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1 판단력 비판

Clay Ryu's sound lab·2022년 10월 18일
0

Philosophical Idea

목록 보기
4/8

https://youtu.be/bWm9xzy6ANA
링크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인공지능 예술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정리할 다른 내용들이 많음에도 잠깐 정리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술이 기존의 인식 형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개념화하는 것, 즉 상상력을 발휘하는 놀이라면 인공지능이 만드는 예술은 기존의 예술을 답습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모아서 넘어선다라는 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에게 공통된 창작의 방식이라면 저는 아직은 포착되지 않은 무언가를 직관하는 능력으로의 상상력의 유무가 둘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상력이 과연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일까요? 그리고 인공지능 예술에 상상력의 작동이 없더라도 결과가 같다면 즉, 기능적으로 둘의 결과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 예술을 차별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플라톤의 영혼 3분설


이성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욕망과 예술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예술. 칸트는 예술에 대해 제대로된 논의를 시작 했다.

판단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에 포섭시키는 것

규정적 판단

반성적 판단

개념이나 법칙이 없는 상태에서 개념이나 법칙을 만들어서 포섭을 하는 판단

미적판단

상상력

개별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것에 포섭하는 능력.
칸트는 이러한 상상력이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본다.
어떤 대상을 포섭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유로운 유희이며 놀이, 이것은 4가지의 규칙인 범주를 따르게 된다.

무관심한 관심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면서 즐거운 것
하지만 미적인 쾌도 관계를 벗어날 순 없다. 이런 말을 하면 리좀을 얘기한 들뢰즈가 화를 내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에 연결되어 있지만 특정한 목적성을 가지지 않는 미적판단을 무관심한 관심과 관련되었다고 말한다.

주관적 보편성

아름다움이란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 객관적인 속성은 보편성과 연관이 된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이를 느끼는 주체의 주관적인 감정 뿐이라면 이는 절대 보편적인 무언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칸트는 주관적인 형식의 보편성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내가 좀더 찾아가야할 문제인듯 하고, 대신 흄이 말하는 세련된 취미에 대해서는 그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취미에 기준이 있을까? 가령 천재의 작품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주관적인 감상에 어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흄의 표현대로 "진정한 감정가들의 합치된 판정"으로 합의된 기준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인걸까? 과연 고대의 사람이 오늘날의 예술에 감동을 받을까? 아니면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서양 문화권의 예술에 감동을 받을까? 아닐 거 같은데... 그러면 흄이 맞는걸까? 정말 주관적인 보편성이 있을지는 좀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이다. 다만 칸트도 그런 보편성을 요청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목적없는 합목적성

세계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은 우리의 구조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목적적 형식은 범주와 같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 필연성

공통감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필연적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공통감이란 증명할 수 없다. 그건 칸트의 희망사항인걸까?

아름다움과 예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우리 안의 합목적적인 특성을 보이는 점은 모두가 납득할만하다. 대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구조가 그것에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순간 이 감정은 감탄으로 변해 세상이 왜이렇게 만들어져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기는 것 같다. 그리고 이성의 권한을 넘어서서 어떤 목적성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숭고

로스코의 작품은 물감 덩어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왜 이건 그렇게도 감동을 주는 것일까?
꽃, 오솔길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름다움이라면,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 밤하늘에 놓은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느끼는 쾌를 수학적 숭고라고 한다. 아찔한 절벽이나 거센 폭풍우 속에서 느끼는 쾌를 역학적 숭고라고 한다.

인식능력

순수이성비판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감성, 범주라는 형식에 맞추어 판단을 내리는 지성,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을 만들어서 대상에 붙이는 능력인 상상력, 좁은 의미의 이성으로 추론을 담당하며 절대로 선험적 종합 형식을 넘어가서는 안되는 이성이 있다.


아름답다는 판단은 지성을 바탕으로 하되 상상력을 발휘할때 생겨난다.

아름다움과 숭고

둘 모두 주관적인 감정으로 대상에는 어떠한 내적 가치가 없다.

수학적 숭고

무한 = 상상력의 좌절

어떤 대상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속에서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무한을 상상하려는 상상력의 좌절에 더이상 개별된 숫자가 아니라 무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이성에게서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아있기에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역학적 숭고

공포란 자연의 힘에 완전히 압도되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자연의 힘에 압도되는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느순간 불쾌가 쾌로 바뀌는 경험

도덕적인 감정과 신성

숭고한 것은 폭풍우가 아니고 폭풍을 맞서는 등대이며, 칸트에게 이 등대는 도덕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도덕적인 감정을 통해서 신의 세계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 두려움에 맞서서 자신의 정신의 힘을 발견하고, 자신의 도덕 감정을 발견하며, 자신안에 들어 있는 신성을 발견할 때 오히려 진정한 신앙이 된다고 한다.

profile
chords & code // harmony with structure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