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1부 5화

이경규·2026년 6월 2일

전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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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조건

5화 세종 코어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현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모를 뿐이다.
입력된 것을 계산하고, 학습한 것을 따라가며,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대답한다.

인간은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비튼다.
AI는 의도 없이 틀린 답을 그럴듯하게 내놓는다.

그래서 더 위험할 때가 있다.

거짓말하는 인간은 언젠가 눈을 피한다.
틀린 AI는 끝까지 정중하다.

하현민이 처음 그 사실을 몸으로 배운 것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이었다.

그때 그는 아직 정치인이 아니었다.
양복보다 후드티가 더 편했고, 국회보다 서버실이 더 익숙했으며, 기자들의 질문보다 밤새 돌아가는 학습 로그를 더 자주 들여다보던 사람이었다.

그의 회사는 한국어 기반 대규모 언어모델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영어 모델을 따라가던 시절이었다. 한국어는 데이터가 부족하고, 시장이 작고, 수익성이 낮다고 했다. 투자자들은 물었다. 왜 굳이 한국어냐고. 글로벌로 가려면 영어부터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현민은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

언어는 시장이 아니라 주권이라고.

그 말은 투자 설명회에서는 별로 좋은 문장이 아니었다. 숫자가 없었고, 매출 예측도 없었으며, 투자자들의 눈을 반짝이게 할 만한 단기 성장 그래프도 없었다. 그러나 하현민은 그 말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언어를 단순한 인터페이스로 보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이 자기 언어로 위험을 설명할 수 있을 때만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나중에 국방으로 옮겨갔다.

처음에는 재난이었다.

산불 확산을 예측하는 모델.
홍수 위험지역을 빠르게 표시하는 모델.
지진 이후 구조 우선순위를 제안하는 모델.
응급실 병상과 구급차 동선을 동시에 계산하는 모델.

하현민이 만든 기술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국방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사일을 말하지 않았다.
전투기도 말하지 않았다.
표적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위성사진을 말했다.
북한의 산악지형을 말했다.
이동식 발사대와 민간 트럭을 구분하는 어려움을 말했다.
수많은 센서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 사람이 모든 것을 제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현민은 그 말을 이해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보가 너무 많아서 실패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너무 밝은 화면 앞에서도 길을 잃는다. 전장의 문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한 장성이 말했다.

“AI가 사람보다 빨리 볼 수 있습니까?”

하현민은 대답했다.

“볼 수는 있습니다.”

장성이 물었다.

“그럼 사람보다 빨리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현민은 그때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때문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조금 굳었다. 장성은 기술기업 대표가 자기 제품을 홍보하러 온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현민은 제품을 팔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그는 말했다.

“계산은 사람보다 빨리 할 수 있습니다. 판단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계산은 답을 냅니다.”

하현민은 천천히 말했다.

“판단은 책임을 집니다.”

그날 회의는 길어졌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문장은 세종 코어의 첫 번째 원칙이 되었다.


세종 벙커의 중앙상황실은 새벽과 아침을 지나 다시 낮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세종시의 도로 위로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부청사 주변 식당들은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고, 공무원들은 커피를 들고 복도를 오갔다. 지상의 세상은 평범한 월요일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보고서를 출력했고, 누군가는 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뛰었고, 누군가는 구내식당 메뉴를 보고 실망했다.

그러나 지하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세종 벙커 안에서 하루는 시계가 아니라 사건으로 나뉘었다.

서해 11분에서 시작된 사건은 워싱턴의 보고서와 베이징의 축하 전문을 지나, 다시 세종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부 작성자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화면 한가운데에는 세종 코어의 분석창이 떠 있었다.

SEJONG CORE / INTEGRATED ASSESSMENT MODE
(세종 코어 / 통합 평가 모드)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사건 축이 연결되어 있었다.

해상 데이터 이상.
외부 보고서 확산.
여론 프레임 증폭.
COND-4 식별 문자열.
미국 비공개 모임.
중국 축하 전문.
국내 계정군 중첩.

각각 따로 보면 하나의 사건이었다.
함께 보면 구조였다.

하현민 대통령은 화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백승조 합참의장이 서 있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앉으면 몸이 회의의 일부가 된다. 서 있으면 아직 판단의 밖에 머물 수 있다. 대통령에게도 그런 작은 거리가 필요했다.

사이버작전사령부 파견 소령, 이름은 유서진이었다.

그녀는 이번 사건 이후로 거의 쉬지 못했다. 처음에는 직함만 불렸지만, 이제 하현민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위기 때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했다. 조직은 직책으로 움직이지만, 책임은 결국 사람에게 남는다.

