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05. 16. 투자 공부 일지

Bard·2026년 5월 16일

출처: 월가아재의 과학적 투자 채널

도합 약 70분 길이의 영상에 대한 요약입니다. 쳐낼 게 없어서 거의 다 썼습니다. 달러 시스템이 망가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달러의 무조건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게 핵심 주제입니다. 재밌겠죠?

달러 질서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적 협력 체제다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 질서는 단순한 금융 인프라가 아니다.
세계 각국의 은행, 기업, 중앙은행이 달러를 사용하고,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위기 때 연준의 달러 공급에 의존하는 이유는 단지 달러 결제망이 편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밑에는 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미국과 주요 동맹국들이 같은 규칙을 공유하고, 위기 때 서로를 지원할 것이라는 정치적 신뢰다.

배리 아이켄그린이 오래전부터 강조해 온 핵심도 바로 이 지점이다.

국제 통화 질서는 시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협력 체제다.

이 말은 평소에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린다. 실제로 달러 붕괴론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지만, 달러는 여전히 압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IMF 통계 기준으로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은 여전히 57% 수준이고, 위안화 비중은 2%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주장이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가 있다.
달러 질서를 떠받치던 정치적 전제가 조금씩 흔들리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러 공급을 정치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상상

최근 유럽에서는 과거라면 거의 상상하지 않았을 시나리오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미국 연준이 동맹국에 대한 달러 공급 라인을 끊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다.

과거 유럽 입장에서 이는 현실적인 위험이라기보다 자연재해에 가까운 극단적 가정이었다.

후지산이 폭발할 가능성이 낮지만 대비 시나리오는 세우는 것처럼, 미국이 유럽에 달러 공급을 끊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른바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 국채 시장이 급락하고 주식시장이 흔들리자, 유럽중앙은행 내부에서는 미국이 미래에 동맹국에게조차 달러 공급을 정치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2026년 4월에는 이 불안을 키우는 사건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 4월 21일, 차기 연준 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케빈 워시가 연준 청문회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 4월 22일, 미국 재무장관 베센트가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와 아시아 동맹국들이 달러 스왑 라인을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 4월 24일, 베센트는 자신의 X 계정에 더 직접적인 글을 올렸다.
  • 4월 28일, 아랍에미리트가 오펙을 탈퇴했다.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50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달러 질서의 전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이켄그린의 오래된 문제의식이 다시 등장한다.


배리 아이켄그린이 던진 질문

국제 통화 질서를 역사로 읽는 학자

배리 아이켄그린은 국제 통화 질서와 경제사를 연구해 온 대표적인 학자다.
1952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1979년 예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6년부터 UC 버클리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일관되어 있다.

  • 화폐는 어떻게 국경을 넘어 흐르는가
  • 환율 체제는 왜 안정되거나 무너지는가
  • 국제 통화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해체되는가
  • 금융위기는 왜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위기로 번지는가

그는 한국과도 접점이 있다.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절하되며 아시아 외환위기의 첫 도미노가 쓰러진 날, 아이켄그린은 IMF의 시니어 폴리시 어드바이저로 첫 출근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1998년 8월, 러시아가 디폴트를 선언한 날 IMF를 떠났다.

그는 이를 두고 농담처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태국이 무너진 날 IMF에 들어와서 러시아가 무너진 날 떠났다.”

즉 그는 우리가 흔히 ‘IMF 시기’라고 부르는 국제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이다.

대표작 『황금 족쇄』의 문제의식

아이켄그린의 대표작은 1992년에 출간된 『황금 족쇄』다.
부제는 금본위제와 대공황이다.

이 책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1929년의 충격은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10년짜리 글로벌 재앙으로 번졌는가?

1929년 주가 폭락은 미국에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충격은 영국, 독일, 일본, 식민지 조선까지 포함한 세계 전체로 번졌다.

아이켄그린의 답은 명확하다.

충격을 증폭시킨 것은 금 자체가 아니라 금본위제라는 족쇄였다. 그리고 금본위제를 무너뜨린 것은 시장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정치적 협력의 붕괴였다.


금본위제는 왜 한때 잘 작동했는가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시기는 흔히 벨 에포크라고 불린다.
전쟁이 없고, 세계 경제가 긴밀하게 연결되며, 국제 교역이 활발했던 시기다.

이때 국제 통화 질서는 금본위제였고, 대체로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아이켄그린은 금본위제가 작동할 수 있었던 조건을 크게 네 가지로 본다.

첫째, 영국이라는 압도적 패권국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 경제의 최종 대부자 역할을 했다.
어떤 국가가 금융위기에 빠지면 영국이 금을 풀어 지원할 수 있었다.

영국이 충분한 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위기 때 시스템을 떠받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도 금본위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둘째, 정치 환경이 엘리트 중심이었다

금본위제를 유지하려면 때때로 임금 삭감, 실업 증가, 긴축 같은 고통스러운 조치가 필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정책을 밀어붙이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에는 보통선거권이 제한적이었고, 노동조합의 힘도 약했다.

중앙은행과 정치 엘리트들은 고용보다 환율 안정성을 우선하는 정책을 비교적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

셋째, 중앙은행 간 협력 네트워크가 있었다

금본위제는 개별 국가 혼자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한 나라가 어려워지면 다른 나라가 일시적으로 금을 빌려주고, 위기 때 서로를 지원하는 협력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주요국 중앙은행 사이에 이런 조율이 가능했다.

