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의 가르침 추천 책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추천해 준 도서 중 한 권이다. 세이노 책을 너무 감명깊게 봐서, 선구안을 믿고 그의 추천책을 다 읽어보려고 다짐했기 때문에 찾게 되었다.
뭐라도 지금 당장 성취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지는 책
6.25전쟁 당시 노르웨이로 건너가 성공을 이룬 1939년 2월 23일생 이철호(미스터 리)씨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이철호씨는 2018년 2월 26일 파킨슨병으로 작고했지만, 생전에 딸과 함께 최고의 책을 남겼다.
행복은 성취에서 온다는 점, 혼자 파라다이스에 가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남는 게 좋다는 점, 10명에게 돈을 주는 것 보다 10명을 채용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점
에서 롤모델이라는 게 생겼다. 흙수저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공을 이루는 과정, M&A, 성공 이후의 삶까지 다룬 책이다.
시공간을 막론하고 세이노도 이 책을 읽었고, 이 책을 인용해서 삶의 처세를 논할 정도로 훌륭한 책이 맞았다.
너의 모든 꿈은 이루어질 거야. 절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마!
인생의 비밀 중 하나는 걸림돌로부터 디딤돌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길이 아무리 어둡고 무서울지라도 절대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전쟁 중에 언제라도 가족이 흩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철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돈뭉치를 나누어 쥐어 준다. 하지만,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돈의 가치는 휴지 조각처럼 떨어져 내리고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이철호는 돈을 전부 현물화한다. 살 수 있는 만큼의 모자를 구입하고 판매하려는데, 단 하나의 모자도 판매하지 못했다. 전장에서의 모자처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상품은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탐색하게 된다.
물을 떠서 기차에서 판매했는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꾸준히 인기가 있었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 보니 깨끗한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신발을 닦자고 계획한다. 판자 조각을 주워 허름하게나마 MVP 구두닦이 통을 손수 만들고 물을 팔아 번 돈으로 구두약과 솔을 사는데 투자한다. 그리고 당장에 군화, 구두를 닦기 시작한다. 묻지도 않은 채 몸을 웅크리고 일단 말없이 구두를 닦았으며, 신발 주인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철호는 공짜라며 미소를 보였다. 한 짝만 공짜로 해드리고 나머지 한 짝은 돈을 내야 한다고 했을 때 화를 낸다면 양쪽 다 공짜로 닦아주면 그만이었다.
소 여물을 훔쳐 먹으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피난길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따라가면 먹을 게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진강까지 올라와서 헤엄쳐서 강을 건너다가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가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된다. 미군들의 눈에 띄어 구조되고, 미군 병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한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한다. 막사를 청소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군화를 닦고 군복을 빨았다. Yes, Sir! 이라는 구호 부터 따라해보면서 짧은 기간에 영어를 터득했고, 미군들이 시키는 일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우연히 장군의 부대 방문시에 장군의 개인 비서로 스카우트 된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철호는 통역과 제반업무에 능했기 떄문이다. 그러다 북한군이 쳐들어 와서 고관절에 수십 개의 파편이 박히게 된다.
다친 고관절은 군사 병원에서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쉬나이더 장군은 병영신문에 철호의 사연을 썼다. 그 후 노르웨이에서 도와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 38선 군사병원 -> 부산 -> 일본 -> 노르웨이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노르웨이로 이동하게 된다.
-출발하기 위해 위대해질 필요는 없지만, 위대해지려면 출발부터 해야 한다.
-일을 사랑하는 게 원동력이다.
-사람은 위대해지고자 결심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위대한 사람 없이는, 어떤 것도 성취될 수 없다.
-스스로 광고하지 않아도 항상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다.
사상 처음으로 노르웨이에 온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노르웨이 뉴스 에이전시에서는 아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루었다. 병원에서 들어섰을 때 책, 잡지, 초콜릿을 팔던 낸시 이모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노르웨이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니 철호에게 통신학교를 추천해주었고 철호는 통신학교에 등록하게 된다.
