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감상

Roeniss Moon·2022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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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중 하나인 마이너리뷰갤러리, 속칭 마리갤이 이 책을 여러차례 언급했다. 평소 그의 사고방식이나 논리전개를 매우 좋아하였기에 이 책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추천해준 책을 '진짜' 읽어본 것은 거의 드문 경험인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영상에서 읽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만큼 나 자신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반증이렸다.

어려운 말들이 가끔 나오고 (스노비즘, 라캉, 지젝, 포스트모더니즘, 시뮬라르크 등등), 듣도보도 못한 오만 일본인들 이름이 나오는 것이 조금 장벽을 느끼게 하지만, 평소 마리텔이 자주 하던 주장(?)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글도 엄청 어려운 편이 아니다. 한 블로그에서는 이 아즈마 히로키라는 저자로 인해 일본 인문학이 새 시대를 맞이했다고 써놨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말투/문체도 한 몫 했으리라.

줄거리

책의 내용은 -- 내가 이해한 바는 -- 이러하다.

  • 근대(과거)엔 거대한 담론, 진리, 사상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고, 작품들을 통해서 그 숨어있는 답을 찾아내려고 했다면,
  • 현대(90년대 이후)는 그런 숨어있는 답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거기서 입맛대로 여러 (모에)요소들을 꺼내와 조합하여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 그로 인해 더이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찾아볼 수 없는, 오리지날리티를 상실해버린, DB 에서 필요한 요소를 꺼내와 학습된 방식으로 소모하는 법밖에 모르는, 시뮬라르크로 가득한, (세계에 대항하려는 '욕망'이 결여된)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만이 남은 (=동물화된), 오타쿠의 생활양식이야말로 이 현재,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를만한 사회의 모습 그 자체이다.

아쉬었던 대목들

  • 나름 중립적인 각도로 잘 설명하다가 극 후반부에 갑자기 "오타쿠는 병든 존재다"라는 감정섞인 주장을 쑥 들이미는데 몹시 당황스러웠다.
  • 3장에서 갑자기 HTML 을 가져와 "보이지 않는 것들을 (html tag들로)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앞뒤 말은 들어맞으나 억지로 짜맞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가장 인상깊은 구절

읽다가 너무 공감되어 빵터진 부분이 있어 여기 옮겨적는다:

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작가는 몇 명이나 들 수 있지만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면 곤란해지는 것이 전문가뿐 아니라 독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이 특징은 저조한 상황의 징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이름을 들 수 없다는 바로 이 사실에 90년대 오타쿠계 문화의 본질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미 작가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들 수 없다. 그 대신에 신들이 된 것은 모에 요소이다. 90년대를 대표하는 모에 요소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그 방면에는 다소 조예가 깊은 소비자라면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단상

오타쿠들이 모에 요소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고, 단지 그것을 적절히 조합하여 소비할 뿐이라는 주장은 굉장히 설득력있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리고 중간중간 -- 저자의 의도는 아닌 것 같지만 -- 일본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대목들도 있어서 좋았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왜 은혼의 배경은 에도이면서 미래 세계일까?"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에도 시대는 두 번에 걸쳐 (메이지유신과 패전을 말한다) 단절되어버린 일본의 정체성을 가장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시간대"라는 표현이 있다. 정확한 문장은 아닌데, 아무튼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 더 일본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등에 잡지같은 걸 한가득 담아 다니는 일본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자를 본 적은 없다)가 왜 형성되었는가, 정확히는 왜 그들은 등에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넣어다니며 오타쿠(=당신의 집)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대답도 찾을 수 있었다. 약간 억지같긴 했는데 아무튼.

한편, 이 책에 나오는 오타쿠들의 문화나 사고방식을 보면서 2000년대 이후의 디시인사이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깊게 고민해보진 않아서 생략. 그리고 지금 이 감상을 적으며 드는 생각이 하나: "이제 더 이상 '거대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것일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다원주의의 실체일까? 아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소멸하긴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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