엘리트 중심의 정치 구조 덕분에 국내 여론의 반발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국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넷째, 금 유출입의 자동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금본위제에서는 각국의 통화량이 보유한 금의 양에 연동되어 있었다.
무역적자를 보는 나라는 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금이 줄어들면 통화량도 감소한다. 그러면 금리가 오르고, 물가와 임금이 내려간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조정이 발생한다.

첫째, 높은 금리를 찾아 외국 자본이 들어온다.
둘째, 물가와 임금이 내려가면서 수출 경쟁력이 회복된다.

반대로 무역흑자를 보는 국가는 금이 들어오고 통화량이 늘어난다. 금리는 내려가고, 물가와 임금은 오르며, 수출 경쟁력은 약해진다.

이론적으로는 이 메커니즘 덕분에 적자국과 흑자국이 다시 균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각국 중앙은행이 이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야 했다.

케인스는 이를 두고 ‘게임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모두가 같은 규칙을 따라야만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금본위제는 어떻게 족쇄가 되었는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네 가지 조건이 무너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금본위제를 지탱하던 조건들은 동시에 흔들렸다.

영국은 더 이상 압도적 패권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최대 채권국이자 금 보유국이 되었지만, 영국처럼 최종 대부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금을 축적하기만 하고 충분히 풀지 않았다.

동시에 대중민주주의가 부상했다.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의 힘이 강해지면서 중앙은행이 예전처럼 실업과 디플레이션을 시민들에게 강요하기 어려워졌다.

이 상태에서 1929년의 충격이 찾아왔다.
그리고 금본위제는 안정 장치가 아니라 위기를 증폭시키는 족쇄가 되었다.

첫 번째 충돌: 위기 대응과 금본위제의 요구가 정반대였다

경기 침체가 오면 일반적으로는 통화를 풀고 금리를 내려 수요를 떠받쳐야 한다.
하지만 금본위제에서는 자국의 금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통화 가치를 방어해야 했다.

어느 한 나라만 금리를 내리면 금은 더 높은 금리를 찾아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
따라서 위기를 해결하려면 여러 나라가 동시에 금리를 내리는 공동 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가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전쟁 배상금 문제로 갈등이 심했다. 조율 역할을 해야 할 영국의 패권도 약해져 있었다.

결국 각국은 공동 대응 대신 자국 통화 가치를 지키는 데 몰두했다.
침체가 왔는데도 금리를 올리고, 임금과 물가를 낮추는 내부 디플레이션을 시민들에게 강요했다.

이를 학자들은 ‘금본위제 멘탈리티’라고 부른다.
고정 환율을 지키기 위해 실물 경제의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다.

두 번째 충돌: 최종 대부자 기능과 금태환 신뢰가 충돌했다

위기가 오면 중앙은행은 금융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준이 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금본위제에서는 유동성을 공급하려면 금을 풀어야 했다.
금이 줄어들면 사람들은 “정부가 금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이 의심은 금태환 신뢰를 흔든다.

즉 중앙은행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금융 시스템을 구하려면 금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금을 풀면 금본위제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아이켄그린은 30년대의 정책 결정자들이 “바위와 단단한 곳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표현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금본위제를 지키면 시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시민들의 삶을 살리면 금본위제가 무너지는 구조였다.

금본위제 탈출은 지능순

흥미로운 점은 대공황 이후 금본위제를 먼저 폐기한 나라부터 회복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1931년 9월 금본위제에서 벗어났다.
미국은 루스벨트 집권 이후 1933년 금태환을 중단하고, 통화를 절하했으며, 금리를 낮추고 통화 공급을 확대했다.

반대로 프랑스처럼 금본위제를 오래 유지한 국가는 1936년까지 버티다가 더 오랜 디플레이션을 겪은 뒤에야 회복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금본위제 탈출은 회복의 출발점이었다.


오늘날의 달러 질서: 금 대신 달러에 묶인 세계

이제 시계를 현재로 옮겨보자.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 이후 약 80년 동안 미국 달러 중심의 통화 질서는 지속되어 왔다. 달러는 세계 결제, 차입, 준비의 기축통화가 되었고, 다른 통화들은 이를 보조하는 구조로 자리 잡았다.

1971년 닉슨이 금태환을 중단하기 전까지는 금이 기준이고 달러가 금에 연동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금태환이 끊긴 뒤에는 달러조차 금에 묶이지 않는 순수 법정화폐의 시대가 열렸다.

냉전 이후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자본, 무역, 정보는 달러를 매개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 구조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국제주의 전성기와 닮아 있지만 차이가 있다.

1930년대에는 금이 세계 통화 질서의 중심이었다.
오늘날에는 달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국가들이 금에 묶여 있었다면, 오늘날 국가들은 무엇에 묶여 있는가.

아이켄그린식으로 보면 답은 이렇다.

오늘날 국가들은 달러 유동성에 접근할 권리에 묶여 있다.


달러는 네트워크 통화다

달러는 단순한 한 국가의 통화가 아니다.
한국의 은행, 독일의 보험사, 일본의 연기금은 모두 일정 규모의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다.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팔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기 때 발생한다.
위기가 오면 모두가 한꺼번에 달러를 구하려 한다. 그러면 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려워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랬고, 2020년 3월 코로나 패닉 때도 그랬다.
이때 마지막 달러 공급자가 된 것은 미국 연준이었다.

연준은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달러를 공급했고, 이를 통해 글로벌 달러 경색을 막았다.
이 장치가 바로 연준의 달러 스왑 라인이다.