같이 온 노르웨이계 미군의 어머니가 집에 작은 방을 월세로 내주게 되고, 그 작은 방에 살면서 CC15 호텔에서 벨보이로 일하며 우체국과 관련된 심부름을 진행했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심부름을 다녔으며, 손님들의 차 문을 닫아줄 때면 항상 깊숙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나,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았고, 임시직으로 극장 배우를 하게 된다. 염소를 끌고 무대를 지나가는 일본인 소년 역할을 맡았다. 극장이 끝나고 바로 다음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새벽 인력시장에 매일 나가면서 일용직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비우고 청소하는 일도 했다.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해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부끄럽고 혐오스러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1년 정도 그 일을 하고 나니 고약한 냄새에도 비위가 상하지 않게 됐지만, 월세와 세금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구두를 닦아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노르웨이는 길에서 사업하려면 크든 작든 면허증이 필요했다. 철호는 바로 생각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어를 익히기 위해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으며, 현지인들은 2시간이면 읽을 분량을 철호는 6시간을 들여 읽어야 했다. 능력이 남만큼 안 되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외엔 승산이 없었다. 언어가 익숙해지고 통신학교에 졸업할 때 쯤 Wang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 중에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번 돈 맛을 보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공부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돈을 주고 산 것은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지만, 공부를 해서 머릿 속에 집어넣어 둔 것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거란다."
장래를 고민하던 중 서비스직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먹는 게 실해서 영양실조로 몇 번 쓰러진 뒤에 요리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의 꿈을 가지게 된 철호는 요리 직업 학교에 진학했다.
운이 좋게도, 입학과 동시에 조리견습생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비록 설거지가 전부였지만, 철호는 늘 그랬듯이 설거지에도 정성을 쏟았다. 책임감 있게 일하는 철호를 보고 요리사들은 철호의 자리를 싱크대에서 조리대로 옮겼다. 4년 후 직업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수료했으며, 견습생으로 있던 호텔에서는 긍정적인 추천서를 써주었다.
졸업 후 스위스의 호텔에 취업했고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을 했으며, 1시부터 5시 사이에는 프랑스어 과외를 받았으며 5시부터 9시 30분까지는 저녁 근무를 했다. 허드렛일인 감자깎이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나 철호는 그날 메뉴를 보고 해당 메뉴에 필요한 모양대로 감자를 깎았다. 감자 하나를 깎더라도 효율적으로 깎을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다.
요리사 T.O가 생기자 주방장은 철호를 요리사로 추천했고, 철호가 보조 요리사로 승진하게 된다. 월급도 오르고 숙식에 필요한 경비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해서 요리 외에 잡다한 일을 많이 하는 것 보다는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그만 두게 된다. 두 달만 버티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위약금을 물어 내고 다른 일을 찾게 된다.
경력과 자격증으로 일자리를 구했지만, 대부분이 보조 요리사이거나 저임금이었다. 그래서 동료와 동양 음식 레스토랑을 창업하게 된다. 설사 레스토랑이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철호가 들였던 시간 말고는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간 쌓아놓은 창업에 대한 경험은 그대로 남을 것이었다. 창업을 그만 두고는 정식요리사가 되어 아쉬운 조건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배움에 욕심이 있었고, 철호는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그 두에도 언제나처럼 주어진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한몸에 받았고, 윗사람들에게는 신뢰를 얻었다.
처음 견습생 하던 곳에서 대표 요리사이자 주방장으로 스카우트 되어 일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내와 독일로 이사하여 노르웨이식 레스토랑을 창업했다. 인테리어에 신경 쓰고 보조 요리사와 서버들까지 노르웨이에서 데려왔으며 노르웨이 전통의상을 입고 일을 했다. 레스토랑은 금세 유명해졌으며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붐볐다.
독일 공기가 너무 안 좋아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동안 가족들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고 때마침 노르웨이의 묄하우센 레스토랑에서 경영진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레스토랑을 처분하고 그 제안을 수락한 뒤, 온 가족이 오슬로로 이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최고경영진에게 일반적인 고정연봉이 아닌, 이윤실적에 따른 퍼센트를 바탕으로 연봉을 줄 것을 요구한다. 실적이 부진하면 그건 철호의 잘못이기 때문에 수입이 적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스토랑의 수입의 떨어질 때는 엄청 적게 받기도 했다. 이내 수입이 지속적으로 올라가면서 수입의 12.5%에서 10%, 그리고 7.5%까지 재계약되었다.
한국에서 유럽식 요리 강의를 해달라는 오퍼를 받고 묄하우센에서 휴직계를 내고 한국으로 이동한다. 6개월간 한국에서 최고급 숙식 제공과 좋은 조건의 임금을 받으며 교육을 해준 뒤, 한국을 관광하며 라면을 먹게 된다.
-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당신은 할 수 없어"라고 남들이 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다.
- 인생과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을 때 오는 성취감과 행복감이다.
- 나에게 혼자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 오르막 다음엔 내리막이 있고, 궂은 날 다음엔 맑은 날이 있다. 맑은 날만을 기대해선 안 된다.