유서진 소령이 말했다.

“대통령님, 세종 코어가 전체 사건 상관관계 평가를 업데이트했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띄우세요.”

화면이 바뀌었다.

서해 11분 관련 통합 상관평가
1. 단일 북한 기만작전 가능성: 낮음~중간
2. 미국 민간·정책 네트워크 연계 가능성: 중간 이상
3. 중국 정보·여론 프레임 개입 가능성: 중간 이상
4. 국내 중개자 또는 내부 접근자 존재 가능성: 평가 보류
5. 다중 행위자 동시 이용 가능성: 높음

오세규 국방부 장관이 화면을 보며 낮게 말했다.

“다중 행위자 동시 이용.”

그는 손에 든 펜을 만지작거렸다.

“말은 고상한데, 쉽게 말하면 다들 이 판에 숟가락 얹고 있다는 거군요.”

백승조 합참의장이 받았다.

“숟가락이라기엔 칼도 좀 섞인 것 같습니다.”

윤태석 국가안보실장은 두 사람의 농담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줄을 보고 있었다.

국내 중개자 또는 내부 접근자 존재 가능성: 평가 보류.

그 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워싱턴도, 베이징도, 서해도 결국 그 한 줄로 모이고 있었다.

하현민은 유서진에게 물었다.

“평가 보류 사유는요.”

유서진은 준비한 자료를 넘겼다.

“현재까지 외부 프레임 개입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다만 COND-4와 관련된 정보가 실제 내부 작성 문서에서 나온 것인지, 외부가 내부 문서처럼 보이게 구성한 것인지 구분이 어렵습니다.”

“세종 코어가 보기엔 어느 쪽입니까?”

“세종 코어는 아직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유서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두 방향 모두 설명력이 있습니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가설 A: 실제 내부 접근자 존재

  • COND-4 식별 문자열이 전작권 조건 구조를 정확히 반영
  • 워싱턴 보고서 문장에 한국군·연합작전 언어 반영
  •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구조를 이해한 흔적
  • 국내 여론 확산 계정군과 일부 민간 방산 네트워크 접점 가능성

가설 B: 내부 접근자 존재처럼 보이게 만든 외부 기만

  • COND-4 노출 방식이 지나치게 의도적
  • 카드와 문장들이 모두 상징성을 과도하게 포함
  • 미국·중국 양측 모두 한국 내부 불신을 유도할 동기 존재
  • 내부 수사를 촉발해 전작권 전환 검증 일정 자체를 흔들 가능성

하현민은 두 가설을 오래 보았다.

둘 다 그럴듯했다.

그래서 위험했다.

그는 과거에 이런 모델을 많이 봤다. 사람이 가장 쉽게 속는 순간은 답이 하나만 있을 때가 아니다. 그때는 의심이라도 한다. 오히려 사람은 그럴듯한 답이 두 개 있을 때 더 깊이 흔들린다. 어떤 답을 택하든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승조가 말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까?”

유서진이 대답했다.

“현재 자료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럼 AI가 해줄 수 있는 게 뭔가.”

질문은 거칠었지만, 비난은 아니었다. 백승조는 정말로 묻고 있었다. 군인은 도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아야 한다.

유서진은 하현민을 잠깐 보았다.

하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답했다.

“세종 코어는 현재 단계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추가 관측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백승조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쉽게.”

유서진은 이번에는 바로 답했다.

“찍지 말고, 뭘 더 봐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승조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쓸 만하군.”

오세규 장관이 중얼거렸다.

“AI도 회의 잘하는 법을 배웠네요. 결론 말고 추가 검토 사항.”

유서진이 아주 작게 웃었다.

“군 보고서 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백승조가 그녀를 봤다.

“그 말은 칭찬인가?”

유서진은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보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하현민도 웃었다.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웃음 뒤에도 화면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세종 코어의 주 연산실은 중앙상황실과 다른 층에 있었다.

그곳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거대한 파란 빛의 기둥이나, 사람 목소리로 대답하는 둥근 기계가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전시용 홍보관에나 어울린다. 실제 시스템은 훨씬 건조했다. 서버랙, 냉각 장비, 전력 이중화 장치, 보안단말, 물리적 접근통제, 그리고 작은 경고등들.

국가의 판단을 보조하는 기계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윙윙거리고, 열을 내고, 로그를 남긴다.

유서진 소령은 하현민을 연산실 외부 관찰구역으로 안내했다. 대통령이 주 연산실 내부에 직접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하현민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리적 접근은 늘 기록을 남기고, 대통령의 방문은 시스템 운용자들에게 불필요한 긴장을 준다.