달러 스왑 라인의 위계 구조

달러 스왑 라인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지 않다.
그 안에는 위계가 있다.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일본은행, 캐나다 중앙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은 위기 때 무제한으로 달러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시 스왑 라인을 가지고 있다. 이를 ‘5인 클럽’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은행을 포함한 다른 중앙은행들은 이 5인 클럽 바깥에 있다. 이들에게는 FIMA Repo Facility라는 별도 창구가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 국채를 담보로 맡겨야 달러를 빌릴 수 있는 구조라, 상시 무제한 스왑 라인보다 조건이 까다롭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5인 클럽은 단순한 통화 협약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과 핵심 동맹국 사이의 정치경제적 합의다.

미국은 위기 때 달러 공급을 보장하고, 동맹국들은 미국 중심 질서에 협력한다.
따라서 이 시스템의 진짜 토대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적 신뢰다.


현재 달러 시스템을 떠받치는 네 가지 조건

1930년대 금본위제가 네 가지 조건 위에서 작동했듯이, 오늘날 달러 질서도 네 가지 조건 위에서 작동한다.

첫째, 미국이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을 한다

1930년대 영국이 금본위제의 중심에서 최종 대부자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 미국은 달러 질서의 중심에서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을 한다.

위기가 오면 연준이 달러를 풀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킨다.

둘째,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가 있다

시장에는 연준이 행정부나 유권자의 압박 때문에 갑자기 달러 공급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는 중앙은행 독립성과 연결된다.
전문성이 필요하고 장기적 안정성이 중요한 결정은 단기 정치 압력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08년과 2020년에 연준은 실제로 이 기능을 수행했다. 의회 승인이나 장기간의 정치적 토론 없이 신속하게 달러를 공급했고,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켰다.

셋째, 위계적인 달러 스왑 네트워크가 있다

5인 클럽을 중심으로 한 달러 스왑 네트워크는 1930년대 주요 중앙은행 협력 네트워크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이는 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떤 중앙은행은 상시 무제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중앙은행은 담보를 제공해야만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즉 달러 시스템은 평등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네트워크다.

넷째,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없다

시장은 여전히 달러 외에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위안화가 도전자로 언급되지만 외환보유액 비중은 매우 낮고, 유로화도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시장은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달러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사용이 다시 달러 중심 질서를 강화한다.

다만 이 조건은 1930년대 금의 자동 조정 메커니즘과 다르다.
금본위제의 조정 메커니즘은 이론상 양방향이었다. 적자국과 흑자국 모두 균형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였다.

반면 현재 달러 시스템은 더 단방향적이다.
한쪽은 계속 적자를 보고, 다른 한쪽은 계속 흑자를 보는 구조가 이어진다. 시장이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달러에 묶여 있을 뿐, 자기 회복적 균형 장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현재 질서는 안정적이라기보다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황금 족쇄: 달러 유동성 접근권

1930년대 금본위제의 족쇄가 금태환이었다면, 오늘날 달러 질서의 족쇄는 달러 유동성 접근권이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 누가 위기 때 달러에 접근할 수 있는가
  • 누가 연준의 달러 공급망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 누가 5인 클럽에 속하고, 누가 그 바깥에 있는가
  • 미국은 누구를 동맹으로 인정하고, 누구에게 달러 안전망을 제공할 것인가

이 질문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다.

따라서 아이켄그린의 명제는 여기서 다시 중요해진다.

국제 통화 질서는 정치적 협력 체제다.

달러 질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미국 금융시장의 깊이나 결제 인프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위기 때 미국이 달러를 공급할 것이고, 동맹국들이 그 질서를 신뢰할 것이라는 정치적 믿음 위에서 작동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위기 때 깨어나는 시스템

달러 기반 시스템은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평상시 연준 스왑 라인의 잔액은 매우 작다. 프레드 데이터 기준으로 현재 연준 스왑 라인 잔액은 약 2천만 달러 수준이다. 미국 GDP가 약 30조 달러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0에 가깝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준 스왑 라인의 피크 잔액은 약 5,800억 달러에 달했다. 평시 2천만 달러와 비교하면 거의 3만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당시 연준 총자산의 25%를 넘는 규모였다.

2020년 코로나 패닉 때도 비슷했다.
피크 잔액은 약 4,490억 달러였다.

이 시스템은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 위기 때 수천억 달러 규모로 깨어나 글로벌 금융시장을 받쳐준다.

2023년 크레딧스위스 위기

가장 최근 사례로는 2023년 3월 크레딧스위스 위기가 있다.
당시 시장 신뢰가 무너지며 고객들이 수백억 달러를 인출하기 시작했고, 경쟁 은행들도 빠르게 익스포저를 줄였다.

크레딧스위스발 금융위기 가능성이 제기되자, 연준은 스위스 국립은행에 수백억 달러를 공급했다. 이 자금이 크레딧스위스로 흘러가면서 고객들의 현금 수요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위기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지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즉 2008년, 2020년, 2023년의 결정적 순간마다 연준의 달러 공급 보험은 작동했다.


문제는 보험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달러 스왑 라인은 위기 때 세계 금융시장을 떠받치는 보험이다.
하지만 이 보험이 감당해야 하는 규모는 매우 크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2025년에 정리한 데이터에 따르면, 전 세계 FX 스왑 시장 규모는 약 113조 달러에 달한다. 그 안에서 비미국 은행권이 보이지 않게 안고 있는 달러 부채는 약 35조 달러다.

여기에 비미국 비은행권이 안고 있는 달러 부채 약 25~26조 달러를 더하면, 미국 바깥에 퍼져 있는 달러 부채는 60조 달러가 넘는다. 이는 미국 GDP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즉 문제가 터졌을 때 연준이 떠받쳐야 하는 글로벌 달러 시스템의 규모는 미국 경제 자체보다 훨씬 크다.