한국에서 돌아와 묄하우센에서 몇 년은 열심히 일을 했고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벌었고 그간 저축한 돈으로 별장도 마련했다. 묄하우센에서 대표직을 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무역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물품을 수입했으며 이를 노르웨이에 판매하는 일이었으며,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팔아달라고 요청한 인삼을 수입했고 노르웨이 인삼 대부로 불리게 되지만, 인삼이 의약품으로 등록되면서 유통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인삼 사업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묄하우센의 대표로서 성공을 거뒀음에도 철호는 늘 새로운 일을 찾았는데, 더 큰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갈 이루어 내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타코가 노르웨이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 테스트를 진행해본다. 주방도 전쟁터처럼 난장판이 되고, 소스가 신체 여기저기 묻게 되어 가족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사업 아이템을 철회했지만 5년 후에 노르웨이 특별식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철호는 거의 손에 잡힐듯했던 성공을 높친 데 크게 낙심하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4살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퇴근 후에 개인 무역회사 일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을 반복했다.
아내 안네리제가 암을 선고받아 철호가 48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3년 뒤 17살 연하의 혜정과 결혼하게 된다. 딸들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혜정을 엄마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늘의 메뉴를 통해 전반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고 광고하고, 일반 음식을 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매출은 일반 음식으로 올렸다. 식당을 운영함에 있어서 중요시 하는 두 가지는 '친절' 과 '맛'이었다. 식당은 음식과 함께 서비스를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단 손님 뿐 아니라 직원들을 위한 식당으로도 운영했다. 직원들도 손님들과 함께 원하는 음식을 선택해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자유 근무시간제도를 도입하여 자발적으로 근무시간을 맞바꿀 수 있도록 했다. 매장이 비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시각이 비는 다른 직원과 근무시간을 맞바꿀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팁은 가외로 들어오는 이익이기 때문에 서빙을 맡은 직원 뿐 아니라 요리사들과 설거지를 담당하는 견습생들까지도 포함해 함께 나누었다.
솔선수범도 중요시했다. 한번은 변기가 막혔다는 직원의 말에 다들 얼타고 변기를 구경할 때, 철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을 넣어서 직접 변기를 뚫었다. 그러면서 "손에 묻은 오물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니, 물로 한 번 씻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말해주었다. 누군가로부터 명령받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랫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거나 지시할 일이 있으면 내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주로 택했다.
철호는 묄하우센 그룹에게 인정받아 묄하우센 그룹에 있던 체인점들을 함께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15개나 되는 카페와 레스토랑이었다. 15개 체인점이 모두 흑자를 기록했다.
덴마크의 하팅이 묄하우센 그룹을 M&A하면서 최종 협상을 통해 다섯 개의 체인점 경영권을 얻어 냈고, 나머지 체인점에서는 손을 떼고 목돈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개의 경영권 또한 포기하게 되었다. 내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철호는 52살의 나이에 일자리가 없는 상태가 되었고 돈과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용주들은 직원의 사람 됨됨이에 따라 월급을 주지 않는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얼마만큼 발휘해서 일을 해내느냐에 따라 월급을 주고, 기업의 이윤을 얻기 위해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충분한 능력과 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고용되지 않고도 혼자서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었다. 그리고 경영에서는 손님에게나 직원들에게나 신뢰가 전부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 많은 자신이 아무 곳에서도 쓰일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묄하우센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것, 거기에 삶의 가장 큰 영광이 존재한다.
- 뭔가를 제대로 알리려면 대표하는 사람이 직접 나서야 한다. 대표하는 사람이 뒤로 숨어선 안 된다.
- 성공은 최종적인 게 아니며, 실패는 치명적인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하고자 하는 용기다.
많은 고민 끝에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무역학도 공부했던 동료와 동업을 하기로 한다. 존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했고 진취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다. 개인이 인삼을 유통하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서 인삼차를 대신해서 판매하였고 한국에서 인삼차를 판매하는 체인점 한 곳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 조건에 인삼차가 모두 팔리지 않으면 책임지고 재고를 회수한다는 획기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의 인삼차를 공급했다. 마케팅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맛이 없어서 잘 팔리지 않았고, Korea Partner한테 납품받았던 소매업체의 재고를 전부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부담 뿐 아니라 인삼차 처치도 곤란해졌다.