대통령도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하현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관찰창 너머로 수십 개의 서버랙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불빛은 일정하게 깜빡였고, 냉각 장치의 소음은 두꺼운 유리를 지나 낮게 들렸다.

오세규 장관이 조용히 말했다.

“여기가 세종 코어의 심장입니까?”

유서진이 답했다.

“주요 노드 중 하나입니다. 심장이라고 하기보다는 뇌의 일부에 가깝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분산 노드가 있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군 지휘체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나?”

“직접 명령권한은 없습니다.”

유서진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세종 코어는 전장판단 지원체계입니다. 지휘명령 체계와 데이터 연동은 하지만, 명령을 생성하거나 자동 집행하지 않습니다.”

백승조가 하현민을 보았다.

“그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까?”

하현민은 관찰창 너머를 보며 대답했다.

“변하면 안 됩니다.”

“전시에도?”

“전시라서 더 그렇습니다.”

백승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원칙을 시험한다.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빨라지려고 한다. 빨라지기 위해 절차를 줄이고, 절차를 줄이기 위해 책임을 나누고, 책임을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기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긴다.

백승조는 전쟁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현민도 알고 있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하지만 대통령님, 국민은 AI가 더 빠르게 막아주길 기대할 겁니다. 미사일이 날아오는데 사람이 회의하고 있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올 겁니다.”

“그럼 어떻게 설득합니까?”

하현민은 잠시 생각했다.

“AI가 1초 만에 틀린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인간이 7초 늦게 책임지는 결정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그 7초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하현민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오세규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하현민은 관찰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속도는 늘 선처럼 보입니다. 느린 건 악처럼 보이고요. 하지만 국가의 폭력은 빠르다고 정당해지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전쟁에서 가장 빠른 시스템이 가장 도덕적인 시스템은 아닙니다.”

그 말이 연산실의 낮은 소음 위에 내려앉았다.

백승조는 대통령을 오래 보았다.

그는 여전히 하현민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적어도 AI로 전쟁놀이를 하려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은 조금씩 인정하고 있었다. 그건 중요했다. 군은 기술을 싫어하지 않는다. 군이 싫어하는 것은 기술을 모르는 사람이 기술을 만능처럼 말하는 것이다.

하현민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기술을 너무 잘 알아서, 기술을 두려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세종 코어의 탄생에는 실패한 시연이 있었다.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사건이었다.

하현민이 대통령이 되기 전, 국가AI전략위원장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장소는 대전의 한 국방연구시설이었다.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통합 감시·판단 시연이었다. 위성영상, 지상감시장비, 해상 데이터, 민간 기상자료를 묶어 특정 위기 상황을 AI가 어떻게 분류하는지 보는 자리였다.

그날 시연에는 장관급 인사와 군 고위 지휘관, 연구원, 방산기업 관계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AI는 모의 상황에서 북한 이동식 발사대로 의심되는 차량을 찾아냈고, 근처의 민간 차량과 구분했으며, 날씨와 지형을 반영해 관측 가능성을 계산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감탄했고, 몇몇은 이미 예산을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생겼다.

AI는 피난민 대열 일부를 군사 이동으로 분류했다.

화면에는 빨간 표시가 떴다.

POTENTIAL HOSTILE SUPPORT MOVEMENT
(잠재적 적성 지원 이동)

회의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연구원이 급히 설명했다.

“모의 데이터입니다. 실제 상황은 아니고, 학습 데이터 편향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현민은 그 문장을 듣지 않았다.

그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피난민 대열.
트럭.
짐을 실은 사람들.
어린아이를 안은 여성의 흐릿한 실루엣.
그리고 그 위에 붙은 빨간 표시.

잠재적 적성 지원 이동.

AI는 사람을 보지 않았다.
패턴을 보았다.

문제는 전쟁에서도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된다는 점이었다. 너무 많은 공포와 정보와 시간 압박 속에서, 사람 역시 사람을 패턴으로 보기 시작한다. 피난민, 용의자, 적성 협력 가능 인원, 부수 피해 예상치. 전쟁은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분류표를 남긴다.

하현민은 그날 시연을 중단시켰다.

방산기업 관계자는 난처해했고, 군 관계자 일부는 불쾌해했다. 한 장성은 말했다.

“위원장님, 이 정도 오류는 개발 과정에서 당연히 나옵니다.”

하현민은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는 화면을 가리켰다.

“개발 과정에서 나오면 오류입니다. 전장에서 나오면 명령의 근거가 됩니다.”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하현민은 그날 이후 세종 코어의 원칙 문서 초안을 다시 썼다.