평소에는 2천만 달러 수준으로 조용히 운영되던 스왑 라인이, 위기 때는 수천억 달러 규모로 즉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스왑 라인이 정치적 이유로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우려가 처음으로 본격 제기되고 있다.

그 배경에 트럼프 2기 정부가 있다.


달러 패권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

문제는 이제부터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달러 질서는 네 가지 조건 위에서 작동한다.

미국의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신뢰, 위계적인 달러 스왑 네트워크, 그리고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없다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조건들은 지금도 여전히 견고한가.

지난 18개월 동안 벌어진 몇 가지 사건을 시간순으로 보면, 달러 패권이 당장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달러 질서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겉으로는 흩어진 뉴스처럼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하나로 묶어 보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달러 유동성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안전망이 아니라, 미국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협상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이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네 가지 사건을 순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스티브 미란의 청사진: 달러 유동성을 협상 자산으로 보기 시작하다

이 흐름의 출발점은 2024년 11월 발표된 하나의 문서다.

트럼프 2기 경제자문위원장이 될 스티브 미란은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편에 대한 사용자 가이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이후 트럼프 2기 경제정책의 청사진처럼 읽힌다.

미란이 제시한 핵심 구상은 다음과 같다.

관세, 안보 공약, 달러 유동성 공급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동맹국과 협상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안보 우산 아래에 남고 싶다면, 그리고 위기 때 달러 유동성을 공급받고 싶다면, 관세와 무역 조정, 미국의 전략적 요구에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치가 달러 스왑 라인이다.
미란은 달러 유동성이 스왑 라인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공급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곧 스왑 라인을 단순한 위기 대응 장치가 아니라 협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미란이 무작정 연준 스왑 라인을 무기화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연준의 독립성과 물가 안정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즉 미란의 구상은 시스템을 부수자는 쪽에 가깝지 않다.
오히려 미국이 이미 쥐고 있는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질서를 전략 자산으로 더 정교하게 활용하자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문제는 이 구상이 실제 행정부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변형되어 작동하느냐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흐름은 바로 그 변형의 과정일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건: 미란의 아이디어가 실전 테스트를 치르다

미란의 아이디어가 현실에서 처음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는 아르헨티나였다.

2025년 10월, 미국 재무부는 아르헨티나에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왑 라인을 제공했다.
다만 여기서 정확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은 연준의 스왑 라인이 아니었다.
미국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 즉 ESF에서 나온 라인이었다.

연준 스왑 라인은 주로 글로벌 금융위기나 달러 유동성 경색 같은 상황에서 위기 관리 장치로 작동한다. 반면 ESF는 재무부가 관리하는 자금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교적, 정치적 목적에 더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ESF는 과거에도 전략적 수단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1980년대 중남미 부채 위기 때도 미국은 이 자금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ESF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장치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중요했던 이유는 시점 때문이다.

미란이 달러의 협상 레버리지를 극대화하자는 제안을 한 직후, 미국 재무부가 실제로 달러 라인을 특정 국가의 정치적 상황과 결합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밀레이 정부는 페론파로 대표되는 야당의 도전을 막기 위해 페소 환율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 미국 재무부가 200억 달러를 제공했다.

좋게 말하면 미국이 우방국의 정치적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한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미국 행정부가 달러 라인을 통해 외국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보든 중요한 점은 하나다.

미국 재무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달러 라인을 제공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미란의 아이디어는 실전 테스트를 한 차례 치렀다.


워시 청문회: 연준 스왑 라인의 경계가 미세하게 이동하다

세 번째 사건은 2026년 4월 21일 열린 케빈 워시 연준 의장 후보의 청문회였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에게서 나왔다.

워런은 워시에게 물었다.
재무부가 특정 국가에 스왑 라인을 열라고 지시하면, 연준은 그 지시를 따라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었다.

워시가 연준 의장이 되었을 때, 달러 스왑 라인은 연준이 독립적으로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재무부와 행정부의 지시에 더 가까이 움직일 것인가.

워시는 여기에 명확히 “아니다”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워시의 답변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편으로 그는 통화정책 운용에서 연준의 독립성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금리 결정과 물가 안정이라는 영역에서는 정치권에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제 금융을 포함한 다른 영역에서는 연준이 통화정책과 같은 수준의 특별한 자율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영역에서는 행정부 및 의회와 협력하겠다고도 했다.

이 두 문장이 함께 가는 것이 핵심이다.

금리는 연준이 결정한다. 그러나 스왑 라인은 통화정책이 아니라 국제 금융의 영역이고, 따라서 행정부와 협력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선 긋기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

지금까지 연준은 연방준비제도법 제14조를 근거로 외국 중앙은행과의 스왑 라인을 사실상 독자적으로 운영해 왔다. 그런데 워시의 답변은 이 오랜 관행의 무게중심을 조금 옮겨 놓았다.

연준의 독립성은 지키되, 달러 스왑 라인과 국제 금융 영역에서는 재무부의 역할을 더 인정하는 방향이다.

청문회 전반에서 워시는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에서 달러 정책에 관한 공식 발언은 재무장관이 한다는 오랜 관행을 재확인했고, 국제 금융 관련 발언권을 재무부 쪽에 양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즉 미란의 페이퍼가 구상 단계였다면, 아르헨티나 사건은 실전 테스트였고, 워시 청문회는 제도적 경계가 움직일 수 있다는 신호였다.

