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면서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이 책에 대한 그냥 내 감상을 시작으로 독서를 꾸준히 하기로 오늘 마음을 먹었다. 부디 이 마음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고 오랜만에 다 읽었다 하핳,,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기록용이다.
SF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있다.
학자 릴리 다우드나가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다가 돌연 사라지고, 인간배아를 완벽하게 디자인하는 바이오해커 '디엔'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아름답고 유능하며 질병이 없고 수명도 긴 신인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인간들만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어쩌면 만들고자 했던 릴리의 바람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배아 디자인으로 인해 완벽한 개조인과 그렇지 않은 비개조인 사이의 위계서열이 심해지는 디스토피아가 도래했다. 그래서 릴리는 결함이 있는 아이들로만 구성되어 차별과 배제가 없는 지구 밖 '마을'을 건설한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행복으로 가득한 유토피아가 되었을까?
마을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지구로 순례를 떠나는데 귀환하지 않는 순례자들이 매번 꽤 있다. 마을의 아이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고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없는 이유를 고민하며 지구로 떠나는 데이지에게는 물음표가 있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학창시절부터 나는 문득 아주 가끔 생각하곤 했다. 아주 사소하게 '시험이 없는 세상이 있었으면' 부터 시작해서 경쟁이 없는 세상, 아등바등 살지 않고 모두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세상, 범죄가 없는 세상, 질병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저런 세상이 훨씬 좋을것이라 생각했고 물론 지금도 나에게 두 세상(살고 있는 이 세계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매우 고민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나에게 약간의 생각거리르 던져주었다. 바로 아래 내용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란 신체적인 결함이 말끔하게 소거된 세상도, 그렇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을 격리해놓은 세상도 아닐지 모른다고. 오히려 장애와 더불어 차별을, 사랑과 더불어 배제를, 환벽함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붙잡고 고민하는 세상일지 모른다고.
우주 어딘가에 있을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는 연구원 할머니가 우주에 가게 되었고, 우주선 결함으로 어떤 행성에 추락해 외계 지성체를 만난 이야기를 40여년 만에 구조된 후 손자에게 이야기해주는 내용이다.
희진(할머니)은 '루이'를 만난다. 이곳 외계 지성체는 수명이 인간에 비해 매우 짧다. 최대 5년 정도?
희진을 처음으로 보살펴준 첫번째 '루이'부터 시작해서 이 행성에 있으면서 네번째 '루이'까지 만나게 된다. 이들은 죽음에 이른 다음에도 죽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으며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번째 '루이'까지 있었던 것이다.
모든 '루이'들은 약간은 다르지만 비슷했고 그림을 그렸고 희진을 잘 돌봐주었다. 마치 정말 영혼이 이어지는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림이었다. 그림은 그들에게 언어였다 색체언어.
색체를 통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는게 나에겐 감동이었다. 아니지, 색체언어가 감동이라기 보단 새로온 '루이'는 이전 '루이'가 기록해 놓은 색체를 통해 희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 그들에게는 희진이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낯선 생명체고 외계인이다. 특히 네번째 '루이'가 처음와서 그림을 다 본 후 희진을 보며 입가를 일그러뜨린게 상상이 되며 마음이 따뜻했다.
입가를 일그러뜨린건 인간의 미소를 따라한 것이다. 소설 내용으로 추측해보자면 이전 모든 루이들이 인간의 미소에 대한 생각과 분석을 적어 놓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펙트럼'의 마지막 부분을 첨부한다.
구조가 되어 지구로 돌아온 할머니는 한 뭉치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여생동안 색체 공부를 하며 기록들을 해석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기록 내용 중 이 한문장, 이걸 읽는데 눈물이 났다.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최근에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잠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괜히 나한테 해주는 말 같아서 눈물이 난 것 같다.
사실 오늘 비도와서 더 센치해졌는지도 모른다 🙄
지금까지의 나를 본 결과 약간 센치해지는 시기에 책을 읽고 싶어한다ㅋㅋㅋ 최근 우울함이 이거 하나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듯...ㅎ..ㅎ
류드밀라 마르코프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그곳'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렸다. '그곳'에 대한 그림은 지구의 어느 장소와도 닮지 않았고 세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향수의 눈물을 흘렸다.
