빅브라더 우려를 기술적·제도적으로 차단하는 출발점이다.

둘째, wCBDC의 적시 공급 문제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에서 예금토큰의 청산은 wCBDC를 통해 이뤄진다. 그렇다면 그 청산에 필요한 만큼의 wCBDC가 필요한 시점에 정확히 공급되어야 한다. 만약 청산 수요가 폭증하는데 wCBDC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면, 통합 원장 위의 결제 시스템 자체가 멈춰버릴 수 있다. 이 우려에 대한 답은 wCBDC 공급을 사후적 정책 판단에 맡기지 않고, 청산 수요에 따라 사실상 자동으로 공급되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신축 공급” 메커니즘으로 설계하는 방향이다. 화폐 공급이 경제의 실물 수요에 따라 신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내생화폐이론이 오래 강조해 온 명제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 명제가 wCBDC의 적시 공급 알고리즘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즉 청산 시점에 필요한 만큼의 wCBDC가 사전에 정의된 규칙에 따라 자동 발행·환수되며, 중앙은행은 그 규칙 설계와 한도 관리에 집중한다. 이 방식이 작동한다면 통합 원장은 사실상 자체적으로 신축성을 확보한 시스템이 된다. 또한 대출 용도에 따라 wCBDC의 적시공급 방식이나 금리를 차별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기호황기에는 부동산담보대출에 대한 wCBDC 공급을 제한하거나 대출금리를 높이는 반면, 기후위기 대응 등과 연계된 대출의 경우에는 wCBDC 적시공급을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용공급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시뇨리지와 경기순응성 문제가 실제로 완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세 번째 길은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다. 따라서 5장에서 본 부동산-신용 cycle의 본질적 동학과, 민간은행이 신용창출을 통해 얻는 시뇨리지 이익(화폐발행차익)이 그대로 남는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공공과 민간의 결합”을 명분 삼아 사실상 기존 시스템의 문제를 그대로 두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다. 이 우려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절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 세 가지 우려와 그에 대한 답은 모두 “설계의 문제”로 환원된다. 세 번째 길의 옳고 그름은 일반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이 옹호하는 세 번째 길은 “무비판적 청사진”이 아니라 “진지한 설계 과제”다. 그 설계가 충실히 이뤄진다면, 세 번째 길은 자본주의 화폐사가 가르쳐 온 통찰 — 공공과 민간의 결합 — 을 디지털 환경에서 한층 발전된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

두 번째 길의 정당한 문제의식을 끌어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풀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길이 단지 첫 번째 길(민간)과 두 번째 길(공공) 사이의 어정쩡한 절충, 즉 “양쪽 눈치를 보는 타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 번째 길의 진짜 강점은 두 번째 길이 제기한 정당한 문제의식 — 화폐발행차익(시뇨리지)이 민간은행의 사적 이윤으로만 흘러가는 문제, 민간 신용창출이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경기순응성 문제, 위기 시 분배 정의의 문제 — 을 민간 신용창출의 활력을 죽이지 않으면서 끌어안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방법은 디지털 환경이 새로 열어 준 세 가지 도구다.

첫째, 동시청산결제 구조 자체가 신용 확장에 자동 제동을 건다. 세 번째 길에서는 모든 예금토큰 거래가 통합 원장 위에서 wCBDC와 실시간으로 동시에 청산된다(동시청산결제). 이 구조에는 흥미로운 성질이 하나 숨어 있다. 민간은행이 부동산담보대출을 늘리면 그만큼 예금토큰이 더 발행되고, 그 토큰이 결제될 때마다 은행은 그에 대응하는 wCBDC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신용을 확장할수록 결제에 필요한 중앙은행 화폐(wCBDC)의 양이 자동으로 늘어난다. 과거의 지급준비금 제도가 “예금 잔액”에만 연동되었던 것과 달리, 이 구조는 실제 “거래량”에 연동되기 때문에 신용 cycle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신용이 과열될수록 은행이 떠안아야 하는 결제 유동성 비용이 커지고, 그 비용이 대출금리에 얹히면서 과도한 신용 확장이 자연스럽게 억제된다. 별도의 규제를 덧붙이지 않아도 결제 구조 자체가 5장에서 본 부동산-신용 cycle의 자기강화 동학에 브레이크를 거는 셈이다.

