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8 묵상

만사·2020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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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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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29-34, 새번역]
29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30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32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33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34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말씀한다. 먼저 29절 말씀

30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필요한 질문이다. 우선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전도 여행 과정에서 정말 많은 고난을 받았다.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를 위해 쓴 편지이다. 이 편지를 쓰던 에베소에서 바울 사도는 고난을 많이 받았다.

[고전16:8-9]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내게 광대하고 유효만 문이 열렸으나” 이 말씀의 뜻은 내가 이 삶에서 죽어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베푸신 구원을 나누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복음 전할 때에 늘 대적하는 세력이 많다. 이 삶에서 고난없이 평탄하게 사는 것이 천국소망과 하늘나라 상급에 전혀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하늘나라에 상급을 쌓는 것인데, 그 삶에는 대적과 고난이 따른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유는, 내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 뿐이다.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다.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노력과 정성과 열심에는 늘 고난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꺾을 수 없다.

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이란 책에서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죄와의 싸움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지만 우리 안의 죄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 안에서 변한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그 죄의 지위가 변한 것이다. 곧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와 우리의 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곧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이다.”

“나는 한번 죽었습니다.” 라고 바울 사도가 말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의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이다. 나의 자아가 죽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삶. 이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건, 여전히 고난과 대적이 많은 삶이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게, 예수님의 편에 서서 싸우는게 더 좋기 때문이다.

32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33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할 때, 맹수는 바울을 대적하던 세력을 말한다. 실제로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 맹수를 풀기도 했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 시민이었고 로마 시민은 맹수 우리에 갇히거나 십자가형을 받지 않는다. 중요한건 바울 사도가 왜 대적하는 세력과 싸운 것일까? 본문에서 “인간적인 동기”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뜻은 부활을 믿지 않는 성도를 말한다. 그렇기에 이 삶에서의 유익과 가치를 쫓아 사는 이들을 말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이 삶에서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믿기에 맹수와 싸우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부활 신앙을 멀리하는 삶은 좋은 습관은 가지기가 힘들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삶을 바울을 통해 본다.

[행20:22-24, 새번역]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삶과 가지지 않은 삶의 차이는 너무나 명확하다. 먼저 부활신앙을 가지지 않은 삶은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이 말의 뜻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사는 삶을 말한다. 하지만 부활신앙을 가진 삶은 사실 죽고 난 후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바라보기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성령에 매여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는 길,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르지만, 오직 성령에 매여 복음을 전할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 고난이 닥치더라도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상급은 천국에 쌓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라고 말한 이유다. 죽더라도 광대하고 유효한 문,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고난을 각오 하더라도 한명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 이었기에 멈출 수 없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 땅에서 많은 선은 행하고 베풀며 사는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이 아닌, 예수님의 피를 힙입어 어떤 고난이 와도 예수님과 함께 함이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을 누리는 삶이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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