류드밀라가 세상을 떠난 뒤 한 행성이 발견되었는데, 망원경이 측정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가시광선으로 변환하자 그 데이터가 류드밀라가 그림으로 그렸던 행성과 맞았다. 모든 관측 데이터가 류드밀라가 말한 행성에 특성과 딱 맞았다. 그리고 또 충격적 사실은 이 행성은 오래전 모항성의 거대 플레어 폭발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한 연구소에서는 뇌해석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아기들의 울음소리로 생각을 해석하는데 결과가 이상했다.
" 어떻게 하면 더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
심오하고 철학적인 아기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류드밀라 행성'에서 온, 눈에 보이지는 않는 이 인격들(그들)은 사람이 7세가 되기 전까지 뇌에서 머무르며 인간에게 '인간성'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어떤 차단으로 인해 '그들'이 머무르지 않는 애기는 단순히 '배고파', '졸려' 같은 생각만 한다.
미지의 어떤 '그들'은 우리의 어린시절 뇌에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감정과 마음, 사랑, 이타심에 관해 토론하고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사실 현실에서도 인간이 인간에게서만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는 건 아닌 것 같다. 소설 속 '알 수 없는 지성체'는 아니지만 우리는 자연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신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받는다. 어쩌면 인간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닐수도.
소설에서 '인간성'을 인간이 아닌 지성 생명체와의 소통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읽으며, '인간성'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어쩌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사람이 나이가 적든 많든 점점 악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상이 절대 절대 절대로! 오면 안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악해진다면 '인간성'의 의미는 지금과 달라질 것이다. 행복, 슬픔, 분노, 타인에 대한 공감, 나와 타인을 모두 소중히 하는 마음 등 지금 '인간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되는 이런 단어들이 계속 '인간성'의 속성이 되려면 이 세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남아 딥프리징(익숙하게 생각하자면 냉동기술?)로 생명을 연장하며 먼저 남편과 아이가 떠난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가고자 혼자 우주선을 기다리는 노인 안나.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유유히 정거장을 떠났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소설이지만 큰 감훙과 생각이 없었다. 책 뒤 문학평론가의 해설글을 보고서도 별 생각이 없었다. 심오한 내용인걸까 아니면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의미를 전달하려 한걸까?
시간이 지난 나중 어느날 다시 읽으면 그땐 느낌이 다를까.
잡지 기자인 정하는 어느 날 행복, 침착, 공포, 우울과 같은 감정을 조형화한 제품인 '감정의 물성'이 인기를 끄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유사과학 상품을 팔아먹는 사람들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공포, 우울 같은 감정의 물성도 사는걸까 의문을 갖는다.
자신의 연인이 우울체 제품들에 빠져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마지막엔 언쟁 뒤 연인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 공간을 느끼려 해본다. 빈자리의 남은 감각, 연인의 향수, 현관의 차가운 질감.
나에겐 가장 어려운 소설이었다. 나도 주인공과 똑같이 생각한다. 행복과 침착과 같은 감정은 좋으니 그렇다하는데 공포, 분노, 우울은 왜 사는걸까.
내가 캐치한 바로는 책에서 두 사람의 답변이 있었다. 한 명은 직장 동료, 한 명은 이 물건을 파는 대표.
직장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샐링 포인트거든요."
이건 난 이해되지 않았다. 행복체 제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을 가진건 아니니까.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합리화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대표는 이렇게 말했고, 이 후 정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언뜻 옳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무언가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소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감정 그 자체였던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대표의 말을 보고 '아!' 했다가 다시 정하의 생각을 보고 '아,' 했다.
나도 가끔은 울고 싶어서 슬픈 영화를 보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며 분노가 치미는데도 계속 보기 때문에 대표의 말이 정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하의 생각도. 분노가 끓는 드라마를 보면서 단순히 분노의 감정만이 아니라 그 속 메세지를 깨닫는다. 근데 감정의 물성은 단지 그 감정 자체만이니까.
누군가는 「감정의 물성」이 이 책에서 가장 귀여운 소설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어렵고 심오한 소설이다.
책 뒤 '작가의 말'에 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말 중 일부다.
나는 사람이 물질에 기반을 둔 존재라는 것에 항상 흥미를 느꼈다.
··· (생략) ···
사람들이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그것으로부터 정서적 욕구를 충족한다면, 어쩌면 감정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서 시작된 글이 「감정의 물성」이다. 나중에는 이 주제로 긴 글도 써보려고 한다.