그 첫 줄은 이랬다.

AI shall not be the authority of violence.
(AI는 폭력의 권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어로 먼저 쓴 문장이었다. 국제 공동검토를 염두에 둔 문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현민은 곧 그 아래에 한국어로 다시 썼다.

AI는 명령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나중에 더 오래 남았다.


현재의 세종 벙커로 돌아왔을 때, 유서진 소령은 새 경고를 받았다.

그녀의 태블릿에 낮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 상단에 노란색 표시가 떴다.

DATA INTEGRITY CHECK / ANOMALY DETECTED
(데이터 무결성 점검 / 이상 감지)

유서진의 표정이 굳었다.

하현민이 그것을 먼저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중 일부에서 무결성 불일치가 다시 감지됐습니다.”

백승조가 물었다.

“서해 데이터인가?”

“아닙니다.”

유서진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과거 훈련 데이터입니다.”

“어떤 훈련.”

“전작권 전환 검증용 지휘소연습 일부입니다. 세부 명칭은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백승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생략해야 할 선을 알고 있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과거 훈련 데이터가 왜 지금 문제가 됩니까?”

유서진은 태블릿을 대형 화면과 연결했다.

화면에 두 개의 데이터 흐름이 나타났다. 실제 작전 세부사항은 제거되어 있었고, 추상화된 흐름만 보였다. 그러나 구조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세종 코어는 현재 사건을 평가할 때 과거 검증훈련 데이터 일부를 참조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한국군 지휘결심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연합 조율 지연이 어떤 패턴을 보였는지, 센서 불일치 상황에서 어떤 보정 절차를 적용했는지 같은 자료입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그 참조 데이터가 오염됐다는 겁니까?”

“아직 오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서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특정 훈련 시나리오에서 한국군 지휘결심 지연 시간이 실제보다 길게 반영된 흔적이 있습니다.”

브리핑룸의 공기가 달라졌다.

백승조의 얼굴이 굳었다.

“얼마나.”

“최대 7분 40초.”

그 숫자는 크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전시 시간표에서 7분 40초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미사일 경보, 항공기 출격, 함정 대응, 민간 대피, 연합 보고. 어떤 상황에서는 7분 40초가 결정을 바꾸고, 어떤 상황에서는 책임자를 바꾼다.

하현민은 낮게 말했다.

“압축된 전시 시간표.”

워싱턴 보고서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compressed wartime timelines
(압축된 전시 시간표)

유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싱턴 보고서의 핵심 표현과 연결됩니다.”

백승조가 물었다.

“그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유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답이 무겁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세종 코어 운용팀 일부, 합참 검증평가 라인 일부, 국방부 전환준비단 일부, 그리고 민간 기술검증 협력사 제한 인원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눈을 감았다.

“넓군요.”

유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예.”

백승조가 말했다.

“넓은 게 아니라 많군.”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국내 중개자 또는 내부 접근자 존재 가능성: 평가 보류.

그 줄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물었다.

“이 변조가 서해 11분 평가에 영향을 줬습니까?”

유서진은 손가락으로 자료를 넘겼다.

“직접 영향은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간접 영향은 있습니다. 세종 코어가 서해 상황 당시 ‘연합 조율 지연 가능성’을 계산할 때 참조한 과거 패턴 중 일부가 이 데이터군과 연결됩니다.”

“쉽게 말하면.”

백승조가 말했다.

유서진은 그를 보았다.

“AI가 이번 상황을 볼 때, 한국군 지휘결심이 실제보다 늦어질 가능성을 조금 더 높게 봤을 수 있습니다.”

브리핑룸이 조용해졌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럼 세종 코어가 틀렸습니까?”

유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현민이 답했다.

“세종 코어가 틀린 게 아닙니다.”

그는 화면을 보았다.

“세종 코어가 받은 기억이 틀렸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더 불편했다.

AI의 현재 판단은 과거 데이터 위에 서 있다.
과거가 조작되면 현재는 정교하게 흔들린다.
그것은 단순한 해킹보다 더 나빴다. 해킹은 침입의 흔적을 남긴다. 기억의 조작은 시스템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현민은 낮게 말했다.

“누군가 세종 코어의 눈을 가린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기억을 만졌습니다.”


유서진 소령은 세종 코어의 내부 설명 로그를 열었다.

이 로그는 일반 보고용이 아니었다. 모델이 어떤 데이터군을 참조했고, 어떤 가중치를 사용했으며, 어떤 이유로 특정 판단을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사람이 추적하기 위한 설명 기록이었다.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최소한 흔적은 남겼다. 그것 역시 하현민이 요구한 원칙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AI는 국가의 폭력 근처에 두지 않는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렇게 말했다.