여기에 디지털 화폐의 “프로그래밍 가능성(programmable money)”을 더하면 이 제동의 강도를 정책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은행에 wCBDC를 공급할 때, 그 조달 비용을 신용 상태에 연동시키도록 미리 프로그래밍해 두는 것이다. 신용이 정상 수준을 넘어 과열될수록 결제에 드는 비용이 누진적으로 비싸지게 설계하거나 기업대출에 비해 부동산대출에 대한 결제유동성 비용을 높이는 방식으로 설계하면, 그 비용이 wCBDC조달 금리에 반영되어 신용 확장을 자동으로 식힌다. 여기서 핵심은 이 방식이 “얼마까지만 빌려줘라”는 식의 수량 규제가 아니라 조달 금리라는 가격 신호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 거시건전성 규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시차·우회·정치 압력이라는 약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차원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시뇨리지를 공적 영역으로 환수한다. 민간은행이 예금토큰 발행을 통해 얻는 화폐 발행 이익에 대해 “디지털 은행세(digital bank levy)”를 부과하는 방안이다. 영국이 2011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시행해 온 은행세 모델을 디지털 환경에서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발행자의 규모와 시스템적 중요성에 따라 세율을 차등 적용하고, 그 세수를 일반 재정이나 위기 시 안전장치의 재원으로 돌린다. 두 번째 길이 “시뇨리지를 공공이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세 번째 길은 민간 발행을 유지하면서도 그 이익의 일부를 공적으로 환수하는 길을 연다.

셋째, 공적 신용창출과 보조적 소매형 CBDC를 결합한다. 두 번째 길이 제안한 공적 신용창출 메커니즘 — 확장된 재할인창구, 지역공공은행, 국가투자청 — 은 세 번째 길과 충분히 양립한다. 다만 민간 신용창출을 폐지하고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영역(기후 전환 투자, 사회 인프라, 중소기업 자금)에 한정해 보완적으로 작동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나아가 평상시 위계의 정점은 도매형 wCBDC가 담당하되, 위기 시에는 보조적 소매형 CBDC를 통해 중앙은행이 시민 계좌에 직접 자금을 지급하는 “대국민 양적완화”나 기본소득 지급도 가능해진다.

이 세 가지 도구가 함께 작동하면, 세 번째 길은 두 번째 길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한 목표를 다른 방식으로 달성하는 길이 된다. 바로 이 점이 세 번째 길을 “미지근한 절충”이 아니라 “양쪽의 정당한 가능성을 모두 담아내는 종합”으로 만든다.

한국에서도 시작된 실험

세 번째 길은 단지 학자들의 이론이거나 BIS의 정책 비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구체적 실증 실험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한국도 있다.

한국은행은 2023년부터 단계적으로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진행해 왔다. 이 테스트의 정확한 구조를 잠시 살펴보면, 그것이 이 책에서 우리가 옹호한 세 번째 길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가 분명해진다.

한국은행의 테스트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단순한 “디지털 원화”의 발행 — 즉 이 책에서 우리가 “두 번째 길”로 분류한 전면 rCBDC — 이 아니다. 그 대신 한국은행이 검증하고 있는 것은 wCBDC와 예금토큰의 동시청산결제 구조다. 즉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도매형 CBDC가 위계의 정점에서 최종 청산 자산으로 작동하고, 그 아래에 시중은행들이 발행하는 “예금토큰”이 일상 결제 수단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양자는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원장 위에서 실시간으로 청산된다.

이 테스트에는 한국 주요 시중은행들이 참여하고 있다. 각 은행은 자기 고객의 예금 일부를 블록체인 위의 “예금토큰” 형태로 발행하고, 그 토큰을 이용한 결제와 청산을 실험한다. 은행 간에 거래가 발생하면 한국은행이 발행한 wCBDC를 통해 즉시 최종 청산된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은행 계좌의 일부 잔액이 “디지털 토큰” 형태로 변환되어 새로운 방식의 결제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 토큰은 여전히 자기 거래 은행의 부채이며, 예금 보험과 같은 기존의 안전장치가 그대로 적용된다.