철호는 인삼차를 처치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인삼빵을 구워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사업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인삼빵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철호가 제안한 배합률에 따라 한 제과점에서는 재료를 모으고 빵을 구워 전국으로 유통하는 일을 했고, 인삼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생산을 책임지고 있던 제과점에서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인삼의 배합률을 낮췄고 사업이 망하면서 인삼빵을 전부 회사하게 되었다.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가져온, 유통기한 몇 년이 지났을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맛을 본 직후, 바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존에게 연락했고 존은 철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한국의 여러 라면 제조업체들과 연락을 취해, 샘플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삼양은 이미 타 업체와 거래를 하고 있어서 농심과 계약을 맺게 되었는데, 농심은 상표를 바꾸지 않고 순전히 농심 상표로 수출하기를 원했다. 낯선 이름으로 노르웨이에 첫 수출하게 되면 소비자 인지도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농심 측을 설득했고, 상표부터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신경을 썼던 것은 포장이었다. 상품을 어떻게 포장하면 좋을지, 어떤 문구와 그림을 넣어야 소비자의 눈길을 끌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거듭했고 '미스터 리'라는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철호와 존은 그들의 사진도 캐릭터화해서 곁들이기로 했고 로고 디자인은 존이 직접 맡았다. 홍보를 위한 제품 사진은 라면을 끓여 플레이팅 한 뒤, 베란다에서 조리사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으로 했다.
하지만, 노르웨이 식품영양국에서는 라면 및 양념 성분이 자국 내에서 공인된 것이 아니라며 수입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고, 그들은 농심에 연락해 노르웨이 식품영양국에서 공인하지 않은 성분들은 제외하고 제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역할분담은 쉽게 이루어졌다. 존은 주로 서류작업을 했고, 유통과 포장, 즉 EAN 숫자와 바코드 등과 관련된 사항을 책임졌으며 철호는 제품의 얼굴 노릇을 담당했따. 한국 측과의 통신 및 협상도 철호가 맡았다.
처음 라면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슈퍼마켓 체인점들을 돌았는데 반기는 이는 한 명도 없었고, 지속적으로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굳건히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딱딱한 라면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이 불쾌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비난과 충고의 연속이었고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철호는 굴욕과 수치심을 삼켰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를 보이고 설득했다.
철호는 지속적인 실패에, 작은 슈퍼마켓부터 공략하고 전략을 바꿨다. 계약을 맺은 가게들은 소비자 가격의 반값으로 라면을 구매할 수 있게 하였고, 혹시라고 재고가 생길 경우 철호가 모두 회수하겠다고 했다. 비즈니스는 나와 상대방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오래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호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살폈으며 절대 내 사업의 이익만 챙긴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강한 자본력이 없었기에 이렇다 할 마케팅도 하지 못했고, 라면에 대해 입소문을 내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3년 반이라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주문량은 늘어갔다. 처음에는 3박스에 불과하던 주문량이 20박스로 늘었고, 어느새 200박스까지 늘어났다. 철호는 저녁이 되면 집 안에 마련한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그날의 판매량을 점검하고, 다음 날을 대비한 주문량까지 확인했다. 1,000박스 넘게 라면을 주문받으면서 둘은 이 작은 회사로는 관리가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유통회사 헤우겐 그룹에 연락을 취했다. 헤우겐은 최고급 식품과 국제적인 회사의 상품을 유통하던 큰 회사였다. 라면을 먹어 보라고 제안했고 며칠 후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전국의 곳곳으로 라면이 배달되었고, 판매는 급진적으로 늘어갔다. 가난한 학생들이 한 학기 내내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웠다는 소식,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아이들도 라면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며 즐거워하는 부모들의 이야기 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자체 생산을 하기로 했다. 나라마다 독특한 소스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 되어 매운맛을 빼고 부드럽고 기름진 맛을 더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매출이 급격히 늘게 되었다.
존은 수입의 일부를 광고비에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철호는 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헤우겐 그룹과 머리를 맞대고 TV쇼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로 했다. TV 프로그램에게 상품을 공급하면 라면의 광고효과도 크게 노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회 1년치의 라면과, 한국으로의 왕복 비행기표를 제공하기로 했고, 비행기표는 대한항공에서 제공해준다는 계약을 따냈다. TV쇼를 통해 '미스터 리'의 이름이 한번 알려지자, 다른 미디어 광고를 따내기도 쉬워졌고 라면 판매량도 크게 늘어났다. 우리는 벌어들인 수익 중 필요한 경비를 뺀 나머지는 모두 홍보와 판촉에 투입했다.