화면에는 세종 코어의 판단 트리가 추상화되어 나타났다.

Event: West Sea Maritime Anomaly
(사건: 서해 해상 이상징후)

Reference Cluster: OPCON Transition Command Exercise Dataset
(참조 군집: 전작권 전환 지휘소연습 데이터셋)

Confidence Adjustment: Alliance Coordination Delay +0.17
(신뢰도 조정: 연합 조율 지연 +0.17)

Command Decision Latency Prior: Elevated
(지휘결심 지연 사전값: 상승)

백승조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저 플러스 0.17이 무슨 의미인가.”

유서진이 답했다.

“전체 판단값을 직접 바꾸는 수치는 아니지만, 연합 조율 지연 가능성을 올리는 요인입니다.”

“작은가?”

“작습니다.”

유서진은 잠시 멈췄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작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현민은 그 말을 들으며 화면을 보았다.

작은 수치.

정치에서도, 전쟁에서도, 시스템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작은 수치일 때가 많다. 0.17. 7분 40초. 11.7%. 그런 숫자들은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사람의 경계심을 낮춘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작은 차이였다고.

작은 차이가 방향을 바꾼다.

백승조가 말했다.

“이 데이터 변형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나?”

유서진은 다음 화면을 띄웠다.

“표면상 수정 시각은 3주 전입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정상 검증 업데이트로 보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물었다.

“누가 승인했습니까?”

유서진은 침묵했다.

대신 화면에 승인 경로가 떴다.

일부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직책만 표시됐다.

국방부 전환준비단 실무 검토.
합참 검증평가 실무 확인.
세종 코어 운용팀 데이터 반영.
민간 협력사 기술 검증 완료.

오세규 장관의 얼굴이 굳었다.

“전부 정상 절차군요.”

“예.”

유서진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정상 절차로 들어온 오염.”

그는 그 말을 천천히 씹었다.

“가장 나쁜 종류군.”

하현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승인 경로를 보고 있었다.

조직은 악당 한 명보다, 정상 절차를 가장한 작은 양보들로 더 자주 망가진다.
누군가는 바빴고, 누군가는 믿었고, 누군가는 검토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잘못된 데이터는 문을 부수지 않고 들어온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하현민은 말했다.

“이제부터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전체에 대한 역추적을 시작합니다.”

유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전체라면 시간이 걸립니다.”

“걸려야 합니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빠른 답이 필요한 상황과, 느린 검증이 필요한 상황을 구분해야 합니다.”

백승조가 물었다.

“전작권 전환 검증 일정은요.”

하현민은 그를 보았다.

“유지합니다.”

브리핑룸 안의 몇몇 사람이 숨을 죽였다.

백승조가 말했다.

“대통령님,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에 오염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상황에서 검증 일정을 유지하는 건 공격받기 좋은 결정입니다.”

“압니다.”

“정치적 공격이 아니라 군사적 위험도 있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유지합니까?”

하현민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종 코어 화면을 보았다.
AI는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 판단 보류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기계는 지금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은 어떨까.

“세종 코어가 흔들렸다고 해서, 우리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검증을 멈추면, 누군가 세종 코어의 일부 데이터만 흔들어도 국가 일정 전체를 멈출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백승조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하현민은 이어 말했다.

“대신 검증 방식은 바꿉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세종 코어 의존도를 낮춘 수동 검증 절차를 병행합니다. 용산 합참 원자료, 각 군 독립 평가, 민간 데이터 대조, 연합망 자료 확인, 그리고 세종 코어 분석을 분리해서 놓습니다.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지 봅니다.”

백승조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AI를 빼자는 게 아니라, AI를 검증대상 중 하나로 놓겠다는 겁니까.”

“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종 코어도 검증받아야 합니다.”

그 말에 유서진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세종 코어 운용자였다. 그러나 그 말에 안도했다. 시스템을 진짜로 신뢰하는 사람은 시스템을 성역으로 만들지 않는다. 성역이 되는 순간, 그곳은 공격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된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언론에 알려지면 ‘AI 국방 흔들림’으로 나갈 겁니다.”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숨길 수는 없습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오세규가 그를 보았다.

“공개합니까?”

“전부 공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공개합니다.”

하현민은 천천히 말했다.

“세종 코어의 분석 절차를 재검증하고 있으며, 정부는 AI 판단을 맹신하지 않고 독립 검증을 병행한다.”

윤태석이 받아 적었다.

“비판이 있을 겁니다.”

“있어야 합니다.”

하현민은 바로 답했다.