이 구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첫째,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은 그대로 유지된다. 시중은행은 여전히 대출을 통해 예금을 창출하고, 그 예금이 토큰화되어 디지털 환경에서 작동한다. 둘째, 그 위에 한국은행의 wCBDC가 “마지막 안전장치”로 자리 잡는다. 위기 시 한국은행은 wCBDC를 통해 무제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 셋째, 양자의 청산은 실시간으로, 결제완결성을 보장하면서 작동한다. 자기앞수표 시대의 “며칠짜리 청산”이 “수 초의 청산”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이 책에서 우리가 “세 번째 길”로 정리한 그 모델이다. 그리고 한국은행은 이 모델을 “자국이 처한 특수한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글로벌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은 흐름”의 한국적 검증으로 진행하고 있다. BIS의 Project Agorá에 한국은행도 참여국 중 하나로 들어가 있다. 즉 한국이 진행하는 이 테스트는 미국 연준, 영란은행, 일본은행, 유럽중앙은행 등이 함께 검증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일부다.

물론 이 테스트가 곧바로 본격 도입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기술적 안정성, 보안 문제, 기존 결제 인프라와의 통합, 규제 정비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리고 한국은행 자신도 이를 “활용성 테스트”라고 신중하게 부르고 있다. 즉 “이 방향이 옳다고 확정한 후의 시행”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진지하게 검증해 보는 단계”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세 번째 길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검증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검증의 결과에 따라, 한국의 화폐 시스템이 향후 10년 안에 매우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이 옹호하는 세 번째 길은 단지 “추상적인 비전”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은행을 비롯한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가장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현실적 답”이다. 그리고 이 책이 강조해 온 화폐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흐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00년에 걸친 자본주의 화폐사가 보여 준 가장 안정적인 모델 — 공공과 민간의 결합 — 이 디지털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누가 미래의 화폐를 결정하는가 — 권력과 인프라의 관점

세 갈래 길을 비교하기 전에,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화폐 제도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이 추동해 왔는가? 그리고 그 답이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택하게 될 것인가에 어떤 시사를 주는가?

이 질문은 이 책 전체에 걸쳐 우리가 따라온 화폐사를 한 단계 위에서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살펴본 모든 화폐사적 분기점에서 두 가지 힘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지급결제 인프라를 장악하는 주체의 변화다. 그리고 이 두 힘은 깊이 얽혀 있다. 인프라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고, 권력의 변화가 다시 인프라를 재편한다.

이 관점에서 이 책에서 다룬 사건들을 다시 한 번 빠르게 짚어 보자.

1694년 영란은행의 탄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지 “천재적 발명”이 아니라 왕의 권력과 상인·은행가의 권력 사이의 절충이었다. 왕은 전쟁 자금이 필요했고 자본가들은 안전한 투자처가 필요했다. 양자의 권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화폐 인프라(영란은행 지폐와 청산 시스템)가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인프라를 영란은행이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화폐 권력 지형이 영구히 재편되었다.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는 어떠한가? 그것은 동부 엘리트의 권력에 대한 변경 주민들의 정치적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잭슨 대통령이 제2차 미국은행을 폐지한 것은 “화폐 권력을 지방에 분산시키겠다”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 분산된 인프라는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했고, 결국 다시 “공적 인프라”(연방준비제도)로의 진화로 귀결되었다. 권력관계가 인프라를 한 번 분산시켰다가 다시 집중시킨 셈이다.

20세기 초 자기앞수표와 요구불예금의 등장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민간은행들이 새로운 결제 인프라를 만들어 사실상 화폐 발행 권한을 회복한 사건이었다. 국법은행법으로 자체 은행권 발행 권한을 잃은 민간은행들이, 수표와 예금 시스템이라는 새 인프라를 통해 “실질적 화폐 발행자”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다시 FDIC와 같은 공공의 안전장치 강화로 절충되었다. 인프라 장악의 변화가 권력관계의 재조정을 추동한 사례다.