토로라는 노르웨이 최대 식품회사의 판매부에서 라면의 매출 증가 수치를 눈여겨 봤고, 토로는 라면 사업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단단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선두업체 하나를 몽땅 사들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미스터 리' 라면과 경쟁관계로 발전하기 보다는 토로의 권한 하에 판매권을 둠으로써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며 철호에게 접근해왔고, 레인킨은 철호에게 현재 연봉의 8~9배 정도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철호는 일시불로 회사를 넘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철호는 약 25억 원정도의 가격을 제시했지만, 토로 측은 라면의 현재 총 이익을 합해봐야 겨우 몇 억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이유로 거절했다. 철호는 토로가 인수한다면 매우 짧은 기간 내에 현재까지의 총이익보다 훨씬 높은 이익을 창출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을 때는 토로의 협력 없이는 라면의 시장점유율이 더 이상 높이기 힘들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약 8억 원과 3년 이내에 발생하는 총이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해 지불하는 조건으로 매각했다. 그리고 토로가 노르웨이 내의 판매권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Korea Expo(Lee 무역 -> Korea Partners -> Korea Expo 명칭 변경)에서 라면 수입 및 관련사항을 계속 맡아 관리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라면의 판매권이 토로로 넘어가면서 마케팅과 유통은 더욱 전문적인 형태를 띄게 되어 판매량이 급증했다. 매각 이후에도 홍보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라면봉지를 직접 들고 가 즉성에서 라면을 끓여 시식을 권하기도 했고, 새로 매장이 오픈할 때마다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라면을 끓여 시식회를 열기도 했다. 간접적으로 들어오는 소득이 있기 때문에 홍보를 지속했다. 그래서 3년간 철호와 존은 토로로부터 처음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지급받을 수 있었고, 수입 및 관련사항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계속되었다.
토로가 판매권을 인수했지만 '미스터 리' 라면의 상품가치는 엄청 높아졌기 때문에 상품명을 쉽게 바꿀 수 없었다. 철호의 자체가 브랜딩이 된 것이다. 개인의 삶이 상품의 인지도에 필요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브랜딩을 통해 일상 속 선택의 순간을 도와주고, 고민할 시간을 주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철호의 이미지와 브랜딩 덕분에 미스터 리의 라면의 가격은 다른 라면들보다 5배나 비쌌지만 소비자들은 미스터 리 라면을 선호했다. 자연스럽게 토로에서는 철호를 앞장세우지 않고서는 '미스터 리' 상품의 인지도를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미스터 리 라면은 토로가 판매하는 상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으로 등극했고, 급기야 2000년대 초 '미스터 리'라면은 70% 이상의 비율로 시장을 점유했고 2010년 봄에는 95%라는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브랜딩으로 인해 이철호는 노르웨이 지역에서 총리보다 더 유명한 인물로 떠올랐고, 노르웨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인물이 되었다.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각종 대학, 기업체 등에서 비싼 강의료를 지불해가며 그를 초대해, 살아온 이야기와 사업에 대한 그의 소견 및 아이디어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때도 항상 예의를 갖춘 미소로 정중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사인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사람이 유명세를 타면 변하게 마련이지만 철호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누군가를 만나도 스스로 구구절절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생겼다.
철호는 미스터 리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상품명 하에 새로운 제품을 들여놓는 데 밤낮없이 고심했다. 토로에 '미스터 리' 상표를 단 골드용품 등 다양한 제시를 했으나, 식품회사에서 골프공을 취급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며 반려당했다.
편법을 쓰려고 잔머리를 굴리면, 반드시 그보다 더한 엄청난 함정이나 위기를 맞게 된다. 정석 플레이가 결국엔 가장 지름길인 셈이다.
골프용품을 반려 당하고, 식품 관련된 새로운 아이템들을 토로에 제시한다. 해삼, 멍게, 넙치, 가자미, 만두 등을 말이다. 그런데, 전부 반려당한다.
이미 요리가 된 면과 서로 다른 종류의 소스를 결합한 것인데, 대기업이었던 토로와 함께 제품을 출시했지만 실패했다. 면밀한 홍보 전략을 세우지 않았으며 뒤늦게 따로 광고 인력을 고용해 상품선전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돌아선 소비자들의 무관심을 이겨내기는 힘겨웠다. 그리고 타깃 고객으로 지정했던 이십 대 중반의 소비자들은 제품이 출시되자 사전 조사에서 보였던 반응과는 달리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판매업체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장 조사와 실제의 괴리감으로 가설 검증에 실패했으며 PMF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라면 사업에서 한걸음 물러선 뒤부터는 노르웨이와 한국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