“AI 국방을 추진하는 정부라면, AI에 대한 비판을 견뎌야 합니다.”

백승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는 이 대통령이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불편한 이유는 못 믿겠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믿을 만한 말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통령은 군에게 더 어려운 상대다.
허술한 정치인은 무시하면 된다.
위험한 정치인은 막으면 된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인은 함께 가야 한다.

그게 제일 어렵다.


워싱턴의 대사관 보안실에서 강이준은 세종의 새 메시지를 받았다.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 오염 가능성. 내부 접근자 가능성 재평가. COND-4 관련 한국 내부 작성 가능성 주시.

강이준은 메시지를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도윤이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까?”

강이준은 휴대폰을 껐다.

“좋은 소식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한도윤은 이제 체념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몇 시간 사이에 그는 담을 넘고, 골목을 뛰고, 외교 리셉션에서 사실상 추격전을 하고, 이제는 세종 코어라는 국가 AI 시스템의 데이터 오염 가능성까지 듣고 있었다. 변호사 생활이 이렇게 동적일 필요는 없었다.

강이준은 보안실 벽에 걸린 워싱턴 지도를 보았다.

조지타운.
듀폰서클.
대사관.
싱크탱크 밀집 지역.
의회.
방산기업 사무소.
중국대사관.

지도 위의 점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탁과 전화와 문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 변호사님.”

“예.”

“한국 방산기업 워싱턴 자문 중에 세종 코어 쪽 계약 건드린 사람 있습니까?”

한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왜 묻습니까.”

“세종 코어 참조 데이터가 흔들렸답니다.”

“해킹입니까?”

“아직 모릅니다.”

“그럼 내부?”

“아직 모릅니다.”

한도윤은 그 말을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당신들은 모르는 게 참 많군요.”

“그래서 오래 삽니다.”

“알면 죽습니까?”

“너무 빨리 알면요.”

한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세종 코어 직접 계약은 대부분 한국 내에서 이뤄졌을 겁니다. 하지만 워싱턴 자문단이 연결된 민간 기술검증, 국제 인증, 연합 상호운용성 평가 쪽은 있을 수 있습니다.”

“상호운용성.”

강이준이 그 단어를 반복했다.

조지타운 만찬에서 나온 단어였다.

Stability requires interoperability.
(안정성에는 상호운용성이 필요합니다.)

좋은 단어.
비싼 단어.
그리고 이제는 더러운 단어일 가능성도 생겼다.

강이준은 말했다.

“그쪽 명단 필요합니다.”

한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쉽게 못 구합니다.”

“어렵게는요.”

“더 어렵습니다.”

“불가능은 아니군요.”

한도윤은 그를 보았다.

“당신은 왜 항상 사람 말을 그렇게 듣습니까?”

“희망적으로 듣는 편입니다.”

“협박처럼 들립니다.”

“워싱턴식 칭찬입니다.”

한도윤은 한동안 그를 보다가 결국 태블릿을 꺼냈다.

“공식 명단은 없습니다. 하지만 방산기업 리셉션 참석자, 로펌 등록자료, 의회 로비 공개자료, 세미나 패널 명단을 합치면 윤곽은 나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정상적으로 하면 며칠.”

“비정상적으로 하면요.”

한도윤은 그를 노려봤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 그 단어가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게 싫습니다.”

“몇 시간.”

“최소 여섯 시간.”

“세 시간 드리겠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네 시간.”

“협상하는 척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섯 시간.”

한도윤은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당신 진짜 피곤한 사람이군요.”

“자주 듣습니다.”

그때 보안실 문이 열리고, 대사관 정무공사가 다시 들어왔다.

“강 요원.”

“예.”

“미국 쪽에서 비공식 메시지가 왔습니다.”

“어디서요.”

정무공사는 잠시 망설였다.

“평택의 헤이스 대령 라인을 통해서입니다.”

강이준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마이클 헤이스.
한국을 존중하는 동맹파.
워싱턴의 문장보다 현장 보고를 더 믿는 몇 안 되는 미군 장교 중 하나.

정무공사는 종이를 내밀었다.

영어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Check the bridge, not the castle.
(성을 보지 말고 다리를 확인하라.)

강이준은 문장을 읽었다.

“다리.”

한도윤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강이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성은 세종 코어일 수 있다.
다리는 세종 코어와 외부를 잇는 검증 절차, 상호운용성 평가, 연합 데이터 교환, 민간 기술협력 라인일 수 있다.

공격자는 성을 직접 치지 않았다.

다리를 건드렸다.

강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한 변호사님.”

“왜요.”

“명단부터 바꿉시다.”