1971년 닉슨 쇼크는? 그것은 미국이 국제 화폐 인프라에 대한 자국의 우월적 위치를 일방적으로 재편한 사건이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낸 “금-달러 인프라”의 부담이 한 국가에 집중되자, 그 국가는 인프라 자체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버렸다. 그 결과 만들어진 새로운 인프라(달러 본위제)는 미국의 국제 화폐 권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2008년 위기 이후의 흐름은 어떠한가? 비트코인의 등장은 기존 인프라를 장악한 자들에 대한 인프라 외부에서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도전이 “실제 화폐”로 작동하기에는 부족했기에,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인프라 안으로 들어오는 타협”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그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권력관계의 절충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화폐사 전체에 걸쳐 한 가지 패턴이 반복된다.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고, 새로운 인프라가 다시 권력관계를 재편하며, 그 재편이 다음 단계의 변화를 추동한다. 화폐 제도는 결코 “기술적 최적해”를 향해 직선적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관계와 인프라 장악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동학 속에서 굴절되며 진화한다.

우리 시대의 권력 지형

이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마주한 디지털 화폐 시대의 갈림길도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첫 번째 길(민간 화폐 미래)을 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혁신”의 옹호자들이지만, 실제로 이 길의 추진력 뒤에는 빅테크와 글로벌 기업의 권력이 있다. 그들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급결제 인프라를 자신들이 장악하기를 원한다.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자들, 그리고 그것을 거래하는 거래소들이 이 길의 직접적 수혜자가 될 것이다. 또한 달러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경우에는 달러 기축통화 체제의 유지와 미 국채시장의 안정을 원하는 미국의 패권 전략이 뒷받침할 것이다.

두 번째 길(전면 공공화폐 미래)을 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표면적으로는 “공공성”과 “민주적 통제”의 옹호자들이지만, 실제로 이 길의 추진력 뒤에는 국가와 중앙은행의 권력이 있다. 그들은 디지털 시대의 화폐 인프라를 자신들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민간 권력에 빼앗긴 화폐 통제권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추진이 그 가장 분명한 사례다.

세 번째 길(하이브리드 화폐 미래)은 어떠한가? 그것은 민간은행(규제된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포함)과 중앙은행 사이의 권력 절충의 시도다. 민간은행은 자신들이 현재 장악하고 있는 지급정산 인프라를 디지털 환경에서 그대로 유지하려 하고(예금토큰과 스테이블코인), 중앙은행은 위계의 정점에서 새로운 권한(wCBDC)을 행사하려 한다. 양자의 절충 끝에 만들어지는 시스템이 영란은행 모델의 디지털 재현이다.

여기까지가 권력 지형의 큰 그림이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아 두어야 한다. “빅테크는 스테이블코인, 민간은행은 예금토큰, 중앙은행은 CBDC”라는 이 깔끔한 매칭은 2019년 페이스북이 리브라(Libra)를 발표하던 무렵의 인상에 기반한 것이고, 그 사이 현실은 훨씬 복잡해졌다.

첫째, 빅테크의 자체 디지털 화폐 발행은 리브라가 무산된 이후 의외로 제한적이다. PayPal의 PYUSD가 유일하게 두드러진 사례인데, 그마저도 실제 발행은 전문 발행사인 Paxos에 위탁된다. 즉 “빅테크가 첫 번째 길을 주도한다”는 그림은 이제 6~7년 전의 옛 그림이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실질적 주역은 빅테크가 아니라 Tether(USDT)·Circle(USDC)·Paxos 같은 전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다. 이들은 빅테크도 민간은행도 아닌 별개의 카테고리이며, 시장의 99%를 차지한다.

