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1 심리적 회고록

숑숑·2021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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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망양(多岐亡羊)의 해

가장 고비였던 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마 지인들은 의아해할 거다.
이번 해에 이룬 것도, 얻은 것도 정말 많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값진 경험도 많이 했다.

그러나 1년 내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나에게 너무 무신경했다.
매 순간 선택지는 지나치게 다양했고, 내가 하고 싶은 거보다 더 유리한 걸 생각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망가진 듯하다.

연말이 다 되고 나서야 내 마음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항상 회고록은 성취한걸 위주로 써왔지만, 올해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닐 것 같다.

결국, 응어리

올해 초부터 고민이 많았다.
동굴에 너무 깊게 들어와서 출구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꼴이 너무 싫었기에, 정확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진로에 대한 불안감,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관계,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 여러 가지가 조금씩은 있었으나, 명확히 이거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응어리 진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할 이유도 없고, 괜히 말했다가 약점처럼 여겨지는 게 더 스트레스였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걸 상당히 꺼렸다.

그러나 하나 깨달은 것은,
입 다물고 있어도 가시가 돋칠 뿐이다.
해결하려면 우선 나부터 솔직해져야 한다.

깨달음

작년까지만 해도 불안감이라던가, 무력감이라던가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는 그런 줄 알았다.
스스로 자존감도 높고, 그동안 해온 게 적진 않으니 근거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 초에 내가 쌓아온 성취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작 내 무기가 되진 못할 것 같았다.
여기서 시작해 마음속에 잡다한 물음표가 많아졌고, 그렇게 가만히 어딘가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내가 아닌 성취를 사랑해왔음을 깨달았다.

선택

올해는 유독 여러 선택의 기로가 있었다.
매 순간 원하는 것보다는 유리한 걸 택했다.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인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한번 그 선택으로 인해 속에 기름을 붓게 된다.

체리피커(cherry picker)

올해 지나간 프로젝트 중 하나가, 좋게 말하면 특별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을 만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흔히들 체리피커라고 하는 것 같다.
일단 유리한 고지를 취한 후 정작 할 일은 수행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에 대해 직접 말을 했으나, 적반하장의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일이 몇 배로 늘었다.
하루에 기본 10시간 이상을 투자했다.
마감에 가까워질수록 잠도 점점 포기해갔다.

바쁜 거 자체에 불만은 없었다.
이보다 더 급한 적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개발이 재밌었다.
차라리 바쁘면 잡생각이 안 들어서 편할 때도 있다.

날 미치게 하는 건 숨 막히는 인간관계와 하는둥 마는둥 식의 매니징, 즉 체리피커의 존재였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내 태스크를 가져가는 게 너무 잘 보였다.
물론 그 결과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안 그래도 불건강한 상태에,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안전한 돌파구 따위는 없었다.
마감일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무슨 수로 버텨야 할지 몰랐다.

내가 죽든 네가 죽든, 일단 끝내자.
이 마음 하나로 버텼고 결국엔 끝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건 있다.

사실 내가 겪은 건 전혀 극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게 현실이다. 심지어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다.
살면서 이런 일이 또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없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일찍 겪어봤을 뿐이다.
하도 얽히고설킨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하는 게 가장 현명했을지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걸 비교적 일찍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득이다.

개발역량 도모 측면에서는 정말 큰 이득이었다.
재미가 없다고 포기했었던 분야지만, 막상 해보니 몰입감이 있다.
그동안 머리에 잘 안 들어오니까 순 엄살을 피웠던 거 같다.

내가 지향하는 분야는 아니었다만, 어떤 식으로든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년에는

쓰다 보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동안 너무 뒤를 많이 돌아봤던 것 같다.
다음 해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되도록 미래를 중심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생각을 줄이려 한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자기비판에 빠지는 것 같다.
차라리 그럴땐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게 더 생산적이다.

선택의 방향을 달리해보려 한다.
유리한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결과가 정말 나에게 유리했는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걸 고르고, 실패한다면 바로잡는 선택을 다시 하면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 아주 조금만 더 의지해보려 한다.
현재의 반의반 정도라도, 지인에게 나 자신을 좀 더 공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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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 만들기 좋아하는 삽질 전문(...) 주니어 백엔드 개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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