“무슨 명단요.”

“세종 코어 만든 사람 말고, 세종 코어를 다른 시스템과 연결한 사람들.”

한도윤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상호운용성 라인.”

“네.”

강이준은 종이의 영어 문장을 다시 보았다.

Check the bridge, not the castle.
(성을 보지 말고 다리를 확인하라.)

“워싱턴 친구들이 성문 앞에서 연설하는 동안, 누군가 다리에 손댔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리는 보통 돈 받고 놓죠.”

한도윤은 태블릿을 켰다.

“그럼 방산 쪽입니다.”

강이준은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돈 냄새가 나네요.”


세종 벙커에서는 헤이스의 문장이 도착했다.

Check the bridge, not the castle.
(성을 보지 말고 다리를 확인하라.)

하현민은 그 문장을 보고 오래 침묵했다.

윤태석이 말했다.

“헤이스 대령이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 경로는 아닙니다.”

백승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평택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요.”

“직접 발신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우회 경로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말했다.

“그럼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게 함정일 수 있습니다.”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문장은 유용합니다.”

그는 화면에 세종 코어의 구조도를 띄우라고 했다.

중앙에는 세종 코어가 있었다.
주변에는 연결 노드들이 있었다.

용산 합참.
각 군 작전라인.
평택 연합 데이터 교환.
국정원 사이버 위협 정보.
민간 기상·해양 데이터.
위성영상 분석센터.
방산 AI 검증망.
국방부 전환준비단.
민간 기술협력사.

하현민은 그것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종 코어 중앙을 가리켰다.

“누군가는 다리를 건드렸을 수 있습니다.”

유서진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조 데이터 오염도 외부 연결 절차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상호운용성 검증 데이터나 민간 협력사 검증 패키지를 통해서라면 정상 절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백승조가 말했다.

“그러면 세종 코어 운용팀 내부자가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뜻인가.”

“예.”

유서진은 답했다.

“하지만 접근권한 구조를 이해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세규 장관이 낮게 말했다.

“방산기업.”

윤태석이 덧붙였다.

“또는 방산기업과 연합검증 절차를 연결하는 자문 라인.”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사천과 창원, 판교와 대전의 이름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의 자부심이자 돈줄이자 새로운 권력이 된 방산의 그림자가, 이제 이 사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전작권이 돌아오면 방산은 더 커진다.
한국군이 독자 지휘능력을 키우려면 더 많은 위성, 더 많은 AI, 더 많은 통신체계, 더 많은 미사일 방어망, 더 많은 무인체계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전작권은 주권이고, 누군가에게는 시장이다.

시장이 생기면 브로커가 온다.

그건 전쟁보다 오래된 법칙이었다.

하현민은 말했다.

“다리부터 봅니다.”

윤태석이 펜을 들었다.

“연결 노드 전수점검 지시하겠습니다.”

“전수점검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너무 넓습니다. 우선순위를 둡니다.”

하현민은 손가락으로 화면의 노드 몇 개를 짚었다.

“연합 데이터 교환. 민간 기술검증. 방산 AI 협력사. 전작권 전환 검증 데이터 관리. 이 네 곳입니다.”

유서진이 빠르게 받아 적었다.

백승조가 말했다.

“용산 합참 쪽에서도 별도 점검하겠습니다. 단, 군 내부에 소문이 돌면 안 됩니다.”

“소문은 돕니다.”

하현민이 말했다.

“그러니 소문이 돌기 전에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내부자 색출이 아니라 데이터 경로 검증입니다.”

오세규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잡기 시작하면 조직이 얼어붙습니다.”

백승조가 건조하게 말했다.

“군 조직은 원래 좀 얼어 있습니다.”

오세규가 그를 보았다.

“그건 농담입니까?”

“현실입니다.”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늦게 나왔다.

하현민은 그 웃음이 지나간 뒤 말했다.

“하나 더.”

모두가 그를 보았다.

“세종 코어에 직접 물어봅시다.”

유서진이 살짝 굳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현민은 화면을 보았다.

“지금 세종 코어가 자기 판단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데이터 경로가 어디인지.”

유서진은 잠시 망설였다.

“가능합니다. 다만 답은 확률적이며, 자기평가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압니다.”

하현민은 말했다.

“사람도 자기평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그건 맞습니다.”

유서진은 세종 코어 질의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이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인 대화형 AI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유롭게 질문하고 자연어로 답을 받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국가위기관리용 질의는 기록되고, 제한되고, 검토된다. 어떤 질문은 허용되지 않고, 어떤 답은 확률 범위로만 나온다.