둘째, 그리고 더 중요하게, 민간은행은 예금토큰만 추구하지 않는다. 두 화폐를 모두 추구한다. JPMorgan·Citi·BNY Mellon·HSBC가 예금토큰 인프라를 구축하는 동시에, 한국에서는 은행들이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증권회사들이 RWA(실물자산 토큰화) 시장 선점을 위해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뛰어들고 있다. 결국 권력 경쟁의 실제 구도는 “빅테크 vs 민간은행 vs 중앙은행”의 깔끔한 3자 대결이 아니다. 다양한 민간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형태의 디지털 화폐를 동시에 시도하고, 그들 사이의 합종연횡과 공공 안전장치와의 결합 방식이 끊임없이 재조정되는 복합 경쟁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차원을 더 보태어 두자 — 통화주권 차원이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9% 이상이 미국 달러 표시이고, 한국 시중은행들이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는 데에는 자국 통화로 결제되는 디지털 인프라를 지키려는 통화주권 인식이 있다. 권력 경쟁의 한 차원은 이렇게 국경을 가로지르며 작동한다 — 이것이 어떤 위험을 의미하는지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짚어 둘 필요가 있다. 통화주권을 지키는 길이 곧 “중앙은행이 모든 시민에게 디지털 화폐(소매형 CBDC)를 직접 쥐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화폐사의 교훈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자국 통화의 주권을 떠받치는 핵심은 중앙은행이 시민의 지갑 안에 들어가 있느냐가 아니라, 시중에 도는 온갖 민간 디지털 화폐 — 예금토큰이든 스테이블코인이든 — 가 언제나 1대 1로 중앙은행 화폐와 맞바꿔지도록 강제할 수 있느냐다(이를 액면 태환, par convertibility이라 한다). 바로 이 강제력이 여러 갈래의 사적 화폐를 하나의 “원”으로 묶어 주는 끈이며, 그 끈이 느슨해지는 순간 —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그 자리를 파고드는 순간 — 통화주권은 잠식된다. 세 번째 길이 위계의 정점에 wCBDC를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wCBDC는 시민이 일상에서 직접 쓰는 화폐가 아니라, 그 아래 모든 민간 화폐의 액면 태환을 보증하는 “닻”이다. 소매형 CBDC를 전 국민에게 보급하느냐는 부차적 선택일 뿐, 주권의 본질은 이 닻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있다.

이 권력 지형도가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현재 “각자가 선호하는 디지털 화폐”는 우연이 아니다. 빅테크과 민간은행은 스테이블코인과 예금토큰을, 중앙은행은 CBDC를 선호한다. 각자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인프라”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미래의 화폐 시스템을 결정할 것이다. 다만 그 경쟁의 본질을 한 차원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어느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을 누르고 독점하는 경쟁이 아니다. 자본주의 화폐사의 모든 결정적 갈림길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한 것은 항상 어느 한 행위자가 아니라 공공과 민간의 특정한 결합 형태였다 — 1694년 영란은행 모델이 그랬고, 19세기 말 자기앞수표·요구불예금 시스템이 그랬다. 디지털 화폐 시대의 경쟁도 본질은 같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공공-민간 결합이 헤게모니 모델이 될 것인가”의 경쟁이다.

그렇다면 “화폐사가 어떤 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길이 실제로 선택되려면, 그것을 지지하는 사회적 권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영란은행이 1694년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이론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왕과 자본가의 권력이 그 방향으로 절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wCBDC와 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의 하이브리드 모델이 실현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관계의 형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현재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BIS의 Project Agorá와 같은 협력을 통해 하이브리드 모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런 권력관계의 형성이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중앙은행이 빅테크의 도전에 대응하면서도 민간은행의 역할을 보존하려는” 권력 절충의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가 한국에서도 한국은행의 CBDC 활용성 테스트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도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빅테크의 권력이 더 빠르게 커지면 첫 번째 길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반면, 사회적 분노가 정치 권력의 형태로 결집되면 두 번째 길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미래의 화폐 제도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형성되고 있는 권력관계의 결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화폐 제도는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권력 지형을 반영하고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정치적·사회적 문제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의 화폐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학자와 정책 결정자뿐 아니라 시민 사회 전체에서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그 큰 대화에 대한 기여다.

화폐사가 가리키는 방향

세 갈래의 길을 살펴보았고, 그것을 추동하는 권력관계의 지형도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화폐사 전체의 흐름과 우리 시대의 권력 지형을 함께 고려할 때, 어느 길이 가장 적절한 방향인가?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두 가지 큰 교훈을 확인해 왔다. 3장의 자유은행 시대에서 우리는 “중앙은행 없는 화폐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4장과 5장의 1971년 이후 50년에서 우리는 “중앙은행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 두 교훈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길은 무엇인가? 분명하다. 공공과 민간의 결합이다. 위계의 정점에 공적 안전장치가 있되, 그 아래에 민간의 활기찬 신용창출이 작동하는 시스템. 이것이 1694년 영란은행이 발견했고, 그 후 300년의 자본주의 화폐사가 검증한 가장 안정적인 화폐 모델이다.

