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지원 학원을 수료한 후, 본격적인 면접활동에 들어갔다.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들과 네이트온으로 면접스터디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각자 정보를 공유하며 스프링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당시 나는 이력서에 아주 패기넘치는 워딩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막상 면접에 들어가서는 아주 긴장을 하는바람에 면접관에게서 이력서와 현실에서의 괴리감이 크다는 말까지 들었다.
여러번 낙방한 후, 한 SI회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첫 프로젝트로 S은행 차세대 프로젝트에 3년차로 투입되었다. SI업체에 3년차로 뻥튀기되서 들어가는게 아직도 매우 비일비재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튼 첫 프로젝트에서 나는 지금까지 배웠던 자바/JSP/오라클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곳은 자체 프레임워크로 하이브리드 앱개발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3년차로서 하나의 도메인을 담당하여 개발하는 개발자로서 JQuery와 HTML5를 사용하여 안드로이드/아이폰 하이브리드 앱을 만들었다.
정말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PL과 기획자, DB담당자 이 세분 (그때 팀원들끼리 3차장이라고 불렀다.)은 투입한 3명의 개발자가 전부 3년차로 뻥뛰기된 신입인걸 알자마자 뒷목을 잡았고, 그러한 초짜들을 데리고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실무 그 자체이지 않은가? 열심히 공부했다. 진짜 살면서 제일 열심히 살았다. 이때 나는 모든 퇴근을 택시로 했다. 자정이 넘으면 택시비가 지급되기 때문이다. 주말도 나왔다. 주말과 공휴일이 겹친 2011년 크리스마스와 2012년 신정도 예외가 없었다. 쉰다고 하니까 화내더라고 ..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첫 프로젝트에서 가장 크게 배운게 무엇이냐고 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이걸 얘기하고 싶다.
Javascript 비동기의 Non-blocking 이라고 할것이다.
왜냐면, 내가 아주 저거에 크게 데였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기능중에 지출내역을 그래프로 표시하는 기능이 있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서버로 부터 해당 기간중의 지출 내역을 받아오고 그것을 그래프로 그려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건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서버통신을 비동기로 진행했고, 그 바로 뒤에 이어지는 그래프를 그리는 코드는 Non-blocking으로 처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가 받아오기전에 그래프를 그려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는것이다.
그때는 정말이지... 이걸 몰랐다... 이걸 해결할 방법을 아예 몰랐다..
근데 더 문제는 이걸 도와줄 사람조차 없었다는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프로젝트의 중요이슈로 올라갔고, 나는 이걸...... setTimeout으로 해결했다... 데이터를 받아오고 3초후에 그래프를 그리ㄴ.. 하 진짜 너무 창피하다..
진짜 신이 나에게 과거로 돌려보내준다면 나는 무조건 다시 이 회사를 가서 이 프로젝트를 다시 할것이다. 진짜 더 멋진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더 골때리는 건, 이를 해결한 후 모두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칠노릇이지 .. 도대체 이사람들 정체가 뭐였지 ...
글이 길어지니 이 얘긴 이만하고,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결국 3년차의 일을 해냈다. 처음에 3차장님은 나에게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라는 말을 했지만, 말미에는 정말 열심히 했고 결국은 문제를 해결해낸다고 칭찬했다. 어찌됐든 저 논블로킹이슈말고는 내가 생각해도 첫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기 힘든 퍼포먼스를 냈다고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주관하는 시스템개발에 투입되었다. 이 곳에서의 경험은 지금의 나라는 개발자의 초석을 다지게 만들었다.
Spring Framework, Oracle, 그리고 각종 프론트엔드 라이브러리를 사용한 말 그대로 "웹프로젝트"였다.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데, 회사에서 작성해준 이력서에 자바스크립트와 JQuery의 기술레벨이 상 으로 적혀있었다. 단언컨데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해있던 때였다.
PL은 나에게 자바스크립트 상에 대해 두가지의 질문을 했다. 프로토타입과 클러져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었다. 자바스크립트의 기반이 되는 것이며, 객체의 상속등이 가능한 개념이라고 딱 한줄로 설명했고, 클로져에 대한 설명은 두루뭉실하게 변수의 생명주기어쩌고 얼버무렸다.
당연하지만, 당시 나의 기술레벨은 하 였다. 한개의 프로젝트를 끝낸 풋내기의 우물안의 망상이었다.
