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10 묵상

만사·2020년 6월 13일
0

말씀 묵상

목록 보기
66/97

[고전15:42-44, 새번역]
42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44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죽고 난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4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번째, 육신의 죽음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건강 하더라도, 돈이 많아 좋은 약과 좋은 치료를 받더라도 때가 되면 죽는 것이 사람이다. 두번째, 영의 죽음이다.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이 죽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고 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죽었다는 것이 아닌, 옛자아 즉, 죄에 노예로 살던 영이 죽어 새로운 영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건 육신과 영은 구별됨과 동시에 절대로 떼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묵상한 대로 우리가 씨를 뿌리고 거둘 때 몸으로 부활한다. 세번째,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죽음. 네번째, 썩을 것으로 그대로 죽는 죽음. 세번째와 네번째는 의미만 반대이지만 굳이 나누었다.

4가지로 나눈 죽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동행” 과 연결된다. 먼저 에녹을 보자면,

[창5:21-24]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삶은 이전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이전 기록은 “낳았고 -> 낳았으며 -> 죽었다” 의 반복이다. 즉,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육신의 죽음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다르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라는 문장이 포함된다. 하나님과 동행한 삶의 끝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라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중점적으로 묵상한 부분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다. 어제 묵상했던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 그 과정이 “하나님과 동행”인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이는, 영원히 썩지 않는 것으로 살아나는데 이 말씀의 본질은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을 살게 된다. 지옥이 두려운 이유는 영원한 고통, 타오르는 지옥불과 같은 것이 아닌,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묵상해본다.
[계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들”은 당연히 이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4절을 보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든 삶이라는 것이 알 수 있다. 눈물, 애통, 아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고린도전서를 한 절로 요약하면 이 말씀이라고 내가 여기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그 삶에는 항상 대적하는 세력이 따르기에, 때로는 눈물과 애통과 아픔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옥한흠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 기억나는 하나는 “요즘 신앙생활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즐겁다, 기쁘다” 라는 대답을 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신앙생활을 영적전쟁의 연속이기에, 오히려 “힘들다, 어렵다” 라고 말하는 성도가 잘하고 있는 성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마냥 즐겁고 기쁘다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왜 우리의 눈물과 애통과 아픔을 위로 하시겠는가.. 하지만 우리 주님은 마지막 때에만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지 않으시고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 어쩌면 바울 사도가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한 이유 중 하나는, 매일매일 주님이 바울의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 하시기에 새로운 삶을 얻어 그런 말을 한게 아닌가 싶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