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8] 하우스도르프 공간

이순간·2025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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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더 이상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기술은 점점 더
국가 간 경쟁의 무기이자 제재의 수단으로 변화했다.

미국이 중국을 향해
반도체 수출 통제를 강화한 사건은
그 전환의 고도화를 느끼게 해준다.

이제 반도체는 단순히 기업의 판매물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권력의 추를 결정짓는 지렛대가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도 소버린 AI
그러니까 인공지능 주권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여기에 국가대표 AI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부가 선정한 다섯개의 팀중 최종 선정되는 팀은
K-AI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GPU와 데이터, 조단위 자금을 지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지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픈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엔비디아의 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스테이지, NC AI, LG AI연구원 같은 기업들이 이번에 받는 것도
SK텔레콤과 네이버가 보유한 B200, H100 GPU를 빌려 쓰는 방식이다.

내년 하반기 정부가 직접 구매하겠다는 1만 장의 칩 역시 엔비디아 제품이다.
국가가 대표를 세웠지만
그 대표가 뛰는 경기장의 트랙은 여전히 남이 깔아준 것이다.


만약 내일 아침
인텔과 AMD의 CPU가 모두 사라진다면
한국의 컴퓨터 가운데 과연 몇 대가 남아 작동할 수 있을까?

아마도 눈에 보이는 대부분은 순식간에 껍데기가 될 것이다.
엔비디아의 GPU 공급이 막히면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모델을 설계하더라도
그것은 설계도로 남을 것이다.

이 불편한 상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부르는 주권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주권은 위에서부터 쌓이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빛나도
그것을 구동하는 물질적 토대가 남의 손에 있다면
우리의 자율성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세계를 압도한다.
그러나 메모리는 기억의 창고일 뿐
학습과 추론이라는 지적 활동을 이끄는 뇌는 CPU와 GPU다.

우리는 창고는 지녔으나 사유의 뇌는 가지지 못했다.
국가대표 AI라는 이름은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대표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그 몸은 남의 두뇌를 빌려 움직인다.

국가대표 AI가 진정한 이름을 얻으려면
그 뿌리가 엔비디아의 공장이 아니라
한국의 연구소와 스타트업의 클린룸에 닿아 있어야 한다.

국가가 내세운 대표가 빌린 장비로만 경기를 치른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표가 아니라 유니폼만 입은 용병일 뿐이다.


AI 주권을 말할 때 사람들은 쉽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더 큰 모델, 더 많은 데이터, 더 빠른 서비스.
그러나 주권은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낮은 레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실리콘의 회로와 전자의 흐름에서 시작된다.

리벨리온이 서버용 가속기를
퓨리오사가 저전력 추론 칩을 설계하는 시도는
단순한 신생 기업의 출발이 아니라
주권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행위다.

거대한 엔비디아를 당장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스스로의 길을 닦아야 한다는 자각이 없다면
한국의 국가대표 AI는
언제든 공급망 위기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소버린 AI 전략이 이름처럼 자립적이려면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라는 기존의 토대 위에
CPU와 GPU, NPU라는 연산 칩 생태계를 반드시 쌓아 올려야 한다.

국가대표 AI는 단지 소프트웨어의 대표가 아니라
하드웨어의 대표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거대한 담론 속에서 우리는 종종 국가나 기업의 행보만 바라본다.
그러나 기술의 주권은 멀리 있는 추상적 과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시선과 태도 속에서도 자라난다.

우리는 기술을 소비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서비스와 모델을 단순히 사용하는 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엔비디아 칩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칩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동작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피상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우리는 깊이를 향한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완벽해보이는 결과물보다는
그 밑바닥을 떠받치는 기초에 눈을 두는 습관
데이터의 뒤에 있는 알고리즘을 보고
알고리즘의 뒤에 있는 하드웨어를 보는 습관이다.

소프트웨어만의 독립이 허상이라면
개인의 성장 또한 표면적인 활용 능력만으로는 공허하다.
깊이를 향한 시선이야말로 개인이 시대와 함께 성장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불완전함을 견디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

스타트업의 칩셋이 아직 세계를 뒤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개인의 작은 공부와 시도도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실패로 여기지 않고
미래의 토대라 믿으며 꾸준히 쌓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스로 길을 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남이 만든 길을 따라가면 편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는 결코 주권을 얻을 수 없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미 닦인 커리큘럼과 매뉴얼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종속적인 학습자에 머문다.

낯설고 거친 길을 스스로 열어보려는 용기 속에서 비로소 직관이 싹튼다.


거대한 기술의 흐름은 국가와 기업의 차원에서 결정되기도 하지만
그 흐름을 받아들이고 또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개인의 눈과 손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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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지언정 늘 행동이 먼저이기를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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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일

우리도 반도체를 인질로 패악질좀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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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일

이순간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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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4일

항상 느끼지만, 순간님은 글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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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9일

글을 읽으면서 ‘AI 주권’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기술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까지 연결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전략도 중요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이 깊이를 향한 호기심과 꾸준한 시도를 Moto X3M 이어가는 게 결국 미래의 토대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통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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