유서진은 하현민을 보았다.

“질의 문장을 확인해주십시오.”

화면에 문장이 떴다.

Identify the data pathways that most reduce confidence in current OPCON-related anomaly assessment.
(현재 전작권 관련 이상징후 평가의 신뢰도를 가장 낮추는 데이터 경로를 식별하라.)

하현민은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행하세요.”

유서진이 실행 키를 눌렀다.

세종 코어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몇 초가 흘렀다.

상황실의 모든 사람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답이 떴다.

Assessment Confidence: Insufficient for ranked conclusion.
(평가 신뢰도: 순위화된 결론을 내리기에는 부족함.)

However, highest uncertainty clusters are associated with external validation packages and alliance-interoperability reference datasets.
(다만 가장 높은 불확실성 군집은 외부 검증 패키지 및 동맹 상호운용성 참조 데이터셋과 연관되어 있음.)

브리핑룸이 조용해졌다.

동맹 상호운용성.

워싱턴의 식탁에서 나온 단어.
방산기업 임원이 말했던 단어.
전작권 전환의 기술적 조건으로 포장되기 쉬운 단어.
그리고 이제 세종 코어가 가장 불안한 데이터 경로로 지목한 단어.

백승조가 낮게 말했다.

“다리군.”

하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화면을 보았다.

세종 코어는 범인을 말하지 않았다.
정답을 내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디를 봐야 하는지는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장은.

하현민은 조용히 말했다.

“세종 코어는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이 썼던 문장을 떠올렸다.

AI는 추천한다.
인간이 명령한다.
국가는 책임진다.

그 문장은 이제 구호가 아니라 절차가 되어야 했다.

“명령은 우리가 합니다.”

그가 말했다.

“동맹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를 추적하세요.”

유서진이 대답했다.

“예.”

“그리고 강이준에게 보내세요.”

윤태석이 물었다.

“어떤 내용을 보낼까요.”

하현민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리를 찾으라고.”

윤태석은 영어 문장으로 보낼지 한국어로 보낼지 잠시 고민했다.

하현민이 덧붙였다.

“한국어로 보내세요.”

“예.”

잠시 뒤, 워싱턴으로 메시지가 전송됐다.

성을 보지 말고 다리를 찾아라. 상호운용성 데이터 경로. 방산 AI 검증 라인.

강이준의 답장은 이번에도 짧았다.

이제야 돈 냄새가 납니다.

세종 벙커의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하현민은 회의가 끝난 뒤에도 잠시 상황실에 남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윤태석은 외교라인을 정리하러 갔고, 오세규는 국방부와 방산 협력사 점검 범위를 논의하기 위해 나갔다. 백승조는 용산 합참과 별도 회선을 연결했다. 유서진은 세종 코어 로그 분석팀으로 돌아갔다.

상황실은 잠시 넓어 보였다.

하현민은 대형 화면 앞에 혼자 섰다.

세종 코어의 기본 화면은 조용했다.
지도 위에 한반도가 떠 있었고, 주변 해역과 항공로, 위성 궤도와 주요 감시영역이 얇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낮은 색의 선들, 작은 점들, 수많은 데이터. 그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밥을 먹고, 출근하고, 병원에 가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고양이 밥을 주고, 지하철을 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싸우고, 투덜거리며 세금을 내는 사람들.

국가안보라는 단어는 너무 커서, 종종 그 사람들을 지운다.

하현민은 그게 싫었다.

세종 코어는 전쟁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무엇을 빼앗는지는 계산하지 못한다.
민간 피해 예상치라는 숫자를 낼 수는 있지만, 그 숫자 안에 들어 있는 이름들을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필요했다.

부정확하고, 느리고, 자주 비겁하고, 때로는 고집스럽게 용감한 인간이.

하현민은 화면 아래 작은 상태 표시를 보았다.

CORE STATUS: DEGRADED CONFIDENCE / HUMAN OVERSIGHT REQUIRED
(코어 상태: 신뢰도 저하 / 인간 감독 필요)

그 문장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인간 감독 필요.

그것은 세종 코어의 약점이 아니라, 이 시스템이 아직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현민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괜찮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시스템이면, 아직은 쓸 수 있어.”

그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세종 코어는 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것은 명령하지 않았고, 위로하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데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현민도 기다렸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세종의 지하는 다시 낮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서버랙의 냉각음, 통신장비의 신호음, 누군가의 낮은 보고, 커피잔이 책상에 닿는 소리. 국가가 잠들지 않는다는 말은 멋있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이런 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고 피곤한 소리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은 다음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종 코어는 흔들렸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기계 바깥에 있었다.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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