이쯤 되면 달러 스왑 라인이 실제로 미국의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UAE와 위안화 카드: 달러 시스템의 절대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다

네 번째 사건은 같은 주에 벌어졌다.

2026년 4월 22일,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상원 청문회에서 걸프와 아시아의 여러 동맹국들이 달러 스왑 라인을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가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 총재가 워싱턴에서 베센트 장관과 연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통화 스왑 라인 가능성을 거론했다는 내용이었다.

더 의미심장한 부분은 그다음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측은 만약 달러 공급이 충분하지 않은 시나리오가 온다면, 석유 결제를 위해 위안화 같은 다른 통화로 옮기는 옵션도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UAE는 이미 중국과 위안화 결제 협력을 맺은 적이 있고, 중국은 UAE 원유의 주요 수입국 중 하나다. 사우디 역시 2023년부터 중국과 위안화 결제 협상을 이어 왔다.

따라서 UAE가 협상 테이블에 올린 위안화 카드는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옵션을 미국과의 협상 카드로 꺼낸 것이다.

물론 UAE가 당장 달러가 없어서 스왑 라인을 요청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UAE는 충분한 달러 자산과 외환을 보유한 국가다. 핵심은 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협상력이다.

UAE가 미국에 던진 메시지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중국이라는 대안도 있다. 그러니 미국은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이 점이 미국 입장에서 껄끄러운 부분이다.


베센트의 X 발언과 UAE의 OPEC 탈퇴

베센트 장관은 4월 24일 자신의 X 계정에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올렸다.

그는 영구적인 스왑 라인을 확장하는 것이 걸프와 아시아의 새로운 달러 펀딩 센터를 만드는 결정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달러 패권과 기축통화 지위는 대안적 결제 시스템의 성장을 견제하는 장기적 이니셔티브를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국가들은 달러 스왑 라인의 우선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중동과 아시아에서 달러 스왑 라인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달러를 우회하는 결제 시스템을 견제하겠다.

그리고 4일 뒤인 4월 28일, UAE는 OPEC과 OPEC+를 동시에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발효 시점은 5월 1일이었다.

물론 UAE의 OPEC 탈퇴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건은 아니다.
UAE와 사우디는 이미 수년 동안 산유량 쿼터, 예멘 정책, 홍해 안보 문제 등을 두고 갈등을 누적해 왔다. UAE는 자신의 실제 생산 능력보다 낮은 쿼터에 묶여 있다는 불만도 컸다.

하지만 OPEC 탈퇴에는 정치적 비용이 크다.
그럼에도 UAE가 이 결정을 내린 데에는 두 가지 변수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미국이 달러를 협상 자산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둘째,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흔들리면서 OPEC의 협상력 자체가 약해진 환경이다.

이 두 가지가 겹치면서 UAE는 사우디 중심의 진영에서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미국 쪽으로 더 가까이 이동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UAE는 위안화 카드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한 손에는 위안화 카드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미국과 더 가까운 협상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1931년의 도미노와 2026년의 신호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아이켄그린의 1930년대 분석과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하자, 주변 국가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이 환율을 절하하면 다른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국가들도 금본위제를 떠나는 선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붕괴의 첫 신호는 언제나 같다.

참여자들이 기존 시스템 바깥의 옵션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UAE의 위안화 카드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UAE가 당장 달러 시스템을 떠나겠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을 상대로 “달러를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카드를 직접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달러 시스템의 절대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조건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

이제 1부에서 정리한 현재 달러 질서의 네 가지 조건으로 돌아가 보자.

첫째, 미국의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을 해 왔다.
위기가 오면 연준은 달러를 공급했고, 동맹국들은 미국이 이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이 역할을 무조건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달러 공급은 더 이상 자동적인 보험이 아니라,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국가에게 더 우선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협상 카드가 되고 있다.

UAE가 “달러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위안화 결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러 사용 여부 자체가 협상 레버리지가 되고 있다.

둘째,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미란의 청사진, 아르헨티나 사건, 워시 청문회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달러 유동성 공급과 스왑 라인이 순수하게 연준의 기술적 판단으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재무부와 행정부의 전략적 판단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신호다.

과거에는 달러 스왑 라인에 관한 발언과 운영의 중심이 연준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재무부가 달러 유동성의 전략적 활용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연준의 금리 결정 독립성이 곧바로 무너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달러 스왑 라인과 국제 금융 영역에서는 정치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위계적 스왑 네트워크의 제도는 남아 있지만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5인 클럽은 여전히 존재한다.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일본은행, 캐나다 중앙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은 여전히 상시 스왑 라인을 가지고 있다.

제도 자체가 당장 해체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네트워크를 작동하게 만들던 신뢰의 토대는 흔들리고 있다.
유럽조차 미국이 미래에 달러 공급을 정치적으로 제한할 가능성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존재 여부만이 아니다.
위기 때 그 제도가 실제로 조건 없이 작동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넷째,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없다는 조건은 아직 공고하다

달러의 대안 부재는 여전히 강력한 조건이다.

IMF 외환보유액 통계를 보면 달러는 여전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위안화는 오랫동안 국제화를 추진했지만 아직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다. 유로화도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달러 시스템은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UAE가 위안화 결제를 협상 카드로 꺼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대체 통화가 아직 충분하지 않더라도, 동맹국들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안”을 언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러 패권의 붕괴라기보다는, 달러 패권의 절대성이 조금씩 협상 가능한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스왑 라인은 미국 자신을 위한 보험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연준의 달러 스왑 라인은 원래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한 자선 장치가 아니었다.
해외에서 발생한 달러 부족이 결국 미국 금융 시스템으로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화벽이었다.