첫 번째 길(민간 화폐 미래)은 영란은행 모델의 “민간” 부분만 살리고 “공공” 부분을 버리려 한다. 그 결과는 자유은행 시대의 재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길(전면 공공화폐 미래)은 영란은행 모델의 “공공” 부분만 살리고 “민간” 부분을 버리려 한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의 본질적 활력 상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길(하이브리드 화폐 미래)만이 영란은행 모델의 두 부분을 모두 살린다. 그것은 자본주의 화폐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디지털 환경에서 충실히 계승하는 길이다. 다만, 영란은행 모델의 계승만으로는 1971년 이후 본격화된 부동산-신용 cycle과 그림자금융의 문제에 대응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계 측면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 번째 길은 종착점이 아니라 수렴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세 번째 길을 옹호한다고 해서, 세 갈래 미래가 “셋 중 하나를 영원히 고르는” 정태적 선택지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이 따라온 화폐사 전체의 교훈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 화폐 제도는 한 번 정해지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충격을 거치며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갈래 미래도 고정된 갈림길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수렴할 수 있는 동태적 경로들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두 가지 “변형 경로”를 그려 볼 수 있다.

변형 경로 하나 — 첫 번째 길이 위기를 거쳐 세 번째 길로 흘러간다. 만약 세계가 첫 번째 길(민간 화폐 중심)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고 하자. 규제된 스테이블코인과 예금토큰이 해외송금, AI 결제, 자산 토큰화 같은 영역에서 빠르게 확산되어, 어느새 일상 결제 전체를 떠받치는 범용 인프라로 자리잡는다. 이는 정확히 19세기 자유은행권이 20세기 초 요구불예금으로 진화해 미국 화폐의 주역이 된 과정 — 우리가 앞 장에서 “보이지 않는 자유은행의 부활”이라 이름 붙인 그 패턴 — 의 디지털 재현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시스템적 위기 우려가 커지면, 결국 공적 안전장치(wCBDC와 통합 원장)가 사후적으로 도입될 수밖에 없다. 즉 첫 번째 길은 위기를 한 번 거친 뒤, 사후적으로 세 번째 길에 도달하게 된다. 도착점은 비슷하지만, 그 사이에 1907년 패닉이나 2008년 같은 값비싼 위기를 치러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변형 경로 둘 — 세 번째 길이 충격을 거쳐 두 번째 길의 요소를 끌어들인다. 반대 방향의 진화도 가능하다. 세 번째 길이 자리잡은 뒤라도, 두 종류의 충격이 두 번째 길(전면 공공화폐)의 핵심 요소를 불러들일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형태의 금융위기다 — 디지털 뱅크런의 빠른 속도, 새로운 그림자 화폐의 출현 등이 위기를 만들면, 그 대응책으로 소매형 CBDC를 통한 대국민 직접 지급이 본격 도입될 정치적 동력이 생긴다. 다른 하나는 AI에 의한 노동시장 충격이다 — 광범위한 일자리 대체가 현실이 되면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급격히 커지고, 소매형 CBDC 인프라가 그 가장 효율적인 지급 통로로 떠오른다. 코로나19 때의 재난지원금이 그 예고편이었다면, 이런 충격은 그것을 상시 제도로 확장시킬 수 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길과 두 번째 길의 중간 어디쯤 — 헤게모니 통화는 여전히 민간 발행 디지털 화폐이지만, 위계의 정점에서 소매형 CBDC가 평상시 기본소득 인프라로 폭넓게 작동하는 시스템 — 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경로를 함께 놓고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세 번째 길은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되어 멈추는 종착점이 아니라, 여러 진화 경로가 모여드는 수렴점이자 다시 갈라져 나가는 출발점이다. 세 갈래 미래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이 아니라 동태적으로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경로들이며, 이는 이 책이 처음부터 강조해 온 메시지 — 화폐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 를 디지털 시대에 일관되게 적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길을 옹호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세 번째 길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미래”라는 주장이 아니다. 핵심은 “위기 이후에”가 아니라 “위기 이전에” 그 진화를 미리 설계하자는 것이다. 변형 경로 하나가 보여주듯, 세 번째 길은 어차피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지점이다. 문제는 그곳에 값비싼 위기를 한 번 치르고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를 미리 내다보고 사전에 제도를 설계해 부드럽게 이행할 것인가다. 사전 설계의 진짜 의의가 여기에 있다 — 첫 번째 경로가 치러야 할 위기의 비용을 피하고, 두 번째 경로가 열어 둘 가능성(위기나 충격이 왔을 때 부드럽게 정책을 적응시킬 여지)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한국 같은 비기축 통화국에 결정적이다. 변형 경로 하나가 위기를 거쳐 진행되는 동안, 그 과정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일상에 깊이 침투하면 한국의 통화주권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잠식될 수 있다. 위기를 기다렸다가 사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 통화 표시 인프라를 미리 설계해 두어야 하는 가장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남는다