긴 글을 꼭 써주셨으면 좋겠다.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이 나온다. 마인드와 접속하면 망자의 영혼과 조우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망자를 추모하거나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지민은 3년 전에 엄마의 영혼이 담긴 마인드의 인덱스가 도서관 내에서 분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사이가 좋은 가족이 아니었기에 엄마의 흔적을 찾으며 처음으로 엄마이기 이전에 이름 석자를 가진 사람으로 엄마를 생각해본다. 본인도 임신을 하게 되지만 아기에 대한 사랑과 엄마가 된다는 감격이 솟구치지 않으며 이전보다는 조금 엄마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인드를 찾아낸 후 한 마디 말을 했다. "엄마를 이해해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은 그간 역사 속에 잊혀왔던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혼모를 비롯한 소수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문학평론가는 '관내 분실'에 대해 '이제 엄마를 이해한다고 용기 내어 건넨 이말은, 불화를 겪었던 엄마에게 보내는 화해의 메시지를 넘어 세상과 단절된 여성들을 세상과 연결된 끈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내 시선은 아직 그리 넓지 못해서 나와 내 주변까지 밖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소수자에 대한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서 저렇게 거창한 해석보다는 나와 내 주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우리 엄마를 '엄마'말고 엄마 이름 석자를 가진 사람 자체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아빠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 가족은 굉장히 화목한 편이라 소설 주인공보다는 엄마, 아빠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겠지만 그래도 자신할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아닌 ○○○, △△△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지를. 나도 나중에 엄마가 되었을 때 누구누구엄마로만 살고 싶진 않다. 나로서의 삶도 매우 중요하다. 엄마와 아빠도 그럴것이고 그래서 가까울수록 오히려 무심할 수 있는 가족에 대해 나는 얼만큼 알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책이든 영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라도 가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이에 대해서는 책 뒤 인아영 문학평론가가 작성한 해설
을 그대로 쓰겠다.
정상성을 묻는 사이보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도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출산을 겪은 48세의 동양인 비혼모로서 우주비행사에 선발된 최재경은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찢고 나간 주체적인 인물이다. 만성 전정기관이상이라는 부적격 건강상태를 가진 데다가 항공우주국 본부 출신의 백인 남성들과 함께 선발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재경은 소수자의 성공서사 모델로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우주 너머보다는 인간 몸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관심 있는 재경은 18개월의 신체개조 장기프로젝트로 다져진 사이보그의 몸으로 우주 대신 깊은 바다로 홀연히 떠난다. 이기전인 이유로 우주비행사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사라졌다는 세간의 비판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더해져 부풀려진다. 하지만 이모 재경을 동경하여 우주비행사가 된 가윤은 사라진 재경의 자리를 몸소 체험해보면서, 성공서사라는 미명 아래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기대를 자유롭게 벗어던진 재경의 선택에서 어떤 해방을 본다. 시스템의 요구나 세간의 기대에 함몰되지 않고 신체의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데 집중한 중년의 비혼모 우주비행사의 선택은 사랫세대인 여성 우주비행사 가윤에게로 이어진다. 가윤 역시 소수자를 대표하면서도 별다른 압박감 없이 우주비행사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경이 온갖 편견과 기대를 헤쳐내고 만들어놓은 길 덕분이기 때문이다. 비혼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인연으로 형성된 대안가족안에서 이러한 세대감각이 이어진다는 점 또한 중년의 동양인 비혼모 우주비행사가 받아야 하는 차별적 시선과 더불어 무엇이 '정상적'인지 묻게 한다.
학창시절 숙제가 아닌 책을 읽고 나의 생각을 작성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독서를 즐기지도, 글을 쓰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기에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그대로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솜씨가 안된다ㅠㅠ 줄거리도 잘 정리해서 쓰는게 생각보다 힘들다.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다보니 확실히 문학평론가는 평론가다. 진짜 정리를 잘하셨다,,,
글을 쓰려다 보니 다시 책의 내용을 생각하게 되고 내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게 좋은 것 같다. 앞으로 꾸준히 책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다보면 늘겠지!?? 🙌
그리고 예전엔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말' 이런거 건너뛰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을 읽는게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혹은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독후감이라 하기엔 너무 형식적인 느낌이니까, 이렇게 나의 첫 '책 기록'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