즉 스왑 라인은 미국 자신을 위한 보험이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안정되어야 미국 금융시장도 안정된다.
달러가 글로벌 결제와 차입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세계 어딘가에서 달러 경색이 발생하면 그 충격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미국은 위기 때 달러를 공급해 왔다.
그것은 선의라기보다 자기 보호였다.

문제는 이 보험이 조건부로 바뀌는 순간이다.

보험이란 기본적으로 사고가 났을 때 보험금이 나온다는 믿음 위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사고가 난 뒤 보험사가 “당신은 평소에 우리 회사에 충분히 협조하지 않았으니 보험금 지급 여부를 다시 검토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험이 아니다.

그러면 가입자는 다른 보험을 찾기 시작한다.
보험사의 장기적인 사업 기반도 약해진다.

달러 스왑 라인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달러 유동성을 협상 카드로 쓰면 단기적으로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동맹국에게 더 많은 방위비, 투자, 무역 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달러 시스템의 토대인 정치적 신뢰를 갉아먹는다.

이것이 달러 무기화의 양날의 검이다.


동맹국들은 떠나지 않지만, 자기 보험을 만들기 시작한다

미국이 달러 공급을 조건부로 만들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동맹국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곳은 유럽이다.

트럼프의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미국 국채 시장이 급락하자, 유럽중앙은행 내부에서는 연준 스왑 라인이 정치적 이유로 차단될 수 있는 시나리오가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인터뷰성 발언이 아니었다.
ECB의 금융안정보고서에도 유럽 은행의 미 달러 활동과 관련한 분석이 들어갔다.

그 문장의 핵심은 이렇다.

극단적 시나리오에서 달러 유출이 발생할 경우, 유럽 은행들이 보유한 고유동성 자산을 레포, 외환 스왑, 매각 등을 통해 동원하더라도 달러가 부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상시라면 나오기 어려운 문장이다.
ECB가 위기 때 미국이 달러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점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 대형 유럽은행의 고위 임원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준의 달러 자금 조달 창구가 이용 불가능해질 확률을 0%로 봤지만, 최근에는 그 가능성을 5% 정도로 올렸다고 말했다.

5%라는 숫자는 작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통화 시스템 같은 거대한 인프라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0이었던 가능성이 0이 아닌 숫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시장은 바로 그 순간부터 가능성을 상상하고,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일본은행의 우에다 총재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금융 안전망에 대해 다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단일한 달러 스왑 라인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일본은 5인 클럽 안에 들어가 있는 국가다. 그럼에도 일본조차 자신들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시아에서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홍콩이 함께 운영해 온 지역 통화 협력 체제다.

유럽 일각에서는 유로존과 동맹국들이 외환보유액 일부를 모아 자체적인 달러 보험 펀드를 만들자는 구상도 거론되고 있다.

동맹국들이 당장 달러 시스템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단일 보험자만 믿지 않고, 여러 층의 자기 보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달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여기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달러 시스템의 절대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달러가 곧 무너진다는 뜻은 아니다.

IMF의 외환보유액 구성 데이터를 보면 달러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미국 달러는 약 57%, 유로화는 약 20%, 일본 엔화는 약 6%, 파운드화는 약 5% 수준이다. 캐나다 달러와 호주 달러는 각각 2%대이고, 위안화는 2%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수치가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은 20년 넘게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했지만, 위안화는 아직 달러의 대체재가 되지 못했다.
유로화조차 20%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달러 비중이 과거보다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하락을 모두 탈달러화로 해석하기도 어렵다.
IMF의 환율 효과 보정 분석에 따르면, 달러 비중 하락의 상당 부분은 실제 매도라기보다 환율 변동에 따른 상대적 비중 변화로 설명된다.

즉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대규모로 던지고 미국 국채를 팔아치운 결과라기보다는, 다른 통화 가치가 움직이면서 비중이 달라진 측면이 크다.

따라서 “달러가 곧 망한다”는 단순한 서사는 경계해야 한다.


달러가 여전히 강한 이유

달러가 여전히 강한 이유는 하나의 통화가 너무 많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는 적어도 여섯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1. 무역 결제의 기본 통화다.
  2. 국가 간 차입과 대출의 기준 통화다.
  3. 외환보유액의 중심 통화다.
  4.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담보 자산의 기준이 된다.
  5. 위기 때 유동성 공급 통화로 작동한다.
  6. 미국 중심 동맹 질서를 묶는 정치경제적 장치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통화가 이렇게 많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 사례는 드물다.
19세기 영국 파운드도 전성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 달러처럼 여섯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기능들을 떠받치는 인프라도 강력하다.

미국 국채 시장은 깊고 유동적이다.
수십 년 동안 달러 중심의 네트워크 효과가 축적되어 있다.
글로벌 부채 상당 부분이 달러로 표시되어 있다.
미국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한 법치와 개방적인 자본시장을 가지고 있다.

대체재들도 각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위안화는 중국 정부의 자본 통제 때문에 달러를 대체하기 어렵다.
유로화는 유럽 국가들 간 정치적 통합성이 부족하다.
금은 결제 통화로 쓰기 어렵다.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 자산은 아직 주류 결제와 준비자산으로 보기에는 신뢰와 안정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싶어도 쉽게 줄이지 못한다.
가능한 것은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통화와 자산으로 일부 분산하는 정도다.

하지만 유동성 위기가 터지면 결국 다시 달러가 우선시된다.