그 PL은 투입과 함께 나에게 실시간 급상승 키워드에 대한 개발을 주문했다. 화면 헤더에 급상승 키워드 1위부터 10위까지가 하나씩 표시되며 , 일정 시간마다 올라가며 표시되는 느낌의 UI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모든 팀원들을 불러모아 내가 설계한 내용과 구현한 내용에 대해 발표를 시켰다.
진짜 당시에는 출근시간보다 1시간 미리와서 PL과 1:1로 이야기하고 그런 발표를 억지로 시키는것에 대해 반감이 들었다.
심지어 그 PL은 내 노트북을 자기 자리로 가지고 오고 옆자리에 앉히고 하루종일 옆에서 개발에 훈수를 두었다.
당시에는 정말 숨이 막혔지만, 그 PL은 개발기술에 대해서 엄청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그 사람에게 개발에 대한 습관을 모두 상속받았다. 아주 은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는 진짜 힘들었다.. 상상해보라, 매일 아침부터 상사와 옆자리 딱 붙어서 이야기해야 하고 업무중에서도 그게 계속 이어진다. 심지어 담배도 피우는 사람이라 담배피러 갈때도 같이 간다..
그 사람은 개발자라면, 항상 모든순간에 내 손에 쥐고 있는 개발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업무외시간에서도 항상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라는 것을 적어도 한개이상은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지금 나에게도 계속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항상 사소하지만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블로깅을 하고 있는 도중 내가 쥐고 있는 생각은 JWT와 시큐리티에 대한 생각이다.
이렇든 이 프로젝트에서 나에게 남은것은 PL이 나에게 물려진 개발에 대한 철학이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잘 이야기 하지 못했던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고 싶다.
이 프로젝트가 끝난후, 나는 현재 와이프되는 사람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방기술품질원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이 프로젝트는 내가 이전 프로젝트 진행중에 미리 1차 사업이 종료되고, 기간이 맞아서 2차 사업에 내가 추가로 투입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전자정부 프레임워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객과의 마찰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서 중요한 고객은 사업을 주관하는 연구원과 이 시스템을 실제로 사용하게 되는 연구원 두 분이셨는데 속사정을 들어보니 이 두 연구원끼리의 사이가 나쁘다고 했다.
그래서 실제로 사용하는 연구원은 주관하는 연구원에게 협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 여파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전체적인 개발을 담당하고 추가적으로 고객과의 협의에 동행하여 회의록을 작성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RFP상에 있는 내용을 번복하는것은 매일이고, 하루전에 한 말도 바로 바뀌어 버리는 실무자들의 행태에 우리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프로젝트 개발은 절반이 진행중인데 아직 요구사항이 확정이 안된 아주 필 쏘 굳한 상태였다.
심지어 그 연구원은 "노가다하는 사람들", "사용하지도 못할 쓰레기를 만들어놓고" 이라는 표현을 우리에게 사용했다. 정말이지 권위의식으로 가득찬 소인배였다.
그 프로젝트중 우리의 PL님은 집에서 쓰러지셨고, 출근하지 않는 PL님을 찾아 죽을 사들고 집까지 찾아가 주인집에게 연락해 문을 따는 이벤트도 있었다.
PM님은 도저히 안되겠다 판단해서 아침부터 모든 현업관계자들을 불러모으고, 오늘은 끝장회의를 할것이라고 선언, 아침부터 늦은밤까지 그들을 절대 회의실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밀려있던 모든 안건들을 처리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셨다. 이 때 만큼은 야근이 오히려 좋았다. 이들이 집에 가자고 하는것을 다 자르고 회의를 진행하시는 PM님은 그때만큼은 참 멋있었다.
솔직히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얼만큼 쓰레기였길래 그렇게 말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렇게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면 우리가 그렇게 시스템 보완에 대해 울부짖었을때 말을 해주지 야속하다.
우리는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했고, 3차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그 누구도 남지 않고 전원 철수했다. 뒤 늦게 들은 소식에 의하면 3차 프로젝트는 망했고 그 귀책으로 인하여 어떤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진짜.. 우리였으니까 했다 그거..
그 이후로 PM님과 PL님은 아주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머지 일본행을 결심하시게 된다.
원래 그 두분은 일본에서 개발을 오래 하셨던 분이고, 고객과의 마찰로 인해 일본에선 이런일은 없었다며 일본행을 제안하셨다.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중간중간에 짧거나 조그마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2014년 9월 나와 현재 내 와이프는 일본이라는 나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