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을 마무리하며

Joonseung Jang·2023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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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월이 지나가고 있다.
하반기도 벌써 절반 이상이 지나가고 있으며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드는 생각들과 있었던 일들을 한번씩 쭉 적어보려 한다.
나중에 돌아오면 이런 시기도 있었지 하며 지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는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부조리란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
정확히 하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거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의미하는 공 사상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사실 원래부터 이 사상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지는 꽤 되었다.
우리는 추상화 능력, 즉 지능을 가진 인간이기에 세상을 패턴으로
인식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패턴이 어디에서부터 온다고 할 수 있을까?

자연법칙, 공리, 입자/에너지 혹은 존재

그것들이 갖는 실체란 결국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실체란 없다.

우선적으로 나는 위의 사상을 모든 추상의 출발점으로 둔다.
그러니까, 뭐가 되었든 간에 언제든 전제조건은 틀릴 수 있으며
근본조건과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나, 세상은 하나의 구조와도 같아서
사람들이 근간으로 믿는 법칙이 존재한다. 상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체제라고 하기도 하고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정해진 것이 없는데 그것을 믿는다니?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인 것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모두가 믿으면 정말 그것은 사실이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튼 간에, 이번 하반기에는 무엇인가 저 지점에서 다른 맥락으로
변화가 오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세상에 실체가 없다는 것은, 있고 없음에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알 수 없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즉, 무색무취이며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것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할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심정으로 거진 1달 정도를 보낸 것 같다.
되돌아보면 뭔가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게 되고 이런 문구를 보게 되었다.

그러면 살아야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물론 없었다. 나는 논리적인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없으며 죽어야 하는 이유도 없다.
주어졌다고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의무도 없고 지속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저것은 추상이 아닌 것을 추상의 세계에서, 주관의 세계에서
들추려고 하니 앞뒤가 안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인생에서의 downturn(조정) / 안티프래질 / 팝콘 사회

1. 인생에서의 downturn(조정)

누구든 인생에서 흥망성쇠란 주어지기 마련이다.
역사를 보면 한 국가나 인류 단위에서도 성장과 위축을 반복하듯이,
그 구성요소인 한 개인도 마찬가지로 상승기와 조정기가 반복된다.

위의 사념을 동반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 문득
그러한 깨달음이 오게 된 것이었다.

현재 나는 조정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삶은 장기적으로 보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것이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어떤 요소를 보아서든 말이다.

허나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년 단위의 스케일로 되돌아보았을 때,
최소 5년에 한번쯤은 큰 폭의 하락기가 주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 바닥을 찍고 다시 떠오르던 와중에,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언제든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잃을 수 있다는 것과
이 세상에 무엇이든지 대가가 있다는 것

우선적으로, 이번 2023년에는 여러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고,
그 중에서도 투자방식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2020년도 이후, 코로나 이후에 주식, 코인시장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 그림의 윗부분이 당시 나의 심리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당시 가장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았다.
(그때는 금리가 매우 낮았다)

돈이 풀리게 되면서 현금가치가 떨어지니까
시장을 떠나있지 말아야겠구나

그리고 이왕이면 변동폭이 더욱 큰 쪽으로 가야겠구나
(시드가 적으면 더욱 저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코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코인 종목 중 하나를 뽑아 풀시드를 투입하게 된다.
수익권일 때도 있었고 탈출 기회도 있었지만 오를거라는 맹목적인 신념으로
인해서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그 이후로 우하향 하락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이것이 잘못된 방식임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23년 초에 들어서서 나는 완벽히 잘못된 방식임을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진짜로 인정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2023년 하반기부터 기법을 공부하고 조금씩 적용하고 있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쉽게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잘 하다가도
뇌동매매로 미끄러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개인투자자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를 하는가?> 라는
논문을 읽게 된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매매방에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여
개인 전업투자자가 어떤 심리로 투자를 하며,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 투자를 선택하는 지에 대해 정리해놓은 논문이었다.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것은 위 사진으로 충분하다.
다만 실제 내용은 꽤나 인간적이고, 희망고문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 또한 당연하게도 확증 편향에 빠져 있었으며,
손실이 나오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심리상 손절을 할 수 없었으며
물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개인은 이러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기 장에 물린 개미들이라면 말이다.
-5%, -10%에 칼같이 기계적으로 손절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0% 수익을 내려는 인간의 욕심보다.
5%의 손실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손실회피 심리가 더욱 강하다.