세 번째 길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하이브리드 화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큰 방향이 정해진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계할 것인가에는 무수한 질문이 남는다.

wCBDC를 어떤 기술 인프라 위에 구축할 것인가? 분산원장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중앙집중식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할 것인가? 예금토큰과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통합 원장에 연결할 것인가? 어떤 규제 틀이 적절한가? 국경 간 거래에서 다른 나라의 wCBDC와 어떻게 상호운용성을 확보할 것인가? 프로그래밍 가능성을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가? 부동산-신용 cycle 통제를 위한 거시건전성 규제 장치를 어떻게 화폐 인프라에 내장할 것인가? 사적 자율성과 공적 감독의 균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 구체적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학자, 정책 결정자, 기술 전문가, 그리고 시민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거대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기 시작하는 첫 걸음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책이 기여하고자 한 것은 정확히 그 첫 걸음이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연구의 마지막을 한국 독자에게 직접 말 거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

한국은 디지털 화폐 시대에 매우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모바일 결제, 핀테크 서비스, 그리고 디지털 인프라에서 한국은 선도 그룹에 속한다. 동시에 한국은 “가계 부채와 부동산”이라는 1971년 이후 화폐사의 핵심 문제를 가장 극심하게 겪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5장에서 본 부동산-신용 cycle의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 한국 경제와 한국 가계의 일상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무엇이 가능해지는가? 한국은 디지털 화폐 시대 진입을 통해, 자국이 가진 가장 큰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한국은행은 이미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진행 중이고, 한국 시중은행들과 IT 인프라는 통합 원장 시스템을 구축할 충분한 역량이 있다. 만약 한국이 wCBDC와 예금토큰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거기에 부동산-신용 cycle 통제를 위한 거시건전성 규제 장치를 내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이 직면한 가장 만성적 경제 문제 — 부동산 거품과 가계 부채 위기 — 에 대한 새로운 답이 될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이 지금까지 부동산 문제와 씨름해 온 방식과 견주어 보면 더 분명해진다. 한국 정부는 1999년 이후 LTV(주택담보인정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 같은 대출 규제를 서른 번 넘게 바꿔 왔다. 부동산이 과열되면 조이고, 경기가 식으면 풀고, 다시 조이기를 반복한 것이다. 이런 잦은 변경은 시장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내고, 정권과 여론의 압력에 휘둘리며, 사업자대출이나 임대보증금 같은 우회로에 번번이 뚫려 왔다. 규제를 발표하고 시행하기까지 몇 달의 시차가 있는 사이에 이미 시장은 다음 수를 두고 있곤 했다. 세 번째 길의 결제 인프라가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규제를 서른 번 넘게 손보며 시장을 흔드는 대신, 신용이 과열되면 결제 비용이 자동으로 올라가도록 인프라에 한 번 설계해 두면, 그 장치는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되게, 거의 실시간으로, 그리고 우회하기 어렵게 작동한다. 게다가 이 도구는 결제 인프라를 운영하는 한국은행이 비교적 독자적으로 다룰 수 있어, 여러 부처의 협의를 거쳐야 하는 기존 규제보다 시차가 작다. 물론 이것이 기존 규제를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존 도구가 가진 시차·우회·정치 압력이라는 약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한 겹의 안전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물론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다. 기술적 난제도 있고, 기존 금융 산업과의 조율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화폐사의 큰 흐름은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에서 한국이 “선도자”가 될 것인지 “추종자”가 될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인식과 비전을 가지고 출발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당 연구가 그 출발의 작은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돈에 대한 더 많은 사회적 대화 — 학계의 논쟁, 정책의 토론, 시민의 관심 — 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의 돈은 너무 중요하고,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어서, 어느 한 집단에만 맡겨둘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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