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PART 1

Ryan Jeong·2020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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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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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아의 북동 해변에 있는 스타게이라 라는 작은 도시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남.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전의(典醫)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의 가문들은 의학 및 해부의 기술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17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 등록
아카데미아에서 20년을 보내며, 아카데미아의 예지(銳智)라는 평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비록 결국에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뛰쳐나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이론을 수립했지만 그는 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아에 체류하는 동안 플라톤의 방식대로 많은 대화편들을 저술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 대화편들의 우아한 문체를 '황금의 강'이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그는 플라톤의 핵심 이론인 이데아론을 당시에는 긍정했었지만, 얼마 뒤 그 이론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
그 후 343-42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립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그의 아들 알렉산더를 교육하게 하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당시 나이는 열 세 살이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장래 통치자의 스승으로서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58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 제도를 수립한 방대한 정치 제도집을 구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필립이 사망한 후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으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소요학파 창시
기원전 335-34년, 자신의 학원을 세웠는데, 그 학원은 소크라테스가 사색하며 산책했다고 전해지는 수림(樹林), 즉 아폴론 신전 부근의 리케이온(Lykeion)의 숲속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숲속의 산책로 페리파토스를 거닐면서 철학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알렉산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기원전 323년) 직후에 발생한 반마케도니아의 풍토는 아테네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 불경죄로 기소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불경죄로 고소되었으나,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대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고 말하면서 리케이온을 떠나 칼키스(Chalcis)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오랜 지변이었던 위장병으로 사망하였다.(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자연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들에 점점 더 파고들어 갔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 방식이 이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 뿌리 박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플라톤은 생각의 흐름을 변화하는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시키면서 이데아들에게 참된 실재(實在)를 부과했다.

[비교해 보세요]
플라톤의 사상
: 초시간적 존재의 정적인 영역에 보다 가까이 가려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 생성과 변화의 세계, 즉 동적인 영역에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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