-10% 이상 손실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장기투자의 관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수치이며,

-50% 이상 하락추세 장에서 손실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투자 혹은 매매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관련 내용은 찾아보면 많이 나오게 된다.
상반기부터 시작해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고치는 데에
많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냥 다 부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집안사정과, 변하는 인간관계, 그리고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주어지게 되었다.

일상에 대한 피로나 스트레스가 이전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또한 예전에는 그것에 맞서 이겨내려 하였으나
이와 같이 피할 수 없고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번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스트레스 상황이 다가오면 두 가지 대처를 한다는데,
하나가 테스토스테론이 터지면서 싸우기를 선택한다는 것이고,
남은 하나가 도망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을 본 것 같다.

나는 점점 쌓이는 피로감에 부딪히기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고통의 시기에 삶의 이유에 대한 질문과,
만약 이 세상의 사건들을, 리스크와 보상으로 쪼개었을 때
과연 이 세상은 리스크에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는가에 대한 주제가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아래와 같은 책을 읽게 되었다.

2. 안티프래질

처음에는 그냥 책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고르게 되었다.
약간 사피엔스 재질의 교양서적을 읽은 지 꽤 되었는데 나름 비슷하지 않을까 하여 지나가면서 골라보았다.

리스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기에 괜찮은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매매 경험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찌 보면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읽으면서 들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비유를 해서 프래질한 시스템과
프래질하지 않은 시스템을 정리 해 두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프래질한 시스템은 충격에 쉽게 부서지고
( 충격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
안티프래질한 시스템은 충격으로 인해서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고속도로는 프래질한 시스템이다.
100명이 이용하면 1시간이 걸리는 도로상황이라고 할 때,
1000명이 이용하면 1시간 30분,
10000명이 이용하면 10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충격의 강도가 증가할 때 그 데미지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는 시스템은
프래질한 시스템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손해를 보면 누군가는 그 사이에서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은 안티프래질하다.
병으로 아프게 되면(충격이 발생하면) 그 충격을 발판삼아
내성이 생기게 되고 이전보다 면역력이 강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kg 짜리 아령으로 10세트 운동을 하면 효과가 낮을 것이다.
10kg 짜리 아령을 들고 10세트 운동을 하면 근육이 성장할지도 모른다.
20kg 짜리 아령을 들고 10세트 운동을 하면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100kg짜리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식의내용이 초반부에 있었고 뒷부분은 그것을 수학적으로 적용하고 주식의 손절에도 비유를 하여

한정된 손실로 무한대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손익비의 개념도 적혀 있어서
나름 재밌게 읽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반문할 수 있다.

굳이 고통을 겪어가며 강해져야 하는가?
오늘의 핵심이 삶의 이유와 부조리에 있으니
우리는 강해져야만 한다는 그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여야 한다.

이대로면 삶은 그저 고통만 계속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쟁 사회와 특히 한국이 빠르게 겪고 있는 수축 사회,
여러 리스크와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을 지켜보자면

고통을 겪어 강해지자는 그 주장에 괜시리 힘이 빠지기도 한다.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해서 보상이 개런티 되는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최소한 나빠지지는 않을 수 있다.

그냥 강해지지 않는 대신에 고통을 겪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
굳이 사회를 위하거나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나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되는 것 아닌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역시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내린 결론은, 내가 욕심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다시 다뤄 볼 것이다.

3. 팝콘 사회

마지막 학기인 만큼 가용시간도 늘어나고
자유는 많은 동시에 책임은 적은, 어떻게 보면 황금기가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둘러보면 위와 같이 요약이 가능할 듯 하다.