1930년대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지금의 흐름은 1930년대와 닮은 점이 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차이를 봐야 현재 상황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패권국이 시스템을 떠나는 속도가 다르다

1931년 영국은 금본위제를 떠나면서 사실상 패권국의 자리에서도 내려왔다.
파운드는 기축통화 지위에서 밀려났고, 영국이 주도하던 국제 질서도 빠르게 해체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달러 시스템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강하게 만들려고 한다.

베센트가 달러 패권을 강화하는 장기 이니셔티브를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패권국 자리에서 내려오려는 것이 아니라, 패권을 더 비싼 가격에 제공하려는 쪽에 가깝다.

둘째, 영국은 밀려났고 미국은 의도적으로 바꾸고 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떠난 것은 원해서가 아니었다.
시스템을 떠받치는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경제는 약해졌고, 노동조합과 대중민주주의는 강해졌다.
디플레이션을 시민들에게 계속 강요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금본위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반면 현재 미국은 다르다.

미국도 달러 시스템을 떠받치는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이를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비용을 분담할지를 바꾸려 하고 있다.

즉 영국은 시스템 밖으로 밀려났고, 미국은 시스템을 무기로 들고 있다.

셋째, 동맹국들은 떠나지 않지만 카드를 올려놓고 있다

UAE의 위안화 카드가 대표적이다.

UAE가 당장 달러 시스템을 떠나겠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신호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동맹국이 실제로 떠나지 않더라도 이런 카드가 자주 등장하면 시장은 달러의 무조건성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낮추게 된다.

미국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달러 질서는 일방적 안정 상태라기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서로 카드를 내밀며 조정하는 협상 질서에 가까워질 수 있다.

넷째, 금과 달러의 자정 메커니즘이 다르다

1930년대 금본위제는 자정 메커니즘이 무너지자 빠르게 붕괴했다.
각국은 도미노처럼 금본위제를 떠났고, 국제 질서는 각자도생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현재 달러 시스템은 조금 다르다.

미국도, 동맹국들도 기본적으로 달러 기반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만 미국은 달러 접근권을 협상 레버리지로 쓰려 하고, 동맹국들은 이에 맞서 대안 카드를 슬쩍 올려놓는다.

따라서 지금의 질서는 1930년대처럼 빠르게 붕괴하는 방향이라기보다, 안정과 불안정 사이에서 오랜 시간 진동하는 방향에 가까울 수 있다.

무너지는 것은 달러 시스템 자체라기보다, 달러 시스템의 절대성이다.
그리고 그 절대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협상과 변동성이 들어온다.


앞으로 매크로 뉴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앞으로 어떤 동맹국이 위안화 결제를 늘리겠다고 발표했다고 해서 곧바로 “달러를 떠나는 신호”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국가가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카드를 꺼내고 있는가.

반대로 미국이 특정 국가에 스왑 라인을 약속하거나 거절했다면, 그것도 단순한 금융 안정 조치로만 보면 안 된다.

그 안에는 미국이 해당 국가에 요구하는 안보, 무역, 투자, 제재 동참 조건이 함께 묶여 있을 수 있다.

과거에는 매크로를 읽을 때 경제지표, 금리, 물가, 연준 발언을 중심으로 보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통화정책과 국제 금융은 점점 더 지정학적 패권 경쟁의 문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연준의 금리 결정, 다른 중앙은행의 대응, 달러 스왑 라인, 관세 협상, 방위비 분담, 에너지 계약이 서로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패키지로 연결되고 있다.

이제 글로벌 매크로를 읽는다는 것은 경제지표만 보는 일이 아니다.
국가들이 서로 어떤 카드를 주고받는지 읽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통화지만, 너희의 문제다”에서 “우리 조건대로다”로

1971년 닉슨 쇼크 직후, 미국 재무장관 존 코널리는 이런 말을 했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너희의 문제다.”

달러는 미국의 통화지만, 그 충격과 부담은 세계가 함께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한 문장이 더 붙고 있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고, 너희의 문제이며, 이제는 우리 조건대로다.

우리는 바로 이 변화의 입구를 지나고 있다.


달러 이용료의 시대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다.
달러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비탄력적인 수요를 가진 자산에 가깝다.

대안이 없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도 계속 써야 한다.

조선시대에 갓을 만들기 위해 말총이 반드시 필요한데, 말총을 특정 상인이 독점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가격이 올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다.

달러도 비슷하다.

동맹국들은 달러 의존을 줄이고 싶지만, 당장 대체할 수 없다.
그러면 미국은 달러 시스템을 사용하는 비용을 올릴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용은 단순히 금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넓은 의미의 달러 질서 이용료다.

좋게 말하면 달러 패권 아래에 들어가기 위한 회비다.
나쁘게 말하면 달러를 쓰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이 생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는 보호비다.

이 이용료에는 여러 항목이 포함될 수 있다.

  1. 방위비 분담 증액
    한국, 일본, NATO 회원국들은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받을 수 있다.

  2. 미국산 에너지, 무기, 첨단 제품 구매다
    동맹국들은 미국산 LNG, 무기, 반도체 장비 등을 더 많이 사야 할 수 있다.

  3. 미국 내 투자 확대
    동맹국 기업들은 미국 본토에 공장을 짓고, 미국 기업과 기술 파트너십을 맺어야 할 수 있다.

  4. 대중국·대러시아 제재 동참
    미국이 정한 제재 리스트에 동맹국들이 동조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거래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할 수 있다.

  5. 무역수지 조정
    동맹국은 미국에 대한 무역흑자를 줄이거나 자국 시장을 미국 기업에 더 열어야 할 수 있다.

