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최지웅·2024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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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국어 때문인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3개가 각각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시간흐름에 따라 서술된다는게 꽤나 재미있었고(숨겨진 비밀들을 파해쳐나가는 느낌이랄까). 몰입도가 굉장한 책이었던 것 같다.

  • 줄거리
    주인공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과 그 이후의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린 후 촬영하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둥의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의 시점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 읽게 된 동기
    이 책은 초등학교 때에 반 친구가 읽던 책이었는데 재밌냐고 물어보니까 재미있지는 않다고 하며 책의 내용을 보여주길 꺼려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몽고반점의 표현 때문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15년 정도가 지난 이제서야 알 것 같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이 기억이 나서 읽게 되었다.

  • 후기
    내가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학생 때에는 책을 읽었다 라는 성취감 때문에 많이 읽긴 했었지만) 워낙 오랜만에 읽는거라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영화 기생충처럼 어떤 표현을 하는데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깊이있고 몰입할 수 있게 글로 담겨있어 조용한 곳에서 집중하며 읽고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오랜만에 내용을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영혜는 결혼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영혜의 남편은 왜 영혜와 결혼을 했을까. 자기 자신은 꽤나 뛰어난 위치에 있지만 그저그런 평범하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영혜와 결혼을 한 이유.. 귀찮아서가 아닐까? 신경써야하는 게 많고 바쁘게 살아가고 자존감과 자존심이 센 편이라 자기에게 무조건 맞춰줄 수 있는 아내를 고른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 영혜는 왜 이런 사람과 결혼했을까? 애초에 살아가며 삶의 의지와 살아가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흘러가듯 살다가 결혼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왜 영혜는 점점 이상해졌을까. 의욕없던 일상과 포기한 삶에서 그 결과가 부정적일지라도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내면의 상처와 화를 뒤늦게나마 표출하고자하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욕망이 폭력과 피와 죽음, 삶에 해당하는 고기를 부정하여 채식주의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이 때 이 채식주의를 응원해줬으면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영혜가 성장했을 것 같지만 가족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억지로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려는 행위로 인해 영혜의 욕망이 더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몽고반점에서, 왜 영혜의 형부는 영혜와 비디오 촬영을 하게 된걸까? 형부가 왜 고요하고 은밀하고 매혹적이며 깊은 것을 원했을까를 생각해보자. 이년의 작업 공백으로 인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초조해져 자신이 그동안 작업했던 것과 달리 더 강렬한 것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때 문득 포스터를 보게되며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감정에 매료되어 작품에 담고자 한 것 같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드넓은 초원을 보며 아름답다 하기도 하고 누구는 빽빽한 도심을 보며 아름답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때 형부는 아름다움을 강렬하고 비밀스러운, 하지만 남들이 쉽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속에 내재된 깊숙한 것을 꺼냄으로써 자신의 답답한 상황과 마음을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영혜가 눈에 들어왔고 표현의 도구로서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혜의 관점에서 왜 촬영에 동의한 것일까? 채식주의자가 되었지만 가족의 반대로 오히려 폭력적인 상황이 펼쳐지며 더 강한 욕망이 생겼고 그 욕망이 채식주의를 넘어 자기 자신이 꽃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꽃이된다면 인간으로 살면서 힘들었던 기억과 감정을 덜어내고 새로운 기억과 감정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혜 입장에서는 폭력적인 가족보다는 자신을 꽃이 될 수 있게, 가치가 있는 생명으로 만들어주는 형부의 제안을 수락한 것 같다. 이 역시 폭력적인 가족과 환경과 고단한 삶 속에서 채식주의자로 조차 해소하지 못하는 자신의 화와 무기력함을 인간으로서 해소하려는게 아니라 나아가 자신이 식물이 되어서라고 해소하고 싶은 갈망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게되는 전환점이라 생각된다. 형부가 영혜의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이지만, 그 생각이 비록 인간성을 버리는 것일 수 있지만, 영혜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다면 이 촬영은 좋은 것이지 않을까? 여기서 재미있는 괴리감이 생긴다. 형부와 영혜 둘만 놓고보면 형부는 자신의 예술을, 영혜는 감정의 해소를 통해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이 일반적인 사회 관념과 반대되게 아내가 있으면서 아내의 동생과 나체영상을 촬영하고, 그로인해 영혜의 (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정신건강이 악화된다. 이 행위를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재미있는 괴리감을 대학교 1학년 때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을 때 느꼈는데 이 영화에서는 선택당한 가족이 아닌 선택한 가족을 위해 살아가기위해 법을 어기며 살아가다 결국 체포되는 내용을 담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어느 가족'영화에서도 그렇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렇고 비난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위법이라고 할지라도 위법을 해야만 자기자신의 행복과 삶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환경을 만든 원인이 법을 포함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잘 살아가며 행복한 하루를 살 수 있는 도구이지만, 누구는 사회의 시스템이 가족을 잃고 삶을 잃게하는 원인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서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잘못됨의 기준은 사회의 시스템이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영혜와 형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무불꽃에서 위에 말한 사회의 시스템의 이면과, 영혜의 삶의 초라함, 분노 등을 뒤늦게나마 언니가 깨닫게되면서 이를 부정하지만 결국엔 영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 같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아니란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영혜를 바라보며, 어쩌면 가장 가까이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한 언니는 결국엔 영혜를 이해하게 된다. 영혜가 채식주의를 하게되기까지 겪은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체 마음 속에서 커져만가는 감정을 언니도 느끼게되고 자기 자신도 영혜처럼 되었을 거다 생각하며 영혜에게 말을 건냈다. 살아가며 겪는 힘듬이 전부같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영혜도, 언니도 알고있다. 다만 살아가는 현재는 말 그대로 전부이기에 이 현재를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영혜의 몸부림이, 현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결국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안 언니는 영혜에게 언젠가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해서 순응하기도, 몸부림치기도 하는 현재에서 깨어나게 되면 순응도 몸부림도 아닐 그 때를 기다리자며 위로를 전한다.

  • 삶에 적용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사회의 시스템이 아닌 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너무 순응하지도, 너무 몸부림치지도 않으며 살아가야한다. 하고싶은 것을 못할수도 마음껏 할 수도 없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이 둘 다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혜처럼 힘들어하지도, 언니처럼 그냥 묻으며 살아가지도 않고 살아가며 힘들기도 하지만 그냥 묻어 넘기기도, 묻어 넘긴 마음이 문득 나를 괴롭힌다면 그로인해 힘들어하기도 하며 다양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선택은 자기 자신의 몫이기에, 나는 순응도 몸부림도 아닌 그냥 웃으며 살아가고 싶다. 내 웃음이 힘든 상황 속에서 극복을 위한 웃음일수도, 내 힘듬을 가리기 위한 웃음일수도 있겠지만 삶에서 즐거움을 찾고 힘들더라도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살게된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채식주의도, 작품촬영도 결국 내 행복을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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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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