팝콘 브레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숏폼 컨텐츠를 포함해서
스마트폰에서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컨텐츠가 많아지다보니,
그것들을 몇십분이고 몇시간이고 보다 보면 작은 자극에는
쉽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에다가 무언가 우리의 의식 기저에 아래와 같은 전제가
깔린 듯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런 리스크 없이, 확실하게 이익을 보고 싶다

저러한 생각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무엇인가 선택지를 고를 때, 나를 포함하여 주변에서
새로운 도전은 피하게 된다.

100% 확률로 10의 보상을,
10% 확률로 200의 보상을,
1% 확률로 5000의 보상을 제공하는 선택지에서,
우리는 가감없이 전자를 택해 버린다.

애초에 팝콘 브레인이 왜 탄생하는 것인가?
지금 당장에 짧고 강렬한 자극을 얻고 싶으면, 그저 아주 작은 시간단위인
30초정도를 대가로 하여 보상을 먹어치우면 된다.

전체를 둔 문제는 나 몰라라 한다.
그것이 출산율을 포함한 사회적인 문제건, 공동체의 선의 문제건,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단기적이고 확실한 것부터 손을 뻗는다.

그곳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을 지켜보다 문득 <팝콘 사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가능성을 얻기에 어려운 사회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사회 근간에 놓인 성장 가능성이라는 발판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인 기댓값을 높이기보다는,
그저 지금 당장 나아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4. 그리고 마지막으로


https://brunch.co.kr/@bwbwpark/6

허준이 교수의 축사를 읽게 된다.

이 글을 읽게 되니 답답했던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견뎌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이 사람은, 적어도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것과,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이, 그저 가진 패들이 정렬되어 족보를 맞추었을 수
있을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한 듯 했다.

그래서 축사를 매듭짓지 못한 부분도 더욱 와닿았다.
입에 발린 말이었다면 그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간 내가 해온 고민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위에서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폭력에 대해서 내가 대응한 것은,
그저 철학과 사상이라는 고통을 잊기 위해 허무의 달콤함을 맛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상이라는 것은 매력적인 것이라, 그것이 열매나 씨앗이 되어 한 사람의
단단한 토대를 형성하면 좋겠지만, 그 향에 취해 갈피를 잡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허무주의의 향 밑에서 배회하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내가 하던 행동이 무슨 행동인지 느껴지게 되었다.

그저, 벽 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신선놀음을 하는 것과도 같다.

결론

사실 적어서 외부 공간에 써내지 않으려 했다.

개발 블로그이기도 하고 그리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허나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순간을 남겨야겠다고 느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다.
좋은 일들은 간혹가다 한번씩 일어나고 지루하고 힘든 일들이 많다.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상이 개런티되지 않음에도 우리는 왜 시도하고 도전해야 하는가.

죽음을 떠올렸다.

무어가 되었든 보상을 받음을 떠올렸다.

이룸과 이루지 않음에 괴로운 적이 많다.

허나 그 틈새에는 자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잘 돼야 한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우리의 자유를 앗아간다.

그러나,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도리어 우리에게
순간을 살아갈 자유를 준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 놓인 시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지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나는 공부에 매진해서 부딪히는 것과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결국 전자를 선택했고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다시 되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 같다.

고통을 받더라도 후회되지 않는 옳은 선택을 하여야 한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아주 작은 확률에 틈이 열려 있더라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면 그곳에 몸을 던져야 한다.

다시 되돌아와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보니 <시지프 신화>가 내 나름대로 보이게 되었다.

비탈길에 돌을 밀어 올려야 한다. 쓰러지면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그러나 후회 없이 지나는 순간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며 밀어 올리면 된다.

하고 싶은 말은 더욱 많지만 이만 줄이겠다.
다음 글은 백준 알고리즘 문제풀이나 올릴 예정이다.
다시금 일어서서, 돌을 밀어 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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