  6. 환율과 관세 협상
    수출 경쟁력을 위해 약세 통화를 유지하는 전략이 더 어려워질 수 있고, 미국이 원하는 관세 구조에 합의해야 할 수 있다.

  7. 미국 국채 보유와 금융시장 협력
    동맹국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은 미국 국채를 안정적으로 보유해 미국의 재정 운용을 뒷받침해야 할 수 있다.

  8. 달러 스왑 라인 접근 조건
    위기 때 달러를 공급받기 위해 안보, 투자, 무역, 제재 동참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베센트와 트럼프의 관세 협상은 단순한 관세 협상이 아니다.
관세, 안보, 투자, 통화 협력이 묶인 넓은 패키지 협상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여기서 두 가지 진실이 동시에 성립한다.

첫째, 달러를 대체할 통화는 없다.
둘째, 그래서 달러를 쓰는 비용은 오른다.

둘 다 불편하지만, 둘 다 현실에 가깝다.


자유무역에 이어 달러도 조건부 공공재가 되고 있다

더 큰 그림에서 보면,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글로벌 자유무역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공공재가 아니다.

트럼프 1기와 2기를 거치며 자유무역은 미국이 조건을 걸고 제공하는 조건부 공공재로 바뀌었다.

이제 비슷한 변화가 달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달러 유동성 공급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안정 장치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달러조차 조건부 공공재가 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여준다.

이 변화는 더 큰 지정학적 흐름의 일부다.

먼저 정치 영역에서 갈등이 커졌다.
미중 갈등, 자국 우선주의, 동맹 재편이 나타났다.

그다음 이 갈등은 실물 영역으로 번졌다.
관세, 반도체 수출 통제, 핵심 광물 공급망 재편이 그 사례다.

그리고 이제 그 흐름이 통화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

정치적 갈등이 실물 경제로 번지고, 실물 경제의 갈등이 다시 통화 질서로 번지는 것이다.
달러와 스왑 라인, 외환시장까지 국가 전략의 도구로 재정의되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의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은 달러 시스템 안에서 중요한 동맹국이지만, 가장 안쪽에 있는 국가는 아니다.
한국은 상시 무제한 달러 스왑 라인을 가진 5인 클럽에 들어가 있지 않다.

위기 때 한국은 FIMA 레포 같은 조건부 창구에 의존해야 한다.
한국의 외환보유고 상당 부분은 미국 국채로 구성되어 있고, 한미 통화 스왑은 상시 제도가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협상해야 하는 형태에 가깝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중요한 동맹국이지만, 유럽중앙은행이나 일본은행처럼 가장 깊숙한 스왑 네트워크 안에 있는 파트너는 아닐 수 있다.

이 말은 곧 한국이 달러 접근권을 위해 더 많은 카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카드는 이미 익숙하다.

방위비 분담, 미국산 무기와 에너지 구매, 미국 본토 투자, 대중국 제재 동참, 무역수지 조정,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 협력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앞으로는 위기 때 달러를 공급받기 위한 조건까지 더해질 수 있다.

1930년대 영국 주변의 작은 채무국들은 선택의 압박을 받았다.
일부는 영국을 따라 빠르게 금본위제에서 벗어났고, 일부는 끝까지 버티다가 더 긴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2026년의 한국도 비슷한 고민 앞에 서 있다.

미국 진영 안쪽에 더 단단히 들어가 더 많은 이용료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달러 의존을 줄이기 위해 자기 보험을 더 부지런히 쌓을 것인가.

현실적으로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하기 어렵다.
한국은 미국 동맹 안에 머물면서도, 동시에 외환 안전망을 다층화하고, 통화·에너지·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결론: 무너지는 것은 달러가 아니라 달러의 무조건성이다

1930년대 금본위제는 금이라는 금속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이라는 패권국, 중앙은행 간 협력, 엘리트 중심 정치, 금 유출입의 자동 조정 메커니즘이 함께 작동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이 무너지자 금본위제는 안정 장치가 아니라 족쇄가 되었다.

오늘날 달러 질서도 마찬가지다.

달러 시스템은 미국의 최종 달러 공급자 역할,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 위계적인 스왑 네트워크, 대체 통화의 부재 위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최근 18개월 동안 이 조건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달러 유동성을 협상 카드로 쓰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은 달러 의존을 줄이기 위한 자기 보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달러를 완전히 대체할 통화는 없다.

따라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달러 시스템의 즉각적인 붕괴라기보다, 달러 시스템의 성격 변화에 가깝다.

무너지는 것은 달러가 아니다. 무너지는 것은 달러의 무조건성이다.

앞으로의 달러 질서는 예전처럼 당연하고 자동적인 안전망이 아닐 수 있다.
더 많은 조건, 더 많은 협상, 더 많은 이용료가 붙는 체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환시장의 변동성은 커질 수 있다.

한국 투자자 입장에서도 이 변화는 중요하다.
미국 주식, 원자재, 금, 원유처럼 달러로 표시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면, 수익률은 자산 가격뿐 아니라 환율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달러 변동성이 커지면 미국 주식에서 수익을 내고도 환차손으로 이익이 줄어들 수 있다.
원자재 투자를 하더라도 환율 변동이 전체 성과를 크게 흔들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금리와 주가만 볼 것이 아니라, 외환시장과 달러 유동성, 국가 간 통화 협상까지 함께 봐야 한다.

정치에서 시작된 갈등은 실물 경제로 번졌고, 이제 통화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이 아이켄그린의 오래된 통찰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국제 통화 질서는 시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협력 체제다. 그리고 그 협력이 조건부로 바뀌는 순간, 세계는 새로운 족쇄를 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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